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파

수평파

다른 표기 언어 Levellers , 水平派

요약 영국 내란(청교도혁명)과 공화국(Commonwealth) 시기에 공화주의적·민주적 운동을 추진한 집단.
Levellers라고도 씀.

수평파라는 이름은 이 운동이 '사람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려 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적대진영의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수평파 운동은 1645~46년 런던과 그 주변지역에서 의회를 지지하는 급진세력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내란은 의회와 국민의 이름을 걸고 진행되고 있었으며, 수평파는 실질적인 주권이 국왕과 귀족들을 배제하고 하원으로 이양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재분배, 1~2년마다 의회를 열어 입법기관이 진정한 대의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 정부의 권한을 지방공동체로 분산할 것 등을 주장했다.

소규모 자산가들의 편에 서서 경제개혁안들도 내놓았는데, 즉 법률상으로 완전한 평등, 상거래 독점의 폐지, 인클로저 운동으로 집중된 토지의 재개방, 등기 소작농에 대한 차지기한의 보증, 징병 및 군에 대한 숙식 제공 금지, 가혹한 법률의 개정, 1/10세의 폐지(또한 국교회 십일조의 폐지), 신앙과 결사의 완전한 자유 등을 요구했다. 의회의 태도에 실망한 수평파는 국민과 신형군(New Model Army)에게 직접 호소하기 시작했다.

1647년 4월 군대의 일반병사들은 수평파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던 선전원들을 선출했다. 군장성들은 장교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반사병 선전원이 포함된 군사평의회를 수용해야만 했다. 군사평의회는 1647년 10월 퍼트니에서 인민협정에 관해 논의했는데, 이 인민협정은 청교도혁명에서 의회가 승리함에 따라 해체되어버린 국가를 재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 협약으로서, 수평파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퍼트니에서 인민협정에 관한 논의는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장군들은 무력으로 군 내부의 규율을 회복시켰다.

1649년 3월 존 릴번과 수평파의 다른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으며, 런던에서 발생한 수평파 병사들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같은 해 5월 옥스퍼드셔에서 좀더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으나 역시 진압됨으로써 조직화한 정치세력으로서 수평파 운동은 막을 내렸다.

수평파는 한 번도 전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수평파의 해록색 깃발이 런던의 시가지에 휘날리고 병사들은 수평파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으나, 교회와 토지귀족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선전활동을 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수평파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을 민주적인 사상으로 교육시킬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장인들에게 수평파의 계획이 호소력 있게 유포되었을 것이다.

수평파는 소규모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지지도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성격의 디거스 운동보다 폭넓은 지지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평파가 관례나 성서의 권위에서 나온 주장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한 것은 정치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평가되고 있으며, 일부 지도자들의 팜플렛은 영국의 대중적인 산문의 발달과정에서 중요한 성격을 지닌다. 그들의 사회사상 중 일부는 퀘이커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