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교회

스코틀랜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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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세기 종교개혁 기간에 장로교 신앙을 받아들인 스코틀랜드 국교회.

전승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400년경 성 니니아누스가 세웠다고 한다. 6세기에 도착한 아일랜드인 선교사 가운데는 563년경 아이오나에 정착한 성 콜롬바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1192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소속교회'로 선포되었다. 1472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가, 1492년에는 글래스고가 대주교구로 되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은 초기에 루터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후에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칼뱅주의의 성격이 나타난 것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던 존 녹스 때문이었다. 녹스가 칼뱅과, 칼뱅이 제네바에서 실시한 개혁을 찬양했다는 사실은 녹스가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공동 규범서 Book of Common Order〉(이 책은 녹스의 전례서로도 알려짐)·〈교회규율서 Book of Discipline〉(나중에 'First Book of Discipline'으로 불림) 등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교회규율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와 국가를 세우는 방안에 대해 쓴 책이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스코틀랜드에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채택했으며 미사집전을 금지시켰다.

로마 교황청과 단절한 이후 1세기 이상 스코틀랜드 교회가 감독제를 택했는지 장로제를 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찰스 1세는 감독제를 주장한 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장로제 정치형태를 고집했다. 이 투쟁이 오랫동안 복잡하게 지속되어오다가, 1689년 윌리엄과 메리가 영국 국왕이 되자 장로제가 헌법에 성문화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영원히 정착되었다. 그후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17세기말에 온건파로 알려진 성직자 단체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전통적인 칼뱅주의를 굳게 고수한 복음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712년 영국 의회가 스코틀랜드에서 성직 임명권을 다시 찾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성직자를 선출할 권리를 지주들에게 빼앗겼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온건파 성직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온건파와 복음주의자 사이의 불화는 1833~43년의 주일학교운동과 신앙부흥운동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마침내 토머스 찰머스가 이끄는 큰 집단이 국교회를 떠나 1843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모든 선교사(1명 제외)와 교회의 저명한 학자 대다수가 이 자유교회에 가담했다. 점차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훌륭한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이 온건파를 대신하여 주도권을 장악했다. 1874년 성직 임명권이 폐지되었고, 자유교회와 유대관계도 더욱 긴밀해졌다. 1921년 스코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국교회가 아닌 민족교회로 만들면서 이 교회와 오랜 관계를 끊었다.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두 교회는 1929년 스코틀랜드 교회라는 옛 이름으로 통합했다. 그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교사업과 개신교 에큐메니컬 운동에 계속해서 적극 가담했다. 1959, 1971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와 영국성공회를 합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