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다른 표기 언어 church and state

요약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종교와 정치는 백성들의 충성을 요구하지만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

그리스도교 출현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종교집단과 정치집단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특정 국가의 신(神)들을 숭배했는데, 그런 경우 종교는 국가의 한 부분이었다. 유대 민족의 경우 성서에 계시된 율법이 곧 이스라엘 국가의 실정법이었다. 세속과 영적 영역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예수가 말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 12:17)는 말씀에 근거를 둔다.

인간생활과 활동의 이 두 분야는, 아주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뚜렷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두 세력에 관한 이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사상과 가르침의 기반이 되었다(→ 유대교, 세속주의).

1세기 동안 이교(異敎) 제국의 지배하에 살던 사도들은 정치 권력을 폐하기도 하는 지극히 높은 하느님의 법을 범하지 않는 한, 통치권력자를 존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던 당시의 교부들은 교회의 권한이 국가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세속 통치자들의 행위를 심판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방세계에서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민간에 대한 권력은 유일하게 남은 지식층, 즉 성직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교회는 유일하게 조직을 갖춘 단체로서 영적 세력뿐 아니라 세속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동방의 경우에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행정 당국이 교회를 지배했다.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던 800년경 로마 제국이 서방에서 다시 일어났고, 10세기경에는 세속 통치자들이 유럽 전역의 많은 권력을 차지했다. 교회의 위계질서가 정치적으로 조작되고 성직자들의 경건함과 열정이 전반적으로 쇠퇴해지자 개혁을 부르짖는 교황들은 활기찬 조처들을 내놓았다.

그들 가운데 그레고리오 7세가 가장 유명했다.

황제나 왕과 교황 사이의 극한 투쟁들이 그후 몇 세기 동안 펼쳐졌다. 12~13세기에는 교황권이 매우 신장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가장 위대한 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국가는 하나의 완전한 사회(또 하나의 완전한 사회는 교회임)이자 필요한 선(善)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 권력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중세시대의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투쟁은 14세기 민족주의의 신장, 왕정주의 법률가와 교회법 법률가들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이론가들이 논쟁마당에 끼어들었고, 마침내 교황권은 재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첫째로 교황들이 프랑스 영향권에 있는 아비뇽으로 옮겨가게 되고, 둘째로 교황들을 로마로 복귀시키려는 노력으로 인해 교회 대분열이 생기는 등의 재난을 맞게 된 것이다.

교회의 통제력이 느슨해지고, 유럽 전역에서 교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종교개혁은 즉각적으로 교회의 권력을 더욱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분 상태에 있던 그리스도교회는 막강한 힘을 가진 왕들에게 어떠한 효과적인 반격도 가할 수 없었다. 그러자 왕들은 자신들이 교회와 국가의 우두머리라는 소위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교회의 주권을 주장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많은 루터파 교회들이 실제로는 국가의 군대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 유대를 끊고, 자신이 영국국교회의 수장(首長)임을 선언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하나의 통일된 국가 안에 신앙의 다양성과 국가 권력에 무관한 교회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인 종교 규범들은 정치질서의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인식되었다. 신앙의 다양성,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이라는 관념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생각들이 국가 교회라는 개념에 맞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17세기 영국에 있었던 종교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이주민들 사이에 교회 규율에 대한 엄격한 순종을 강조했다.

제1차 미국 헌법 수정에 들어간 세속 정부의 개념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미친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로부터 독립한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려는 기존 교회들의 특별한 관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특히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 권력의 분리를 자신들의 신조의 한 원칙으로 삼았다.

1840년대에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오자 주(州)의회 기관들은 정 재원이 교구 교육 시설에 할당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세속 정부의 원칙을 재천명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 제1차와 제14차 수정헌법이 법원에 의해 교육분야에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20세기 말엽 미국의 보수주의 그리스도교 단체들은 교과서 검열과 학교 기도의 법적 금지조항 취소를 요구하고, 과학이론과 반대되는 성서의 교리들을 가르치라고 주장하여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교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