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트로이

다른 표기 언어 Troy

요약 트로이는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km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에 있었다. 트로이의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졌으나,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였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주거지가 파괴되어 버린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목차

접기
  1. 그리스·로마의 트로이 전설
  2. 중세의 트로이 전설
트로이(Troy)
트로이(Troy)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km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에 있었다. 트로이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청동기시대에 트로이가 누렸던 세력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를 지배하는 전략적인 위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BC 3000~2000년에 번성한 문화 중심지로서, 트로아스의 농업 공동체들을 지배하던 왕권의 수도였다. BC 1100년경부터 버려졌다가 BC 700년경에 그리스 정착민들이 트로아스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트로이에도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며 일리온이라는 이름으로 4세기까지 존속했다. BC 6세기말부터 이 지역은 페르시아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아시아 남서부의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 로마인들에 차례로 점령당했다. BC 85년 로마인이 약탈한 후 같은 해에 로마 장군 술라가 부분적으로 복구시켰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황제들이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그러나 324년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고 나서 일리온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투르크인들이 히사를리크라고 불렀고 그리스·로마 시대의 일리온 유적을 포함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던 구릉이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졌으나,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였다. 1890년 슐리만이 죽은 뒤에도 그의 동료인 빌헬름 되르펠트에 의해(1893~94), 그후에는 신시내티대학교의 원정대에 의해(1932~38) 발굴작업이 계속되었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제1~7기 트로이는 요새,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1900)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 동안의 주민들이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로이 목마
트로이 목마

그리스·로마의 트로이 전설

그리스·로마의 트로이 전설
그리스·로마의 트로이 전설

트로이의 전설은 그리스·라틴 문학에서 계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가장 초기의 문학적 증거인 호메로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 주요 이야기는 이미 골격을 갖추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일부는 분실된 연작시가 〈키프리아 Cypria〉·〈아이티오피스 Aethiopis〉·〈소(小) 일리아스 Little Iliad〉·〈일리오스의 약탈 Sack of Ilios〉에서 나타났으며 개개의 주제들이 나중에, 특히 그리스 희곡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트로이 출신의 용사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로마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Aeneid〉의 제2권에는 트로이 약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설명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딕티스 크레텐시스와 다레스 프리기우스라는 이름의 작가들이 쓴 것으로 통용되는 의사(擬似) 연대기들이 있다.

그리스에서는 테우크로이와 다르다노이라는 이름들이 대체로 '트로이인들'과 같은 말로 사용된다.

그래서 전설은 스카만데르 강의 아들 테우크로스를 트로아스의 첫번째 왕으로 만들었고, 제우스와 엘렉트라(아틀라스의 일곱 딸인 플레이아데스 중의 한 사람)의 아들인 다르다노스를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삼았다. 다르다노스의 아들 에릭토니오스는 트로스의 아버지이며, 트로이인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트로스에게는 일로스·아사라코스·가니메데스(이다 산에서 제우스에게 납치됨) 등 3형제가 있었다. 일로스는 얼룩소가 알려준 지점에 일리움(트로이)을 건설했으나 이 도시는 그의 아들 라오메돈이 승계했을 당시에 아직 성벽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라오메돈은 성벽을 쌓기 위해 포세이돈과 아폴론 신을 고용했으나 그들이 성벽을 다 쌓은 후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트로이를 괴롭히기 위해 바다괴물을 보냈으며 헤라클레스는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를 괴물로부터 구출해냈다. 그러나 라오메돈은 헤라클레스에게 약속했었던 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와 그의 동료들이 트로이를 약탈하고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살해했다.

이때 막내아들 프리아모스만이 헤시오네가 지불한 보상금으로 석방되었다.

부유하고 강한 왕인 프리아모스는 아내 헤카베와 첩들 사이에서 50명의 아들과 12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파리스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자'를 위한 것이라고 표시해놓은 황금사과를 놓고 아프로디테·헤라·아테나 중에서 누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심판하도록 요구받았다.

아프로디테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만난 뒤 사랑에 빠져 그녀와 도주하고 말았다. 헬레네를 찾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메넬라오스의 형인 아르고스·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총 지휘하에 대원정을 시작했다(트로이 전쟁). 트로이인들은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거절했다.

트로아스 내부와 근처의 작은 도시들이 그리스인에 의해 약탈당했으나 트로이는 소아시아와 트라키아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10년 동안 포위공격을 견디어냈다. 신들 역시 편이 갈라져서 특히 헤라·아테나·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을, 아프로디테(아사라코스의 손자인 트로이 용사 안키세스와의 사이에 아들 아이네아스를 두었음)·아폴론·아레스는 트로이 편을 들었다. 전쟁 10년째에 시작된 이야기인 〈일리아스〉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용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과, 그로 인한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자 헥토르의 전사를 기록하고 있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는 두 외국 동맹군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 멤논이 트로이 편에 가세했다.

아킬레우스가 이들 두 사람을 모두 죽였으나 파리스가 화살로 아킬레우스를 살해했다.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전에 그리스인들은 성채로부터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치고, 렘노스로부터 헤라클레스의 화살과 병든 궁수 필록테테스를, 또 스키로스로부터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피로스)를 데려와야 했는데,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모두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마침내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에페이오스가 거대한 목마를 완성했다(트로이의 목마). 여러 명의 그리스 용사들이 목마 안에 숨고, 나머지는 포위공격을 포기한 척하면서 근처의 섬 테네도스로 빠져나갔다.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탈주자임을 가장한 그리스인 시논의 말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서 트로이 성벽 안으로 가져왔다.

그 목마를 파괴하려고 애썼던 라오콘 신관(神官)은 바다뱀에게 죽음을 당했다. 밤이 되자 그리스인 함대가 돌아왔고 목마 속에서 나온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다. 뒤이은 철저한 약탈에서 프리아모스와 남아 있던 그의 아들들이 살해당했고, 트로이 여자들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로 가서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스 지도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은 위험하고 종종 비참하기까지 했던 항해여행은 2개의 서사시 〈귀향 Nostoi〉과 〈오디세이아〉에 그려져 있다.

엘렉트라는 자신의 후손에 대한 슬픔 때문에 플레이아데스 성단 중 자신의 별을 가장 희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중세의 트로이 전설

중세기 작가들은 호메로스 작품들을 직접 접한 적은 없었지만, 트로이 전설의 영웅적이고 로맨틱한 이야기를 자신들 시대의 궁정연애나 기사도적 사랑의 개념과 끼워 맞출 수 있었고 특히 프랑스·영국의 국가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중세기 판(版)의 주요출처는 딕티스 크레텐시스와 다레스 프리기우스가 쓴 허구적인 전쟁담이었다.

다레스는 서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가 쓴 의사연대기가 트로이 측에 유리하게 기록되었고 몇몇 서구 국가들의 기원이 트로이인 것으로 여겨져서 서구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엑시터 출신의 조지프, 슈타더의 알브레히트, 플릭세쿠르의 장, 워터퍼드의 조프루아, 세르베스 코팔 등이 다레스의 글을 작품의 소재로 이용했지만, 트로이 주제를 이용한 핵심적인 작품은 브누아 드 생트모르가 쓴 프랑스의 로맨스 〈트로이 이야기 Roman de Troie〉(1154~60)이다.

방대한 시(詩)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아손과 헤라클레스에 의한 최초의 트로이 파괴, 프리아모스에 의한 재건, 파리스의 헬레네 유괴, 트로이의 포위공격과 전쟁들, 영웅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포함한 전후 이야기 등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헬레네와 파리스, 아킬레우스와 플릭세나, 트로일로스와 브리세이다(크레시다) 간의 사랑이야기가 강조되었다. 후일 중세기 작가들은 〈트로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시칠리아의 판사 구이도 델레 콜론네가 1287년경에 라틴어 산문 〈트로이 파멸의 역사 Historia destructionis Troiae〉를 완성하고부터는 이것에서 소재를 얻었다.

구이도의 산문은 오랫동안 독창적인 것으로 명성을 누렸지만 사실은 〈트로이 이야기〉의 축약판이었다.

트로이의 전설은 15세기에 특히 부르고뉴 왕실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부르고뉴 공 도서실에는 트로이에 관한 필사본이 17개나 소장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구이도의 작품에 기반을 둔 라울 르 페브르의 〈트로이 역사집 Recueil des histoires de Troye〉(1464)은 윌리엄 캑스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인쇄(1474경)된 최초의 책이 되었다.

또한 구이도 작품의 스페인어·이탈리아어·덴마크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아이슬란드어·체크어 판도 나왔다. 트로이 전설의 인기는 특히 프랑스 문학 같은 중세의 다른 문학에서 전설 자체와 전설 속의 인물·주제가 많이 언급된 데서도 입증된다. 그 주제는 또한 필사본 채색과 태피스트리 등의 중세예술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트로이의 흩어진 영웅들이 몇몇 서구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세웠다는 문학적 또는 심지어 애국적인 전설이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

7세기 중엽에 프랑크족 연대학자 프레데가리우스는 일단의 트로이인들이 트로이 시 파괴 이후 자신들의 왕 프란키오의 지휘 아래 라인 강, 도나우 강, 지중해 사이 지역에 어떻게 정착했는지를 설명했다. 프랑크족의 기원을 트로이인으로 보는 이 최초의 견해는 이후 계속해서 연대학자·계보학자·찬사가 간에 반추되었다. 16세기에도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던 이 신화는 장 르메르 드 벨주의 〈갈리아의 삽화와 트로이의 진기함 Illustrations de Gaule et singularités de Troie〉(1510~13)과 롱사르의 민족서사시 〈라 프랑시아드 La Franciade〉(1572)에 영감을 주었다.

영국에서는 영웅 아이네아스의 증손자이자 로마인의 전설적인 시조인 브루투스가 영국인의 시조이면서 트로이아노바(뉴트로이[런던])의 창건자라는 비슷한 전설이 일찍이(9세기 이전) 형성되었다. 저지의 웨이스(바스)가 자신의 작품 〈브루트 이야기 Roman de Brut〉(1155)에서 맥을 이은 이 전설은 셰익스피어의 시대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