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

다른 표기 언어 Isocrates
요약 테이블
출생 BC 436, 아테네
사망 BC 338, 아테네
국적 아테네, 그리스

요약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몇 년 동안 이소크라테스는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잃고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용할 연설 원고를 써주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후 40년이 넘게 주로 비싼 수업료를 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공적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힘썼다.
이소크라테스는 범그리스주의를 주창했다. 스파르타에게 페르시아에 대한 민족적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의 화합을 이룩하라고 요구했고, 30년 이상이 지난 후에 <필리포스에게>라는 편지에서 마케도니아 왕에게 그리스인들과 화해하고 그들을 지도하여 페르시아와 싸워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카이로네이아 전투로 그리스가 독립을 잃고 그 결과 필리포스가 진짜 지배자가 되자, 절망에 빠진 그는 스스로 굶어 죽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영향
  3.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
  4. 환멸과 죽음
이소크라테스(Isocrates)
이소크라테스(Isocrates)

개요

그의 저술은 당시 아테네의 정치적·지적 생활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그가 세운 학교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는 설립 목적이 크게 달랐으며, 이 학교의 학생들 중에는 당시 그리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명한 인물이 많았다(고대 그리스 문학).

초기생애와 영향

이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 일어나기 직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지도자인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뒤에 찾아온 음울한 시기에 젊은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는 아테네의 모든 공적·사적인 부가 분산되고 정치적 결정은 사악하고 폭력적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제가 투표를 통해 트라케의 소도시 스키오네의 모든 남자 시민을 죽이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나이는 14세 정도였다. 이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깊은 열망을 품고 있었는데, 시칠리아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게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아 고르기아스식 산문을 애호하게 되었다.

고르기아스는 그리스의 병폐에 대한 치유책으로 범(汎)그리스주의구상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함으로써 그리스의 단결을 이루고 페르시아에 빈민층을 이주·정착시키며 이를 통해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평생 동안 이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신조가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몇 년 동안 이소크라테스는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잃고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용할 연설 원고를 써주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현재 이 연설 원고 중 몇 편이 남아 있다. 당시 웅변가가 되려는 사람은 이러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대중연설가에게 필요한 좋은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교육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후 40년이 넘게 그는 주로 비싼 수업료를 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공적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힘썼다.

100명에 이르는 그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테네의 장군으로 BC 378~355년에 활동한 티모테우스,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통치자 니코클레스, 4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2명의 역사가 에포로스(세계사 저술)와 테오폼포스(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대한 역사적 저술) 등이다.

이렇게 그가 끼친 영향은 정치와 문필 모두에 스며들어갔다. 동시에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그리스의 상태에 대한 일련의 연설문을 계속 발표했다. 이것들이 당대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가를 놓고 토론이 계속되어왔지만 성과는 없는 상태이다. 이 저술들은 범그리스주의자와 보수적인 그리스인들의 견해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에게는 중요한 문헌이다.

〈찬사〉(BC 380)·〈평화에 대하여〉(BC 355)·〈아레오파고스에 관하여〉(BC 354?)·〈필리포스에 관하여〉(BC 346)·〈범아테네주의〉 등과 같은 연설문을 주의깊게 읽은 사람은 누구나 당시의 중요한 현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지적 능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플라톤 학파의 철학적 난해함을 경멸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는 무엇보다도 세련된 표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찬 사〉를 쓰는 데는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헬렌에 대한 찬사〉(BC 390)와 같이 수사로 가득 찬 저술에 노력을 쏟는 사람이라면 언급할 만한 지적 중요성을 거의 갖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소크라테스의 결점과 선호는 그가 전개한 교육체계에서 드러난다. 불행히도 〈소피스트에 반대하여〉·〈교환에 대하여〉 등의 연설문에서 그가 펼치는 논의들은 자신의 체계에 대해 실질적으로 주장한 점보다는 다른 체계에 대해 반대한 점이 무엇인지를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분명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교육이 본질적으로 철학적이었던 반면 이소크라테스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설득기술, 즉 수사학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이다(교육학).

사실 이소크라테스가 명분의 정당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잘 표현해내는 즐거움 때문에 아무 명분에나 자신의 재능을 빌려주었을 것이라고 볼 만한 여지는 충분히 있다. 〈니코클레스에게〉(BC 372경)·〈니코클레스〉(BC 368경)·〈에바고라스〉(BC 65경) 등 이른바 키프로스의 연설문은 군주들에 대한 찬미와 관련된 것인 반면, 〈아르키다모스〉(BC 366)는 스파르타의 한 군주의 후계자를 위해 써준 것으로 스파르타와 스파르타주의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찬 연설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찬사〉나 〈범아테네주의〉와 같은 연설문에서 공공연히 아테네를 찬양해도 그다지 감동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내용에는 무관심한 채 문체만을 중시하는 것은 경멸받을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의 교육 체계의 목적은 사람들을 훈련시켜 누구나 유창한 말솜씨를 갖도록 하는 것인 듯한데, 그렇다면 자신이 다른 수사학 학교에 퍼부은 비난을 그 자신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레오파고스에 관하여〉에 그 일부가 나타나 있다.

아테네의 운명이 50년 동안 최악의 상태에 있었던 동맹시(同盟市)전쟁 말기에 씌어진 이 작품에서 그는 아테네의 고대 정치 체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고대의 정치체제 밑에서는 아레오파고스의 귀족회의가 시민들의 행동에 대해 전반적인 관리를 행사했다. 민주제 시기 이전의 이러한 정체로 돌아가자는 이소크라테스의 제안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극도의 보수 성향을 드러내줄 뿐이었다.

그가 내세운 또 하나의 주장은 범그리스주의였다.

역사가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범그리스주의이다. 이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 특히 고르기아스와 수사학자 리시아스가 그때까지 주장해왔던 이 주제를 〈찬사〉에서 펼쳐보였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의 패권을 공유하기에 적합하며 그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민족적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의 화합을 이룩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 반대했던 5세기의 위대한 인물 키몬의 정치적 신념을 다시 언명한 것이었다.

3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이소크라테스는 〈필리포스에게〉라는 편지에서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그리스인들과 화해하고 그들을 지도하여 페르시아와 싸워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필리포스는 제2차 성전(聖戰:BC 355~346)을 끝내기 위해 그리스에 개입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소크라테스가 이민족의 군주에게 조국을 바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면에서 단순했던 이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책이 낳을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는 극히 모호한 생각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예전부터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시라쿠사의 폭군 디오니시오스 1세, 테살리 페라이의 폭군 알렉산드로스 등에게도 이와 비슷한 호소를 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리스의 정치적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이소크라테스가 찾고 있던 사람은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였다. 이러한 호소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BC 350년대에 그리스는 처음에는 식민단을 사모스에 보내기로 한 아테네의 정책, 코스와 낙소스를 아테네의 지배 아래 둔 일, 돈을 달라는 아테네 장군들의 요구 등에 의해 촉발된 동맹시전쟁으로 분열되었고, 다음에는 앰펙티온인들이 부과한 벌금의 납부를 포키스인들이 거부함으로써 촉발된 성전으로 분열되었으며, 페르시아는 또다시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가 단결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소크라테스는 특히 동맹시전쟁 말기에 쓴 〈평화에 대하여〉라는 연설문에서 평화를 호소하는 것으로 그쳐야만 했다(제3차 신성전쟁).

환멸과 죽음

필리포스가 득세하자 이소크라테스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케도니아가 범그리스주의의 꿈을 성취했을 때 그리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테네와 필리포스 사이의 평화관계에 대한 희망이 모두 사라지자, 그는 곧 필리포스를 잊었다. 이소크라테스의 위대한 마지막 연설문 〈범그리스주의〉에서 필리포스는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로 그리스가 독립을 잃고 그결과 필리포스가 진짜 지배자가 되자, 절망에 빠진 이소크라테스는 스스로 굶어 죽었다(BC 338).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은 아시아에 도시를 건설해 헬레니즘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헬레니즘 세계를 만들었다.

역사가들은 이소크라테스가 헬레니즘 세계를 예언했나를 놓고 논란을 벌인다. 확실히 그는 아시아가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는 범그리스주의 사상에 집착했다. 그러나 그가 그렸던 것은 소아시아의 식민화 정도인 것 같다. 실제로 마케도니아인들의 아시아 이주지는 결코 이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빈민들을 위해 꿈꾸었던 안락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단지 빈민들의 수출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며 그리스인들을 빈곤에서 구할 거대한 새로운 공동시장에 대한 전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언자라는 호칭은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가 지닌 문제의 핵심이 '빈곤'에 있다고 보았으며 식민지 획득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을 통해 이 문제에서 동시대인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부한 상식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