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침례교

다른 표기 언어 Baptist

요약 대부분의 개신교와 기본적 신앙은 같지만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 것과 세례는 침례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세기에 영국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일반 침례교도와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속죄가 적용된다고 보는 사람들을 특수 침례교도가 등장했다.
오늘날 수많은 독립적 침례교회들이 있는데, 다른 모든 교회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거나, 작은 규모의 근본주의자들 교파에 속해 있다. 꾸준한 선교활동을 통해 침례교는 세계 도처에 교회를 세웠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세밀한 신학적 논술보다는 종교적인 체험과 그 표현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침례교(Baptist)
침례교(Baptist)

대부분의 개신교와 기본적인 신앙은 같지만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 것과 세례는 침례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세례). 개신교회나 독립교단 형태를 취하지 않고 교회 정치에서 회중교회 형식을 고집한다.

17세기에 청교도 개혁운동이 진행될 때 영국에서 2개의 침례교 집단이 등장했다. 이 두 집단은 신자에게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모든 사람들을 위한 속죄)을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켜 일반 침례교도라고 불렀고, 그리스도의 속죄가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보는 사람들을 특수 침례교도라고 불렀다.

일반 침례교도의 기원은 1611년경 토머스 헬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런던에 세운 침례교회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일찍이 분리주의자들(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길 원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1608년경 암스테르담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되돌아온 자들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안 그들은 본래 자기들을 지도하던 존 스미스의 신조를 따랐다. 스미스는 〈신약성서〉를 연구한 끝에 믿는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래의 런던 교회의 활동을 통해 다른 일반 침례교 교회가 생겼고, 그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교리적인 면에서 만인 구원론,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선택받은 사람들(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다.

17세기말과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반 침례교의 교세와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교회들은 문을 닫았고, 많은 신도들은 유니테리언파가 되었다. 일반 침례교는 1770년에 새로 조직된 단체인 새 일반 침례교(New Connection General Baptists)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일찍이 존 웨슬리가 이끄는 감리교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특수 침례교는 1633, 1638년에 런던에 있던 독립교회(영국국교회에 속하지 않음)를 떠난 사람들이 1638년에 세운 한 침례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새 교회 신자들도 신자들만(유아는 제외)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신학적인 면에서 이들은 제한 속죄 교리, 즉 그리스도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교리를 믿는 칼뱅주의자들이었다. 특수 침례교는 일반 침례교에 비해 빠르게 성장했지만, 나중에는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강조하고 새 신자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성장이 둔화되었다.

그러다가 1750년 이후 감리교 부흥운동의 영향과 복음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 및 선교사업을 통해 새롭게 성장했다. 윌리엄 케리의 주도로 1792년 영국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케리는 그 선교회가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인도로 갔다. 19세기에는 침례교가 영국인들의 종교 및 정치 생활에 끼친 영향력이 컸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교세와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1813년 영국침례교연맹이 특수 침례교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1891년에는 새 일반 침례교가 이 침례교 연맹에 합병되었다. 특수 침례교의 엄격한 칼뱅주의 사상은 점차 수정되어갔고,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지만 침례교연맹 소속의 신자들은 대체로 교파 연합으로 생긴 사상의 자유를 받아들였다.

미국 침례교의 기원은 로저 윌리엄스가 청교도들에 의해 매사추세츠로부터 추방당한 뒤 프로비던스에 침례교회를 세운 16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윌리엄스는 곧 교회의 임직을 존 클라크에게 넘겼다. 로드 아일랜드가 여전히 침례교의 본거지였지만,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침례교도의 생활 중심지는 필라델피아였다. 1707년 이곳에 처음으로 상부 교회협회인 필라델피아 침례교 협회가 조직되었고 이 협회는 식민지 전역에 세워지는 새 침례교 교회들을 후원했다.

18세기 중엽의 대(大) 각성운동은 침례교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남부 식민지 지역에서 대단한 것이었다. 셔빌 스턴스는 1755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샌디크리크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부흥 설교자들이 남부 미개척지역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침례교 교세가 우세해졌으며, 그 교세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19세기에 부흥파 침례교회가 빠르게 성장을 계속한 데는 평신도 설교자들의 지원이 있었던 데다가 회중교회적 정치가 미개척지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1814년 이전까지는 미국의 침례교회들이 전국 규모의 기구로 연합되지 못했으나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중앙조직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노예제도에 관한 분쟁으로 일반 침례교 협의회는 곧 분열되었다.

정식으로 분열된 것은 조지아 주 아우구스타에 남침례교 협의회가 조직된 1845년의 일이고, 이는 북침례교 협의회가 조직된 1907년에 더욱 분명해졌다. 남침례교와 북침례교(나중에는 아메리카 침례교가 되었음)는 남북전쟁 이후 뚜렷한 지역적 특성을 나타냈고, 신학, 에큐메니컬 운동, 선교활동, 예배에 있어서 여전히 다른 성격들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2개의 대규모 연합회로 구성되어 있는 흑인 침례교 교회들은 미국에서 침례교의 주요분파를 이루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자유인이 된 노예들로 조직된 이 교회들은 이따금 흑인 공동체 가운데 사회적·영적 측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미국 흑인들의 삶 속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젊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중심이 된 흑인 침례교회들과 목회자들은 1960년대 민권운동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제시 잭슨 목사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것(1984)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이 교회들과 목사들은 1980년대 동안 흑인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평등권).

20세기에 침례교는 신학상의 논쟁으로 또 한 차례의 분열을 맞았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독립적 침례교회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른 모든 교회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거나, 작은 규모의 근본주의자들 교파에 속해 있는 교회들과 느슨하게 제휴하고 있다. 꾸준한 선교활동을 통해 침례교는 세계 도처에 교회를 세웠다. 침례교의 중심지는 독립국연합으로 그곳의 침례교는 최대의 개신교 단체를 형성하고 있다. 침례교는 신앙과 의식에 관한 권한을 넓게는 그리스도 안에, 좁게는 세례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지역교회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교회들은 선교·교육·자선사업과 같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주(州)·지역·국가조직들과 자발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조직이 이러한 지역 교회들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침례교 교리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교리였다. 침례교 예배는 설교를 통한 성서 해석이 중심을 이루고 즉흥적인 기도와 찬송도 특징적이다.

초기 침례교는 신학적인 면에서는 강직하면서도 온건한 칼뱅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18, 19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들을 거치면서 상당히 완화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침례교회들은 다양한 신학운동을 위한 지도력을 제공해왔다. 특히 사회복음주의 운동에서 W. 라우셴부시, 미국 모더니즘(그리스도교의 현대화운동)에 있어서 해리 에머슨 포즈딕과 셰일러 매슈스, 현대 복음주의에 있어서 빌리 그래험 등이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세밀한 신학적 논술보다는 종교적인 체험과 그 표현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한국의 침례교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는 1889년 한국에 온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M.C. 펜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함경남도 원산에 자리잡은 펜윅은 다른 선교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주·간도·시베리아·몽골 등)에 복음전도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한국 선교에 힘을 쏟았다. 그 결실로 31개 교회가 개척되자 교단 조직의 필요를 느끼고 1906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모든 동역자와 교인들을 모아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으며, 46개조의 회칙을 만들었다. '대한기독교회'의 조직은 철저한 권위체제였으며, 신앙의 근간은 침례교 신앙이었고 성령이 인도하는 신약성서적 회중사상을 강화했으나 개신교회의 자치권은 전혀 없었다.

이후 1940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었고, 1949년 제39회 총회가 충청남도 강경에서 개최되었을 때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 침례회'로 다시 변경했다. 1959년 3월 17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실행위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을 둘러싸고 양분되었으며, 3월 18일 한미연석회의에서는 선교부측에서 총회의 전도부장을 불신임 결의함으로써 총회와 선교부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결국 2개의 분열 총회가 충청남도 대전과 경상북도 포항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1968년 4월 16일 9년 동안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포항측)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대전측)으로 분열되었던 교단이 합동총회를 개최하고 화해와 단결의 새출발을 다짐했다. 1963년부터 시작된 청지기운동, 1964년부터 시작된 교회학교 확장운동 및 복음전도운동, 1968~70년에 걸친 교회확장 및 전도대회 등의 훈련과 교역자 강습회는 1970년대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교단통합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총회 분열기간 동안 총회 안에 깊이 침투되었던 제반 비침례교적인 요소들을 제거시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

또한 1970년대부터 신학대학 출신의 참신한 젊은 일꾼들의 대거 등장, 교회진흥원에서 발간한 교회학교 공과 등 각종 자료의 활용, 그리고 교회성장을 위한 각종 강습회와 훈련 캠페인 등은 1970, 1980년대의 침례교회 성장의 기틀과 발판을 다지고 마련했다. 교회의 양적 규모도 한미 전도대회 등을 통해 대폭 확장되었다. 1976년 11월 4일에는 한국침례회연맹의 교단명칭이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되었다.

1981년에는 수도권의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은퇴 후의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의 생활과 복지를 지원하기 위한 교역자 복지회가 1990년 설립되어, 은퇴 목회자와 가족에게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이미 1954년 결성되었던 전국여선교연합회에 이어, 1982년에는 전국남선교연합회가 구성되어 평신도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본부는 2013년 10월 미국 남침례회 한국 선교부 빌딩의 대지에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했다.

2017년 기준 2,785 교회, 118개의 지방회, 약 80만 명의 교인이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6길 10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