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케네

미케네

다른 표기 언어 Mycenae
요약 테이블
위치 그리스 남부 아르골리스 주 북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
대륙 유럽
국가 그리스

요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 그리스 남부 아르골리스 주 북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에 있다. 페르세우스가 창건한 도시로 하기오스엘리아스 산과 자라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가멤논이 살던 도시였으며 고대 그리스의 청동기 시대 후기 문화인 미케네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지금은 거의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미케네(Mycenae)
미케네(Mycenae)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선사시대의 그리스 도시. 일찍이 호메로스에 의해 "길이 넓고", "금빛 찬란한" 도시라고 찬양되었으며 트로이 시를 약탈한 아카이아인(人) 왕 아가멤논이 살던 도시였다. 하기오스엘리아스(아이오스일리아스) 산과 자라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좋은 데다가 미케네를 창건한 전설적인 인물 페르세우스의 이름을 딴 맑은 샘물 페르세이아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등 호메로스의 말대로 '아르고스의 구석에 있는' 도시였다.

그리스 본토에 있는 후기 청동기시대의 주요유적지로 체계적인 발굴작업은 1840년에 시작되었으나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이 가장 유명하다.

'미케네 시대'라는 말은 종종 크레타를 제외한 도서(島嶼) 지방과 그리스 본토의 청동기시대 후기를 뜻한다(미케네 문명). 청동기시대 전기에도 미케네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물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몇을 뺀 대부분은 후기 시대의 건축물에 밀려났다. 남아 있는 궁전은 BC 14세기에(아마도 페르세우스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이 지역 전체 곳곳에 들어선 무덤에서 많은 미술품과 가공품이 나왔다.

미케네 성채의 사자문에서 시작되는 너비 3.6m의 비탈길은 5개의 테라스 벽으로 받쳐진 경사로로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궁전의 남서쪽 입구로 연결되어 있다. 궁전의 남서쪽 입구는 2개의 중심구역으로 통하는데 그 하나는 본래 언덕의 꼭대기에 있었으나 후에 그리스식 신전이 세워지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다른 하나는 서쪽 끝에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남쪽 방향의 낮은 테라스였다. 이 두 구역은 동서로 나란히 뻗은 낭하(廊下) 2개에 의해 분리되어 있으며 이 낭하에는 바깥쪽으로 문이 열리는 저장실이 있다. 색칠한 3각형 제단의 일부와 함께 2개의 여신상 및 어린이 신상(神像) 하나를 비롯한 화려한 상아 제품들, 그밖에 여러 물건이 발견됨에 따라 테라스 위쪽에 왕실 제단이 있었을 확률이 크다.

나중에 건설된 궁전에는 남서쪽 구석에 큰 로비가 서쪽으로 나 있다. 이 로비에는 22단의 대형 계단이 있고 이어 층계참, 17단 또는 18단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계단이 놓여 있다. 이 층계는 소궁전에서 끝나는데 소궁전에는 대궁전의 입구가 있으며 정북쪽에 있는 4각형 방으로 통하는 입구도 있다. 여기에는 석고로 테두리를 두른 장방형의 대(臺)가 다른 곳보다 높은 위치에 놓여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왕의 알현석(謁見席)이라 했으나 다른 학자들은 화로가 놓인 자리나 응접실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왕좌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부분인 메가론(큰 중앙 홀)의 오른쪽에 있었을 것이다. 현관과 메가론의 주요부분에는 모두 치장 벽토를 칠한 바닥을 깔았으며 가장자리에 석고판을 댔다. 벽은 프레스코로 단장했는데 벽에 그려진 것 가운데 하나는 요새화한 성채 앞에서의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메가론 복판에는 나무기둥 4개로 둘러싸인 둥글고 석고로 된 화로자리가 있으며 이는 이 건물 안에 채광창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노상(爐床)에 석고가 10켜로 발라져 있고 바닥에도 4켜가 칠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홀은 상당히 오래 사용되었던 듯하며, 지붕은 평평했던 것 같다. 낭하의 동쪽에는 여러 개의 방이 늘어서 있는데 그중에 장식 때문에 '프레스코 방'으로 알려진 방이 가장 흥미롭다.

이곳에서 더 동쪽으로는 살림방들로 통하는 층계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채 안에는 종자(從者)들이 사는 여러 종류의 집이 있었다. 가장 독특한 것은 3층짜리인 '원주들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묘지의 남쪽에는 '경사진 집', '남쪽 집', '초운타스의 집' 유적이 있다. BC 13세기에 거대한 성벽과 묘지 사이에 건축된 어떤 건물은 BC 1100년경 화재로 도시가 파괴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는데 이곳의 지하실에서 새까맣게 탄 보리·밀·살갈퀴가 나왔기 때문에 이 건물을 '곡식창고'라 부르기도 한다.

미케네 시대 후기(BC 1400~1100)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크게 발전했다. 크레타에 있는 크노소스가 파괴된 후, 미케네는 에게 해 지역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미케네 함대는 에게 해 앞바다를 제패했고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타, 키프로스, 도데카네스 제도,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북부,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집트·시리아·팔레스티나의 시장에는 미노아 상품보다 미케네의 상품들이 더 많았다. 미케네의 약탈자들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해안지대를 습격했다. 아가멤논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대도시 트로이를 약탈한 것은 BC 1180년인 듯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BC 1250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BC 16세기에 한때 미케네 미술은 미노아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미노아 문명). 따라서 크레타 미술가들이 본토로 옮겨갔음이 틀림없다. 모든 미노아 미술의 지역적 다양성들이 미케네 미술에 그대로 나타난다. 미노아 예술의 자연미와 화려한 특성은 그리스의 형식미와 균형감각에 혼합되었다. 이는 이미 헬라도스 문명 중기 시대의 채색도기에 나타나 있고 이후에는 아테네의 디필론 묘지에서 발견된 기하학 양식의 도자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1950년까지 학자들은 꽃병에 그려진 몇 가지 상징만으로 미케네에 문자가 있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1952년 성벽 밖에서 '기름장수의 집'과 '포도주 장수의 집'을 발굴하면서 선형 B문자로 쓰인 문자판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뒤에 이를 해독한 마이클 벤트리스는 이 문자가 그리스어의 초기 형태임을 증명했다.

미케네는 BC 1100년경 침입한 도리스인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곽도시에서 원시 기하학 양식또는 기하학 양식시대의 무덤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계속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미케네가 조그만 도시국가로 존속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성벽 역시 허물어지지 않았다. BC 6세기초에 신전 하나가 세워졌으며 여기서 출토된 훌륭한 부조물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BC 480년에 미케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400명의 남자들을 파견했고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 때도 군대를 보냈다.

미케네의 호전적인 이웃 아르고스족은 페르시아 전쟁 때는 중립을 지켰지만 BC 470년에 태도를 바꾸어 미케네를 포위하고 비열한 복수극을 폈으며 BC 468년 미케네를 파괴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미케네는 부흥했고 새로운 신전이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세워졌다. BC 235년 아르고스의 참주인 아리스티포스가 미케네에서 죽고 성벽이 수리되었다. 스파르타 왕 나비스는 BC 195년경 일부 젊은 남자들을 끌고갔는데 BC 194년에 새겨진 비문에 그들의 억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미케네에서는 로마 시대의 유물도 몇 점 발견되었지만 AD 160년경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가 방문했을 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에게 문명

미케네(Mycenae)
미케네(Mycenae)
지도
미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