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

폼페이우스

다른 표기 언어 Gnaeus Pompeius Magnus 동의어 Pompey the Great, 폼페이우스 대왕
요약 테이블
출생 BC 106. 9. 29, 로마
사망 BC 48. 9. 28, 이집트 펠루시움
국적 로마

요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프리카 부대에 의해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로 불렸다.
정치가로서 무능했는데 그 까닭은 음모나 무자비한 행동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에서 솔직함과 일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지도자로서 폼페이우스는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했지만, 용의주도하고 철저했으며 완벽한 행정가였다. 그가 가슴에 품은 제국의 포부는 결코 카이사르보다 협소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전략구상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카이사르에게 넘겨주고 제해권과 동방의 자원에 의거하여 이탈리아의 카이사르 세력을 고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고,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 평원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목차

접기
  1. 초기생애
  2. 전성기
    1. 동방의 재편
    2. 제1차 삼두정
  3. 후기생애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프리카 부대에 의해 마그누스라는 칭호로 불렸다(BC 82~81). 폼페이우스의 이름은 지속적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의 종말은 루카누스의 최상의 시편들에 영감을 주었다.

제국 내에서 그는 공식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유명한 작가들이 그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동시대인들이 그에 관해 명석하거나 공정한 평가를 내린 예는 드물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에 관해 글을 쓸 때 분노보다 슬픔이 앞선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자 했다. 그의 선전은 주도면밀한 것으로 교묘하게 경쟁자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내용을 담았다.

키케로의 일관성 없는 평가는 그가 사태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뿐이다. 키케로의 연설에 나오는 폼페이우스에 대한 부풀린 찬사는 그의 편지에 실린 끈덕진 비난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도력을 존경했으며 결단의 순간에 그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혁명가도 아니고 반동도 아니었으며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틀을 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도권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으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한 방법이 귀족지배층의 이익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사태를 겪었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수동적인 역할로 떨어졌으며 귀족들이 자신의 주도권을 인정하게 만들 계기가 연이어 닥쳐오기를 기다리거나 몰래 모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기다리는 태도가 이중성의 표현이라고 보았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순전한 정치적 무능력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무능했는데 그 까닭은 음모나 무자비한 행동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에서 솔직함과 일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지도자로서 폼페이우스는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그에게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성이나 활력과 위세, 인간관계의 부드러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용의주도하고 철저했으며 완벽한 행정가였다. 그가 가슴에 품은 제국의 포부는 결코 카이사르보다 협소하지 않았다. 그는 능률적이고 청빈한 행정과 사법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동시대인들 다수가 믿듯이 자신 스스로 그런 목표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다. 당대의 가장 부자였던 폼페이우스는 막대한 재산을 신중하게 투자했다. 그의 영지는 관리하기 적합한 규모로 나뉘어 이탈리아 전역에 분포해 있었다.

그는 온갖 사치스러운 개선식 행사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잔혹한 살인경기를 벌여 서민들의 환심을 샀지만 생활은 평범했고 스토아 철학자 파나이티우스의 친구이며 찬양자였다. 3번째 아내인 무키아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그리고 딸 폼페이아를 낳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부정을 이유로 BC 62년에 이혼했다. 율리아는 그가 가장 사랑한 아내였다. 코르넬리아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았고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초기생애

폼페이우스의 가문은 원로원 귀족가문에 속했으나 BC 141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콘술(집정관) 직책을 맡았다.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고 평생 동안 그리스 학자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로마의 귀족계급 청년이 받는 정상적인 교육을 마친 것이 틀림없다. 어릴 때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참모진에서 군사경험을 쌓은 것이 그의 성격형성과 군사적 능력의 개발, 정치적 야망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동부의 피케눔에 땅이 있었고 무수한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스트라보는 콘술을 맡은 해에 재산과 가신의 숫자를 크게 늘렸다. 루키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BC 88~87) 스트라보는 술라에게 거역하고 마리우스파와 한 동료 장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나서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에서 떨어져나왔다.

킨나의 군대가 술라와 맞서 싸우기 위해 발칸 지방으로 출동하려고 할 때 그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병사들이 킨나를 구타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BC 84). 이 하극상 사건에서 폼페이우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그는 피케눔에서 모집한 3개 군단의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독립적인 동맹자 자격으로 술라와 합세하여 마리우스파로부터 로마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BC 83). 술라는 이 젊은 동맹자의 군사적 능력을 충분히 활용했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의붓딸과 결혼했다. 술라의 명령으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마리우스파로부터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탈환하는 과업을 맡겼다. 그는 2차례의 번개 같은 원정을 벌여 이 과업을 완수했다(BC 82~81).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항복한 마리우스파의 지도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적들에게 그는 술라의 백정으로 알려졌고 부하병사들에게는 '대장군'이며 '대왕'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면서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자신을 개선장군으로 맞이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해체를 거부하고 로마의 성문 앞에 나타나 술라에게 압력을 넣어 자기 요구를 관철시켰다. 술라가 쫓겨난 이후 폼페이우스는 반역자인 술란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BC 78년의 콘술직을 차지하도록 도왔다. 레피두스는 일단 콘술이 되자 혁명을 시도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신속하게 그에 맞서 법질서를 수호하는 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폼페이우스는 군대의 해체를 거부하고 그 힘으로 원로원에 압력을 넣어 자신에게 속주총독의 권한을 부여하여 스페인(히스파니아)에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그는 마리우스파 지도자 세르토리우스와 싸우는 메텔루스 피우스와 합세했다.

스페인의 재정복으로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소모되었고 그 자신과 국가의 재원도 극도로 고갈되었다.

결국에는 메텔루스가 아니라 그가 나서서 스페인 측에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반영한 타협책을 강요했다. 그의 정책은 화해와 명예회복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개인적 권위와 후원은 스페인과 갈리아 남부, 이탈리아 북부에 널리 미쳤다. 메텔루스와 달리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것은 외견상으로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선식을 치르고 BC 70년의 콘술직에 선출되기 위한 것이었다.

술라가 복권시킨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부패하고 무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폼페이우스는 국내와 국외에서 개혁을 약속했다. 그의 정적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타협이 이루어져 두 사람은 공동으로 콘술에 선출되었고 품페이우스는 또 한 차례의 개선식을 치렀다.

전성기

동방의 재편

귀족들 거의가 콘술 선출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 실제 권력의 원천은 이탈리아 외부에 있게 되었다.

로마가 해적들로부터 제해권을 되찾으려면 특별한 지휘관 직책이 별도로 신설되어야 했다. 호민관의 발의권이 부활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콘술 임기를 마친 뒤 그는 반대파 귀족들이 아나톨리아에서 미트라다테스를 상대로 원정중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건성으로 해적들을 상대하는 시늉을 했다.

마침내 BC 67년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평민회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해적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해적들을 평화로운 농민으로 정착시키는 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 로마에서 또다른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가 반대파의 약세를 틈타 폼페이우스를 미트라다테스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폼페이우스에게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고 로마의 동방 속주 전체를 재편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BC 66).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해임하고 지체 없이 소아시아로 출동하여 미트라다테스를 무찔렀다. BC 63년 미트라다테스가 죽고 나서 폼페이우스는 자유롭게 동방 속주들과 변경왕국들을 강화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6,000탈렌트를 제공하여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를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아울러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폼페이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 영향권의 한계선으로 인정하겠다는 파르티아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로마 보호령의 범위를 확대하여 흑해 연안의 콜키스와 카프카즈 남쪽의 국가들까지 포함시켰다. 아나톨리아에서 그는 새로 비시니아폰투스와 실리시아 속주를 창설했으며 이어서 시리아를 합병하고 유대를 독립적이고 축소된 성전국가(聖殿國家)로 만들었다.

동방을 재편한 것은 폼페이우스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상호연관된 지리적·정치적 요소들을 바르게 통찰하여 전반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 방안은 변경방위체제의 토대가 되었으며 큰 변화가 거의 없이 500년 이상이나 유지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권력과 위신은 BC 62년 12월 그가 브룬디시움(브린디시)에 상륙하여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 절정에 달했다. 3번째 개선식(BC 61)은 그의 업적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후 10년간 이탈리아에서 줄곧 상승세를 누렸다. 그러나 이 상승세는 카이사르의 군사력이 성장해가면서, 카이사르가 이탈리아 북부와 갈리아에 마련한 근거지로부터 폼페이우스의 전세계적인 '종속국들'(클리엔텔라이)을 점차 장악하면서 점차 위축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완강한 적은 옵티마테스라고 하는 귀족들의 내부집단이었으며 크라수스나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점차 로마에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다시 강화하여 이탈리아와 로마 민중의 상태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방해했다.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를 상대하기 위해 민중의 편을 드는 것을 삼갔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을 제1시민으로, 장차 국가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인물로 인정해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는 3번째 부인 무키아와 이혼하고 새로이 젊은 원로원 지도자 소(小)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정파에 혼인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가 자신들의 대열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으며 그의 제안은 거절당했다.

루쿨루스와 그 일파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재편안에 대한 일괄 비준을 방해하고 퇴역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할 작정이었다.

제1차 삼두정

카이사르가 스페인 총독직에서 복귀하면서 비로소 그의 원군이 생겼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카이사르는 처음에 은밀하고 비공식적인 제1차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그것은 단순한 선거협약 이상이어야 했다. 옵티마테스로부터 콘술직 하나를 빼앗아내자면 3명이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했다. 카이사르가 BC 59년에 획득한 성과를 공고히 하자면 그들간에 지속적인 연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카이사르로서는 장기집권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출세에 꼭 필요한 도구라고 보았다.

일단 콘술에 오르자 카이사르는 즉각 토지법안을 강제로 관철시키고 곧이어 캄파니아의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일리리아와 갈리아에서 5년 임기의 지휘권을 확보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사들 대부분을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수지맞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능률적으로 로마의 식량공급 문제를 해결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히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BC 56년은 삼두정의 중대한 고비였다. 귀족들은 폼페이우스가 군사임무를 띠고 이집트에 파견되는 것을 방해했으며, 한편 푸블리우스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크라수스가 그의 생명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을 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제정한 캄파니아의 토지분배에 관한 법안을 유보시키려는 기도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의심과 사나운 기세에 놀라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를 만나러 라벤나로 갔으며 카이사르는 뒤이어 자기 속주의 경계선에 있는 루카로 가서 폼페이우스를 만났다.

BC 56년의 루카 회담으로 삼두정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토대를 마련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BC 55년의 콘술직 선출을 약속받았다. 그들도 또한 5년 임기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카이사르는 지휘권을 갱신하여 5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3명은 오랜 투쟁 끝에 폭력과 부정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BC 55년초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마침내 콘술에 선출되었으며 그밖의 작은 관직들도 대부분 지지파들이 차지했다. 카이사르는 지휘권의 연장을 승인받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각각 스페인과 시리아의 지휘권을 획득했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면서 부관들을 보내 속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삼두체제는 종말로 치달았다. 율리아의 죽음(BC 54)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가장 강력한 결합고리가 깨졌고 크라수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참패를 당하고 죽었다. 삼두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합할 의향은 보이지 않았다.

후기생애

한편 로마의 성벽 바깥에서 폼페이우스는 로마 시의 무정부상태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을 목격했다(로마 내전). 그는 자신할 수는 없지만 옵티마테스가 자신과의 동맹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또 한 차례 혼인동맹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BC 54년부터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를 독재관(딕타토르)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거리의 폭력사태로 인해 선거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BC 52년 1월 클로디우스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추종하는 무장세력에게 살해당했다. 밀로는 콘술 후보로 나서려다 폼페이우스와 클로디우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이제 양쪽 파벌의 충돌은 더 큰 폭력사태로 발전했다.

원로원 건물이 군중들에 의해 불살라졌다. 더 높은 행정관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질서회복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이때를 기다렸다. 그는 신속하게 이탈리아로부터 병력을 소집했다. 귀족들은 그를 독재관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를 단독 콘술로 임명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폼페이우스가 제정한 BC 52년의 법률은 개혁에 대한 그의 진정한 관심을 보여주는 한편, 카이사르에 대한 이중적 행동을 드러냈다.

그는 사법절차를 개혁하여 존경받는 인물들로 구성된 배심원회의를 설치했다. 금품에 의한 부정선거를 처벌하는 가혹한 법률이 BC 70년까지 소급하는 내용으로 제정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카이사르의 친구들이 보기에 그것은 영락없이 카이사르를 겨냥한 것이었다. 또다른 편리한 법률은 로마에서의 행정관 임기와 속주 지휘관 직책 사이에 5년의 간격을 두도록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법률과 부재중의 입후보를 금지하는 다른 법률은 실질적으로 카이사르의 기대를 밑바탕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콘술에 지명됨으로써 규정에 따라 갈리아의 자기 군대를 해산하기 전에 기소당하지 않는 안전한 지위를 확보하기를 바랐다. BC 51~50년 카이사르가 2번째 갈리아 총독 임기를 마치기 전에 그를 소환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그같은 시도는 로마에 있는 카이사르 일파와 대리인들의 강한 반발로 좌절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야망에 대해 갈수록 우려와 의심을 했으나 공개적으로는 카이사르에게 반대하지 않다가 BC 51년말에 이르러 갑자기 자기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를 콘술에 지명해야 한다는 제안에 대해서 폼페이우스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타협안으로 내세운 카이사르의 소환 일자는 카이사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카이사르가 의지할 수단은 갈리아에서 축적한 부를 이용하여 원로원에 있는 적들을 막아낼 사람들을 사는 것뿐이었다. 전쟁이 닥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 편과 폼페이우스 편으로 비등하게 갈라졌다. 콘술들은 폼페이우스가 그래도 로마에 덜 해로울 것이라고 보고 확실하게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 BC 50년말에 콘술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으로 하여금 카이사르를 공적(公敵)으로 선언하게 하려다 실패하자 차기 콘술들과 함께 폼페이우스를 방문하여 그의 손에 칼을 넘겨주었다.

그 뜻은 군대를 모집하여 국가를 수호해달라는 것이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카이사르는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끊임없이 타협안을 제기했다. BC 49년 1월 7일 마침내 원로원은 전쟁상태를 선포했다. 4일 후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폼페이우스의 전략구상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카이사르에게 넘겨주고 제해권과 동방의 자원에 의거하여 이탈리아의 카이사르 세력을 고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맹세력인 옵티마테스로부터 규율바른 충성과 전면적인 협조를 얻지 못했으며 카이사르의 신속한 남진(南進)으로 이탈리아에서 급히 퇴각해야 했다.

디라키움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널 때에 이르러 폼페이우스의 전략에 담긴 지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추격전을 벌이다가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의 기지로부터 차단되어 우세한 지상군을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브룬디시움에 있던 카이사르의 나머지 병력에 대한 해상봉쇄를 결국 포기하게 되어 그들이 바다를 건너 카이사르와 합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의 진지를 공격하다 격퇴되었다.

서방에서 싸움을 조기에 결정짓지 못한 탓에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테살리아로 들어가야 했다. 폼페이우스는 그 뒤를 쫓아 그곳에 있는 스키피오 휘하의 원로원 군대와 합세함으로써 카이사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고비에 이르러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 동맹세력의 압력에 못이겨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의 적수가 천재적인 지휘관이 아니었더라면 그것은 충분히 현명한 결정이 되었을 것이다. 파르살루스 평원의 전투(BC 48)에서 폼페이우스는 참패를 당했다(파르살루스 전투). 그는 적군이 진지를 들이칠 때 몸을 피하여 해안으로 달아났다. 그의 지지세력들은 아프리카와 스페인, 동방 등지에서 결집하여 그뒤로도 3년이나 더 카이사르와 완강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자신은 그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죽었다.

카이사르의 신속한 추격에 쫓겨 급하게 달아나느라고 자기 함대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실리시아·키프로스·이집트로 나아갔다. 펠루시움에서 육지에 내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얻을 작정을 했다. 이집트 왕은 겉보기에 그를 환영하는 태도로 해안까지 행진해왔다.

그러나 그와 그의 신하들은 승전한 카이사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소함대가 앞바다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내 코르넬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몇몇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집트 왕이 자신을 육지까지 태어다주기 위해 보내온 작은 배에 올라타라는 음흉한 제안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육지에 내릴 차비를 하던 중 불의의 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BC 48.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