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고대사

그리스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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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그리스의 역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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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게 문명
  2. 청동기 시대의 에게문명
    1. 초기 에게 문명
    2. 청동기 말기의 에게 문명
    3.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교
    4.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말
  3. 그리스 고대 암흑시대와 도시국가
    1. 개요
    2. 참주들의 출현
    3. 아테네의 번영
  4. 고전시대 그리스 문명
    1. 개요
    2. 아테네 제국
    3.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4.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5. BC 5세기의 그리스 문명
  5.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시대
    1. 개요
    2. 필리포스2세
    3. 알렉산드로스 대왕
    4. BC 4세기의 그리스 문명
  6.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명

실제 그리스의 역사는 BC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스 본토 사람들은 이 시기에 꽃 핀 에게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시켜 나갔으며, BC 8세기에 들어서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도시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지형적인 이점을 안고 해양 강국이 되었으며 BC 7세기 말에는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이웃나라인 페르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BC 500년경 이오니아 반란으로 인해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힘을 쏟는 사이 스파르타는 그리스 영토의 패권을 장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세력 싸움은 펠로폰네스 전쟁, 코린트 전쟁 등을 벌이며 계속되었다.

BC 359년 이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였다. 특히 알렉산드로스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그리스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사후 고대 그리스 제국은 로마의 이집트 정복으로 종말을 맞았다.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에게 문명

에게 문명이란 에게 해 지역에서 BC 7000~3000년과 BC 3000~1000년에 각각 꽃핀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명을 뜻한다. 에게 문명이 꽃핀 지역은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諸島)를 비롯한 여러 섬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및 테살리아를 포함하는 그리스 본토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 땅에서 처음으로 꽃핀 주요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달했다.

그후 그리스 본토 사람들은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었다. 크레타 문명은 전설적인 왕 미노스의 이름을 따서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발달한 문명은 키클라데스 문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본토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어로 그리스를 일컫는 이름인 헬라스를 따서 헬라도스 문명이라고 한다.

미케네를 비롯한 본토의 여러 곳에 청동기 시대에 쌓은 거대한 성벽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1876년에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미케네에서 왕들의 무덤을 발굴할 때까지 이 시대의 문명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슐리만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참전 그리스 영웅들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그보다 더 옛날(BC 1600~1450경)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슐리만의 발견 결과 그리스 본토에서도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00년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뒤의 아서 경)는 청동기 시대 크레타 섬의 가장 큰 중심지였던 크노소스에서 궁전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발견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점토판은 청동기시대 에게 해 지역에 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뚜렷이 입증하는 최초의 자료였다. 영국 건축가이자 암호 해독자인 마이클 벤트리스는 언어학자인 존 채드윅과 함께 이 점토판에 새겨진 언어를 연구해 이 언어가 아주 오래된 형태의 그리스어라는 것을 1952년에 밝혀냈다. 그리스와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발굴자들은 그뒤 몇 년 동안 크레타 섬과 그리스 본토의 청동기 시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에게문명

초기 에게 문명

초기문화의 흔적으로 그리스 본토에서는 구석기시대 사냥꾼들이 돌을 깨뜨려 만든 연장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크레타를 비롯한 다른 섬에서는 아직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아르고스 만(灣)에 있는 프랑크티 동굴을 발굴한 결과 BC 1만 3000년경부터 이미 크레타 북쪽 멜로스 섬까지 배가 왕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무렵에는 잡종 곡식 재배와 가축 사육, 조직적인 다랑어 잡이도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농경공동체는 BC 7000~6000년에 세워지기 시작해 그리스 전역에 퍼졌다(→ 농업). 당시 사람들은 손으로 도자기를 빚었고 돌을 갈아 모서리를 날카롭게 다듬은 연장을 만들었다. 이들은 밀·보리·귀리·콩 따위를 재배했고 소·양·염소·돼지 등도 길렀다.

에게 해 지역에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BC 3000~2000경) 사이의 이행기에는 뚜렷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금속 세공술을 알고 있는 새로운 민족이 동쪽에서 크레타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로 이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금속세공품). BC 2500년을 전후해 크레타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 및 그리스 본토 남부 지역에서는 이미 금속 문화가 꽃을 피웠다. 초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금속연장으로는 도끼와 단도, 수염을 뽑는 족집게 등이 있었다.

이무렵 에게 해 거의 전역에 여러 개의 방을 가진 집들이 세워졌다.

크레타 섬에는 그 고장 통치자들의 저택으로 확인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유적지에서 점토로 구운 타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타일의 집'이라 부르는 본토의 정착지 레르나에 있던 집은 지붕 덮인 발코니가 딸린 2층집이었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공동 무덤은 씨족이나 친족 묘지로, 여러 세대가 대대로 사용한 것 같다(→ 매장). 일부 무덤에는 수백 명이 묻혔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건물만이 아니라 동굴과 바위틈도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둥근 무덤은 크레타 섬 남부의 메사라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땅 위에 세워진 이 무덤은 주위에 거대한 돌담을 둘렀고 그 위에는 아마 통나무와 짚이나 널빤지를 이었을 것이다.

입구 앞에 의식을 치르는 방이 딸린 부속 건물을 지어놓은 무덤도 있었고 옆에 공물을 바치는 방이 있는 무덤도 있었다. 무덤이 유해로 가득 차면 그 위에 새로운 층을 얹거나 부속 건물의 일부를 매장실로 이용했다. 때로는 오래된 유해를 별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덤 안팎에서 공물을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 꽃병 그림이 암시하듯 이런 매장과 관련된 의식이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무덤에 대개 몇 구의 시체만 묻었다. 이는 그 무덤이 크레타 섬에 있는 무덤처럼 씨족이나 친족의 대규모 묘지가 아니라 가족 묘지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게 해 전역에서 발견된 무덤 근처의 도자기들은 모두 손으로 만든 용기였다(→ 그리스 도기). 독특한 타원형 그릇은 당시 본토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국그릇으로,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하거나 검은 빛을 띠고 있으며 크레타 섬의 도자기는 색깔은 비슷하지만 표면에 얼룩무늬가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금·은으로도 그릇을 만들었고 금제 국그릇과 금·은 장신구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지역에서 만든 점토 항아리와 도장에는 소용돌이 무늬(파도를 나타냄) 사이에 노가 많이 달린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배들은 뱃머리가 높고 그 위에는 대개 물고기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으며 고물은 낮고 용골이 고물너머로 쑥 튀어나와 있다. 이런 종류의 배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도 항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유물에 크레타인의 솜씨와 이 무렵의 풍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말기의 에게 문명

그리스 본토의 초기 청동기시대는 새로운 민족이 키클라데스 제도와 본토 남부 지방으로 이동해 오면서 막을 내렸다.

이 민족 이동은 그 지역의 초기문명이 갖고 있던 통일성을 깨뜨렸다. BC 2000년이 되기 직전경에 본토의 많은 마을이 불타버렸으며 그후에 지어진 집들은 더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집들은 원주민 부락을 불태운 뒤 그 자리에 정착한 외부 침입자들이 지은 것이 분명하다.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북방 민족의 침입은 BC 200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분명 유목민이었고 이들이 그리스에 말[馬]을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학자들은 이 민족 이동을 '그리스인의 도래'로 보고 있다.

아티카의 엘레우시스와 양쪽 해안에서는 이제 매장 방식이 종래의 단독 매장 방식에서 좀더 큰 가족묘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슐리만이 미케네에서 발견한 수혈식(竪穴式) 분묘는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금제 장신구와 무기를 부장품으로 택했다는 점에서 거의 유목민적이다.

이 수혈식 분묘에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시체가 매장되었다. 분묘 유적은 그 당시 장례 의식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몇몇 무덤들을 덮고 있는 커다란 돌판에는 죽은 사람이 전차를 타고 전쟁터로 나가거나 사냥하러 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 본토에서 전차가 쓰였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다.

크레타 섬은 키클라데스 제도나 본토에서 일어난 민족 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크레타 섬
크레타 섬

그러나 이곳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크레타 섬의 중심지인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및 말리아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궁전들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건축된 것 같다.

당시에 쓰인 문자 중 처음 발견된 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 크레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자는 동물이나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림문자 또는 상형문자라고 부른다. 이 문자의 체계는 크레타에서 만들어진 것 같지만 아마 이집트나 시리아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크레타에서는 상형문자와 더불어 이것을 좀더 단순하게 도안한 선문자(線文字)도 사용되고 있었다.

후기(BC 1700~1450경)에는 좀더 발달한 선문자가 크레타 섬의 여러 지역에서 쓰였다. 이것은 BC 15세기말부터 크레타 섬과 본토에서 널리 쓰인 변형 선문자(선문자 B)와 구별하기 위해 선문자 A라고 부른다(→ 선형 A문자, 선형 B문자). 청동기시대 에게 해 지역에서 쓰인 글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것처럼 대부분 점토판에 새겨져 있다.

크노소스 점토판에는 인사(人事) 문제와 동물, 직물, 무기, 저장된 보물, 종교적 제물 등에 관한 처리 내용이 써 있다.

BC 18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갈 무렵 크레타 섬에는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났다. 크노소스와 말리아의 궁전이 손상되었고 다른 중심지들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그 원인은 자연 재해나 내란, 또는 본토에 사는 그리스인의 침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재난이 일어난 뒤에도 200~300년 동안 에게 해 지역의 청동기문명은 가장 발전했고, 이 시기에 크레타 문명도 절정에 이르렀다.

궁전들은 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복구되었으며 긴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수많은 방들이 세워졌다. 그 궁전들은 대부분 2층이나 3층이었고 크노소스에는 자그마치 5층짜리 궁전도 있었던 것 같다.

파이스토스에 있는 아름다운 제례용 계단은 궁전 구내에 제례의식을 위한 구역이 따로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식을 위한 방의 회반죽을 칠한 벽은 화려한 색깔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그림에는 대부분 정교한 옷차림을 한 여신이 그려져 있고 여신 배경에는 신성한 춤이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의식 장면이 나타나 있다.

황소 뛰어넘기는 종교나 마술에 근거한 행위였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의 크기는 실물 크기에서부터 세로 길이 5cm밖에 안되는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벽화는 크레타 예술가들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예술 분야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단편(斷片)밖에 남아 있지 않다. 꽃병·도장·장신구 따위를 만드는 소규모 예술의 수준은 고고학적 유물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BC 1600년부터 BC 15세기말까지 절정에 이르렀던 크레타 문명은 또 한차례의 잇따른 재난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BC 1500년경 테라 섬의 화산이 폭발해 주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다. 크노소스는 이 화산 분화에 앞서서, 또는 분화와 함께 잇따라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크레타 섬 북부 해안의 마을들은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덮친 것 같다. 후세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데우칼리온의 대홍수이야기는 이 무렵 역시 본토 해안을 덮친 해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한 뒤에도 크레타 섬은 BC 15세기 중엽까지 비교적 번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15세기 중엽 크레타 섬의 중부와 남부에 있는 많은 주요 도시들이 화재로 불타버렸고 그후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폐허에 집을 다시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존재했던 사회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을 의미한다. 폐허가 된 궁터에서 금붙이나 은붙이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사실로 보아 크레타 섬의 많은 궁전과 집들은 화재로 파괴되기 전에 이미 약탈당한 듯하다.

이 섬을 약탈한 사람들은 아마 본토에서 건너온 정복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정복자들은 애초에 크레타 섬에서 배웠던 관료제도를 크레타 섬에 다시 강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BC 14세기와 13세기의 국가는 왕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1명의 군사지도자와 전차장교들이 이끄는 군대를 두었다. 도시는 지방관리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계급사회였다. 개인주택의 유적이 궁전이 있는 중심지와 궁전이 없는 시골에서 모두 발견되었고, 미케네의 집들을 비롯한 일부 개인주택은 선문자 B로 쓴 주택 등기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중심지와 중심지를 잇는 도로망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갖추어져 있었다.

BC 15세기부터 본토의 그리스인들이 동쪽을 탐험하기 시작해 동부의 많은 전초기지에 살던 크레타 이주민들을 대신했다. 히타이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작전과 침입을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스인들을 아히와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아카이오스(아카이아)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청동기시대 전체에 걸친 일련의 관계와 갈등이 집약된 것인지도 모른다.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교

청동기시대에 에게 해 지역에서 숭배한 으뜸 신은 분명 여신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에 '말'이나 '곡식'을 뜻하는 형용사를 수반한 여신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본토의 궁전에는 여신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이 대부분 그려져 있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점토여신상은 보통 BC 15~12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을 보면 제우스와 포세이돈·아테나·아르테미스·아레스·헤르메스 및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그리스 후기의 많은 신들이 이 무렵에 이미 자리를 잡았고, 단순히 우상 그 자체보다는 훨씬 면밀하게 공들여 만든 구체적인 신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가 언어 자체뿐 아니라 종교와 제식에서도 뒤이은 그리스 시대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시대에는 죽음의 세계에 관해 2가지 생각이 존재했다. 하나는 바다 저편에 엘리시온이라는 낙원이 있으며 죽은 사람은 그곳에서 육체적으로 편안한 새 삶을 얻는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의 생각은 서사시의 전통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더 널리 퍼졌던 생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사는 저승(하데스)이 지하에 있다는 것이다.

각각 크레타와 미케네의 전통을 대표하는 이 2가지 생각은 끝내 융합하지 않았으며 별개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 따로따로 살아남았다.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말

BC 13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본토의 궁전들은 잇따라 불탔지만 미케네에는 계속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은 BC 12세기에 도자기 생산과 무역으로 대단히 풍족하고 활기찬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필로스는 폐허가 되었고 아테네에는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부유하지는 못했다. 피난민들이 이주해 만들었거나 독자적으로 세워진 새로운 중심지들이 칼키스 남쪽에 있는 에우보이아 안쪽 해안의 레프칸디처럼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BC 1000년경에는 새로운 민족이 그리스와 크레타 및 여러 섬들과 키프로스에 들어와 정착했다.

도리스 부족민을 비롯한 여러 민족 집단인 이들은 허약해진 나라에 들어와 원주민을 내쫓거나 외딴 지역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그리스 고대 암흑시대와 도시국가

개요

고전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실제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암흑기). BC 5세기의 위대한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트로이 전쟁부터 그 자신의 시대까지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썼지만, 이 극적인 공백기에는 어떤 빛도 비추어 주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미케네 시대 이후 몇 차례의 이주로 그리스가 다시 세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를 알려준다. 그 이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도리스족의 침입'인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전설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자손들의 귀환'과 결부시켰다.

도리스족이오니아족들은 암흑시대부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오니아족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는 아테네였다.

그리스 역사에서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정확성을 인정받는 최초의 연대는 제1회 올림픽 제전이 열린 BC 776년이다(→ 올림픽 대회). 기록을 남기고, 올림피아 같은 성역을 중심으로 하나 이상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활동은 BC 8세기초로 올라간다.

1981년에 고고학자들은 암흑시대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대를 되짚어 원시 기하학 시대(BC 1075경~900)까지 추정하게 되었다.

원시 기하학 시대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기하학적 무늬에서 나온 것이다. 매우 화려한 고분 하나가 1981년 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레프칸디에서 발견되었는데, 연대를 확인한 결과 BC 1000년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BC 1000년경의 그리스는 가난하고 고립된 지역이었지만, 이 고분의 발견을 통해 적어도 그리스에 있는 한 섬의 한 모퉁이는 그 무렵 가난하지도 않았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레프칸디에 있던 커다란 여러 신전은 폴리스(복수형은 폴레이스)라고 부르던 도시국가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시대의 것이다.

'폴리스 형성'이라는 명사를 가리켜 그리스인들은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라 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데 모으기'라는 뜻이며 투키디데스는 시노이키스모스를 2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한 도시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물리적인 인구 집중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종전처럼 흩어져서 살게 두되 정치적으로만 통합을 이룩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가 예로 든 아티케는 초기에는 정치적 통합만 이루었을 뿐, 페리클레스가 많은 시골 주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데려온 BC 431년 전까지는 물리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도시국가의 기원은 사모스 섬의 거대한 헤라 신전 건립처럼 기념비적 건물이 최초로 세워진 때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런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강한 집단 의식을 가진 도시국가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또다른 이론에 따르면 공동체가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하는 지역의 가장자리에 성역을 만든 것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한다. 세번째 이론은 도시국가의 기원을 좀더 격식을 갖춘 매장 관습과 결부시킨다. 이런 매장 의식은 BC 8세기에 더욱 보편적이 되었는데 이러한 매장의 '민주화'는 사회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새로워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또다른 이론은 그리스의 지형이 대개 산맥으로 둘러싸여 방어하기 쉬운 비좁은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형 자체가 끊임없이 경계선을 넘어 전쟁을 벌이려는 작고 매서운 도시국가의 탄생을 어느 정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페니키아의 식민지 개척자들 역시 많은 인구가 모이는 중심지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페니키아 해안에 그리스의 초기 도시국가와 많은 점에서 비슷한 공동체가 세워짐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이들과 자주 상거래를 했음이 분명하다.

암흑시대에 형성된 수많은 대(大) 집단은 집단 구성원들이 배타적인 지역적 동질성을 갖게 될 만큼 오랫동안 존재했다. 이오니아족과 아나톨리아의 도리스계(系) 그리스인, 심지어는 카리아족(그리스인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그리스화한 민족)까지도 각각 인보(隣保) 동맹(암픽티오니아)이라는 연합체들을 이루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 지속된 인보동맹은 그리스 중부에 있는 델포이 신전을 관리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그리스 신탁소가 있었는데, 이런 신탁소들은 특정한 질문에 대해 신의 계시를 받은 신탁으로 답하는 기능을 했다.

도시국가들은 소수의 배타적인 일족이 시민권과 정치 권력을 독점했다는 의미에서 귀족주의적이었다.

BC 7세기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시에는 일반적으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복수형은 바실레이스)의 억압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귀족주의의 가치관은 가정 안에서 입에서 입으로 대를 이어 수직적 방식으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심포시온(symposion)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제도를 통해 수평적으로도 전해졌다. 먹고 마시는 행사였던 심포시온은 의식적(儀式的)인 요소가 강했다.

호메로스 시대의 시(詩)에 개최자의 지위를 과시하는 화려한 축제와 격식을 갖춘 연회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귀족주의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강렬한 동성애(同性愛)도 귀족주의 가치관의 일부였다. 이런 관계는 김나시온(gymnasion)이라고 부르는 신체 단련장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김나지움).

심포시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행위는 대부분 의식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올림픽 제전이 도시국가 사이의 운동시합이듯이 심포시온과 김나시온은 도시국가 사이의 경쟁이나 전쟁에 대한 채비를 반영한 것이다.

대규모 운동경기 제전은 그리스 개별 사회의 내부 조직보다는 도시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더 큰 관련이 있다. 도시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이른바 크세니아(xenia:손님에 대한 우정)였으며 이 관계 자체에 의식적 요소가 더욱 강했던 지역에서는 이런 제도 전체를 '의례화(儀禮化)한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도시 국가들 사이에 주로 이루어진 상호 작용은 우정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신화적인 '트로이 전쟁' 이후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그리스 전쟁은 렐란티네 전쟁이다(→ 렐란티네 전쟁). 이 전쟁은 BC 8세기말경 에우보이아의 주요도시였던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사이에 벌어졌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증언하고 있듯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도 어느 정도는 이 전쟁에 개입했다. 최근의 학문적 연구에도 델포이의 신탁이 이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었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델포이는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신탁을 내려, 개척할 수 있는 식민지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정 지역의 식민지 건설을 맨처음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참주들의 출현

종래의 귀족주의적 질서가 처음 무너지기 시작한 도시국가는 코린트였다.

코린트의 주요 가문인 바키아드 일족은 그리스의 남북 통로와 동서 통로를 둘 다 통제할 수 있는 코린트의 지리적 위치를 충분히 이용했고 동서 항로의 입항세(入港稅)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리스 세계가 팽창함에 따라 코린트의 다른 가문들은 바키아드 일족을 시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최초의 그리스 참주정치가 등장했다. 최초의 참주 킵셀로스는 바키아드 가문의 피를 일부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코린트 헬멧
코린트 헬멧

킵셀로스의 성공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온 일부 학자들은 BC 7세기에 일어난 전투 방법의 변화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이전에는 전쟁에서 개개인의 용맹성이 강조되었으며, 위대한 전사들은 전차를 택시처럼 이용해 이곳저곳 전쟁터를 돌아다녔고, 전쟁터에 도착하면 전차에서 내려 동료 귀족 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승자는 패자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얻었으며 시체를 절단하는 의식 행위도 승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BC 7세기에 이르러 중장(重裝) 보병(호플리테스)이라는 새로운 전투 대형이 등장했는데, 여러 사람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싸우는 이 대형은 서민 계급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호플리테스). 보병들은 호플론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밀집 대형을 이루어 싸웠으며, 개개인의 칼을 든 손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방패가 보호해주었다.

중장 보병의 무기와 전술, 집단 정신 강조가 참주정치 등장의 배경이라는 이 중장보병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이는 귀족 정치에 대한 반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BC 7세기에는 코린트와 맞닿은 도시국가에서도 참주가 2명 등장했다. 메가라의 테아게네스는 부자들을 학살했으며 BC 630년경 사위 킬론이 아테네에서 권력을 잡도록 도왔다. 시키온에 등장한 오르타고라스 가문의 참주정(僭主政)은 일부 그리스인의 마음에 맺혀 있던 도리스족에 대한 적대감을 교묘히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참주는 BC 6세기초의 클레이스테네스로 그는 도리스족만이 아니라 아르고스 사람도 싫어했다.

참주정치를 면한 지역들을 검토해 보면 참주정치가 시행된 지역은 생각보다 훨씬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에는 도시국가가 수백 개 있었지만 그 대다수는 아주 작아서 한 번도 참주정치를 경험하지 않았다. 인구가 적은 곳에서는 정치적 야심가들이 대부분 공직에 앉을 기회가 충분했기 때문에 참주정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

참주정치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견해는 잘못된 생각이지만 이는 예로부터 뿌리박힌 오해로,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도 참주정치가 수많은 곳에 확립되었다고 말했다.

참주정치를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식민지를 거의 건설하지 않았고, 도시를 요새화하지도 않았으며, 물리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룬 적도 없었다. 훨씬 큰 이웃 도시 메세니아를 정복해 수백 년 동안이나 복속시켰다는 점에서도 예외적인 도시였다.

스파르타의 귀족 전사들은 메세니아를 정복한 뒤, 메세니아인(人) 헬로트를 비롯한 국가소유의 노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노예들의 노동력 덕분에 스파르타인은 군사훈련을 기본으로 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노예들은 스파르타가 외교 정책을 수정하는 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파르타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군사 활동을 감행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원정을 떠나려면 불만을 품고 있는 수많은 노예들(스파르타인보다 7배가 많았음)을 남겨놓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메세니아 반란(BC 600경)을 진압한 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BC 6세기에 스파르타는 그 세력을 더욱 넓혔지만 아직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이웃 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스파르타의 도리스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웃 도시국가들의 신화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원래 아트레우스나 아가멤논 및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 같은 아카이아오스족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행위는 오레스테스 왕의 뼈를 스파르타로 가져간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이것을 아트레우스 왕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구실로 삼았고 그 결과, 오늘날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 불리는 군사 연맹이 이루어졌다. 이 동맹 규약에 따라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은 스파르타가 공격을 받으면 방어해 주어야 할 의무를 졌고, 스파르타도 그 대가로 동맹국들에게 비슷한 보장을 약속했다.

한편 BC 6세기에 스파르타는 코린트의 킵셀로스를 비롯한 그리스 참주들을 권좌에서 몰아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더욱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BC 431년에는 그리스를 신(新) 참주정치, 즉 아테네 제국(帝國)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자칭 해방자로서 대규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는 참주정치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순수한 이념적 동기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아테네의 번영
아테네
아테네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코린트나 메가라보다 훨씬 큰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요새(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네 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런 요인들 덕분에 아테네는 해양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인구가 크게 늘어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BC 7세기말에 아테네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BC 8세기에 참주정치를 낳았던 그런 정치적 긴장이 이 무렵 아테네에도 퍼져 있었다. BC 630년대의 올림픽 제전 우승자인 킬론이 참주가 되려고 했지만 아테네는 이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킬론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아테네의 입법자(立法者)인 드라콘이 아테네 최초로 포괄적인 법전을 만들었다(BC 621경). 이 법전이 지나치게 잔인했기 때문에 드라콘이라는 이름은 야만적인 법률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드라콘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법 내용이 파피루스에 씌어 1890년 발견된 〈아테네 헌법〉에 살아남아 있는데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으로 보인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치세(治世)는 지대한 군사적·외교적 성공을 거둔 시대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긴장은 결국 고전시대 그리스 역사의 대부분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두 도시국가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시대에 나타났다.

BC 7세기말 아티카의 경제와 사회가 불안했다는 증거는 솔론의 시(詩)에 나타난다.

솔론은 인간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 최초의 유럽 정치가로, 그가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회였지만 좀더 공정한 사회였다. 솔론은 BC 594년에 아테네의 모든 빚을 말소하고 채무자를 노예로 삼는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장로들의 협의회인 아레오파고스와 더불어 새로운 400인회(불레)를 구성했는데, 이는 BC 6세기말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500인회로 바뀌었다.

하층 계급도 민회(에클레시아)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솔론의 개혁이 추구한 전반적인 목표는 도시 국가의 활동 범위를 규정하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솔론은 빚을 탕감하고 땅을 재분배했지만 그때까지 헥테모로이(hektemoroi:'제6의 분할자들'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이들의 땅은 '호로이'라는 경계선으로 표시되어 있었음)가 경작했던 땅은 부자들이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은 솔론 이후에도 후원자가 계속 필요했기 때문에 솔론 이후에는 진짜 참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의지했다.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 스파르타의 적인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었고 게다가 BC 519년에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플라타이아이와도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는 또한 조직적인 해군력을 가진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문헌에서는 3단 노(櫓)를 갖춘 갤리가 아테네에 처음 등장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데, 고대 코린트 말기의 발명품인 이 배는 170명이 노를 저어 움직이고 30명의 전투 병력을 실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1987년 그리스에서 노가 3단으로 되어 있는 갤리를 복원해 물에 띄웠는데, 이 배의 크기와 정교함 및 시각적 효과를 보면 고대 아테네인들이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바다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BC 510년 스파르타에 의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BC 508년에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를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헤로도토스가 "부족과 민주주의를 도입한 사람"이라고 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 전체를 10개의 부족으로 개편하는 것을 개혁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부족은 아티카 전역에서 선발한 사람들을 포함하며,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거주 지역만을 근거로 하여 만든 최초의 조직이었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정치기구이자 행정기구인 500인회를 낳았으며 이 기구의 기능은 민회에서 결정할 사항들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500인회에는 아테네 역사상 처음으로 아티카 전역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참여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단위인 데모스(마을)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사회를 개혁한 혁신자였다(→ 데모스). 데모스는 사회단위이자 농업·사법 단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BC 510~450년대에는 데모스에 재판관을 두는 조치가 유보되었다. 외딴 데모스인 람노스에서 BC 5세기에 작성된 신전의 재정 계산서에 나타나듯 데모스는 경제 단위이기도 했고, 500인회에 대표를 파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정치단위이기도 했다.

부족은 하나의 군사단위로서 같이 훈련을 받았고 BC 500년경 렘노스를 정복할 때도 하나의 집단으로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데모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도 종교 단위였다. 데모스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데모스의 종교력(宗敎曆)을 보면 이 축제들은 아르테미스 숭배를 비롯해 도시국가의 종교적 축제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문화 단위의 역할도 해 데모스가 주최하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는 데모스의 부자들이 후원하는 연극제가 벌어졌다.

이 시대는 또한 후원의 시대였고 중요한 집안끼리 혼인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혼인 풍습과 관련된 고대의 전형적인 행사는 BC 6세기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딸 아가리스테의 구혼자들을 위해 베푼 연회로, 이는 몇 가지 점에서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묘사한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연상시킨다.

시인과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도 그리스 세계를 한 문화권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후원자를 찾아 옮겨 다니던 예술가들로 인해 각 참주들의 궁정 사이에 사람과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시인들인 테오스의 아나크레온과 케오스의 시모니데스는 여러 참주의 궁정을 순회하던 당시 위대한 문화인의 생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둘은 참주들과 함께 살았고 그 참주들이 쫓겨나자 둘 다 다른 참주의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고대의 모든 시인들이 참주들의 후원에 의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출신인 알카이오스가 쓴(BC 600경) 시의 단편에는 그 고장의 참주를 비난하는 구절이 들어 있으며, 같은 시대에 같은 섬에서 살았던 여류 시인 사포의 시는 정치적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고 사랑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노래하는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방의 그리스 식민지가 본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 이오니아의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본토보다 우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오니아는 특히 사변(思辨) 분야에서 탁월했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밀레토스는 만만찮은 사상가들을 낳았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및 아낙시메네스의 우주론은 그들이 도달한 결론보다는 오히려 방법론(추상 관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등) 때문에 더 주목할 만하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크세노파네스는 자신의 시(詩)에서 종교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신들이 피부가 검고 트라키아의 신들이 파란 눈을 갖고 있듯이 말[馬]들도 신을 갖고 있다면 그 신은 말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화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 크세노파네스는 주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같은 이웃 나라의 문화는 특히 역사 분야에서 그리스에 가장 큰 문학적 자극을 주었다.

헤로도토스는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의 저서(BC 500경)가 없었다면 역사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학과 신화를 함께 다룬 그의 저서는 오늘날 단편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의 연구는 당시 어느 정도의 실용성을 갖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식민지를 오가며 장거리 무역을 하던 밀레토스 같은 도시에서는 분명히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BC 500년 이후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와 정치적으로 대결하게 되자 헤카타이오스는 이오니아 지방 도시들에게 공동방어로 대결에서 주도권을 잡으라고 제안했다. 크고 위협적이며 성격이 다른 문화가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국 고대 그리스가 나중에 공통된 문화를 형성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고전시대 그리스 문명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개요

BC 500~386년에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최대 관심사였으며 예술과 웅변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주제였다.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경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금방 진압되었기 때문에 그 원인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반란이 끝난 뒤 양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 반란의 장기적 결과로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옆에 있는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립하게끔 만들었다.

반란 이후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적대했고 페르시아 통치자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대해 보복을 결심했다.

그 결과가 유명한 마라톤 전투(BC 490)이다(→ 마라톤 전투). 헤로도토스의 설명에 따르면 페르시아가 마라톤을 전쟁터로 택한 이유는 마라톤이 에레트리아와 가깝고(페르시아는 병참 기지와 전쟁터를 잇는 보급선이 짧은 쪽을 원했음), 그곳의 지형이 기병대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지휘를 받는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적군을 단숨에 공격해 압승을 거두었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다.

이것은 그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아테네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의 아테네는 군사 및 문화적 업적을 근거로 삼아 자신들은 어느 도시도 따라갈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마땅히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리우스가 BC 486년에 죽자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이어 페르시아 왕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도 아테네에 대한 보복을 결심했는데 헤로도토스가 말했듯이 이번에는 그리스 전체를 점령해 페르시아에 편입시키거나 사트라프령(領)으로 만들려 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이러한 야욕은 그리스 세계의 공동 방어 계획을 유발했고, 페르시아에 맞서 결성된 그리스 동맹은 BC 481년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테살리아에 방어선을 치려던 최초의 계획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곧 폐기되었지만 그대신 그리스인들은 에우보이아의 북동쪽 끝으로 후퇴해 육지에서는 테르모필레에, 바다에는 아르테미시움에 방어선을 쳤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시민이 300명이나 속해 있는 부대를 몸소 지휘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인 반역자가 가르쳐 준 우회로를 통해 배후에서 공격했다.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전멸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입은 손실도 막대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벌어진 해상 작전은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함은 에우보이아 섬을 돌 때 폭풍우를 만나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 직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군에게 약탈당했다.

그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을 파괴했으며, 옛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인 히파르코스를 BC 514년에 암살했던 두 사람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기톤의 동상을 가져갔다(이 동상들은 150년 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아테네로 되돌아왔음).

승리를 눈앞에 둔 페르시아군이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갔을 때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스 함대에게 기습을 받은 페르시아 함대는 크세르크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지없이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영토의 크기나 자원에서 볼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보다 훨씬 더 크고 또한 페르시아의 전함이 훨씬 더 빨랐다는 점에서 이 살라미스 해전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배에 올라타 육박전을 벌일 수 있었고 그리스의 배는 가벼운 만큼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페르시아가 참패한 뒤 그리스 전역에서는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하는 페르시아의 야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 제국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영토 내의 패권은 스파르타로 넘어가 있었으며, 아직도 페르시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리스 동쪽 지역의 국가들은 스파르타에 의존했다.

스파르타가 제안한 해결책은 이오니아 주민을 다른 곳에 정착시키고 이오니아를 비워 두라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세스토스를 BC 478년에 점령하고 BC 476년 아테네 주위에 성벽을 쌓은 것은, BC 480~479년에 아테네가 순순히 받아들였던 스파르타의 지도적 지위를 거부하고 독립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스파르타는 고립주의와 제국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했지만 어쨌든 아테네가 그리스 영토 내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투키디데스의 책에는 이제 동족이라는 이유로 아테네에 접근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오니아인과 새로 해방된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테네에 대한 이 호소는 결국 그뒤 아테네 역사의 성격을 결정하게 된 아테네 제국 즉, 델로스 동맹을 낳았다(→ 델로스 동맹). 이 이름은 이른바 시노드(synod)라는 동맹 회의가 열렸던 델로스에서 유래했다.

이 회의에서 아테네는 표결권을 하나만 갖고 있었지만 그 한 표의 비중은 컸다.

로도스를 비롯한 도리스계(系) 도시, 레스보스 같은 아이올리아계(系) 도시, 심지어는 그리스계가 아닌 키프로스의 도시들도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그리스 세계의 새로운 통일은 BC 476년에 열린 올림픽 제전으로 상징되었다. 이 제전에서는 스파르타·아르고스·아이기나·시칠리아 등에서 온 선수들이 우승을 다투었다.

또한 아테네는 BC 476년 스트리몬 강변의 에이온을 점령해 델로스 동맹이 겉으로 내세운 범(汎)그리스 운동, 또는 반(反)페르시아 계획과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었다.

아테네는 BC 462년에 이른바 에피알테스 개혁을 치렀다. 정치가 에피알테스는 젊은 페리클레스와 함께 아레오파고스의 권력을 박탈해 500인회와 시민 법정에 재분배했다. 또 그보다 더 급진적인 것으로 아르콘(집정관)의 사법권을 크게 축소하는 조치도 취했다.

아르콘은 이제 예비 심리만 담당했고 정식 재판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시민 배심원단이 맡았다. 에피알테스 개혁과 그에 뒤이은 개혁은 뚜렷한 민주주의 철학을 가진 특정 개인들이 신중하게 궁리한 결과로 보인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가 아르고스 및 테살리아와 새로 동맹을 맺은 것은 도발적 행위이기는 했지만 곧바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르고스가 전에 코린트와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동맹은 코린트와 아테네의 우호관계를 간접적으로 해쳤다. 이것이 코린트와 아테네가 서로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품게 된 최초의 원인이었다. 이로 인해 근대 학자들이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60~446)이라고 부르는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본래 아테네와 코린트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아테네가 어디에 야심을 두고 있었는지는 그 무렵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대규모 이집트 원정(BC 460~454)에서 참패했는데 이 원정은 분명 페르시아에 대한 싸움의 연장이었다. 둘째, 아테네는 피레에프스뿐 아니라 해안까지 이어진 '장성'(長城)을 쌓아서 장차 필요하다면 제국을 건설할 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아테네는 BC 5세기 중엽에 델포이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무렵 대체로 스파르타에 호의적이었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제 아테네야말로 '항상 하늘 높이 떠 있는 독수리'라고 선언을 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BC 459년 아테네가 아이기나를 점령했을 때부터 전쟁의 판도는 바뀌었다. 핀다로스는 〈네메아 송가(頌歌)〉에서 항해가 생업(生業)이고 인정이 많은 아이기나의 전통과 고대의 대도시였던 아이기나의 당당한 도리스 주의를 강조했다.

아테네가 이런 아이기나를 정복한 것은 중대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아테네는 자기 방어를 위해 기꺼이 참여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연합체를 이끌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핑계는 아이기나의 정복으로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BC 458년 스파르타는 모시(母市)인 도리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전쟁에 개입했다. 도리스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도리스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기고 이 도시를 자신들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스파르타군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아테네군과 맞붙게 되었는데(BC 458), 이 전투는 대규모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군은 그후 오이노피타에서 승리해 10년 동안 보이오티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의 참패로 아테네는 BC 451년 스파르타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휴전협정 뒤에도 스파르타는 자신의 영토인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반란을 진압하러 보이오티아로 들어가자 스파르타는 아티카를 공격하려고 했다.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엘레우시스와 트리아시아 평야까지 진격했지만 아티카 침략은 실현되지 않았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티카를 침략하는 대신 페리클레스와 흥정을 한 것 같다. 아테네가 최근에 잃어버린 보이오티아와 메가리스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지역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파르타도 에우보이아에 개입하거나 아티카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타협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또는 펠로폰네소스 대전)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적어도 BC 430년대초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 전쟁이 아테네의 팽창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났다는 투키디데스의 설명이 옳다면 BC 6세기말부터 BC 5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사건도 이 전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BC 430년대초 페리클레스는 흑해로 원정을 가서 예로부터 코린트의 세력권이었던 지역 근처의 아카르나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칼키디키 반도 포티다이아에 있는 코린트 세력권 전초 기지와 바싹 붙은 암피폴리스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로 인해 코린트의 서쪽과 북동쪽은 간접적으로 아테네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코르키라의 식민지를 둘러싸고 코르키라와 코린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아테네는 코르키라를 지원하는 소규모 함대를 보냈다. 코린트 함대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네 전함과 격돌하게 되었다. 그후 아테네군은 포티다이아에 있는 코린트 행정관들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라고 요구했다.

포티다이아는 반란을 일으켰고 코린트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아테네군의 포위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전략과 초기의 전술 방식을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는 당대의 거물이었던 페리클레스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원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주로 상대편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를 참주 정치에서 해방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테네 제국을 해체시켜야만 했으나 아테네는 그런 해체를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스파르타의 아티카 침공은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31~421) 전반기의 성격을 결정했다.

이 전쟁의 명칭은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BC 431년말 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장례식 연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명한 연설은 대부분 투키디데스가 쓴 것으로 아테네의 힘과 제도의 강성함에 바치는 영원한 찬사였다.

전쟁 2년째인 BC 430년도 아티카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에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해 1만 4,000명의 중장 보병과 기병 가운데 1/3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페리클레스도 이 병으로 쓰러져 BC 42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죽기 전에 원정대를 이끌고 에피다우로스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BC 428년 아테네 제국에 속해 있던 레스보스 섬의 미틸리니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파르타는 전쟁의 기본 목표인 그리스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테네는 즉각적인 봉쇄작전으로 반란에 대응했다. 스파르타는 미틸리니에 원조 물자를 보냈지만 섬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미틸리니 주민들은 대량으로 처형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BC 427년에 투항했다.

이 무렵 아테네는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모험을 감행했다. BC 427년경 우선 20척의 원정대를 서쪽으로 보냈고, 그후 2년 동안 60척을 더 파견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총 80척의 전함은 큰 병력이었지만 그 목표가 과연 그만한 가치를 갖고 있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아테네가 이런 원정을 일으킨 동기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아마 해군을 훈련시키고 코린트로 곡식을 싣고 가는 배를 차단하며,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델로스 동맹이 창설되었던(BC 478)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가 BC 426년에 이오니아풍(風)의 아폴론 축제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은 분명 도리스계(系) 식민 도시 헤라클레아에 대한 하나의 응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이 식민 도시 건설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BC 4세기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와는 아무 관계도 없음)가 BC 426년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헤르마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헤르마

이듬해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25)에서 데모스테네스는 멀리 떨어진 필로스의 메세니아 곶, 즉 나바리노 만(灣) 북쪽 끝에 불쑥 튀어나온 땅을 점령했으며 그곳에 요새를 쌓았다. 420명 중 절반이 시민이었던 스파르타군은 어리석게도 필로스 남쪽에 있는 스팍테리아 섬에 상륙했다.

아테네군은 이 부대의 퇴로를 차단해 앞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귀중한 수단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자신의 동맹국들과 관계없이 평화 조약을 맺자고 요구하자, 아테네의 클레온은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을 내세우면서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스파르타의 제의를 거절하게 했다.

외교적 해결을 거부한 뒤 클레온은 무력 해결에 전념했다.

그는 스파르타의 시민을 120명이나 사로잡아 아테네로 압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 극적인 승리 덕분에 BC 424년 스파르타는 절대로 아티카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얼마 뒤 전세는 다시 스파르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도착한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아테네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던 메가라를 구원했다. 그는 또한 아이안토스와 싸워 이겼으며 암피폴리스와 티로네를 점령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BC 423년 휴전을 했지만 브라시다스는 그뒤에도 다른 몇몇의 지역을 함락했다.

암피폴리스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둘 다 전사하자 스파르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던 평화 협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 한꺼번에 제거되었다. 니키아스 평화조약(BC 421)에 따라 양쪽이 그 동안 얻은 전리품들은 대부분 원상태로 되돌려졌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제국을 해체하는 데 분명히 실패한 것이므로 이런 뜻에서 보면 아테네가 전쟁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이 평화조약을 한 전쟁의 2단계 사이에 잠깐 생겨난 막간으로 보았다. 코린트와 보이오티아는 처음부터 평화조약을 거부했고, 아테네의 혈기 왕성한 젊은 정치가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스파르타를 괴롭혔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책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썼다.

아테네와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는 동맹을 맺고 BC 418년 만티네이아 영토에서 스파르타와 싸웠지만 참패를 당했다.

아테네는 다른 곳을 공격할 수밖에 없어 BC 415년 시칠리아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시칠리아 원정). 오늘날 알려져 있듯이 시칠리아의 재난은 시라쿠사 항구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해전은 아테네 함대가 마음대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져 아테네 함대는 주요지휘관들과 함께 사실상 전멸했다.

아테네는 긴급 건조(建造) 계획으로 간신히 펠로폰네소스 함대와 동등한 해군력을 갖출 수 있었다.

아테네의 군사력 복구는 주목할 만했지만 급진적 민주주의가 받고 있던 정치적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부자는 돈을, 하층계급은 목숨을, 모든 계층은 환상을 잃었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지성적 행동주의자인 소피스트들은 이 상황을 충분히 이용했다. 소피스트 시대의 산물(産物)인 알키비아데스는 BC 411년에 일어난 과두정(400명의 과두정치 지배자 정권) 혁명의 주요배후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이기적이었고 근시안적이었으며(그의 목표는 자신에 대한 추방령을 철회시키는 것이었음)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자 그는 과두정의 지배자들을 저버렸다. 결국 BC 410년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되었고 법률을 집대성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테네는 헬레스폰토스 반도 지역과 아르기누사이에서 스파르타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테네 지휘관들은 생존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대중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었고 전투가 끝난 뒤 스파르타가 평화조약을 거듭 제의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짓을 다시 저질렀다. 스파르타에는 리산드로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고 페르시아에서는 왕의 아들인 젊은 키루스가 새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지도자들이 이끄는 두 나라는 노티움 전투에서 아테네를 무찔렀지만 아테네는 계속 평화조약을 거부하다가 아이고스포타미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BC 405). 아테네군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항복했고 장성은 허물어졌으며 함대는 12척으로 줄어들었다.

아테네 제국은 마침내 지상에서 사라졌으며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과두 정치를 강요함에 따라 '30인(人) 참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5세기의 그리스 문명

페르시아 전쟁이 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은 즉각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쟁은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 같은 시문학을 배출했고, 자유에 대한 빛나는 토대를 놓은 아테네인을 찬양하는 핀다로스의 찬가(讚歌)를 낳았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전쟁이 철학에 미친 영향은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BC 5세기에 그리스에서 성행한 자아비판적 사변철학은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합리적인 정치 토론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좀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 주장을 논증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철학과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수사학적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주목할 만한 토론이 이미 호메로스의 작품에 제시되어 있다는 반론도 있으며, 위대한 전사들은 설득력 있는 연설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BC 460년대말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에피알테스 개혁의 주요 원칙이었으므로 지식인의 책임도 정치적 책임과 나란히, 또는 정치적 책임의 결과로서 발달했을지 모른다.

아테네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 지식인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것은 BC 5세기의 문화를 다루다 보면 결국 아테네 문화를 다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비극과 희극은 오늘날에도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다(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반면 플라톤 이전 철학에 대한 연구는 후세 작가들이 보존한 단편을 토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남아 있는 문헌들 중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시인의 작품도 아닌 것이 한 질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리스 지방의 코스 섬에서 BC 5세기에 태어난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서적들이다.

이 저술은 부분부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사물을 묘사하고 있으며 수사학적으로 논쟁하기 적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스 비극은 정치 토론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웅변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Oidipous Tyrannos〉과 〈필록테테스 Philoktetes〉뿐만 아니라, 에우리피데스의 〈페니키아 여인들 Phoinissai〉과 〈애원하는 여자들 Hiketides〉에도 이런 영향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 Eumenides〉(BC 457)에서는 아이스킬로스가 당시의 최신 정치 개혁을 지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개혁에 대한 요구조건을 밝히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우리피데스의 〈애원하는 여자들〉에는 민주주의 제도를 찬양하는 대목이 분명히 많이 들어 있지만, 민주주의가 낳은 새로운 정치가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애원하는 여자들〉이 정치 토론에 기여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소피스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에서 극작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그밖의 생각을 직접 추론할 수는 없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시대

개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참주가 아테네를 다스렸지만 이들의 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BC 403년경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고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재고하게 되었다. 법전의 재편찬으로 말미암아 민회가 법률을 제정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기능은 선서를 거친 특별 배심원단이 맡았다. 아테네 정부의 이런 개편은 효율성과 전문성을 지향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멀어졌다. BC 4세기의 아테네가 BC 5세기 때보다 덜 민주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테네의 모든 사회계층은 제국시대에 누렸던 이익을 드러내놓고 그리워했다.

스파르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이것은 제국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코린트 전쟁(BC 395~386)의 원인이 되었다. 코린트 전쟁에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얻고 보이오티아·코린트·아르고스와 힘을 합쳐 스파르타와 싸웠다. 스파르타는 이 전쟁에서 결국 승리했지만 그것은 페르시아가 도중에 편을 바꿔 스파르타를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가 손을 잡으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것이었다.

코린트 전쟁(Corinthian War)
코린트 전쟁(Corinthian War)

이 승리에 뒤이은 BC 386년의 안탈키다스 평화조약(또는 왕의 평화조약)은 아시아가 페르시아 왕의 영토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했다.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의 도시와 섬들은 자치권을 갖게 되었지만 스파르타가 그리스 도시들을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이 자치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BC 382년 스파르타가 테베의 아크로폴리스인 카드메아에 수비대를 주둔시키자, 그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급격히 드높아져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테베는 아테네의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BC 376)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그리스 역사의 초점은 이제 스파르타에서 아테네와 테베 사이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두 강대국은 테살리아마케도니아를 중요하게 여겼다. 아테네가 암피폴리스에 대한 해묵은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BC 368년에 암피폴리스로 군대를 보내자 테베는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실패했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려던 테베의 소망은 그에 뒤이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무참히 꺾였다.

필리포스2세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죽음(BC 360)은 한 시대의 종말과 시작을 뜻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였다. 필리포스 2세는 BC 359년 권력을 잡은 뒤, 좀더 엄격한 군사훈련을 도입하고 용병을 고용함으로써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편했으며, 일리리아인(人)을 비롯한 북방의 적들을 패배시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여자들과 잇따라 정략결혼을 했다. 그중 몇몇은 공식적인 결혼이었지만 BC 357년에 결혼한 올림피아스만이 그의 공식 왕비였으며 그녀는 결혼 이듬해에 알렉산드로스(훗날의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를 낳았다.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테살리아를 BC 358년 예비 방문했던 필리포스는 암피폴리스에 집중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갖춘 뒤 BC 357년에 암피폴리스를 포위 공격해 점령했다. 이어서 그는 피드나와 광산 도시인 크레니데스를 점령하고 크레니데스의 이름을 필리피로 바꾸었다(BC 356). 필리포스는 또한 그의 재빠른 진출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주위의 민족 집단과 동맹을 맺었다.

BC 353년경에는 필리포스가 전보다 훨씬 넓어진 마케도니아의 지배자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테베가 포키스를 공격해 제3차 신성전쟁(神聖戰爭:BC 355~346)이 일어났을 때 필리포스는 그리스에 개입하게 되었다.

테베는 델포이를 설득해 포키스에게 신성한 땅을 경작했다는 이유로 무거운 벌금을 물리게했다. 이것은 상대편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 기술적인 공격으로, 테베는 포키스가 벌금을 내지 못하면 포키스와 전쟁을 벌여 배상금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일은 테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포키스인들은 BC 356년 신전 금고를 장악했고 유능한 용병을 대규모로 모집했으며 결국 테베군은 포키스군을 무찌르지 못했다. 포키스의 위협이 더욱 커지자 라리사 시(市)는 필리포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나타난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뒤엎었다. 포키스가 필리포스에게 이겼기 때문이다. 용수철 포(砲)라는 '비밀병기'를 가진 포키스가 필리포스를 이긴 것이다. 이것은 필리포스가 야전(野戰)에서 맛본 유일한 패배였다.

그러나 이듬해(BC 352)에 벌어진 크로코스 벌판 전투에서는 필리포스가 이겨 테살리아를 점령하고 그 지역의 항구와 부(富) 및 강력한 기병대를 손에 넣었다.

이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원정 초기에 벌인 대규모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근위 기병대를 증강하는 데 이용되었다.

테살리아 남부는 BC 480년에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에 대패한 곳인 좁은 산길 테르모필레가 이미 실증했듯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러나 테르모필레를 면밀히 조사해 보려던 필리포스의 시도는 아테네의 완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필리포스가 헤라이움테이코스라는 곳을 포위하자 아네테는 BC 351년 9월 소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그 직전에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유명한 〈필리포스 탄핵 Philippika〉 제1편을 연설했다. 그는 또한 필리포스에 대한 아테네의 반격이 언제나 너무 약하고 너무 늦다고 비난했다.

칼키디키 동맹의 중심 도시 올린토스는 아테네의 지원을 받았지만 BC 348년 결국 필리포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이 도시 주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렸다.

그리스에서는 전쟁에 진 도시의 주민을 노예로 파는 것을 이론적으로 허용했지만, 올린토스 주민에 대한 이런 처사는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아테네는 문간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암피폴리스와 올린토스를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필리포스와 싸워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필리포스는 얼마간 평화조약을 맺을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지만 결국 신성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포키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포키스군 지휘관은 뜻밖에도 아테네군과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레를 점령하는 것을 거부했고 아테네는 결국 악명높은 필로크라테스 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많은 것을 양보했는데 무엇보다도 암피폴리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정식으로 포기해야 했고 필리포스와 평화조약만이 아니라 동맹까지도 맺어야 했다. 이것은 일부 자료가 주장하고 있듯이 필리포스가 BC 346년에 이미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는가 하는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무렵 아테네에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집단이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려면 필리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끊임없이 평화를 깨뜨리는 필리포스를 믿을 수 없다면서 BC 344년에는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필리포스가 제안한 평화조약 재협상을 거부하게 했다.

이 무렵에는 과중한 군대생활이 주는 긴장이 필리포스의 외모에 벌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고 당시 30대 중반이었지만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던 듯하다(1983년 마케도니아의 베르기나에서 발견된 두개골에는 화살에 맞아 다친 흔적이 눈 위에 남아 있었는데, 이 두개골을 법의학적으로 복원해 본 결과 필리포스 왕의 실제 두개골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음). 하지만 이런 상처를 입었어도 그는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BC 344년 테살리아를 옛날처럼 4개의 관구로 개편했으며 BC 340년에는 그리스 도시 페린토스를 공격했다.

필리포스는 더 큰 적이며 더 욕심나는 목표물인 아테네를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필리포스는 BC 339년말경에 그리스의 테베에 사신을 보내 아테네만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위협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아에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BC 338. 8). 이때 필리포스는 거짓으로 후퇴했다고 암시하면서 그리스의 완전한 패배는 알렉산드로스 때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전투는 필리포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의 패배는 이후 BC 2세기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했다. 아테네는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으며 포로들은 몸값을 내지 않고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필리포스의 정치적 기반은 코린트 동맹(BC 337)으로 확립되었다. 이 동맹은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재산권과 토지재분배를 강조했다. 사실 필리포스의 새로운 동맹에는 민주주의·군주제도·과두정치 등 다양한 정치체제가 철저히 뒤섞여 있었다.

이것은 BC 4세기 전체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는 이런 해결을 환영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일부 군인들은 아테네와 동맹을 맺느니보다는 아테네를 약탈하는 쪽을 원한 것 같다. 필리포스가 암살당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BC 336년으로, 암살 동기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Alexander III Magnus)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Alexander III Magnus)

사태 변화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대응은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고 냉혹했다.

그는 고위직에 있던 두 용의자를 즉시 처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왕위계승 정당성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으므로 그는 실제로 경쟁자들을 많이 제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단순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조(朝)를 타도하는 데 이바지한 외부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아케메네스조의 후계자이자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를 선언하고 법률을 회복시켰으며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이 바치던 공물을 면제해 주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내세운 목적인 BC 480년에 페르시아가 저지른 불손한 행위를 앙갚음한다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면서 호의적으로 다룬 곳들은 대부분 이오니아 반란이나 페르시아 전쟁 때 눈에 띄게 페르시아에 대항했던 곳이었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트리발리인과 일리리아인을 전격 공격함으로써 정복 활동을 시작했다.

테베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일리리아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을 믿고 봉기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1주일 만에 테살리아에, 닷새 뒤에는 보이오티아에 도착해 테베를 무참히 파괴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트 동맹의 투표에서 페르시아 원정군 지휘관으로 선출되었고 BC 334년 봄에 출발했다. 이 아시아 정벌은 아들이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을 이어받아 일으킨 사건이다. 필리포스는 BC 4세기초 쿠낙사 전투 때부터 아시아 원정을 계획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창설한 군대와 경제적 번영 및 인적 자원을 아시아 원정에 이용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자마자 아시아 땅에 창을 던지면서 자신은 아시아 전역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선포했다.

트로이에서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스와 아이아스의 무덤을 참배함으로써 자신을 서사적이고 호메로스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단호하게 표현했다.

이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할 가능성은 BC 346년보다 훨씬 높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BC 337년에 죽었고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그보다 훨씬 허약한 다리우스 3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군의 일부와 마주쳐 대낮에 공격을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맞은편 강둑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섰는데, 이것은 당당해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는 전쟁의 신에게 바치는 우렁찬 함성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BC 334년 중반에 알렉산드로스는 방어 태세가 완벽한 할리카르나소스 시(市)를 공격했으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지한 저항에 부닥쳤다. 이 도시는 천연의 요새일 뿐 아니라 인공적인 방어 시설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에 주둔하는 페르시아군 사령부로 선정된 도시 6였다.

전투는 치열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진영에 전령을 보내 성벽 앞에서 죽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를 점령한 뒤, 원주민인 아다 공주를 사트라프(총독)에 재임명했다. 아다 공주가 알렉산드로스를 양아들로 입양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훌륭한 정치적 책략으로 여겨지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공주의 이런 책략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할리카르나소스 정복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동쪽으로 진격해 마침내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이며 아나톨리아 반도의 내륙에 있는 고르디움에 도착했다.

여기서 유명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사건이 일어났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대에 전차를 고정시킬 때 사용했던 이 복잡한 매듭을 푸는 사람이야말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온 예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매듭을 푸는 대신 칼로 잘라 문제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문제를 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고 결국 이집트에 이르렀다.

당시 이집트는 종주국(宗主國) 페르시아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마케도니아에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머물던 때 2가지 중요한 일을 이룩했다. 하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 서부 사막지방 시와에 있던 암몬 신(神)의 신탁소를 찾아간 일이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를 가로질러 BC 331년 10월 가우가멜라(니네베와 아르벨라 사이)의 탁트인 벌판에서 다리우스를 격파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다리우스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1년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자신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이무렵 알렉산드로스는 프로스키네시스(proskyne-sis)를 포함한 페르시아 궁정의식들을 그리스에 도입하려고 애썼다. 프로스키네시스는 이슬람교도들의 기도 자세와 비슷한 자세로 통치자 앞에 납작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페르시아 특유의 의식이다.

이 정책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하려는 알렉산드로스의 전반적인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부복(俯伏)은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일로 여겨졌다. 통치자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숭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BC 327년 인도 공격을 목표로 삼았지만 BC 326년에야 겨우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했다(→ 인더스 문명). 대규모로 벌어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왕 포로스(포루스)를 물리쳤는데 이것은 그가 코끼리를 앞세운 군대와 맞섰던 최초의 주요 전투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진격했는지는 지금도 후세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문제이지만 그의 군대의 호기심과 인내력은 이제 바닥이 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말년에 보여준 행동과 계획은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신격화하라고 요구했으며, 친구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그를 위해 엄청난 화장용 장작더미를 마련했고(이 장례식은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음), 아라비아를 배로 일주하고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모든 행동과 계획은 문서에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과음으로 병에 걸려 BC 323년 6월 10일 초저녁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다.

BC 4세기의 그리스 문명

여러 가지 점에서 BC 4세기는 그리스 역사가 가장 잘 기록된 시대이다.

비문(碑文)은 BC 5세기보다 훨씬 흔해지고 아테네 이외의 다른 도시국가에서도 대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문만 해도 60편이 넘으며 BC 4세기의 비극은 한 편도 없지만 BC 4세기초에 나온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과 BC 4세기말 작가 메난드로스의 희극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의 산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생활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플라톤이 저서에서 정체나 내란 상태에 빠질 염려가 없는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규정하려고 애쓴 것을 보면, BC 4세기의 그리스 세계가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Politica〉은 당시 발전한 군주정과 동맹제도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도시국가에 대한 그리스인의 사고 방식에 깔려 있는 이론적 개념을 검토하고 있다(→ 역사편찬).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역사 기술은 BC 4세기 투키디데스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 같은 정력적인 인물은 완벽한 카리스마와 강한 개성으로 자신의 정책과 관계가 없는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투키디데스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를 "알키비아데스가 한 일과 겪은 일"로 규정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투키디데스의 저술이 포함하고 있는 이런 측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쓰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참모진에 가담했으며, 이 저술이 완성된 이후 역사는 알렉산드로스가 한 일과 겪은 일로 규정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주정을 인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건축 분야에서 BC 4세기는 파르테논 같은 훌륭한 신전을 하나도 낳지 못했지만 군사적 건축물에서는 위대한 시대였다. 세력있는 개인들이 세운 마우솔레움 같은 건축물은 강력한 인물의 등장이 BC 4세기의 특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아테네 제국은 아테네만이 아니라 속국(屬國)에서도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조각가를 고용했다.

마우솔레움(Mausoleum)
마우솔레움(Mausoleum)

BC 404년에 제국이 무너지자 이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그들은 예술품·건축물·요새 등에 돈을 쓸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마우솔로스 같은 사트라프나 디오니시오스 같은 군사 통치자의 궁정을 찾아갔다. 부유한 마케도니아 궁정 역시 예술가들의 새 일터가 되었다.

개인이 다른 도시국가로 이주하거나 도시국가들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한 것은 BC 4세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아테네에서 이민을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한 것은 아테네의 항구 피레에프스였다. 인구가 밀집한 이곳에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살았다. 피레에프스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비문은 페니키아 상인들이 이곳에서 활동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또다른 비문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해달라는 키프로스 출신 상인들의 요구에 대한 아테네 민회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요구의 선례(先例)로 이집트 이민들이 세운 이시스 신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주와 페르시아 전쟁 때의 광범위한 원정 결과 그리스 전역에서는 외래 종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도니스 숭배였다.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다룰 때는 그 전후에 있었던 문명과의 연속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연속성은 종교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다. 비교적 나중에 그리스에 도입되었다고 전해지는 몇몇 신들은 사실은 미케네의 토착신들이었다. 예컨대 아테네의 한 신화는 디오니소스가 비교적 후기인 BC 6세기에 엘레우테라이에서 아티카로 도입된 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문자 B로 쓰인 BC 13세기의 점토판에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후세로 눈길을 돌리면 BC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대행진에 디오니소스 상(像)이 묘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바카이 Bakchai〉에서 디오니소스를 다소 냉정하고 '공식적인' 견지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디오니소스는 성격상 사회적 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인들은 BC 186년 유명한 포고령을 발표해 디오니소스 숭배를 규제했다.

디오니소스 신의 다양한 성격과 장수(長壽)는 알렉산드로스가 옥수스 강 양쪽까지 가져갔던 그리스 문명의 강한 점착력을 상징하지만, 이 문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 문명의 특징뿐 아니라 선사시대 문명의 특징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명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로마의 이집트 정복은 고대 그리스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적 요소와 비그리스적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헬레니즘의 형용사형 헬레니스틱(Hellenistic)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의 고대 그리스 문화를 가리키는 형용사 헬레닉(Hellenic)과는 다른 용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그리스 세계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대왕에 비하면 그야말로 피그미족처럼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혈통은 중시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피붙이인 이복 동생과 유복자가 함께 왕위에 올랐다. 필리포스 왕의 서자(庶子)는 정신병자였지만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BC 358경~317) 왕으로 선언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BC 323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뒤 록사네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알렉산드로스 4세(BC 323~310)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두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는 안티파트로스가 한동안 권력을 장악했고, 바빌론에서는 고위 관리인 페르디카스(BC 365경~321)와 크라테로스(BC 370경~321)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추진하던 계획은 만장일치로 중단되었다.

그의 휘하 장군들은 군사적으로 명성을 얻을 가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총독 자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애꾸눈 안티고노스(BC 382경~301)는 안티파트로스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당시 바빌론에 없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프리지아를 다스리면서 용감한 군인이자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확고한 태도와 임기응변의 재능은 그리스 도시에서 인기가 높았다. 바빌론에 있던 장군들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BC 367/366경~283)는 처음부터 마케도니아 제국이 통합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이집트 총독 자리를 얻은 그는 이곳에 독립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명성을 높였다. 리시마코스(BC 360경~281)는 이집트보다는 이익이 덜한 트라키아를 다스렸다. 개인적 기량도 뛰어나고 훌륭한 무예를 갖춘 것으로 유명한 레온나토스와 셀레우코스는 때를 기다렸다.

국내 행정의 책임을 맡은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는 군인들에게는 과소평가받았지만 그는 사실상 어느 누구보다도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후 20여 년 동안 벌어진 음흉한 권력 투쟁은 놀라우리만큼 복잡했다. 우선, 에우메네스의 지지를 얻어 두 왕의 이름으로 제국을 다스리던 페르디카스가 개인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암살당했다. 군대는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를 부지휘관으로 삼아 아시아 지역 주둔군을 장악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는 계속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케도니아인은 아니지만 막대한 재산가였던 에우메네스는 두 왕을 대신해 장군과 총독들의 야심을 견제할 능력이 있었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이라는 무능한 정치인이 뒤를 이어 섭정이 되었다. 그는 본토의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새 포고령을 발표해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 결과 아테네인들은 새로 얻은 자유를 이용해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처형했다.

훌륭한 인물이지만 타협적이던 포키온도 이때 처형당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으며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과 손잡고 안티고노스에게 도전해 바빌론을 확보했지만 BC 316년에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다.

폴리페르콘은 입지가 약화돼 얼마 후 유능하고 정력적인 카산드로스에게 쫓겨났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카산드로스는 테베를 재건하고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신봉자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에게 아테네를 맡겼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3세를 제거했으나 그녀는 카산드로스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록사네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카산드로스의 보호 또는 감시를 받았다.

안티고노스는 이제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및 리시마코스는 연합전선을 결성해 그에게 대항했다. 4년 동안(BC 315~311)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정력적이고 임기응변의 재치와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상대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변화는 셀레우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빌론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는 것뿐이었다. BC 311년 네 지도자는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안티고노스는 아시아를,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얻었으며,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가 성년이 되는 BC 305년까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 추구 과정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은 곧 무시당했다.

카산드로스는 BC 310년 록사네와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죽였다.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쳐부수려고 했지만 셀레우코스는 파괴된 바빌론과 동부의 속국들을 완강히 지키며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만은 인도 왕 찬드라굽타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티고노스는 '영리한' 아들 디미트리오스(BC 336~283)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폴리오르케테스(포위공격자)라는 별명을 가진 디미트리오스는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추방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으며 결국에는 코린트 동맹도 재건했다.

아테네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경의로써 그를 찬양했고 파르테논 신전을 그의 궁전으로 내주었다. 디미트리오스는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고 키프로스와 에게 해를 확보했지만 유명한 로도스 포위작전(BC 305~304)에서는 실패했다.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잇는 공동 왕을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손에 넣지 못했고 다른 통치자들 역시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는 동맹을 맺어 안티고노스 및 디미트리오스와 맞섰는데, BC 301년에 연합군은 셀레우코스가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 부대의 도움을 얻어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죽였다.

그러나 디미트리오스는 도망쳐 티로스와 시돈을 계속 다스렸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실상 점령한 남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부 지역으로 만족했지만 그뒤 병에 걸려 셀레우코스에게 투항했다.

디미트리오스가 몰락한 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천수를 누렸고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308~246)가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첫 아내가 낳은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안티파트로스의 손자)는 '벼락'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리시마코스의 주위에 계속 파문을 일으켰고 리시마코스는 곧 지지를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군대를 쳐부수고 그를 죽였으며 이집트를 제외한 옛 마케도니아 왕국을 거의 손에 넣을 단계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그는 리시마코스 군대의 지지를 받은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BC 281).

셀레우코스의 아들이 그뒤를 이어 안티오코스 1세(BC 324~261)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영리한 디미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BC 320경~239)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였다(피로스).

BC 3세기 중엽에 3대 세력중심지는 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였지만 통치자들의 권력은 사실상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가 죽은 뒤 이미 공격을 시작해 밀레토스를 확보해 두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다스리는 시리아를 얻으려고 BC 276년 새로이 공세를 폈지만 시리아군에게 격퇴당했다. 서쪽에서는 피로스가 에페이로스로 돌아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그리스 남부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스파르타 점령에 실패했고 아르고스에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지붕 위에서 구경하던 한 여인이 던진 타일에 맞아 죽었다.

북부에서는 안티고노스의 권력에 만만찮게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아테네가 크레모니데스(the handsome Chremonides)의 지휘를 받으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과 연합해 그에게 맞섰다. 이 동맹은 이집트의 후원을 받았고 에페이로스에서도 약간의 지원을 받았다. 4년 동안(BC 266~262)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동맹은 깨졌으며 아테네의 정치 권력도 마침내 무너졌다. 그러나 아테네는 문화 중심지로 살아 남았다. 안티고노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에 자신이 선정한 참주를 두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는 BC 261년에 죽었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2세(BC 287~246)는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맞섰다. 제2차 시리아 전쟁(BC 259~255)에서 안티오코스는 아나톨리아 해안과 페니키아를 대부분 되찾았으나 해전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는 해상을 장악했다. 그러나 BC 246년 안티오코스 2세가 죽자 시리아에서는 새로운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이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84경~221)는 혼란에 빠진 시리아 영토 안으로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BC 265경~225)는 간신히 국내안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땅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BC 3세기에 그리스 본토에서는 동맹 내부에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동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동맹은 아카이아 동맹이었다. 전에도 존재했던 이 동맹은 BC 280년 재건되었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제한된 지역에서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도시 국가들의 다양한 성격을 넓은 견지에서 통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동전에 지역적으로 한정된 신, 즉 코린트에는 아프로디테, 아르고스에는 헤라를 새겨넣었으나 이 무렵 동전에는 이들 대신 좀더 널리 섬겨졌던 제우스 호마기리오스와 데메테르 파나카이아가 새겨졌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말에 따르면, 아카이아 동맹 동안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거의 하나의 도시 국가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 당시(BC 3세기)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 섬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를 계속 잠식하고 있었다.

타렌툼 시(市)는 로마를 두려워해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원조를 청했다. 시라쿠사에서는 피로스를 지지하는 히에론(BC 306경~215)이 BC 269년 왕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54년 동안 시라쿠사를 다스렸다. 그는 한두 해 동안 로마에 대항한 뒤에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 로마가 카르타고와 싸울 때 로마를 도왔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살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는 그리스 세계의 변경으로서,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독자적인 강력한 해군과 안정된 과두 정부를 유지했다.

BC 220년대말 3대 강대국인 시리아·이집트·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운 군주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왕이라고 불리며 형 셀레우코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BC 242경~187)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이집트 영토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박트리아를 손에 넣었고 인도의 북서쪽 국경 지방과 페르시아 만 건너편에서 인상적인 양동(陽動) 작전을 벌였다.

그는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싸운 뒤 곧 전력을 회복한 로마의 방해를 받았다. BC 188년에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에 따라 그의 영토는 아시아 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이는 상당히 넓은 영토였다. 이집트에서는 BC 221년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44경~205)가 이집트 군인들과 함께 라피아에서 시리아를 격퇴했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남부지방을 다스리던 누비아족 통치자들과 이집트 원주민의 권력이 강해진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BC 205년 다섯 살짜리 아들 하나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5세(BC 238~179)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안티오코스와 마찬가지로 팽창주의적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평민에게 인기가 높았고 전쟁터에서는 유능했지만 판단력과 안정성이 부족했다.

로마는 BC 229~228년과 BC 219년 일리리아 해적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뒤 BC 218년~202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데 몰두해 자원을 다 소모했다. 그런데도 로마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를 쳐부수어 패권을 입증했다. 그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필리포스 5세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물리쳤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도 물리쳤지만 로마는 한 뼘의 땅도 합병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배하던 과두정의 지도자들은 다른 영토를 병합해 그곳의 행정까지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행정 책임이 무거워지면 그만큼 권력자의 수를 늘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적들의 인정대로 1마리의 용이었으나 그것은 되도록 충돌을 피하고 싶어하는 소극적인 용이었다.

BC 175년 집권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215경~163)는 왕국 통합을 위해 그리스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에피파네스(神의 現身)라는 칭호에도 나타나 있듯이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는데, 이스라엘 신의 절대권을 신봉하는 정통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티오코스는 유대교 예배를 금지하고 유대교 신전 제단에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유다 마카베오(로마인들과 '우호 연합동맹'을 결성한 인물)의 지도로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 투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동안 시리아의 통치자들도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자세한 투쟁 내용은 매우 복잡하지만 사실상 1세기 동안 유대 민족은 상당히 많은 독립성을 누렸다.

BC 146년경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불안정한 상태를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과 동시에 카르타고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에 있는 비옥한 들판에 속주를 건설했다.

마케도니아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군대를 일으켜 테살리아를 침략하자 로마군은 그를 패배시켜 처형했으며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했다. 로마에 예속된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과 충돌했고 그들의 애국심은 높아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테베를 다룬 방식 그대로 코린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맹이 해체되었고, 민주주의는 폐지되었으며, 권력은 부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BC 2~1세기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격한 불화와 싸움이었다.

이집트 왕가에서는 남매의 근친 결혼이 자주 이루어졌고, 통치자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부유했으며 영토도 남쪽으로 팽창을 계속했다. 시리아에서는 내란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으나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BC 159경~129)가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메디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뒤 얼마 간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BC 130~129년 다시 결집한 파르티아인들은 왕을 죽였고 그가 되찾은 땅을 모조리 다시 빼앗았다. 그후 시리아 왕국은 약해지고 분열되었으며 이웃 나라들에게 끊임없이 국경을 유린당했다.

BC 256년경부터 그리스계(系) 왕조의 통치를 받은 동쪽 끝의 박트리아는 BC 1세기 중엽에 이르자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서부에서는 인도의 전설적 영웅인 메난드로스가 권력을 잡았다. 간다라 지역(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부)의 예술에는 그리스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BC 67년 로마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大폼페이우스:BC 106~48)는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이끄는 흑해의 해적들을 조직적으로 분쇄함으로써 평화로운 교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미트라다테스는 폰투스 왕국에서 쫓겨나 BC 63년 자살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린 셈이다. 폼페이우스는 유명한 동방 정벌을 시작해 시리아를 로마 속주로 병합하고, 유대를 평정했으며, 로마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후 그리스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BC 48년에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에서 대결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트라키아의 필리피에서 브루투스 및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대결했다. 이집트의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 7세(BC 69~30)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권력 정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세계를 지배하려면 로마를 정복해야 했으며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구든 로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매혹시켰고, 뒤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엉뚱한 사람을 후원한 셈이었다.

세계의 지배권을 얻기 위한 권력 투쟁이 2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리스에서 벌어진 세번째 충돌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해전의 승자는 뒤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BC 63~AD 14)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던 마지막 왕국 이집트는 마침내 로마에 정복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