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슐리만

하인리히 슐리만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Schliemann
요약 테이블
출생 1822. 1. 6,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노이부코
사망 1890. 12. 26, 나폴리
국적 독일

요약 트로이· 미케네· 티린스의 발굴자로서 흔히 선사시대 그리스의 발견자로 여겨진다. 7세 때 아버지가 준 역사책 속에서 불타고 있는 트로이 그림을 보고 평생 동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1846년 러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후 크림전쟁 중에는 주로 군수사업자로 활동하여 재산을 모았다. 36세에 사업을 그만두고 선사고고학 연구에 돈과 정열을 바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호메로스 시가의 무대인 트로이를 찾는 문제에 힘썼다. 이를 위한 훈련을 쌓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했으며, 파리에서 고고학을 연구했다. 1868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유적지들을 탐방했고 다음해 첫 저작인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를 출간했다. 슐리만이 발굴을 시작하기 전에도 산발적인 발견이 있기는 했지만, 선사시대 그리스 고고학의 창시자는 슐리만이라 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일컬어져왔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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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트로이 발견
  4. 슐리만에 대한 평가

개요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미케네·티린스의 발굴자로서 흔히 선사시대 그리스의 발견자로 여겨진다.

초기생애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가 준 역사책 속에서 불타고 있는 트로이 그림을 보고 평생 동안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호메로스의 시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4세에 식료품 가게 수습사환이 되었으며 이 가게에서 그리스 원어로 낭송되는 호메로스의 시를 들었다. 몇년 동안 이 가게에서 일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고 함부르크에서 베네수엘라를 운행하는 배의 선실급사가 되었다. 이 배가 네덜란드 해안에서 난파함에 따라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 들어가 사환과 경리직원으로 일했다.

언어에 대한 열의와 재능, 뛰어난 기억력, 정열과 의지를 갖춘 덕분에 하인리히 슐리만은 8~13개 국어를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었다. 슐리만이 몇 개 국어나 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러시아어와 고대 및 근대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1846년 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 이곳에서 하인리히 슐리만은 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인디고 무역을 시작했다. 1852년 러시아인 예카테리나 리스친과 결혼했고, 크림 전쟁중에는 주로 군수업자로 활동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1850년대에 미국에 가서 시민권을 얻었다(평생 동안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음). 러시아로 돌아와 36세에 사업을 그만두고 선사고고학 연구에 돈과 정열을 바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호메로스 시가(詩歌)의 무대인 트로이를 찾는 문제에 힘썼다.

이를 위한 훈련을 쌓기 위해 그리스·이탈리아·스칸디나비아·독일·시리아 등지를 널리 여행했으며, 세계일주에 나서 인도·중국·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나중에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을 썼음). 또 파리에서도 고고학을 연구했다. 1868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재산을 그리스로 가지고 가서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유적지들을 탐방했고 다음해 첫 저작인 〈이타카·펠로폰네소스·트로이 Ithaka, der Peloponnes und Troja〉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유적이 소아시아의 부나르바시가 아니라 이곳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히사를리크이며,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가 기술했듯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은 미케네 성벽 밖의 톨로스 묘(tholos 穹窿墓)가 아니라 성 내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뒤 여러 해 동안 발굴 작업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했다. 예카테리나와 이혼하고 결혼상담소를 통해 1869년 그리스의 소녀 소피아 엥가스트로메노스와 재혼했다.

트로이 발견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을 시작하기 전에도 산발적인 발견이 있기는 했지만, 선사시대 그리스 고고학의 창시자는 슐리만이라 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일컬어져왔다.

프랑스 지질학자 페르디낭 푸케는 1862년 산토린 섬을 발굴하고 8m 두께의 부석층 아래에서 프레스코로 장식된 가옥의 벽과 칠무늬토기[彩色土器]를 발견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부석이 두껍게 깔린 것은 원래의 산토린 섬을 테라(지금의 티라)와 테라시스(지금의 티라시스)로 나누어버린 화산의 대폭발 때문이었다.

당시의 지질학자들은 산토린 섬의 화산 폭발 시기를 BC 2000년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푸케가 발굴한 유물이 매우 오래된 것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선사문화가 에게 해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1871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히사를리크에서 발굴작업을 했던 영국 고고학자 프레더릭 캘버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 거대한 인공 마운드를 발굴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이 마운드의 가장 아래층에 있다고 믿고 무작정 아래로 파내려갔다. 1873년에는 매우 오래된 어떤 도시의 요새와 유적지에 도달하여 황금 보물을 발견했고 이를 투르크에서 밀반출했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도시가 호메로스의 트로이이며, 그 보물은 프리암의 보물이라고 믿었다. 슐리만의 발견과 주장이 처음 제시된 〈고대 트로이 Trojanische Altertümer〉(1874)는 많은 학자의 회의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영국의 총리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학자들과 많은 독자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874년 2월 하인리히 슐리만은 히사를리크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그가 밀반출한 유물, 특히 황금 보물의 분배 문제를 놓고 오스만 정부와 소송이 일어나 약 2년 동안 작업을 계속하지 못했다(1876년 4월이 되어서야 작업 재개를 허가받음). 한편 이 지체기간 중 슐리만은 히사를리크 대신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에서 미니아의 보물 유적지를 팠지만 아름다운 천장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또 이 기간에 〈트로이와 그 유적 Troja und seine Ruinen〉(1875)을 출간했으며 미케네 발굴도 시작했다. 1876년 8월에는 톨로스 묘의 발굴작업을 시작해 사자문 일대에 이어 성벽 안쪽을 팠다. 이곳에서 슐리만은 이중원형 석렬을 발견했는데, 석렬 내부에는 5개의 구덩식[竪穴式] 무덤이 있었다(6번째 무덤은 그가 이곳을 떠난 직후 발견됨). 이 원형으로 배치된 무덤떼에서 슐리만은 16구의 시신과 금·은·청동·상아로 된 많은 보물을 발견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것이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이기를 기대했고, 또 그렇게 믿었으며 발굴 결과를 〈미케네 Mykenä〉(1878)라는 책으로 출간했다(아트레우스의 보고).

1878년 이타카 발굴이 실패로 끝난 뒤 같은 해 히사를리크 발굴을 다시 시작했다.

1882~83년에는 3차 트로이 발굴, 1888년부터 죽을 때까지 4차 발굴을 실시했다. 1878년의 첫 발굴에서는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내 소피아만이 참여했으나, 1879년 발굴에서는 고전 고고학자 에밀 뷔르누프와 저명한 독일의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도움을 받았다. 피르호는 '독일인류·민족·선사학회'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마지막 2년의 발굴에서 슐리만은 경험이 풍부한 건축가로서 독일의 올림피아 발굴에 참여한 적이 있는 빌헬름 되르펠트의 노련한 도움을 받았다.

되르펠트는 그리스에서 작업중이던 독일 고전 고고학자들의 새로운 방식과 효율성을 트로이 발굴작업에 적용해 트로이 유적의 층위를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밝혔고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기법에 혁신을 일으켰다. 1884년 슐리만은 되르펠트와 함께 미케네 가까이에 있는 대요새 유적인 티린스를 발굴했다. 만년에는 귓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럽의 전문의를 찾기도 했지만 이를 고치지 못했다. 슐리만은 심한 괴로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1890년 12월 25일 나폴리의 한 광장을 가로질러가다 쓰러져 다음날 죽었다.

슐리만에 대한 평가

고고학 분야에서 슐리만이 이룩한 발굴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는 호메로스의 트로이뿐 아니라 호메로스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도시, 즉 선사시대 투르크의 청동기 문명을 발견했고 미케네에서도 같은 시기의 문명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고대사가들은 그리스·로마·이집트와 바빌로니아-아시리아라는 4개의 제국만을 알고 있었으나, 슐리만은 새로운 두 문명을 발견하여 역사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또 그는 제3의 문명, 즉 선사시대 크레타 문명의 대부분을 발견했다.

오래 전부터 슐리만은 지중해 지역에 미케네나 히사를리크의 청동기 문화보다 앞선 크레타 섬의 문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여 한때 크레타 발굴을 계획했으나 높은 땅값 때문에 조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케네 이전에 꽃핀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슐리만이 죽은 10년 뒤 아서 에번스 경에 의해 발견되었다.

슐리만은 처음으로 고고학을 대중화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들과 〈타임스 The Times〉·〈데일리 텔레그래프 Daily Telegraph〉 등의 신문에 보낸 급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고고학 발굴을 전세계에 알렸고,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이전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던 일이었으며, "교양과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트로이 발견의 드라마에 휩싸여 살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슐리만은 19세기 후반에 이룩된 새로운 고고학 학풍의 상징일 뿐 아니라 고고학의 낭만과 흥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학자들과 일반 대중은 슐리만에게 자극을 받았으며 옥스퍼드대학교 캠던좌(座) 고대사 교수인 존 마이어스 경은 슐리만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계절에서 봄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슐리만이 발굴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고고학 야외조사에 대한 일반화한 방법이 없었다. 플린더스 피트리 경과 오거스터스 피트 리버스와 같이 그는 발굴방법의 선구자였다. 그때까지 층위는 덴마크의 이탄 유적, 유틀란트 반도의 무덤, 스위스 선사시대의 호상 주거지 등에서 관찰되고 이해되었지만, 히사를리크야말로 지상의 인간이 만든 마운드 중 최초로 발굴된 대규모 유적이었다. 그러므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처음에는 당혹해 했지만, 결국 되르펠트의 도움을 받아 층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발굴자로서 슐리만의 발굴기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내려졌다. 1870년대 발굴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의 작업은 탁월한 것이었지만 100년 뒤 중동에서 그와 비슷한 마운드를 발굴한 사람들은 그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부당하게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