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1세

제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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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66. 6. 19,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
사망 1625. 3. 27,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시어볼즈
국적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영국

요약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최초 영국 왕으로 절대 왕정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왕’이라고 칭했다. 어머니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에게 패배, 왕위에서 물어나자 돌이 갓 지난 그가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왕권을 약화하려는 장로파 교회 목사들의 시도에 반발했지만, 그 자신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장로파 교회 신자였다. 그는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는데, 예로부터 잉글랜드의 적이었던 프랑스 및 스페인 왕과도 관계를 맺은 이유다. 실제로 그는 1604년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전쟁을 재빨리 끝냄으로써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왔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그는 잉글랜드로 떠났다. 제임스가 병사한 후 그의 둘째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제임스1세(James I)
제임스1세(James I)

'그레이트 브리튼의 왕'이라고 자칭한 그는 절대왕정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유럽의 평화와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팽창을 촉진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1542~67 재위)와 그녀의 2번째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제임스가 태어난 지 8개월 뒤 아버지는 집이 무너지는 폭발 사고로 인해 죽었다. 메리는 보스월 백작 제임스 헵번과 3번째로 결혼한 뒤,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에게 패배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뒤를 이어 돌이 갓 지난 제임스가 1567년 7월 24일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다. 메리는 1568년 5월 16일 왕국을 떠나,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린시절 제임스는 소수의 스코틀랜드 대영주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는데, 이들 가운데 머리 백작과 레녹스 백작, 마 백작, 모턴 백작 등 4명의 귀족이 잇달아 스코틀랜드의 섭정을 지냈다.

잉글랜드에는 통치자인 튜더 왕가와 신하들 사이에 커다란 틈이 존재했지만 스코틀랜드에는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구별하는 그 간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9대에 걸쳐 스코틀랜드를 다스린 스튜어트 왕가는 사실상 세력이 엇비슷한 많은 가문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일 뿐이었고, 제임스는 평생 동안 그가 신임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어린 왕은 상당히 고독했지만 14세 때까지 좋은 교육을 받았다.

교육과정은 매우 한정되어 있어서, 주로 그리스어와 프랑스어 및 라틴어 등 세 언어를 항상 성서(주로 〈구약성서〉)의 테두리 안에서 배웠다. 그는 어머니가 남겨준 책을 읽고 프랑스 시인들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다. 다른 모든 가정교사들의 가르침보다 휠씬 유익한 것은 가정교사인 조지 뷰캐넌과 피터 영이 그를 위해 모아준 고전문학과 종교 및 역사책이었다. 젊은시절 제임스는 시작(詩作)에 열중했지만 시적 재능은 빈약했다. 그는 가스코뉴의 위그노인 바르타의 영주 기욤 드 살뤼스트가 프랑스어로 쓴 글을 번역했으며, 그가 직접 지은 수많은 시들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경치를 언급한 것은 구름에 싸인 셰비엇 구릉지대를 묘사한 부분뿐이다.

젊은 군주는 해박한 지식으로 스코틀랜드 백성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주었다. 어른이된 제임스는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항상 말을 타고 다녔고 개와 말을 이용한 사냥을 좋아했는데, 그 때문에 그는 스코틀랜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백성이 된 잉글랜드인들은 그의 다리가 허약하고 가냘프며 턱이 좁고 뾰족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자각한 결과였다. 어른이 되면서 나타난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행히도 금전 감각이 전혀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 따라다녔다. 그는 또한 평생 동안 평화에 대한 깊은 열망을 간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권을 약화하려는 장로파 교회 목사들의 시도에는 반발했지만, 항상 교리에 충실하고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장로파 교회 신자였다.

만년에는 전반적으로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로 묘사되지만, 그 자신은 성공회가 모국인 스코틀랜드에 도입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는 동안 장로파 교회 목사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그는 이런 차이를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문제로 여겼다. 장로파 교회 목사들이 추구하는 통치 형태는 궁극적으로 신정주의였고 그가 의도하는 것은 군주정치였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평생 동안 악마의 힘과 증오를 굳게 믿었고, 이런 믿음에 크게 시달렸다. 그는 언제나 혼자서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지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단한 확신을 가졌다. 아버지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로 섭정 모턴을 처형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5세 때였다. 1600년 고리 백작 존 루스벤이 그의 세금 징수안에 반대하자 격분했고 고리 가문과의 혈연관계에 사실상 당혹감을 느꼈다. 같은 해 8월 고리의 집에서 백작과 그의 동생 알렉산더가 수상쩍은 상황하에서 살해되었다.

제임스는 줄곧 고리 백작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으며, 이번 사건은 거기에 맞서 싸우다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리 음모는 결코 충분히 해명된 적이 없었다.

1589년 8월 제임스는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2세의 딸 과 결혼했는데 앤은 1594년에 맏아들 헨리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제임스는 평생 동안 여자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애인을 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 여자는 단지 친구의 아내와 어머니뿐이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첫번째 친구는 사촌이기도 한 오비니의 영주 에스메 스튜어트였다. 그는 이 사촌에게 레녹스 공작작위를 주었다. 제임스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궁정에 대한 정보는 레녹스 공작에게 의존했다. 젊은시절부터 제임스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기 위해, 슬하에 자녀가 없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정책을 결정했다.

20년 동안 잉글랜드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어머니가 1587년에 포더링게이에서 처형되었을 때에도 그는 형식적인 항의만 제기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잉글랜드의 정치체제를 공격할 처지가 아닐 뿐 아니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최상책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1597년에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악마 연구 Daemonologie〉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는 영적 세계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헨리 왕자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부제를 가진 〈바실리콘 도론 Basilikon Doron〉이라는 책을 사비(私費)로 소량 출판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비록 범위는 좁지만 거의가 스코틀랜드에서 찾아낸 것들이며, 신학적 내용은 별로 강하지 않다.

이 시기에는 '옥타비안'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왕의 완전한 동의를 얻어 왕국의 행정을 도맡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장로파) 교회와 왕 사이에는 상당한 불화가 존재했지만 왕은 냉정하면서도 약삭빠른 태도를 보였다(장로교회).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왕의 측근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미약했다. 왕권과 교권 사이의 갈등이 그다지 위험한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제임스는 용기 없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런 용기라도 발휘해야 될 만큼 갈등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말년에 국무장관인 로버트 세실 경과 제임스 사이에 개인적인 서신 왕래가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세실 경은 그를 섬기게 되었다(대계약). 제임스는 또한 예로부터 잉글랜드의 적이었던 프랑스 및 스페인 왕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자신과 같은 신분을 가진 다른 나라의 왕들과 뚜렷한 동질감을 가진 결과였고 또한 자신이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1604년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전쟁을 재빨리 끝냄으로써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왔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제임스는 오랫동안 친숙했던 장관들을 스코틀랜드의 공직에 그대로 둔 채 잉글랜드로 떠났다.

통치 후반기에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것은 1617년 한 번뿐이었다.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을 궁정에 받아들였지만, 그의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로 옮겨 온 직후 그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제임스는 왕비가 가면극과 야외극에 관심이 많은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가톨릭에 자꾸 관심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고, 아내가 자녀들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덴마크 왕의 누이인 아내를 여전히 정중하게 대했다. 아내는 1619년에 죽었다.

제임스의 통치기간 동안 가장 좋았던 시기는 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부터 그에게서 솔즈베리 백작작위를 받은 세실 경이 죽을 때까지 9년 동안이었다. 그가 거느린 신하들 가운데 솔즈베리 백작만큼 경륜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은 없었다. 통치 후반기에 잇따라 그의 총애를 받은 사람은 로체스터 자작과 서머싯 백작작위를 받은 로버트 카 및 버킹엄 공작작위를 받은 조지 빌러스였는데, 이 두 사람은 왕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잉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받았던 것만큼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잉글랜드 의회의 귄한과 기풍을 거의 이해하지 못해 의회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잉글랜드 중산층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며, 사고와 이해의 범위가 좁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능숙하게 연기하곤 했다. 그래서 길가의 대중은 여왕이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는 여담을 곧잘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궁정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가 접촉한 시골의 노동계층은 아마 야외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하인과 사냥꾼, 그리고 사냥 막사를 지키는 사람들뿐이었을 것이다.

말년에는 판단력도 약해졌다. 왕은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인 곤도마르 백작 디에고 사르미엔토 데 아쿠냐에게 호감을 가졌는데, 잉글랜드인들은 이것을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런던 탑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뒤 금을 찾아 기아나로 건너간 월터 롤리 경이 당시 잉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스페인인들과 충돌하자 곤도마르는 제임스를 설득해 롤리 경을 참수시켰다.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취한 결정적인 행동은 아들 찰스 왕자를 마드리드로 보내 스페인 공주들 중에서 신부감을 고르게 한 것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곤도마르가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1612년에 형 헨리 왕자가 죽은 뒤 왕세자가 된 찰스 왕자는 처음에는 버킹엄 공작과 대립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은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왕을 완전히 따돌렸다. 통치기간의 마지막 18개월 동안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사의 대부분은 찰스와 버킹엄이 처리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골 저택인 하트퍼드셔의 시어볼즈에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