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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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국적 그리스

요약 호메로스는 서사시의 걸작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2편의 서사시에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시켰다는 사실말고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호메로스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몇 가지 추측이 나오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비평가 겸 문헌학자는 이 2편의 서사시가 원래는 모든 민족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소산이라고 주장했고,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2편의 서사시는 고전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의 교육과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위대한 서사시를 문학작품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 서사시를 거의 다 외었고, 그리스 문화의 통일성과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과 실천적 교훈의 오랜 원천으로 존중했다.

목차

접기
  1. 호메로스에 대한 초기 자료
  2. 호메로스에 대한 근대 자료
  3. 구송시인 호메로스
    1. 개요
    2. 시작법
    3. 시의 누적적 구조
  4. 호메로스 작품의 텍스트 확정
    1. 개요
    2. 〈일리아스〉
    3. 〈오디세이아〉
호메로스(Homeros)
호메로스(Homeros)

서사시의 걸작 〈일리아스 Iliad〉·〈오디세이아 Odyssey〉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2편의 서사시에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시켰다는 사실말고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호메로스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몇 가지 추측이 나오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비평가 겸 문헌학자는 이 2편의 서사시가 원래는 모든 민족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소산이라고 주장했고,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시인이 있었고,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있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호메로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호메로스 서사시, 그리스 문학).

또한 호메로스는 넓은 의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2편의 서사시는 고전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의 교육과 문화의 토대가 되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퍼질 때까지 사실상 인문 교육의 뼈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교육사).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간접적으로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이 작품은 대체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느슨하게 모방해 만들어졌음)를 통해, 직접적으로는 8세기말부터 두 작품을 되살린 비잔틴 문화를 통해, 그후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서쪽으로 망명한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가져온 두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두 작품은 유럽의 고전문학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고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작품들보다도 더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문화 자체에 미친 영향을 통해 서양의 윤리와 사상에 가장 미묘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이 위대한 서사시들을 문학작품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 서사시들을 거의 다 외었고, 그것을 그리스 문화의 통일성과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과 실천적 교훈의 오랜 원천으로 존중했다. 서사시는 민간 전승에 그 뿌리를 두었고, 따라서 시의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좀더 합리적인 행동규범으로 바꾸려고 애쓴 플라톤에게 호메로스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호메로스에 대한 초기 자료

호메로스가 언급되고 그의 작품이 인용되기 시작한 것은 BC 7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7세기의 아르킬로코스, 알크만, 티르타이오스, 칼리노스, BC 6세기초의 사포를 비롯한 몇몇 시인들은 호메로스의 표현법과 운율을 자신의 목적과 형식에 맞게 바꾸었다. 이무렵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장면은 예술 작품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BC 7세기말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델리의 아폴론에게 바치는 송가는 호메로스를 흉내낸 작품인데, '울퉁불퉁한 키오스 섬에 살고 있는 장님'의 작품이라고 주장되었다. 이것은 호메로스에 대한 전설을 빗댄 말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도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호메로스가 '호메리다이'로 알려진 후예들을 두었고, 그들이 호메로스의 시를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는 생각은 BC 6세기초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호메로스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레기움에 사는 테아게네스는 BC 6세기말경에 호메로스의 작품을 우의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해설서를 썼다. BC 5세기에는 이미 호메로스의 생애에 대해 꾸며낸 이야기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호메로스의 죽음에 대한 하찮은 전설(호메로스가 이를 잡는 문제에 대한 소년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전설)을 이용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호메로스 이후 가장 오래된 그리스의 시인)를 번갈아 인용하며 경쟁을 벌인다는 생각은 아마 소피스트의 전통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색다른 이야기를 많이 공급한 직관적인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거리를 찾지 못했지만, 호메로스의 연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인 점은 칭찬할 만하다. 그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리스의 신학체계를 명확히 서술했다고 평가한 다음, 이 두 시인은 그 자신의 시대인 BC 5세기보다 불과 400년 전에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 즉 호메로스가 자신이 노래한 트로이 전쟁(BC 1200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음이 분명하다는 생각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참고 자료로 미루어볼 때, 시인(호메로스는 서사시 자체에서는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음)에 관한 실제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 그의 고향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호메로스가 이오니아(소아시아 서해안의 중심 지역) 출신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은 시 자체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뒷받침된 합리적인 추측이었다(이오니아-아타카어). 스미르나와 키오스 같은 도시들은 일찍부터 호메로스의 고향이라는 명예를 다투기 시작했고(시인 핀다로스는 BC 5세기초에 호메로스를 두 도시와 모두 결부시켰음), 이어서 다른 도시들도 이 경쟁에 가담했다.

구송(口誦)시인이든 아니든, 호메로스만한 시인은 그당시 꽤 주목할 만한 존재였을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어딘가에는 그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믿을 만하다고 입증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인들은 명백한 사실이 없는 것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단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BC 5세기 이전부터 호메로스의 생애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고, 이것은 BC 3세기, BC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시대(진정한 학문만이 아니라 거짓 학문도 번성하던 시대)에 환상적인 거짓 전기로 발전했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파생된 학자들이 거짓 전기를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가장 오래 살아 남은 거짓 전기는 헤로도토스를 그 작가로 내세운다. 이 전기는 서슴없이 호메로스의 조상을 몇 대나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고, 그가 여행한 곳을 자세한 목록으로 만들어 덧붙였다. 이 전기는 논리적인 말투를 사용했고 시인의 족보에서 오르페우스와 님프들을 제외했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호메로스에 대한 근대 자료

호메로스가 주로 활동한 지역에 대해서만은 근대 학자들도 고대의 자료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고대인들이 제공한 정보 가운데 가장 유망한 것은 호메리다이, 즉 호메로스의 후예들이 이오니아의 키오스 섬에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오니아 방언은 서사시의 전통적 관례일 뿐이고 호메로스도 그 이유 때문에 이오니아 방언을 채택했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일리아스〉에 언급되어 있는 몇몇 지역적 환경은 이 시의 주요 저자가 에게 해 동부지역에서 살았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트로이 평원에서 사모트라케 섬을 보았을 때 그 사이에 있는 임브로스 섬 너머로 사모트라케 섬의 봉우리가 살짝 보이는 것, 에페소스 근처의 카이스터 강 어귀에 사는 새들, 이카리아 섬 앞바다의 폭풍과 트라키아에서 불어오는 북동풍이 그것이다.

주로 그리스 서부를 무대로 한 〈오디세이아〉에는 에게 해 동부지역의 색채가 희미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타카의 위치가 애매한 것은 그리스 세계의 반대쪽 끝에서 얻은 자료를 이오니아에 사는 시인이 공들여 다듬었다는 생각과 모순되지 않는다.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과연 동일 저자의 작품인지도 의심스럽다. 이런 의구심은 고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장르의 차이(〈일리아스〉는 전쟁을 주제로 한 영웅시이고, 〈오디세이아〉는 악한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환상적인 경우가 많음)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휘의 미묘한 차이가 그런 의심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디세이아〉를 호메로스가 노년에 쓴 작품으로 보았는데, 이런 견해도 결코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두 작품 가운데 〈일리아스〉가 보다 앞선 작품이라면(〈일리아스〉의 구조가 보다 단순하고, 〈오디세이아〉에 비교적 후기의 언어 형태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로 여겨짐),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의 이미지를 본떠서 창조될 수 있었을 것이고, 일단 불멸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방대한 작품이 본보기로 주어졌다면, 그것을 의식적으로 보완하는 작품이 창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두 작품의 유사점은 부분적으로는 두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영웅시의 전통이 일치하는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이나 적어도 오늘날에는 '상층 비평'과 옛날의 '호메로스 문제'의 미심쩍음을 피할 수 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대시인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그는 이오니아인이고, 실질적으로 〈일리아스〉의 저자이며, 그가 〈오디세이아〉를 직접 썼든 아니든지 간에 적어도 〈오디세이아〉에 영감을 주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합리적이다.

호메로스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점, 즉 그가 오랜 옛날부터 키타라나 리라의 반주에 맞추어 시를 노래한 가수들이 거의 사라질 무렵에 살았던 '구송시인'이었고, 트로이 전쟁을 주로 다룬 방대한 영웅 서사시를 글로 쓰지 않고 말로 발전시켰다(그리스어). 이 작품의 내적 단서는 호메로스가 언제 살았는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시어는 말로는 결코 정확히 재현할 수 없는 인위적인 혼합물인데, 그 일부 요소는 2편의 서사시가 미케네 시대 이후(BC 1100년경의 청동기시대말 이후)에 창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오니아에 최초의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진 BC 1000년경보다도 훨씬 나중에 창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접한 단모음들이 함께 뒤섞이고 반모음인 디감마(초기 그리스 문자의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간대의 상한선이라면, 그 하한선을 결정해주는 요소는 진정한 정관사의 발달이다. 진정한 정관사의 등장은 2편의 서사시가 BC 7세기 중엽과 말기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호메로스의 시는 문체나 운율로 볼 때 헤시오도스보다 앞선 시기의 작품인 듯한데, 학자들은 헤시오도스의 시를 BC 700년 직후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보다 좀더 명확한 또 하나의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물품과 관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에 언급되어 있는 이런 물품과 관습 가운데, 아테네 사람들이 나중에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한두 가지를 빼고는 어떤 것도 BC 700년 이후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편 〈오디세이아〉에서 페니키아인들이 무역업자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 그밖의 한두 가지 현상으로 미루어볼 때, 〈오디세이아〉의 창작 연대(적어도 관련이 있는 문맥의 창작 연대)는 BC 900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일리아스〉의 몇 구절은 밀집 대형으로 싸우는 새로운 전투 형태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런 전투 형태가 등장한 것은 BC 750년 이후 보병(장갑 보병)을 위한 특수한 갑옷이 발달한 결과였다. 장식적인 모티프로 고르곤 가면을 언급한 것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두 편의 시에 전통적 요소와 예스러운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언어와 물질적 배경은 여러 시대에 생겨난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서사시들(이전에 제작된 그보다 훨씬 짧은 서사시들과는 달리)의 창작시기는 BC 9세기 또는 8세기이며, 몇몇 특징은 BC 8세기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디세이아〉는 BC 8세기말에 가까운 작품이고, 〈일리아스〉는 BC 8세기 중엽에 더 가까운 작품인 듯하다.

구송시인 호메로스

개요

호메로스의 이름이 알려져 있고 그가 살았던 연대와 장소를 짐작할 수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시 자체에 투영된 존재로 남아 있다.

이 시들의 특성은 개인으로서나 영웅시 전통의 계승자로서 호메로스가 갖고 있는 취향과 세계관을 나타내지만, 그가 어떤 시인이며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도 좀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전설이 구전이었다는 것은 호메로스 연구의 가장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이다(구비문학). 이 발견은 특히 미국의 학자인 밀먼 패리(1902~35)와 결부되어 있다.

호메로스 자신이 시인을 가리킬 때 사용한 용어는 '아오이도스'(aoidos:가수)였다. 〈오디세이아〉에는 이런 시인 두 사람이 꽤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한 사람은 이타카의 오디세우스 궁전에 있는 궁정 시인 페미우스이고, 또 한 사람은 반신화적인 페니키아인들의 도시에 살면서 알키노오스의 궁전에서 귀족들을 위해 노래하거나 오디세우스를 기념해 운동경기가 열렸을 때 경기장에 모인 대중을 위해 노래한 데모도코스이다.

경기장에서 데모도코스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불륜을 노래하는데,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이 노래가 정확히 100행 정도 계속된다. 이 노래를 비롯해 이 가수들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노래들(예를 들면 〈오디세이아〉에 요약되어 있는 트로이의 목마에 대한 노래)을 보면, 영웅시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오이도스'는 대개 한 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짧은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시대와 다른 지역의 가수나 청중의 성향도 그것을 입증해준다(이슬람교를 믿는 세르비아의 음유시인들의 구전은 지금까지 가장 효과적인 비교 대상이 되어왔음). 영웅시를 노래하기에 알맞은 경우(귀족들의 잔치, 종교 축제, 선술집이나 시장에서 열린 대중 집회)가 무엇이든, 시의 길이는 가수의 체력과 재능만이 아니라 청중의 시간적 여유와 관심 정도에 따라서도 자연스럽게 제한되었다.

이처럼 비교적 짧은 노래들이 호메로스가 물려받은 전통의 뼈대를 제공했을 것이다. 데모도코스와 페미우스에 대한 호메로스의 묘사는 이런 점에서 정확한 것 같다. 호메로스 자신이 한 일은 방대한 시(끝까지 노래하려면 한 시간이나 하루 저녁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문학이나 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일화를 중심으로 하는 선배 시인들의 노래보다 좀더 복잡하고 새로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시)의 형태로 전혀 다른 시 형식의 개념을 도입한 것인 듯하다.

시작법

어떻게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호메로스를 구송시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운율학) 호메로스가 시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페미우스나 데모도코스와 다르다면, 시작법에서도 그들과 전혀 달랐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상당 부분은 그의 시가 갖고 있는 성격 자체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시의 표현 양식은 '상투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판에 박힌 형용어구와 반복되는 행(정도가 훨씬 덜하지만, 이런 특징은 베르길리우스 같은 문학적 모방자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만이 아니라, 고정 어구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고정 어구는 행의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도 수없이 되풀이해 사용된다.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예는 이른바 상투적인 명사-형용어구들이다.

이 상투어구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신이나 주인공들은 제각각 다양한 형용어구를 갖고 있어서, 가수가 행의 어떤 대목을 얼마나 많은 형용어구로 노래하고 싶어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용어구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오디세우스의 형용어구는 신과 같은 오디세우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는 오디세우스, 참을성 있는 뛰어난 오디세우스 등인데, 6보격 시행의 나머지 부분에 딱 들어맞는 길이의 형용어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형용어구를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배는 검거나 얕거나 대칭적이라는 형용사로 묘사되는데, 이런 형용사는 그 특정한 배를 다른 배들과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낱말 앞뒤의 운율적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명사-형용어구의 전체적 체계는 신축적이고 경제적이어서, 정확한 반복이나 불필요한 중복이 거의 없이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치밀하게 다듬어진 복잡한 체계는 어느 한 시인의 창작물일 수 없고, 오랜 전통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달했을 것이다. 그 전통은 기능적인 이유로 신축성과 경제성을 필요로 했고,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는 시인이 심사숙고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서 한 낱말씩 써나가는 것과는 달리 기억과 즉흥에 의존해야 하는 구송의 성격 때문에, 이런 고정 어구에 크게 의존했다.

널리 인정되는 바와 같이, 호메로스의 어휘 가운데 고정 어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명사-형용어구(또는 흔히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로서, 연설을 시작하고 끝내는 표현)만큼 두드러지게 상투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표현, 문장의 많은 부분이 경우에 맞게 개별적으로 창작되었거나,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호메로스가 사용한 인위적인 언어에는 상투적이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성 요소가 있다.

분사와 접속사 및 대명사의 배열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측면도 이런 상투적인 구성 요소에 속한

따라서 호메로스는 평범한 '아오이도스'로 훈련을 받은 것 같다. 훈련받는 '아오이도스'는 유고슬라비아의 '구슬라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기성 가수들에게서 얻은 보통 길이의 작품을 다시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 과거의 위대한 영웅적 모험(특히 테베를 공략한 일곱 장군의 모험, 이아손과 함께 황금 양털을 구하러 간 아르고선 선원들의 모험, 아카이아의 트로이 공격 같은 범그리스적 모험)은 어떤 작품에서나 이미 두드러졌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일부 측면은 이례적인 길이(그래도 역시 한 번에 끝까지 노래할 수 있는 길이)의 노래로 이미 확대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1만 6,000행이 넘는 방대한 〈일리아스〉를 완성하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하는 데에는 최소한 4일 저녁이 필요하고, 실제로는 아마 그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청중에게 이례적이고 지나칠 만큼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이런 방대한 작품이 나타난 것은 예외적인 능력과 평판을 가진 가수(보기 드문 천재적인 노래를 통해, 본질적으로 기능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개념을 청중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수)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BC 8세기는 다른 측면에서도 문화적 혁신의 시대였고, 모든 것이 크고 방대해지는 대형화의 방향으로도 적잖은 혁신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신전(예컨대 사모스에 있는 초기의 헤라 신전)과 거대한 장례식용 꽃병(아테네의 디필론 묘지에서 발굴된 기하학 양식의 사발과 항아리)은 트로이 전쟁을 다룬 방대한 시에서 자신과 유사한 문학 형태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에서 호메로스는 구전되어 오는 모든 영웅시가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확대되는 경향을 단순히 연장했을 뿐이다. 가수는 단순한 기억력만으로 다른 가수에게서 노래를 얻지는 않는다. 가수는 자신이 들은 것을 자신의 기억 속에 이미 존재하는 어구와 전형적인 장면과 주제에 맞게 조정하고, 자신에게 생소한 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바꾸거나, 거기에 없는 익숙한 자료를 덧붙여 더욱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구전의 전통이 살아 있을 때, 그 구전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가수는 자신이 얻은 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가 새로운 자료를 자기 것으로 전용하는 데에는 기억만이 아니라 즉흥의 요소도 존재한다. 러시아와 유고슬라비아, 키프로스 및 크레타 섬에서 19세기 중엽부터 연구된 구송시인들의 관행으로 미루어볼 때, 자신이 들은 것을 조정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개선하는 경향은 모든 구송시인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시의 누적적 구조

호메로스는 자신이 얻은 자료를 더욱 우수하게 갈고 다듬을 뿐만 아니라, 길이와 복잡성도 크게 늘리기로 결심한 것 같다.

모든 구송시는 본래 누적적이다. 시행은 어구에 어구를 더해 이루어지고, 개개의 묘사는 행에 행을 더해 이루어진다. 노래의 전체 줄거리는 사소한 모티프와 주요 주제의 점진적인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이 여행을 떠난다' 또는 '주인공이 적에게 말을 건다'와 같은 단순한 착상에서 인간이나 신들의 집회 같은 전형적인 장면을 거쳐, 인정하거나 화해하는 장면처럼 고도로 발달했지만 규격화한 복합적인 주제로 발전하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이런 누적적 경향을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간 것 같다. 다른 점(예컨데 그의 시어)에서뿐 아니라 이 점에서도 그는 광범위하고 잘 알려진 구전에서 얻은 풍부한 원재료에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시각을 적용했다. 그 결과는 평범한 전통적 시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의 기원과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려면, 호메로스 이전의 전통을 이루고 있는 개별적인 요소들만이 아니라, 그 전통에 호메로스 자신이 이바지한 부분도 가려내야 한다.

호메로스의 공헌은 특별히 방대한 구조에 대한 의존, 전체적인 전통과 비교해볼 때 뚜렷이 드러나는 참신성, 또는 그밖의 여러 가지 수단으로 분간할 수 있다. 방언과 언어적 구성 요소(예를 들면 살아남은 미케네어, 소아시아 서해안의 아이올리아 도시들에서만 쓰인 낱말들, 또는 호메로스 시대 이후에 그의 시에 도입된 아테네 방언 형태 등)는 많이 확인해야 한다.

후기 청동기시대나 초기 철기시대, 또는 호메로스가 활동한 시대(적어도 호메로스까지 내려오는 시적 전통의 전체적인 범위 안에서 비교적 이르거나 비교적 늦은 시대)의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갑옷과 옷, 집, 매장 관습, 정치 지리학 같은 것도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같은 이질적인 형식과 착상들은 원문에서 별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이질적인 요소가 따로따로 나뉘어 있다면, 좀더 이른 시기에 쓴 부분이나 나중에 쓴 부분으로 특정할 수 있을텐데, 그렇게 편리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반대로 그런 이질적인 형식과 착상들은 하나의 인위적 언어형태나 하나의 형용어구에 공존할 수 있다. 게다가 호메로스 자신도 그렇지만, 이 전통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예스럽게 표현하고, 또다른 경우에는 혁신적으로 표현하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결과 트로이에 대한 공격이나 노동자들의 지위 같은 역사적 현실을 재구성할 때, 서사시들은 뜻이 분명하지 않거나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전거가 된다. 초기 그리스 문법이나 신학을 연구할 때, 서사시들이 의미가 불분명한 원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서사시들은 하나의 세계관·시대·인식방법에 묶이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포괄적인 것이 된다. 서사시들은 진정으로 신화적인 특징, 다시 말해서 '현실' 생활에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판단과 경험을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로 결합시키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 완전한 통일체는 문학적이지만, 인간 존재의 기본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드러낸다.

호메로스 작품의 텍스트 확정

개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호메로스의 텍스트는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원문 비평). 그 정확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는 2편의 서사시가 실제로 '확정'된 연대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구전은 항상 어느 정도는 유동적이기 때문에, 텍스트가 확정된다는 것은 권위 있는 문자 형태로 변형된 것을 의미한다. 알파벳 표기체계가 그리스에 도입된 것은 BC 9세기 또는 BC 8세기초였다(그리스 문자).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면서 선문자 B(각 기호가 대체로 하나의 음절을 나타내는 표기체계)가 사라진 뒤, 알파벳 표기체계가 도입될 때까지는 200~300년의 공백이 있었다.

그동안 그리스에는 문자가 없었던 것 같고, 구전 서사시는 대부분 이 공백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알파벳 비문은 BC 730년경의 것인데, 그중 일부에는 6보격 시행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BC 750년 이후에 〈일리아스〉를 창작했다면, 그는 아마 문자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가 문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믿는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그가 끝내 문자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구송의 창조성과는 대개 결부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아는 조수에게 시를 받아쓰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또다른 학자들은 적어도 BC 7세기 중엽에 엄밀한 의미의 '문학'이 아르킬로코스의 시에 나타날 때까지 거의 100년 동안, 호메로스의 시는 구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보존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 3가지 가설에는 각각 반대 의견이 있지만, 문자 사용은 어쨌든 보조적이고, 호메로스가 대개는 전통적인 구송시인으로 처신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시에 나타난 미묘한 효과와 상호 참조로 미루어볼 때 그가 적어도 글로 쓴 원문을 참고할 능력은 갖추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의심스럽다. 평범한 구송시인이라 할지라도, 이 점에서는 글에 익숙한 사람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메리다이와 음유시인(이들은 더이상 창조적이 아니었고, 리라도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음)으로 알려진 직업적 암송가들은 늦어도 BC 7세기 후반부터는 서사시의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것만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최초의 '완성판'은 BC 6세기에 아테네에서 4년마다 1번씩 열린 판아테나이아 대축제에서 서사시 경연대회의 기준으로 확립된 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텍스트를 항구적으로 확정하지 못했고, 그때부터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주기적으로 왜곡된 뒤 점점 더 효과적으로 확정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가장 중요한 확정화는 BC 5세기에 아테네의 출판업이 크게 성장한 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널리 보급된 것과 BC 4세기 이후에 도서관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BC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추진한 비평 작업, 그보다 훨씬 뒤인 중세의 비잔틴 세계에서 그리스·로마 학문이 낳은 최고의 성과들을 통합해 정확한 필사본을 널리 보급한 결과였다.

그후로는 두 작품에 추가된 부분이 거의 없었지만, 오래지 않아 주요한 창작 행위가 이루어졌다. 〈일리아스〉 제10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간 원정, 그리고 그결과인 트로이 첩자 돌론의 체포, 〈오디세이아〉 제11권에 나오는 지하 세계의 장면들 가운데 일부, 〈오디세이아〉 제23권 296행(아리스타르코스는 이 행을 본디 텍스트의 결말로 보았음)부터 끝까지의 대부분은 구조나 언어, 문체의 견지에서 볼 때, 나중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부분들이다.

중간 규모의 다듬기 작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제쳐놓더라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모든 구송시가 갖고 있는 사소한 모순들을 보여준다.

때로는 작가가 전통적 재료를 대규모 구조 속에 융합시킨 것이 빤히 들여다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압도적인 인상은 강력한 통일성이다.

〈일리아스〉

오랫동안 계속된 트로이 전쟁 전반을 농축했을 뿐만 아니라, 온갖 형태의 모순, 무모하고 탐욕스러운 자만심, 웅장하지만 동물적인 힘, 둔감하지만 궁극적인 인간애 속에서 영웅의 전형을 탐구한 작품이기도 하다(영웅시). 사실 이 시는 〈일리아스〉의 첫부분에 선언되어 있듯이, 가장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후 수천 행에 걸쳐 아킬레우스는 부하인 미르미돈족 틈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제우스의 약속, 즉 트로이인들이 아카이아의 배들을 불태울 것이며, 아가멤논 왕은 그에게 전쟁터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약속을 기다리며, 눈에 보이지 않고 언급되지도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말다툼이 일어난 제1권부터 아킬레우스가 중대한 양보를 하여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그 대신 싸우는 것을 허락하는 제16권까지, 시의 대부분은 길지만 미묘하게 다른 전투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일화들과 군사 전략이 조심스럽게 섞여 있다. 분견대의 목록, 파리스와 메넬라오스 및 아이아스와 헥토르의 결투, 헬레네가 아카이아 군주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장면, 아가멤논의 부대 사열, 디오메데스의 승리, 헥토르가 트로이에서 아내 안드로마케를 만나는 장면, 아카이아 방벽 축조,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패하는 장면, 야간 원정,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하고 그후 포세이돈이 아카이아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시가 2/3 정도 진행되었을 때 파트로클로스가 죽음으로써 아킬레우스는 싸움터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싸움터로 되돌아간 것은 우선 파트로클로스의 시체가 회수되고, 아킬레우스를 위해 신성한 새 갑옷이 만들어지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정식으로 화해한 뒤였다. 제22권에서 그는 판단력을 잃은 헥토르를 죽인다.

이어서 그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식 겸 경기대회를 벌여, 영웅의 지위를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마지막 권에서 아킬레우스는 신들의 강요로 헥토르의 시체를 프리아모스 왕에게 돌려줌으로써, 문화적인 가치관과 그 자신의 관대함을 되찾는다.

〈오디세이아〉

표현이 〈일리아스〉만큼 활기차거나 행동이 힘차게 진행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리아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조화로운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이타카에 있는 페넬로페와 젊은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체념하고,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거만한 구혼자들 앞에서 무력해진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소식을 알기 위해 몰래 펠로폰네소스로 가서,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 및 헬레네를 만난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에서 페니키아인들의 섬으로 위험한 항해를 하고, 그곳에서 트로이를 떠난 뒤에 겪은 모험을 이야기한다(제9~12권). 시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와 교묘히 변장을 하고, 충직한 돼지치기인 에우마이오스와 텔레마코스에게만 자신을 드러낸다. 이들은 구혼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잔인하게 실천한다. 마지막으로 충실한 아내 페넬로페가 그를 알아본다.

호메로스의 영향은 2편의 서사시를 이루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구성 요소에 가장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신들이 인간사에 참여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쾌활함이나 엄격함이나 보편성을 준다. 이것은 오랫동안 영웅 서사시 전통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리아스〉에는 신들의 집회가 자주 화려하게 등장하고,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와 아테나 여신 사이에 유난히 개인적이고 양면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아마 작가의 취향과 능력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전투의 다면성, 즉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묘사하는 애매모호한 사실주의는 호메로스의 선배 시인들이 발달시킨 것이 분명하지만, 그 전에는 결코 그처럼 강력하고 복잡한 효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확대된 직유법은 직접 관련이 있는 비유 시점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세계의 이미지를 얼마 동안 갈망하듯 전개한다. 완전히 이질적이고 평화로운 당시의 세계를 설명하는 이런 이미지는 불필요한 침입처럼 여겨지지만, 주인공의 행동이 초래한 긴장을 완화시킨다. 이런 직유법은 작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적어도 그런 직유법을 어느 위치에 집어넣고 얼마나 많이 사용할 것인지는 작가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런 개괄적인 통찰을 넘어서서, 작가가 특별히 이바지한 부분을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자멸 행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전통과 작가의 의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신처럼 뛰어나거나 영웅적인 면과 지극히 인간적인 면, 상투적 문체의 딱딱한 불변성과 화려한 개인적 상상력의 유연한 자연스러움이 거의 초자연적으로 합류하고, 따라서 결코 해부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무엇보다도 이런 융합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