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르호

피르호

다른 표기 언어 Rudolf (Carl) Virc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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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1년 10월 13일, 프로이센 포메른 시펠바인
사망 1902년 9월 5일,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병리학자·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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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활동
  2. 의학 연구
  3. 인류학 연구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의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질병이 신체의 기관과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세포 이론에 적용하여 설명함으로써 병리작용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제창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기관이나 조직들 속에서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기관과 조직들의 개개의 세포 속에서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사회개혁을 위한 활발한 운동을 벌였고 인류학을 근대적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의학).

초기활동

1839년부터 베를린대학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연구소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843년 의사자격을 얻었다.

샤리테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조직병리학을 공부했고, 1845년 백혈병의 증상을 설명한 논문을 발표했다(이것은 백혈병의 증상으로 보고된 최초의 2가지 증상 중 1가지를 설명한 것으로 정평 있는 논문으로 평가됨). 샤리테 병원에서 사체해부자로 임명되었고 1847년에는 친구 베노 라인하르트와 함께 새 잡지 〈병리해부학·생리학·임상의학을 위한 기록 Archiv für pathologische Anatomie und Physiologie, und für klinische Medizin〉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1852년 라인하르트가 죽자 피르호는 〈피르호 기록 Virchows Archiv〉으로 알려진 이 잡지를 50년 뒤 죽을 때까지 단독으로 편집했다(전문교육). 1848년초 피르호는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상(上)슐레지엔 지방에서 번지고 있는 발진티푸스의 발병원인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잇달은 보고서에 발진티푸스가 사회적 여건과 정부 때문에 발병했다고 기록했다. 슐레지엔으로 돌아온 피르호는 돌아온 지 8일 만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정부와 싸웠으며, 혁명이 끝난 뒤에는 의사와 외과의사의 등급분류 폐지 등 의료 개혁운동에 기꺼이 참여했고, 주간지 〈의료 개혁 Die Medizinische Reform〉(1848. 7~1849. 6)을 펴내면서 대부분의 글을 직접 썼다. 피르호는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1849년 3월 31일 정부에 의해 샤리테 병원에서 해고되었지만 2주 뒤 몇 가지 특권을 잃은 상태로 다시 복직되었다.

1849년 그는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 새로 설치된 병리해부학과(독일에서 설치된 최초의 병리해부학과) 과장에 임명되었다.

많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7년간의 과장 재임기간 동안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수는 98명에서 388명으로 늘어났다. 이곳에서 그는 나중에 이름을 떨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피르호는 1850년 로제 마이어와 결혼했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그는 병리해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특수병리학과 치료학 입문서 Handbuch der speziellen Pathologie und Therapie〉(6권, 제1권의 대부분은 그가 직접 썼음)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세포병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고안하기 시작했고, 백치(왜소하고 정신적으로 모자란 사람)의 두개골을 연구하고 두개골 기저부의 발달을 조사하면서 인류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피르호 덕분에 1856년 베를린대학교에도 병리해부학과가 설립되었다. 피르호는 새로운 병리학 연구소 창설을 포함한 몇 가지 요구사항을 조건으로 베를린대학교의 초빙을 받아들였고 이 연구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2번째 베를린 시기에 피르호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59년 그는 베를린 시의원에 선출되었고, 이 자리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하수처리, 병원 설계, 음식물 검역, 학교위생 등 공중보건문제에 주로 관여했다. 그는 베를린에 새로 건립된 2개의 대규모 병원인 프리드리히스하인 병원과 모아비트 병원의 설계를 감독했으며, 프리드리히스하인 병원 안에 간호학교를 개설했고, 베를린의 새 하수처리 체계를 고안했다. 1861년 피르호는 프로이센 의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진보당(Fortschrittspartei)의 창설자였으며, 단호하고 꾸준하게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는 1865년 피르호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피르호는 현명하게 이를 거절했다. 1866, 1870년의 전쟁 때는 육군병원 설립과 병상병운반열차 설비에 정치활동을 집중시켰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는 최초의 병상병운반열차를 직접 전선으로 끌고 갔다. 1880~93년에는 제국의회(Reichstag) 의원을 지냈다.

의학 연구

1848년 피르호는 정맥염(靜脈炎)이 대부분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그는 혈관 속의 덩어리들은 '혈전증'(피르호의 용어)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혈전의 각 부분들은 '색전'(피르호의 용어) 형태로 분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순환하지 않는 색전은 결국 더 좁은 혈관 속에 갇히게 될 것이며, 인접한 부분에 심각한 기능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피르호의 세포병리학 개념은 뷔르츠부르크에 있을 때 고안된 것이다.

18세기 후반까지 질병은 신체의 4가지 유동액(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이 불균형을 이룰 때 생긴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체액 병리학'에 의거한 것이었다. 1761년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는 질병이 체액의 불균형 때문이 아니라 기관의 손상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1800년경 프랑스의 해부학자 그자비에 비샤는 신체가 21개의 별개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했으며, 병든 기관 속에서는 단지 몇 개의 조직만이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피르호는 모든 세포의 근원이 비결정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포 이전 상태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하는 세포 이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병리과정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 이 이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세포를 영양분의 중추로 보는 에든버러의 존 굿서의 견해, 조직을 형성하기 위한 세포증식이 세포분열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1852년에 처음으로 지적한 독일의 신경해부학자이며 발생학자인 로베르트 레마크의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레마크는 새로운 세포가 병리조직 속에서도 기존 세포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레마크의 저서는 병리학자와 개업의사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든 세포는 (이전) 세포로부터 나온다'(omnis cellula e cellula)로 표현된 피르호의 사상이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귀절 자체도 피르호의 것이 아니며 프랑수아 뱅상 라스파유가 1825년에 만든 말이다.

그러나 피르호는 세포병리학을 매우 중요한 체계로 만든 공로자이다. 그는 1858년 20차례의 강연을 통해 이 이론에 관한 견해를 밝혔으며, 이 강연은 저서 〈조직생리학과 조직병리학에 근거한 세포병리학 Die Cellularpathologie in ihrer Begründung auf physiologische und pathologische Gewebenlehre〉(1858)으로 출판되었다.

이 강연은 즉시 생물학 전(全)분야의 과학적 사고를 바꾸어 놓았다.

피르호는 백혈구가 이동하지 않는다는 오류를 범했지만 염증의 과정을 새롭게 조명했다. 또 지방침투와 지방변성을 구별했고 근대적 녹말변성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종양에 관한 병리학에 큰 관심을 표명했지만, 악성종양이 결합조직의 변질형성에서 생긴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악성종양에 관한 논문과 이에 관한 저서 〈악성종양 Die krankhaften Geschwülste〉(3권, 1863~67)의 중요성은 다소 빛을 잃었다.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기생충, 특히 선모충의 역할에 대한 그의 연구는 기본원리가 되었으며, 그 자신에게는 음식물 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1874년 그는 표준화된 기술을 시체해부에 도입했는데 이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시체의 전부분을 상세히 부검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하던 병소(病巢)가 드러나기도 했다.

새로이 등장한 세균학에 대한 피르호의 태도는 복합적이었다.

그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역할에 관해서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어떤 질병 속에서 어떤 유기체를 발견했을 때 그 유기체가 항상 그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독소가 발견되기 훨씬 전에 독소를 만들어내는 세균도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때로 피르호가 다윈이 제시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론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는 처음에 다윈의 이론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였다가 이 이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한 이 이론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뿐이다(진화).

피르호(Rudolf Carl Virchow)
피르호(Rudolf Carl Virchow)

인류학 연구

1865년 피르호는 독일 북부에서 선사시대의 수상가옥을 발견했고, 1870년에는 언덕 위의 성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인류학을 위해 자신이 가진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1869년 그는 '독일 인류학회'를 공동창립했으며, 그해 직접 '베를린 인류학·민족학·선사학회'를 창립해 1869년부터 죽을 때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전반에 걸쳐 그는 학회지 〈민족학 잡지 Zeitschrift für Ethnologie〉를 편집했다. 1874년 피르호는 트로이 유적 발견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을 만나,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1879)와 이집트(1888)를 탐사했다. 슐리만이 자신의 방대한 소장품을 베를린에 기증한 것은 피르호의 힘이 컸다.

1881, 1894년 피르호는 카프카스로 개인 탐사여행을 떠났다. 그는 독일 인류학의 조직자로 꼽힌다. 1873년 피르호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는 '폰 피르호'라는 귀족작위는 정중히 거절했으나, 1894년 추밀고문관직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