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주의

청교도주의

다른 표기 언어 Puritanism , 淸敎徒主義

요약 16세기말과 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종교협정 이후 존속되어온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습으로부터 영국국교회를 '정화'하고자 노력했다.

모든 생활에서 도덕적·종교적 진지성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전국민의 삶에 확산시키려고 했다. 국가를 변혁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내란으로 이어졌고, 청교도적 생활방식의 실용모형으로 미국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1534년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켰고,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은 에드워드 6세(1547~53 재위) 때 급속히 신장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재위기간에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자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순교하거나 추방당했다(영국). 추방자 중 다수는 제네바로 갔는데, 그곳에 있는 장 칼뱅의 교회는 훈련된 교회의 실용모형을 제시했다. 이 경험으로부터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책인 〈제네바 성서〉(2권)와 J. 폭스의 〈순교자들의 책 Book of Martyrs〉이 나왔다.

순교자들의 책(Book of Martyrs)
순교자들의 책(Book of Martyrs)

폭스의 책은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인식하게 했다. 1558년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열렬히 환영했으나 엘리자베스의 타협정책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바라던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교회의 최고 정치기구인 주교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1560년대의 제의(祭衣) 논쟁 과정에서 생겨났는데, 청교도들 중 다수는 영국국교회의 정치형태를 장로 중심제로 만들기 위해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개혁이 지체되는 것을 우려한 다른 청교도들은 '지체 없는 개혁'을 결의했다.

이 '분리주의자들'은 영국국교회를 비판하고 하느님의 계약에 근거를 둔 자발적 회중을 형성했다(독립교회파). 두 집단 모두 기존체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특히 분리주의자들이 받은 탄압은 더 심했다. 기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당한 청교도들은 설교와 소책자 발간으로 관심을 돌렸고, 종교적 표현, 사회적 행동과 조직을 통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가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귀족과 의회의 후원뿐만 아니라 옥스퍼드·케임브리지의 여러 대학과 교수단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1603년 칼뱅주의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1604년 햄프턴궁 회담에서 제임스 1세는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문구에 대한 청교도들의 불만을 묵살했다.

제임스 1세 (James I)
제임스 1세 (James I)

청교도들은 여전히 탄압을 받았다. 일부는 직위를 박탈당했고, 일부는 국교에 최소한도로 순응하면서 곤경을 피했으며, 타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잉글랜드를 떠났다. 찰스 1세(1625~49 재위)와 대주교 W. 로드의 재위기간에 국교에 순응하라는 압력이 가중되었지만 청교도 정신은 계속 확산되었고, 1640년대에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청교도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의회와 정부를 향해 하느님과의 계약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촉구했다.

의회는 교회정치에 관해 조언해줄 성직자단을 소집했으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의견이 너무 심하게 분열된 나머지 교회정치와 규율을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왕당파 군대를 무찌른 신형군(新型軍)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의회가 찰스 1세와 타협하여 그들이 청교도주의를 위해 얻은 것을 헛수고로 만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권력을 빼앗아 신형군의 영웅 크롬웰에게 맡겼다.

크롬웰(Oliver Cromwell)
크롬웰(Oliver Cromwell)

크롬웰의 공화정 아래 종교정책은 제한적이나마 다원주의를 허용하면서 청교도에게 특혜를 주었다. 이것과 함께 수평파·디거파·제5왕국파·퀘이커파(오늘날 현존하는 유일한 종파)를 포함한 많은 급진적 청교도 집단이 출현했다.

1658년 크롬웰이 죽은 뒤 보수적인 청교도들은 찰스 2세의 복위와 수정된 주교 중심제를 지지했으나 로드의 엄격한 주교 중심제를 재확립한 사람들에게 압도당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는 대박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명예혁명 기간에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영국의 종교문제는 1689년 기존교회를 주교 중심제로 하고 국교에 반대하는 집단들을 관용하기로 한 관용령에 의해 처리되었다(관용법).

계약공동체를 수립하여 거룩한 공화국을 실현하려고 한 청교도들의 이상은 토머스 데일에 의해 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로 이식되었으나 가장 큰 기회는 뉴잉글랜드에 찾아왔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 세워진 교회조직의 본래 형태는 장로교와 분리주의의 '중간 형태'였으나, 1648년 뉴잉글랜드의 4곳의 청교도 식민지는 케임브리지 강령을 공동 채택하여 회중교회적인 형태를 취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교회의 틀에 따라 세속 사회에서도 공화정을 실시했고 하느님의 선민만이 투표를 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원칙이 제2세대 거주자들에게 문제가 되자 불완전서약을 채택했는데, 이는 세례를 받고 도덕적이고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교도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서 쫓겨난 로저 윌리엄스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퀘이커교도 윌리엄 펜은 펜실베이니아에서 각각 청교도적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의 특성은 일차적으로 강도 높은 종교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자신의 죄의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설교를 통해 구원을 계시하며 이성보다는 성령이 힘 있는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히 당시 영국국교회의 설교와 의식의 특성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신 청교도들은 성서와 일상적인 경험의 이미지들에 주목하는 평범한 설교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중시한 청교도들은 학식 있는 목회를 권장했다. 청교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회심경험은 칼뱅주의에서 비롯된 예정론과 결합되어 자신들이 역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라고 하느님이 선택한 선민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