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2세

다른 표기 언어 Philippos II 동의어 Philip II, 필립 2세
요약 테이블
출생 BC 382
사망 336, 소아시아
국적 마케도니아

요약 국내의 평화를 회복하고 BC 339년에 군사적·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형 페르디카스에 이어 왕위를 이은 필리포스는 이웃나라와 협상을 벌이면서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키웠다. 곧 파이오니아를 침공하면서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제압하기 시작했으며, 테살리아 동맹을 주도했다. 이어 코린트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와 섬 지방의 모든 국가 대표들이 평화를 지키기로 서약하고 필리포스가 동맹의 의장(헤게몬)으로 인정받았다. 아시아 진출 준비가 상당히 진척되었을 무렵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이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올림피아스의 동생)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왕위 등극
  3. 마케도니아의 팽창
  4. 테살리아 동맹의 주도
  5. 카이로네아의 승리
  6. 코린트 동맹
  7. 말년
  8. 평가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개요

국내의 평화를 회복하고 BC 339년에 군사적·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초기생애와 왕위 등극

필리포스는 아민타스 3세의 아들이었다.

소년시절에 그는 형들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페르디카스 3세가 각기 몇 년 간 통치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이 붕괴해가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의 형들은 지방 봉건제후들의 불복종과 강력한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의 간섭, 서북쪽 변방의 일리리아인들의 침공 등을 막아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포스 자신은 아테네와 더불어 당대(BC 370~360)의 주도적 도시국가인 테베에서 얼마간 인질로 지냈다.

테베에서는 그당시까지 그리스 장군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전술가로 꼽히던 에파미논다스가 그리스 최강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테베에 있던 시기에 아마도 필리포스는 가장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왔을 때 형 페르디카스는 그가 벌써 군대의 지휘를 맡을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이내 알았다.

BC 359년에 페르디카스가 일리리아인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면서 뜻하지 않게 필리포스가 왕위에 올랐다.

일리리아인들은 포위할 준비를 했다. 북방에서는 파이오니아인들이 쳐들어왔고 외세의 지원을 받는 2명의 인물이 왕군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위기를 맞이하여 필리포스는 현명하게 우선순위를 가려 위험한 이웃나라들을 돈을 주어 달래고 조약을 맺어 암피폴리스아테네에 양보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시간을 군사 준비에 이용했다. 나중에 페르시아까지 정복한 그의 군대는 그의 재위기간 내내 발전을 거듭했지만 결정적인 신무기, 즉 '사리사'(그리스인이 보통 쓰는 창보다 반 이상 더 긴 창)와 전술, 훈련의 혁신은 그 첫해에 이룩된 성과인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의 팽창

BC 358년에 파이오니아를 침공했으며 일리리아인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미 원숙한 전쟁의 기량이 드러났다. 다음 해에 그는 이피로스의 몰로시아인 공주 올림피아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서부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제 그는 동부 변경을 안정시키고 트라키아로 진출하는 전략적 열쇠인 암피폴리스를 재점령하기 위해 아테네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BC 356년에 서부 트라키아의 그레니데스(그가 필리피라고 개칭)를 점령했다.

이곳은 팡가이온 산에서 새로 발견된 금은광을 캐기 위해 새로 생긴 도시였다. 이런 성과에 겁을 먹은 이웃나라들은 그에게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고, 아테네도 거기 참여했으나 동맹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아테네와 10년에 걸쳐 진행된 '암피폴리스 전쟁'은 막강한 해군력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지상 군사력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심지어는 동맹국을 필리포스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지도 못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필리포스는 2차례에 걸쳐 트라키아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테살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 그가 그리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10년 동안 중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를 포키아인들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신성전쟁이 벌어졌고, 필리포스는 테베와 테살리아 도시국가동맹의 동맹자 자격으로 여기에 개입했다.

BC 353년 테살리아에서 그는 지상전에서 유일하게 큰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나친 자신감과 정찰 소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해에 그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어 그 패배를 만회하고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그의 남부 진출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테살리아 동맹의 주도

필리포스는 힘의 사용을 거부하고 협상에 의해 테르모필라이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6년 동안 기다렸다.

한편 테살리아의 승전 덕분에 그는 테살리아 동맹의 의장(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BC 352경). 그리스의 동맹 내에서 외국인이 이런 직책을 맡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테살리아는 이후 150년 이상이나 마케도니아의 왕들에게 속박되었다. BC 348년에 필리포스는 올린토스를 점령하고 칼키디키를 합병하여 올린토스인들과 그밖의 칼키디키인들을 노예로 만듦으로써 여러 나라에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리스인들 자신도 때때로 작은 도시에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올린토스는 큰 도시였다. 필리포스의 적들은 마케도니아 야만족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과 경멸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고, 그의 편일 경우에도 그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의 심장부로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의구심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방면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테살리아인과 테베인 등이 자력으로 끝낼 수 없었던 신성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아테네는 이를 방해할 수 없었으며 필리포스의 다음 트라키아 원정(BC 346)이 주요한 곡물 수입원인 남부 러시아로의 행상로를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사실은 아테네가 아니라 필리포스가 모든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의 장래 구상은 그리스와 그밖의 원정에서 아테네를 패배한 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맹자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아테네와의 평화협정이 비준되기(BC 346) 전에도 아테네의 정치평론가 이소크라테스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의 주도적인 4대 도시국가를 화해시켜 통일적인 그리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 침공전쟁을 벌이자고 권유했다(→ 색인:이란사).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단계는 필리포스가 개입하여 신성전쟁을 종결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델포이 인보동맹의 가맹국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테살리아인들과 그 종속국들의 투표에 힘입어 그는 동맹의 평의회를 장악했고 필요에 따라 동맹을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몇 해에 걸쳐(BC 346~343) 그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 그리스로 침투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여러 작은 도시의 정치가들 가운데 친구를 만들어두는 한편 이따금 지원금이나 용병부대를 이용하여 지방의 소소한 분쟁에 개입했다.

이 정책으로 몇몇의 적을 만들었으며 아테네의 위대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 같은 인물들이 이 약점을 이용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가 이제 아테네의 성장에 장애물이며 아테네의 자유와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연설을 통해 아테네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전체 그리스인들에게도 그것을 그들 자신의 위험으로 깨닫게 만들려고 애썼다.

이 시기에 필리포스는 어떤 도발이 있더라도 작은 문제에서 아테네와 타협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에는 데모스테네스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반대파 인사들이 타협할 수 없는 상대라고 느끼게 되었다(BC 343~342). 한편 인접한 일리리아인들에 대한 종주권을 재천명하고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뒤 BC 342년에 연이은 트라키아 원정을 몇 차례 벌여 2년 동안 그 대부분을 속주로 합병했으며, 마침내 도나우 강 삼각주의 남쪽 둑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트라키아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의 그리스 동맹국 중 페린토스(나중에 헤라클레아, 지금의 마르마라이렐리시)와 비잔티움의 두 도시가 자신들의 입장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들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2차례의 대규모 포위전은 필리포스의 포병술과 관련무기의 발달을 보여주었다.

후에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서 그 무기들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BC 340년에 아테네의 선전포고로 그는 남부 러시아로 이어지는 아테네의 곡물수송로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부당하게 체면을 깎이는 일 없이 2곳의 포위전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아테네는 이제 중부 그리스를 통해 영토침략을 당함으로써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중부 그리스의 요충지는 테베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테베는 여태까지 필리포스의 동맹국이었으나 최근에 들어와 불만과 반발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성동맹에서 그는 테베에 도움을 주었으나 새롭게 인보동맹에서 주도권 경쟁자로 나섬으로써 이전의 공로가 모두 상쇄되었다. 그리스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그의 시도는 테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었다.

카이로네아의 승리

BC 339년 11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올 때 필리포스는 테베인들이 동맹자를 영접하고 아티카로 진격할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테베인들은 오히려 데모스테네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스 동맹은 테베의 가맹으로 공고해졌으며 필리포스는 당대의 한 웅변가가 거의 과장 없이 표현한 대로 '짧은 하루의 결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이로네아 전투는 유명한 승전으로 이 전투에서 필리포스의 기병대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지휘관으로서 그의 진정한 재능은 의도적인 퇴각작전을 사용해 공격해오는 그리스군의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기병대가 타격할 지점을 만들어낸 데서 엿볼 수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국가들이 맺은 다양한 평화협정에서 테베는 마케도니아 수비대의 주둔을 인정해야 했고 민주주의 정부를 친마케도니아 정부로 교체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영토의 침략이나 민주정치에 대한 간섭을 겪지 않았으며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해군을 양도하는 조치에 의해 무장해제되지 않았다. 필리포스로서는 그리스 국가 중 유일하게 아테네로부터는 중립이나 마지못한 동맹이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과거의 모든 경험에 비추어볼 때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이 에게 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할 때만 승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다.

테살리아 바깥의 그리스에서 필리포스는 자신의 인기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을 수가 없었다. 단지 부유층 사람들만이 그의 궁정과 그에게서 받은 후원에 이끌렸으며, 또한 몇몇 도시들(특히 스파르타의 이웃들)이 해묵은 적을 상대할 필요에서 기꺼이 마케도니아에 의지할 뿐이었다.

필리포스는 모든 그리스인을 페르시아 전쟁에 가담시킬 작정이었다. 8년 전에 이미 이소크라테스가 그렇게 할 것을 권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고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필리포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자신과 서로에 대해 평화를 이룩하고 해외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를 지원하도록 결속시켜나갔다.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치체제에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의 가정교사를 지낸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았다.

코린트 동맹

필리포스가 BC 337년에 창설한 이른바 코린트 동맹은 전반적인 평화(코이네 에이레네)를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해 구상된 조직으로,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와 섬 지방의 모든 국가 대표들이 평화를 지키기로 서약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필리포스를 의장(헤게몬)으로 인정하기로 함으로써 출범했다.

전반적인 평화는 그리스인들 자신의 정치적인 발명품으로 지난 50년간 주도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구호로 몇 차례 이용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주도적인 그리스 국가들이 침략자들에 대항해 집단행동을 벌일 수 있는 효과적인 조직체를 창출해낼 만한 힘이나 상호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모든 국가들의 대표로 이루어진 평의회(시네드리온)를 구성하고 평화가 깨지거나 위협받는 경우에 필요한 행동을 숙고하고 결정할 권한을 그 기구에 부여했다.

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을 집행할 책임은 의장인 필리포스에게 있었다. 국가들은 의장의 요구에 따라 병력이나 선박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 할당량은 평의회에서 갖는 투표권에 따라 결정되었다. 필리포스나 마케도니아는 평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지만 의장이 마케도니아의 권력을 수중에 쥐고 이 조직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된 사실이었다.

우연하게도 이 조직체의 창립회의가 열린 코린트는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3군데 그리스 도시 중 하나였으며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했다.

말년

그리스인들 자신이 이전에 해왔던 관행을 바탕으로 조직체를 건설한 것이나 과거의 불쾌한 기억을 지나치게 연상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필리포스로서는 분명히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정치가도 그리스인도 아니고 단지 마케도니아인의 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로서는(대부분의 현대사가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 문제의 해결을 평생 업적의 완성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성과도 아니었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카이로네아 전투는 그리스인들에게 질서를 부여했으며, 그의 구상을 실현하자면 그들이 계속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BC 337년초에 코린트에서 열린 평의회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그의 계획을 듣고 정식으로 그것을 승인했다. 다음해 초에 마케도니아 군대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필리포스는 이제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로 진출할 것이며 그리스인들이 함께 갈 것이었다.

이처럼 찬란한 계획은 어이없이 무산되었다.

섬세하고 유연하고 인내심 있고 꾀많은 외교가이며 정치와 전쟁에서 시기선택의 천재이던 그가 무책임하고 무능한 처신으로 자기 삶을 마감했다. 가까이에서 필리포스를 보았던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그의 악행, 음주벽과 방탕한 생활, 마구잡이 사치에 대해 혹평을 했다. 이 역사가가 유별나게 깐깐하고 청교도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필리포스의 성품에는 실제로 애매한 구석이 있었으며 이는 가정생활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정략결혼들'은 대부분 화해할 가치가 있는 군주나 집단에 대한 친선의 상징으로 이루어졌으나, BC 338년에 마케도니아 여인 클레오파트라와 치른 마지막 결혼은 결국 왕비인 올림피아스와의 파국으로 이어졌다.

올림피아스는 왕세자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마케도니아를 떠나버렸다. 올림피아스가 궁정에서 인기가 없었던데다 클레오파트라의 세력이 강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정치문제'가 후계권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필리포스는 애써 알렉산드로스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자신이 결코 그런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입게 될 피해의 정도를 치명적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아시아 진출 준비가 상당히 진척되었을 무렵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이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올림피아스의 동생)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필리포스는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귀족으로 자신의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필리포스와 젊은 왕비의 삼촌 아틀라오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해명이었을 뿐 파우사니아스 자신은 현장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거기에 한마디도 보탤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필리포스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된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를 의심했으며, 현대사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생각을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몇 년 뒤에 발표된 〈정치학〉에서 그는 이 사건을 예로 들어 사적인 동기로 살해당한 군주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나 세상 사람들이 그 허위발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솔하고 섣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평가

위대한 마케도니아인들의 제일 가는 인물은 그처럼 무가치하게 자기 삶을 마쳤다.

그에 관해 알려진 모든 사실은 그리스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자료들은 그가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험난하고 보잘것없었던 과거에 비추어볼 때 훨씬 더 감명 깊은 이야기는 그가 자신의 왕국을 통일하고 팽창시키는 사업을 벌여나간 일일 것이다. 그는 지방제후와 귀족, 호족과 그 가신들을 통제하여 위대한 마케도니아 민족을 이루어냈다. 이는 일찍이 유례 없는 세계 최강의 군대와 전쟁과 외교에 의한 끊임없는 정복으로 상징된다.

그것을 통해 마케도니아는 20년가량의 기간에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일리리아나 트라키아 원정이라든가 테살리아, 에우보이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외교나 무력(또는 양자 모두)에 의해 벌인 간섭활동은 겉보기에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벌이는 전략가의 활약상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종종 전쟁보다 외교를, 최대의 성과보다 제한된 목표를, 위험이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선호했으며, 특히 또다른 기회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카이로네아에서 그가 결정전을 벌이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진정한 그리스 정책이 일면 데모스테네스 덕분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실상 더 나중에도) 카이로네아 같은 전투를 치르지 않고 그리스를 제패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필리포스가 그리스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여 많은 그리스인 명사들을 자기 궁정에 끌어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친그리스 경향이란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올린토스와 그리스 도시들은 그 점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도한 정책적 이유로 아테네인들과 교제를 하기는 했지만 평생 동안 아테네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은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무관심의 표현이다. 그의 도읍인 펠라는 오랫동안 위대한 학자들의 집결지이자 은신처였으며, 필리포스 치하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긴밀한 연락이 유지되었다.

테오폼포스가 영접받았고 이소크라테스가 초빙되었으며, 아테네 연극무대의 첫째 가는 배우들도 마케도니아에 모습을 나타냈다. 필리포스의 아버지 아민타스의 주치의를 아버지로 둔 아리스토텔레스는 3~4년의 중요한 시기에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를 지냈다.

필리포스는 이런 사람들과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신이 학식이 있었다든가 지식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전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웅변가로서 그는 데모스테네스와 아이스키네스 같은 전문가들을 포함한 아테네인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붙임성이 있었으며 놀기를 즐겼다.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많이, 자주 마시는 편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했을 때도 그는 가슴을 찌르는 진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지휘관으로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맹장이었으며 행동에 임해서는 사자같이 용감하게 싸웠다. 말년에는 오래된 흉터 때문에 실제로 용모가 보기 흉하게 될 정도였다. 천재적인 지휘관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매우 규율있는 장수였으며 기병대와 보병대를 배합하는 독창적인 전술 기량을 발휘했다.

수년에 걸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고 훈련해냈으면서도 그 힘을 사용하는 데서는 역설적으로 인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가 살아서 아시아 침공을 단행했더라도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타도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시아에 마케도니아 제국을 세웠겠지만 그 성격은 지중해에 국한된 제국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식민지 개척으로 혜택을 입었겠지만 저급 문화가 고급 문화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자유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았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그 문제를 깨닫고 있었으며, 자유를 표면에 내건 코린트 동맹은 그것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그것으로 그리스인을 기만하거나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후대의 마케도니아 왕들로서도 그 이상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를 만들었으며 당시 마케도니아와 그 후대의 왕들은 세계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