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

서사시

다른 표기 언어 epic , 敍事詩

요약 영웅시대의 전설과 구전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같은 전통적 서사시와, 문학적·사상적 목적에 적용해 만들어 낸 문학적 서사시로 구분된다.
서사시적 관행의 주요양상들은 영웅을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 광대한 지리적 배경, 영웅적인 전투, 이국적인 여정,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등이다. 문학적 서사시는 전통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적 전개, 익살스러운 모방을 포함한다. 20세기의 서사시는 낡은 시 형식으로 간주되었지만 방대한 규모와 웅장함은 다른 형식의 작품들에 반영되고 있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제일 먼저 꼽고 근대에 들어서는 1924년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꼽는다. 1967년 발표된 신동엽의 서화·본장·후화의 3부로 나뉘는 서사시의 기본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사시와 좀더 짧은 영웅시, 덜 고상하고 규모가 작은 민간 설화와 발라드, 좀더 일관되게 허황하고 환상적인 로맨스 등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아리오스토·보이아르도·스펜서의 이야기체 시에는 이런 특징들이 뒤섞여 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영웅시대의 전설과 구전으로 이루어진 '1차' 서사시, 즉 전통적 서사시와, 세련된 시인들이 전통적 서사시 형태를 특수한 문학적·사상적 목적에 적용하여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2차' 서사시, 즉 문학적 서사시를 구별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와 〈오디세이아 Odyssey〉는 1차 서사시이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와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은 2차 서사시이다.

가장 오래 된 서사시에 해당하는 작품은 BC 3000년경에 운문 이야기체로 씌어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중요한 서사시이자 서유럽의 2차 서사시에 형식과 특징을 부여한 주요원천으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BC 900~750년에 완성된 호메로스의 시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판에 박힌 묘사, 상투적인 수식어구, 정형화한 어구와 시행의 반복 등은 즉흥적인 시작(詩作)과 전수에서 서술의 전개와 운율의 충족을 쉽게 하기 때문이라는 데에 오늘날 학자들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해 있다.

서사시적 관행의 주요양상들은 군사적·민족적·종교적으로 중요한 영웅이나 반신(半神)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 거의 우주적일 만큼 넓은 지리적 배경, 영웅적인 전투, 장기간에 걸친 이국적인 여정,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등이다.

서사시는 대개 주제를 먼저 소개하고 뮤즈 여신에게 도움을 호소한 다음, 이야기의 본론으로 곧장 뛰어들어 이야기의 앞부분은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회상하는 형식으로 채워넣는다. 서사시는 친숙하고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초기 단계를 건너뛰어도 청중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서사시의 극적인 전개에 몰두할 수 있다. 주로 특정한 지역과 연관되어 주인공들의 이름이 계속 나열되는 것은 서사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그런 주인공들이 하는 말은 미리 준비한 공식적인 연설일 때가 많다.

서사시의 서술에는 장황한 서사시적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 가지 유사점을 근거로 하여 일단 비유가 시작되면 전혀 다른 경험의 영역에서 끌어온 장면이나 사건이 장황하게 전개된다.

영웅시대 이후에 나타난 문학적 서사시의 자의식과 그 문화 배경은 관례적 서사시의 소재 및 전통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적 전개, 또는 익살스러운 모방까지도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네이스〉에 이미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서사시적인 전투가 영웅적일 뿐 아니라 잔인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밀턴은 〈실락원〉에서 전통적인 서사시에서는 전쟁터의 영웅이 갖고 있던 특징의 대부분을 악당인 사탄에게 부여하고 있다. 형식적 인습과 초자연적인 '장치'(machinery) 및 획기적 사건으로 가득 찬 영웅들의 세계는 알렉산더 포프의 〈머리카락의 겁탈 Rape of the Lock〉·〈바보전 The Dunciad〉,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 같은 시에서 풍자적 목적을 위해 시시하고 한심하며 부적절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테두리로 이용될 수도 있다. 헨리 필딩은 〈톰 존스 Tom Jones〉에서 서사시의 장엄함과 구조, 그리고 그런 웅장한 틀에 현재의 경험을 집어넣었을 때의 부조화를 이용해 익살스런 효과를 냈다.

반면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 같은 후기 소설들은 호메로스의 소재를 재생하여 서사시의 수준에 도달했다.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시 〈서곡 The Prelude〉은 서사시의 진지함을 갈망하며 샘솟는 시적 상상력을 묘사하기 위해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무운시를 표현수단으로 이용한다.

베르길리우스가 2차 서사시를 널리 보급한 지 오래된 뒤에도 유럽에서 자국어로 영웅적인 경험을 기록한 1차 서사시는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스페인의 〈엘 시드의 노래 Poema de mio Cid〉는 11세기에 무어인과 싸운 전쟁영웅을 찬양하고 있다. 12세기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는 8세기에 피레네 산맥에서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와 사라센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를 기린 작품이다.

13세기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는 5세기에 부르군트족과 훈족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다. 앵글로색슨족의 〈베오울프 Beowulf〉는 영웅적 공동체를 위협하는 늪지대의 괴물들과의 투쟁을 묘사하면서 6세기의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 속에 포함된 역사적 요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신화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형태 속에는 다른 시대와 전설에서 끌어들인 다른 소재와 주제가 뒤섞여 있다.

1835년 처음 출판된 핀란드의 국민시 〈영웅들의 땅 Kalevala〉은 엘리아스 뢴로트가 구전되어 오는 고대의 짧은 담시들을 하나의 서술 구조로 통합하여 구성한 종합적인 1차 서사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서사시는 낡은 시 형식으로 간주되었지만, 이 장르의 방대한 규모와 웅장함은 다른 형식의 작품들, 예를 들면 프랭크 노리스의 미완성 3부작 장편소설인 〈밀의 서사시 The Epic of the Wheat〉(1901~03)와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영화 〈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1944~46) 같은 작품에 이따금 나타난다.

옥스퍼드대학교의 문헌학자 J. R. R. 톨킨이 쓴 환상적인 3부작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1954~55)은 세상에서의 모험과 탐구를 서사시 형태로 서술하면서,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영웅 이야기와 앵글로색슨족의 시문학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맛과 형식을 반영했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제일 먼저 꼽는데, 이는 고구려 건국과 관련하여 해모수·동명왕·유리왕 3대의 이야기를 전3편으로 나누어 쓰고 지은이의 소감을 덧붙인 작품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4년 발표된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꼽는다. 근대시가 대체로 짧은 서정시였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남녀의 사랑을 긴 서술체로 쓴 것인데, 이전의 서사시가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였던 것과는 달리 이 시의 내용은 민중들의 이야기이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서사시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처럼 긴 서술체 시 일반을 서사시로 본다면, 일제시대 한 가족이 유이민이 되는 이야기를 그린 이용악의 〈낡은 집〉도 서사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이야기시' 또는 '장편 서사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1967년 발표된 신동엽의 〈금강〉은 전봉준·최수운·최해월·신하늬가 이끄는 민중들의 모습을 장중하게 그렸는데, 서화(序話)·본장(本章)·후화(後話)의 3부로 나뉘는 서사시의 기본형식을 따르고 있다. 근대와 현대로 들어서면서 서사시의 내용은 점차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