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스테네스

데모스테네스

다른 표기 언어 Demosthenes
요약 테이블
출생 BC 384, 아테네
사망 BC 322. 10. 12, 아르골리스 칼라오리아
국적 그리스

요약 데모스테네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로, 아테네 시민을 선동해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항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의 연설문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정치, 사회, 경제 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인물로 후견인들에게 횡령당한 유산을 되찾기위해 웅변술을 익히고 법률과 수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웅변술이 주목을 끌면서 연설문 작가로 활동했고, 당시 그리스를 위협하던 신흥강국 마케도니아에 맞서기 위해 아테네인들을 설득했던 명연설은 그를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웅변 정치가로 남게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청년시절
  3. 연설문 작가로서의 활동
  4. 민주파의 지도자
  5. 필리포스 탄핵
  6. 연설 〈왕관에 관하여〉
  7. 감금과 망명
  8. 영향과 명성
  9. 필리포스 탄핵
  10. 왕관에 관하여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개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로, 아테네 시민을 선동해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항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연설문은 BC 4세기 아테네의 정치·사회·경제 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청년시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인물로 부유한 칼 제조업자의 아들이었다.

7세 때 아버지가 죽어 많은 유산을 받게 되었으나 후견인들에게 횡령당해 성년이 되었을 때쯤에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는 전통적인 그리스의 체육교육을 받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한 이유도 있었지만 후견인 아포보스를 고소하기 위해 웅변술을 익히고 법률과 수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역사가이며 전기작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 Bioi Paralleloi〉에 기록하기를, 데모스테네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지 못하도록 스스로 머리카락을 절반이나 밀어버리고 지하에 서재를 만들어 그곳에서 발성연습을 했다고 한다.

또 데모스테네스는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려'웅변가로서 결함이 있었으나 입에 자갈을 문 채 말을 하고 달리기를 할 때나 숨이 찰 때 시를 암송해 자신의 결점을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큰 거울 앞에서 연설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쌓았으나 그가 청년시절 민회에서 대중들에게 행한 최초의 연설은 청중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BC 363년에 아포보스와 다른 후견인 2명에 대한 소송 때는 좀더 성공적으로 연설을 했다. 이 소송으로 큰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연설전략과 논쟁방법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아포보스에 대한 연설 3편과 조각가 안테노르에 대한 연설 2편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연설문 작가로서의 활동

20세 때의 데모스테네스에게는 재산도 기술도 직업도 없었으며 어떤 방면에서도 성공할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웅변술은 주목을 끌었다. BC 4세기의 아테네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싶거나 고소를 당해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시민은 누구든지 직접 연설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이 연설문을 직접 쓸 만한 충분한 기술을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에 연설문 기초자(logographos)를 고용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아포보스를 공격하는 연설에서 보인 그의 재능은 연설문 기초자를 필요로 하는 돈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곧 그는 봉사의 대가로 기꺼이 많은 돈을 내고자 하는 부유한 권력층을 고객으로 맞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평생의 직업이 되었는데 마치 현대의 변호사가 정계(政界)에 몸담아도 개인적으로는 계속 변호사 일을 할 수 있듯이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정책에 맞선 정치적 암투에 가장 깊숙이 관여되어 있을 때조차도 연설문을 써주는 일을 계속했다.

BC 354년 30세 때에야 민회에서 〈해군위원회에 관하여〉라는 중요한 연설을 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므로 이에 대한 검토를 위해 아테네의 성인 남자 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민회(에클레시아)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가 공격을 먼저 하지는 않겠지만 싸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것을 페르시아에 보여주기 위해 조용히 해군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탄탄한 논리로 아테네인을 설득했다.

그는 또 만약 아테네가 먼저 공격을 한다면 동맹국을 전혀 갖지 못하겠지만 페르시아가 먼저 공격한다면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에 가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주장한 자신의 논리, 즉 아테네가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가장 훌륭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는 한편 위험이 닥치면 언제든지 그들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이 연설에서 신중한 재정 계획에 찬성하는 경향을 나타내면서 선박건조 기금 마련을 위해 부유층에 세금을 물리는 개정 과세안을 제시했다(웅변).

민주파의 지도자

이때부터(BC 354) 데모스테네스의 활동은 사실상 아테네 외교정책의 역사라 할 수있다.

뛰어난 연설기술 덕택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오늘날 민주당이라 부를 수 있는 집단의 실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몇몇 이익집단, 특히 부유층은 민주정체(民主政體)보다는 과두정체(寡頭政體)를 더 좋아했으며 대부분의 상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원했다. 당시 아테네 시민 대부분은 마케도니아인들이 야만인이라는 데는 공감했으나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를 신용하지는 않았다.

아테네 민회는 강한 구속력이 없이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구성원인 남자 시민이 6,000명에 달했으므로 때로는 소란스러운 기구이기도 했다. 연사(演士)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함을 질러 내려오게 하거나 비웃음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어떤 시민이라도 연설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있었지만 연설 수준이 너무 높아 최상급 연사들만이 장기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혼탁한 시대에 데모스테네스는 두각을 나타냈다. 현대인들은 준엄하고 무서운 그의 성격 때문에 그를 '금주가'(禁酒家)라 부른다. 당시 민회에서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으나 그의 재기(才氣)는 특히 신랄했다. 〈왕관에 관하여〉라는 연설에서, 평생 그의 정적(政敵)이었던 아이스키네스의 공격에 대항해 자신을 변호할 때 아이스키네스를 가리켜 '간교한 동물', '게으른 수다쟁이', '궁전의 늙은 말', '타락한 인간'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데모스테네스는 단지 욕을 하는 데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에 대해 청중들이 존경심을 잃도록 만드는 데서 오는 이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 역사를 열심히 연구했으며 연설문에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건들을 인용함으로써 효과를 올렸다. 언어 구사력을 높이고 충분한 이해를 위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iai〉를 8번이나 되풀이해 베껴 썼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민주주의에 대해 갖고 있던 과거의 신념을 기억하며 그들이 얼마나 참주정체(僭主政體)를 싫어했던가를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라고 부탁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은 그의 연설에 인간미를 불어넣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흥미를 잃지 않게 해준다. 또한 그는 매우 부지런했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낮에 들은 연설과 대화를 밤늦게까지 검토하며 그에 따라 제시될 수 있었던 답변과 연설을 여러 가지로 가정해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미리 연설을 주의깊게 준비할 시간이 있을 때는 언제나 탁월함을 보였으나 아테네 정치 생활의 성격상 즉석에서 상대에게 답변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연설문은 모두 공들여 편집된 원고들이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가 얼마나 자주 즉흥 연설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BC 354년에 한 〈해군위원회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연설은 동방세력의 위협에 대한 것이었다. 한편 북쪽의 마케도니아에서는 데모스테네스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젊은 왕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남쪽 국경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츰차츰 합병해가고 있었다. BC 356년 필리포스는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아테네인을 속인 다음 트라키아에 있던 아테네 소유지를 빼앗았으며 BC 354년에도 또다른 아테네 소유지를 차지했다. BC 353년경 스파르타와 아르카디아는 필리포스에 대항해서 아테네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뇌물과 협박을 동원해가며 필리포스가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자 아테네인들은 테르모필레 고개를 봉쇄하기 위해 소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비록 필리포스는 트라키아 해안으로 물러나 아테네와 정면 충돌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그러나 많은 아테네인들은 필리포스의 위협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계속 믿었다.

필리포스 탄핵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하는 연설문인 소위 〈필리포스 탄핵 Philippika〉의 제 1편을 일찍이 BC 351년에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진 마케도니아와 맞서는 세력의 지도자 위치를 확보했으며 그후 죽을 때까지 결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가 말했듯 "그리스를 위해 그가 선택한 길, 즉 필리포스에 대항해 그리스를 지킨다는 것은 고귀하고 정당한 일"이었다. 〈필리포스 탄핵〉 제1편에서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한때는 그들이 필리포스만큼 강력한 스파르타를 무찔렀던 점을 깨우쳐주고 만약 필리포스가 아테네인들이 생각하듯 진짜로 겁이 많다면 결코 아테네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라고 빈정대며 지적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가 필리포스가 이기도록 하지 말고 자신들의 일은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자고 제의하는 것으로 연설을 끝냈다.

이 연설은 선동적이었지만 아테네인을 자극시키지 못했다.

필리포스가 칼키디키에 침입해 올린토스 시를 위협하자 올린토스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다. BC 349년 데모스테네스는 올린토스 원조를 부추기기 위해 3개의 선동연설(〈올린토스에 관하여 Olynthiacs〉)을 했으나 올린토스는 아테네에게서 별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듬해 함락당했다. 마침내 BC 346년 4월 필리포스와 아테네인들은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을 맺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오랜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해 그에 대비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평화조약에 동의하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필리포스와 협상하러 마케도니아에 갔다.

협상 동안 필리포스는 말 잘하는 데모스테네스가 그의 계획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데모스테네스를 무시한 채 대신 데모스테네스와 함께 간 아이스키네스에게만 말을 걸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험악한 원수가 되어 돌아온 뒤 데모스테네스는 아이스키네스를 비난했으며 아이스키네스는 필리포스의 의도가 훌륭하다고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BC 346년말 〈평화조약에 관하여〉에서 데모스테네스는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의 조건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필리포스는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전략을 계속 펴나갔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할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아테네가 파견한 사절단들에 끼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갔으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 필리포스는 사절들의 몇몇 발언에 관해 아테네에 항의했다. BC 344년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 탄핵〉 제2편에서 만약 필리포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는 절대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나아가 아이스키네스와 몇몇 사람들이 아테네에 그릇된 안보지향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BC 343년 가을에 발표한 〈나쁜 사절〉이라는 연설에서는 아이스키네스가 허위 보고를 했고 잘못된 의견을 내놓았으며 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다가 뇌물을 잘 받는다고 비난했다. 이 문제를 두고 재판까지 하게 되었으나 법정은 아이스키네스를 무죄로 선언했다.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는 그뒤 위협과 반격이 계속되었고 BC 341년에는 아테네의 한 장군이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있던 마케도니아 점령지 너무 가까이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해 필리포스의 분노를 샀다.

필리포스는 그를 소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데모스테네스는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관하여〉에서 마케도니아의 '획책과 계략' 뒤에는 필리포스의 정복 계획을 반대하는 아테네의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야심이 숨어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깨고 우리와 전쟁에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그뒤 얼마 안 되어 〈필리포스 탄핵〉 제3편을 연설했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필리포스 저항 연설 가운데 단일 연설로서는 가장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그는 해군 담당관이 되어 이미 BC 354년에 자신이 제안했던 해군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나아가 필리포스에 대항해 테베를 비롯한 아테네의 옛 적과 비잔틴 제국을 포함하는 거대한 동맹을 맺었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필리포스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결판도 나지 않는 싸움이 뒤따랐다. 잘 조직된 마케도니아군은 지휘관 한 사람 아래 고도로 훈련된 보병과 기병대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그리스 동맹은 본질적으로 민병대 중심의 군대에 의존했다.

BC 338년 그리스 중북부 카이로네아에서 벌어진 전투 때 그리스 동맹군은 필리포스에게 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 참가했던 데모스테네스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했건 아니건 간에 그는 이 전투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웅변을 하는 데 뽑혔다. 아테네의 웅변가 겸 외교관인 데마데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와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필리포스는 그 이상의 행동을 자제했으며 그리스의 패배로 친(親)마케도니아 일파의 세력이 크게 강해졌지만 아테네 정복을 삼갔다. 데모스테네스는 아이스키네스와 몇몇 사람들로부터 입법상의 교묘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카이로네아 전투).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되어 그리스인들은 크게 놀랐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가 왕위를 잇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자유가 곧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 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더더욱 압제를 가했고, BC 335년 그에 대항해 테베 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도시를 파괴했다. 잇달은 승리로 더욱 대담해진 알렉산드로스는 데모스테네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반(反)마케도니아 웅변가들 8명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아테네에 요구했다. 아테네 쪽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특사를 보내 겨우 그 명령을 취소시켰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멀리 인도까지 아시아 원정을 떠났으므로 아테네는 직접적인 무력침입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BC 330년까지도 아테네에서는 친(親)알렉산드로스 일파의 세력이 강했고 이를 간파한 아이스키네스는, 6년 전 데모스테네스의 국가 봉사를 치하하는 뜻에서 그에게 황금관을 수여하자고 제안했던 크테시폰을 기소했다. 물론 그의 진짜 목표는 데모스테네스였다. 아이스키네스는 데모스테네스의 애국심과 공공 봉사를 찬양한 크테시폰의 발언을 거짓이라 비난했다.

그에 뒤따른 아이스키네스와 데모스테네스 사이의 연설 대결로 데모스테네스뿐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의 아테네 정책이 심판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리스 전역이 이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이런 사건에는 시민 배심원이 최소한 500여 명 정도만 필요했으나 다른 아테네인 또는 외국인까지도 이 토론을 보기 위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연설 〈왕관에 관하여〉

자기가 결단력없이 정책을 추진하고 뇌물을 받았으며 전투중에는 겁쟁이였다는 아이스키네스의 비난에 맞선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왕관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여기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20년 동안의 관계가 전부 나와 있으며, 마케도니아의 첩자로서 아이스키네스가 저지른 배반행위와 데모스테네스의 정책이 하나하나 대조되어 있고, 항상 그러하듯 자세한 역사 설명이 들어 있어 큰 인상을 준다. 데모스테네스는 과거 위기에 처했을 때 필요했던 행동과 또 누가 과연 그 행동을 실행했는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청중들에게 묻고 있다.

그는 아이스키네스에게 직접 "당신의 정책은 우리의 적이자 곧 나의 적이며 나라의 적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또 아이스키네스를 비열한 배신자이며 필리포스의 앞잡이라고 매섭게 비난했다. 배심원의 판결은 아주 분명했다. 아이스키네스는 1/5표도 얻지 못해 망명해야만 했다. 데모스테네스와 그의 정책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수많은 표를 얻었다.

감금과 망명

그러나 6년 뒤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도망쳐온 하르팔로스가 아테네에 맡겼던 20탈렌트를 빼앗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50탈렌트를 벌금으로 내라는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는 그 돈을 공공 목적으로 쓰려 했을 수도 있다. 비슷한 경우에 대체로 10배의 벌금을 무는 판결이 나는 데 비해 그는 2.5배 되는 벌금을 선고받은 점에 주목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뒤 탈옥했고 벌금 마련을 위해 아테네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때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그는 이제 아테네인의 눈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고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무너지는 듯해지자 아테네인은 데모스테네스를 망명지에서 불러들이고 벌금낼 돈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안티파트로스가 다시 세력을 뻗쳤으므로 데모스테네스와 몇몇 웅변가들은 다시 아테네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그러자 그의 옛 친구 데마데스는 이제 아테네인을 설득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부하들을 피해다니다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오랜 세월 국가를 위해 봉사했으나 변덕스러운 아테네 시민들에게 버림받아 죽은 그의 생애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쇠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영향과 명성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가 죽은 뒤 아테네인은 그를 기리기 위해 황동상(黃銅像)을 세웠다고 한다.

그 다음 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들은 그의 연설 중 유명한 작품들의 필사본을 편집했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 키케로는 〈왕관에 관하여〉에 큰 감동을 받아 그것을 라틴어로 옮기고 이를 위한 서문을 썼다. BC 44년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 반대해 발표한 잇달은 연설들은 데모스테네스가 필리포스에 반대했던 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키케로의 이 연설들 역시 〈필리포스 탄핵〉이라 불린다.

로마의 학생들은 웅변교육을 받을 때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을 공부했다. 중세·르네상스 시대에 그의 이름은 곧 달변을 뜻했으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데모스테네스에게 감명을 받아 그의 연설을 로저 애스컴이라는 학자와 함께 그리스어 원문으로 공부했다. 19세기의 몇몇 학자들은 당시 서로 반목하고 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한 것은 당연한 정치 발전과정이며 따라서 데모스테네스를 발전에 반대한 사람이라 비난했다.

특이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중 유럽에서 그에 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를 비롯한 일부 프랑스 작가들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침략에 저항해 싸웠다는 점에서 그를 찬미했다. 한편 몇몇 독일 작가들은 정치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뛰어났던 그의 능력을 칭송했다. 베르너 예거 같은 현대 작가들은 데모스테네스가 상당히 복잡한 정치문제를 다만 웅변술로 처리했다는 점을 들어 좀더 냉정한 견해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이나 업적에 관한 해석이 어떻든 간에 시대를 막론하고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웅변 정치가로 간주되어왔다.

필리포스 탄핵

마케도니아에서는 데모스테네스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젊은 왕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남쪽 국경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츰차츰 합병해가며 아테네를 위협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필리포스의 위협이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하는 연설문인 소위 〈필리포스 탄핵 Philippika〉의 제 1편을 일찍이 BC 351년에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진 마케도니아와 맞서는 세력의 지도자 위치를 확보했으며 그후 죽을 때까지 결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가 말했듯 "그리스를 위해 그가 선택한 길, 즉 필리포스에 대항해 그리스를 지킨다는 것은 고귀하고 정당한 일"이었다. 〈필리포스 탄핵〉 제1편에서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한때는 그들이 필리포스만큼 강력한 스파르타를 무찔렀던 점을 깨우쳐주고 만약 필리포스가 아테네인들이 생각하듯 진짜로 겁이 많다면 결코 아테네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라고 빈정대며 지적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가 필리포스가 이기도록 하지 말고 자신들의 일은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자고 제의하는 것으로 연설을 끝냈다.

이 연설은 선동적이었지만 아테네인을 자극시키지 못했다. 필리포스가 칼키디키에 침입해 올린토스 시를 위협하자 올린토스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다. BC 349년 데모스테네스는 올린토스 원조를 부추기기 위해 3개의 선동연설(〈올린토스에 관하여〉)을 했으나 올린토스는 아테네에게서 별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듬해 함락당했다.

마침내 BC 346년 4월 필리포스와 아테네인들은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을 맺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오랜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해 그에 대비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평화조약에 동의하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필리포스와 협상하러 마케도니아에 갔다.

협상 동안 필리포스는 말 잘하는 데모스테네스가 그의 계획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데모스테네스를 무시한 채 대신 데모스테네스와 함께 간 아이스키네스에게만 말을 걸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험악한 원수가 되어 돌아온 뒤 데모스테네스는 아이스키네스를 비난했으며 아이스키네스는 필리포스의 의도가 훌륭하다고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BC 346년말 〈평화조약에 관하여〉에서 데모스테네스는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의 조건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필리포스는 테베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전략을 계속 펴나갔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에 대항할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아테네가 파견한 사절단들에 끼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갔으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 필리포스는 사절들의 몇몇 발언에 관해 아테네에 항의했다.

BC 344년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 탄핵〉 제2편에서 만약 필리포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는 절대 필로크라테스 평화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나아가 아이스키네스와 몇몇 사람들이 아테네에 그릇된 안보지향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BC 343년 가을에 발표한 〈나쁜 사절〉이라는 연설에서는 아이스키네스가 허위 보고를 했고 잘못된 의견을 내놓았으며 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다가 뇌물을 잘 받는다고 비난했다. 이 문제를 두고 재판까지 하게 되었으나 법정은 아이스키네스를 무죄로 선언했다.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는 그뒤 위협과 반격이 계속되었고 BC 341년에는 아테네의 한 장군이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있던 마케도니아 점령지 너무 가까이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해 필리포스의 분노를 샀다. 필리포스는 그를 소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데모스테네스는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관하여〉에서 마케도니아의 '획책과 계략' 뒤에는 필리포스의 정복 계획을 반대하는 아테네의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야심이 숨어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깨고 우리와 전쟁에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그뒤 얼마 안 되어 〈필리포스 탄핵〉 제3편을 연설했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필리포스 저항 연설 가운데 단일 연설로서는 가장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그는 해군 담당관이 되어 이미 BC 354년에 자신이 제안했던 해군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나아가 필리포스에 대항해 테베를 비롯한 아테네의 옛 적과 비잔틴 제국을 포함하는 거대한 동맹을 맺었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필리포스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결판도 나지 않는 싸움이 뒤따랐다. 잘 조직된 마케도니아군은 지휘관 한 사람 아래 고도로 훈련된 보병과 기병대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그리스 동맹은 본질적으로 민병대 중심의 군대에 의존했다.

BC 338년 그리스 중북부 카이로네아에서 벌어진 전투 때 그리스 동맹군은 필리포스에게 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 참가했던 데모스테네스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했건 아니건 간에 그는 이 전투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웅변을 하는 데 뽑혔다.

아테네의 웅변가 겸 외교관인 데마데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와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필리포스는 그 이상의 행동을 자제했으며 그리스의 패배로 친(親)마케도니아 일파의 세력이 크게 강해졌지만 아테네 정복을 삼갔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왕관에 관하여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

자기가 결단력없이 정책을 추진하고 뇌물을 받았으며 전투중에는 겁쟁이였다는 아이스키네스의 비난에 맞선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왕관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여기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20년 동안의 관계가 전부 나와 있으며, 마케도니아의 첩자로서 아이스키네스가 저지른 배반행위와 데모스테네스의 정책이 하나하나 대조되어 있고, 항상 그러하듯 자세한 역사 설명이 들어 있어 큰 인상을 준다.

데모스테네스는 과거 위기에 처했을 때 필요했던 행동과 또 누가 과연 그 행동을 실행했는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청중들에게 묻고 있다. 그는 아이스키네스에게 직접 "당신의 정책은 우리의 적이자 곧 나의 적이며 나라의 적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또 아이스키네스를 비열한 배신자이며 필리포스의 앞잡이라고 매섭게 비난했다.

배심원의 판결은 아주 분명했다. 아이스키네스는 1/5표도 얻지 못해 망명해야만 했다. 데모스테네스와 그의 정책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수많은 표를 얻었다.

아이스키네스(Aischines)
아이스키네스(Aisch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