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른 표기 언어 (Gaius) Julius Caesar
요약 테이블
출생 BC 100.7.12
사망 BC 44. 3. 15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장군·정치가.재무관, 안찰관,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폼페이우스. 크라우스와 3두동맹을 맺고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솔이 되어, 국유지 분배법안 등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BC 58년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갈리아 전쟁을 수행했다. 또한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으로 원로원 지배를 타도하며 1인 지배자가 되어 각종 사회정책 및 역사의 개정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아 암살당했다.

목차

접기
  1. 카이사르 가문의 배경과 경력
  2. 카이사르의 제1차 3두정과 갈리아 정복기
  3. 카이사르의 말년
  4. 카이사르의 성품과 평가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로마의 장군·정치가. 갈리아를 정복했으며(BC 58~50), BC 49~46년의 내전에서 승리해 딕타토르(독재관)가 된 뒤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도 최고 통치자나 가장 중요한 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독일어의 '카이저', 슬라브어의 '차르', 이슬람 세계에서 쓰이는 여러 언어의 '카이사르')인 그의 성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율리우스라는 이름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생전에 로마에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달인 퀸틸리스(로마력의 제7월)를 '율리에'로 개명했다. 이 이름은 카이사르가 로마력을 개정해 만든 태양력인 율리우스력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은 동방 정교회를 믿는 여러 나라에서 아직도 부분적으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약간 개량해서 만든 태양력이다(→ 역법).

카이사르 가문의 배경과 경력

카이사르의 씨족인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의 초기 귀족계급에 속해 있었다(파트리키우스). 이 귀족계급은 BC 4세기에 지도적인 평민 가문들과 연합해 새로운 귀족계급을 형성함으로써 그후 줄곧 로마의 지배층을 이루었으나, 이러한 집안 배경은 더이상 정치적 이점이 되지 못했고 실제로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헌법상으로는 귀족보다 하위이면서도 실권이 막강한 평민 호민관 자리를 맡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를 조상신으로 섬기고 있었지만, 이 가문 사람들은 속물 근성이나 보수적인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가문은 또한 부나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유명하지도 않았다.

로마 귀족이 명성을 얻고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방법은 공직에 선출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로마에서 정치적 경력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까다로웠고, 비용도 많이 들었으며, 경쟁도 치열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경제개혁으로 재산을 일부 몰수당한 농민계급은 지배계급을 증오하게 되었다. BC 133년부터는 혁명과 반혁명이 돌발적으로 번갈아 일어났다. 귀족계급의 악정이나 실정은 더이상 계속되기 힘들었으며, 군대에 병력을 공급하는 농민계급의 지지를 받는 군사독재가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재산을 몰수당한 농민들은 대다수가 군대에 들어가 장기복무를 했으므로 이들의 지지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귀족들 사이의 경쟁은 공직과 거기에 따른 이권을 얻기 위한 전통적 양상에서 독재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안은 이 경쟁에 적극 참여한 것 같지는 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 카이사르가 BC 91년에 콘술(집정관)을 지냈고, 이듬해 콘술을 지낸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으며,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BC 64년에 콘술을 지낸 정도이다. BC 90년에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정부가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자 로마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자 당시 콘술이던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로마에 다시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탈리아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긴급 법령을 도입했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안이 로마의 귀족이면서도 이미 반귀족파의 입장에 섰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날은 7월 12일 또는 13일이고,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연대는 BC 100년이다. 그러나 이 날짜가 정확하다면, 카이사르는 법률로 정해진 최소한의 공직 취득 나이가 되기 2년 전에 몇 개의 공직을 맡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16세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BC 84년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혁명에 참여한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함으로써 공공연히 급진파의 입장에 섰다.

BC 83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동방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와 BC 83~82년의 반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후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이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군대에 복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처음에는 아시아 속주에서 복무하다가 소아시아 남동부의 실리시아로 옮겼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그는 로마로 돌아와 검찰관으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번째 공격 목표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였다. 그러나 돌라벨라는 당대의 일류 변호사인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의 변호를 받아 원로원 의원들만으로 배심원단이 구성된 재물강요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저명한 몰론에게 웅변술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 섬으로 갔다. 그는 섬으로 가는 도중 해적들에게 붙잡혔다.

카이사르는 몸값을 내고 풀려난 뒤 해군을 모집해서 그를 사로잡았던 해적들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 모든 일은 공직을 전혀 갖지 않은 채 개인 자격으로 한 것이었다. BC 74년에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가 로마에 대항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카이사르는 그와 싸우기 위해 사병을 모집했다.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정치적 성직자인 대신관단의 신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군사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이제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협력해 술라가 제정한 헌법을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부관으로 출발했지만, 술라가 죽은 뒤 급진파로 돌변했다. BC 69(또는 BC 68)년에 카이사르는 콰이스토르(재무관, 로마의 정치적 단계를 올라갈 때 맨 처음 밟아야 하는 관직)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아내 코르넬리아와 마리우스의 미망인인 그의 고모 율리아가 죽었다. 그들을 위한 공개 장례식 추도연설에서 카이사르는 킨나와 마리우스를 찬양할 기회를 얻었다. 그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먼 친척인 폼페이아와 결혼했으며 원(遠)스페인 속주(지금의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에서 콰이스토르로 일했다. 그는 BC 65년 공공건물을 관리하는 쿠룰레 아이딜레스(고위 조영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자 빌린 돈을 아낌없이 뿌려가며 이 직책에 뽑힌 것을 크게 선전했다.

BC 63년 그는 정치적 술수를 써서 대신관단을 통할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신관)에 선출되었으며, BC 62년 콘술 다음 가는 지위인 프라이토르(법무관)로 선출되었다. 프라이토르 임기가 끝날 무렵, 카이사르의 집에서 여자들만을 위한 보나 데이(땅의 풍작과 여자의 다산을 관장하는 로마의 여신) 축제가 열렸는데,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여자로 변장하고 이 종교의식에 참석했다. 이로 말미암아 추문이 생기자, 아내가 클로디우스를 집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마침내 아내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그는 BC 61~60년 스페인(히스파니아) 총독 자리를 얻었고, BC 60년 로마로 돌아온 뒤 이듬해 콘술로 뽑혔다.

카이사르의 제1차 3두정과 갈리아 정복기

카이사르는 이미 정치적 거두들과 제휴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의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이탈리아로 돌아온 BC 62년에 그의 군대가 해산되자 원로원은 그가 제대군인들에게 나누어줄 땅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다. 꾸준히 폼페이우스와 우정을 나눈 카이사르는 이제 그와 비밀협정을 맺었고 뛰어난 수완으로 크라수스를 설득해 동료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삼두정이다.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술라의 부관이었던 크라수스는 그때까지 폼페이우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방해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카이사르만이 두 사람을 화해시킬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BC 59년초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콘술이 된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의 공유지를 분배하기 위한 법안을 도입했으며, 맨 처음 분배되는 몫은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3명의 평민 호민관은 이 법안을 거부했고,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 비불루스는 대중집회가 소집될 때마다 하늘을 살피며 날씨가 나쁘다고 하면서 대중집회를 막았고 공공 업무 처리를 방해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군대에서 제대한 일부 병사를 동원해 폭동을 일으킴으로써 반대파를 위협했고, 결국 토지분배를 이루었다.

카이사르의 앞잡이인 평민 호민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의 결정으로 동방 영토에 대한 폼페이우스의 해결책까지 함께 비준되었다. 바티니우스가 내린 또 하나의 결정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키살피나(알프스 산맥과 아펜니노 산맥 및 아드리아 해 사이)와 일리리쿰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이 2개의 속주를 BC 54년 2월 28일까지 보유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갈리아트란살피나의 총독에 임명된 사람이 갑자기 죽자 폼페이우스의 권유에 따라 이 속주도 얻었다.

갈리아키살피나는 카이사르에게 신병을 모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고, 갈리아트란살피나는 로마의 북서쪽 국경 너머에 있는 땅 정복의 출발점이 되었다(갈리아 정복).

BC 58~50년 카이사르는 라인 강 왼쪽 연안에 이르는 갈리아의 나머지 땅을 정복했고, 그곳에 사는 이민족을 효율적으로 복속시켰다. 그래서 갈리아 지방은 BC 49~31년 로마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줄곧 로마의 통치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로마인의 군사장비가 북유럽 이민족의 것보다 별로 우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카이사르의 이 업적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이 업적은 위대했지만, 이것이 카이사르의 경력과 로마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중요성은 단기간에 걸친 카이사르의 브리튼 섬 공격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갈리아 정복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갈리아 정복으로 병력을 얻었고, 또한 재물과 명성을 얻음으로써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개편작업을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낳은 현재의 서양문명이라는 좁은 무대 안이 아니라 세계사라는 좀더 넓은 무대를 배경으로 살펴보면, 카이사르의 이 마지막 업적이 갈리아 정복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

BC 125년에 확립된 로마의 북서쪽 국경이 BC 58년에는 알프스 산맥에서 론 강 상류의 왼쪽 연안을 따라 내려와 피레네 산맥까지 뻗어 있었고, 세벤 산맥 기슭을 따라 가론 강 상류 유역에 이르렀지만 갈리아의 대서양 연안에는 이르지 못했다. BC 58년 카이사르는 이 국경선을 넘어 갈리아에 진격했으며, 이어서 라인 강 건너편 출신인 게르만 용병 아리오비스투스를 진압했다.

BC 57년 카이사르는 멀리 북쪽에 사는 갈리아인의 일파이며 호전적인 벨기에족을 정복했고, 그의 부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을 정복했다. BC 56년 오늘날의 브르타뉴 남부에 살던 베네티족이 북서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까지 정복당하지 않은 도버 해협의 갈리아 쪽 해안에 사는 모리니족과 라인 강 하류의 남쪽 연안에 사는 메나피족이 이 반란을 지원했다(게르만족). 카이사르는 간신히 베네티족을 다시 정복했으며 BC 55년에 나머지 두 부족을 전멸시켰다.

같은 해 코블렌츠 바로 밑에서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를 공격했고, 다음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튼(브리타니아) 섬을 급습했다. BC 54년 다시 브리튼 섬을 공격했으며 갈리아 북동부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을 진압했다. BC 53년에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라인 강을 건너 2번째로 게르마니아를 공격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BC 52년에 위기를 맞았다. 켈트족의 일파인 아르베르니족의 족장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중부지방에서 민족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알프스 산맥 건너편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던 카이사르 군대를 로마군으로부터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이들은 로마의 오랜 속주인 갈리아트란살피나의 서쪽 지방을 침략하기까지 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작전과 초토화작전으로 로마군에 대한 군수품 보급을 차단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의 설득에도 그의 동포들은 이 고통스러운 작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투리게스족은 아바리쿰(지금의 부르주)에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며 농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그 도시가 1개월도 채 지나기 전에 점령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어서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클레르몽페랑 근처에 있는 게르고비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르고비아를 단숨에 점령하려는 로마군을 물리쳤고, 로마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당한 최초의 참패였다. 그후 카이사르는 행군하는 로마군에 대한 공격을 물리쳤고, 그리하여 디종 북서쪽에 있는 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할 수 있었다. 알레시아는 게르고비아와 마찬가지로 천연의 요충지였고,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갈리아의 대군이 몰려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대군을 격퇴했고 결국 베르킨게토릭스는 투항했다. BC 52~51년 겨울과 BC 51년의 전투기간에 카이사르는 수많은 반란을 진압했고, BC 50년에는 새로 정복한 영토를 조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이 끝난 후 그는 고국에 있는 적들을 견제할 준비를 갖추었다.

카이사르의 말년

카이사르(Caesar)
카이사르(Caesar)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는 동안에도 국내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갈리아에서 약탈한 재산의 일부로 로마의 정치적 앞잡이들을 고용했다. 한편 삼두정을 이끄는 세 사람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던 동맹자 카이사르에게 사사건건 맞섰고, 크라수스는 옛날의 적 폼페이우스에게 대항했다. 세 사람은 BC 56년 4월에 카이사르의 속주인 갈리아키살피나에 있는 루카에서 회의를 열고, 분쟁을 조정해 동맹관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이 회의에서 세 사람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음해에 콘술이 되어 속주 군대에 대한 카이사르의 지휘권을 다시 5년 동안 연장하는 한편, 크라수스가 5년 임기의 시리아 총독이 되고 폼페이우스가 5년 임기의 스페인 총독이 되는 데 합의했다. 이후 크라수스는 BC 53년 파르티아인에게 참패당하고 죽었으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은 BC 54년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죽음으로써 깨졌다.

그후 폼페이우스는 점점 더 카이사르한테서 멀어져,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갈라졌을 때 폼페이우스는 어느새 귀족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귀족들은 결코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속주 총독에서 사임해 군사 지휘권을 잃게 되는 날짜와 2번째로 콘술에 취임하는 날짜 사이에 간격을 두어야 하느냐 두지 말아야 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간격을 둔다면 카이사르는 그동안에 어떤 공직도 갖지 않은 민간인으로서, 무방비 상태로 적들의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될 처지였다.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정치적으로 파멸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2번째로 콘술에 취임할 때까지 그의 안전을 보장해줄 군사력이 있는 속주를 적어도 하나는 계속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를 위기로 몰고 간 사람은 BC 50년의 콘술 가운데 하나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그는 임기가 끝나는 날짜에 카이사르가 지휘권을 내놓아야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같은 날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그러자 BC 50년 12월 1일 평민 호민관 쿠리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결의(찬성 370표, 반대 22표)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이튿날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의 허가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부대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겨주는 한편,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는 권한도 함께 넘겨주었다. BC 49년 1월 1일 원로원은 카이사르한테서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카이사르의 제안은 위압적이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해진 날짜까지'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그를 공공의 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BC 49년 1월 10~11일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키살피나와 이탈리아 사이의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리하여 그는 전쟁을 위한 최초의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사실상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 대한 로마 귀족들의 잘못된 통치를 계속 허용할 것이냐, 아니면 독재정권으로 교체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불행한 내전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로마 내전). 내전은 비극이었다.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도, 심지어는 상당수의 귀족들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로마 시민들은 대부분 평화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중요한 세 파벌이 정치적으로 모두 덫에 걸려 있었다. 카이사르가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자 옛 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심한 적개심을 품었으며, 그는 이제 적들의 처분에 자신을 내맡기거나 아니면 권력을 독점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점점 더 질투하게 되었고, 이 질투심에 쫓겨 귀족계급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진 나머지 체면을 잃지 않고는 이제 두 번 다시 카이사르와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내전의 초기 단계는 빨리 진행되었다. BC 49년 카이사르는 적들을 이탈리아에서 오트란토 해협 동쪽으로 몰아냈다.

이어서 그는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BC 49년말경 그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아드리아 해를 건넜고, BC 48년 8월 9일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디라키움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파르살루스 전투). 카이사르는 테살리아에서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장교에게 살해당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겨울을 나면서 그곳 주민들과 싸우는 한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BC 47년에 그는 아나톨리아 북동부에서 아버지 미트라다테스의 폰투스 왕국을 되찾으려고 애쓰고 있던 킴메리 보스포루스의 왕 파르나케스와 잠시 국지전을 벌였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는 이 전투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이었다.

그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지만 몇 달 뒤에는 딕타토르라는 칭호를 갖고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에서는 그의 적들이 집결해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BC 46년 그는 카르타고 근처의 타프수스에서 적을 무찌르고 로마로 개선했지만, 새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1월에 다시 스페인으로 떠났다(타프수스 전투). 그는 BC 45년 3월 17일 문다에서 이를 진압했고 그리스 로마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문다 전투). BC 44년 3월 15일 로마의 원로원에서 암살당할 때까지, 그가 이 방대한 재건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너그러움과 성급함 때문이었다.

이 2가지 성격의 결합은 그의 개인 신변에는 지극히 위험했다. 카이사르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결코 망설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반대하다가 패배한 로마인들에게는 거의 언제나 너그럽게 대했다. 따라서 너그러움은 단순히 정책적인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것을 보았다.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대규모로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를 새로운 정권의 책임 있는 지위에 앉히기도 했다.

그의 암살 음모를 선동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로마 공화제의 상징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모두 일찍이 카이사르의 적이었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는 그가 용서하고 믿고 사랑했던 사람의 칼에 찔린 카이사르의 특별한 고통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러나 60명의 음모자들 중에는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 그들의 태도가 이처럼 표변한 것은 카이사르의 정권이 점점 군주제 경향을 띠기 시작한 것에 실망한 탓도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귀족적 오만도 그에 못지 않게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출세시켜 준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이익보다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해도 그들은 로마 귀족 계급의 지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카이사르를 순교자로 만든 것이 결국 그에게 죽은 뒤의 정치적 성공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BC 44년에 살해되지 않았다면 아마 15~20년은 더 살았을 것이다.

말년에 여러 번 간질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의 몸은 보기 드물게 튼튼했다. 15~20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그는 이 시간으로 무엇을 했을까? 대답은 그가 권좌에 오른 후의 몇 달 동안 한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BC 46년에 로마력을 개정했다. BC 45년에는 무니키피움(자치시) 구성의 표준 유형을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무니키피움은 이때쯤에는 로마 시민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영토에서 지방자치단체의 단위가 되어 있었다.

BC 59년에 이미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권이 150년 전에 법률상의 법인 자격을 박탈한 카푸아 시를 부활시켰다. 또한 전임자들이 파괴한 2개의 대도시인 카르타고코린트를 되살렸는데, 이것은 제대군인과 로마의 도시노동자를 다시 정착시키기 위해 시행한 조치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는 또한 동맹국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에도 너그러웠으며(BC 49년 포 강 북쪽에 있는 갈리아키살피나의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음), 원로원의 규모를 늘려 원로원 의원들이 로마 시민 전체를 좀더 잘 대표하게 했다.

카이사르는 BC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들에게 당했던 비참한 패배를 앙갚음하고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원정을 떠나려던 참에 암살당했다.

소멸한 셀레우코스 왕조가 잃어버린 유프라테스 동쪽의 땅, 특히 바빌로니아를 카이사르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 되돌려줄 수 있었을까? 크라수스의 군대가 당했던 운명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지형이 로마 보병대에게는 불리하고 파르티아 기병대에게는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이 이런 불리한 조건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카이사르 암살은 로마인들을 다시 13년 동안의 내전으로 몰아넣었으며, 로마는 그후 다시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보유할 만한 병력을 갖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성품과 평가

카이사르는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패배한 적에게 너그러웠지만, 그럼에도 그 너그러움은 적들의 애정을 얻지 못했다. 그는 지적 능력을 전투에 적용해 눈부신 승리를 거둠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비록 사랑스럽지는 않았지만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인물이었다. 그의 정치적 업적에는 배후 공작이나 선전 같은 사소한 기술뿐만 아니라 행정력과 통솔력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필요로 했다. 이 모든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명인이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정치적 야망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했다.

그는 패배한 정적들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이 너그러움은 그가 암살당한 하나의 원인이었다(정적들에게 무자비했던 술라는 사임하고 편안히 죽었음).

카이사르의 천재성이 그의 정치적 야망이 요구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또 하나의 분야는 저술이었다. 이 가운데 그의 연설문과 편지 및 소책자는 사라졌고, 갈리아 정복과 내전에 대한 그의 보고서(이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보완되었음)만이 전해지고 있다.

카이사르는 유명한 웅변가인 호르텐시우스와 키케로가 활동한 시대에, 차례로 경쟁하면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훌륭한 대중연설가로 손꼽혔다. 카이사르의 연설과 저술은 사라진 것도 있고 현존하는 것도 있지만 모두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고모를 위한 장례식 추도연설도 정치적 선전을 위해 활용했다. 그의 전쟁기는 교묘하게 고안되어 있어서, 순진한 독자라면 카이사르가 원하는 관점에서 카이사르의 행위를 보게 된다. 이 전쟁기는 꾸밈없고 간결하며 사실에 입각한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비개인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록된 사실은 모두 주의 깊게 선택·제시되고 있다.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죽었을 때 키케로는 카토를 찬양하는 추도문을 썼다. 지금은 사라진 카이사르의 〈안티카토 Anticato〉는 이 추도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가 군사·행정·입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글을 쓸 시간을 냈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는 카토가 명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BC 46)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훨씬 더 정치적으로 강력해졌음을 깨달았다.

카이사르가 카토의 뒷덜미를 잡으려고 애쓴 것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옳은 일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150년 동안 순교자 카토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였고,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글에 나타나 있는 천재성의 증거는, 그 글이 비록 선전을 위해 쓰였지만 뛰어난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글의 평범한 목적을 간파한 독자라 하더라도 그 글을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이다.

카이사르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지적·육체적 정력이다.

그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중대한 반란을 아직 진압하지 못하고 있을 때인 BC 51년에 갈리아 정복에 관한 7권의 책(→ 갈리아 전기)을 출판할 준비를 했고, BC 49~44년의 바쁜 시기에도 내전에 관한 책과 〈안티카토〉를 썼다. 그의 육체적 정력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BC 57~56년 겨울에 시간을 내어 갈리아키살피나만이 아니라 3번째 속주인 일리리아까지 방문했다. 그리고 BC 55년 원정과 BC 54년 원정 사이의 막간에는 갈리아키살피나에서 공무를 처리하고, 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살던 난폭한 부족 피루스타이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갔다.

BC 49년에는 그해의 전투기간이 끝나기 전에 루비콘에서 브룬디시움까지 행군했고, 다시 브룬디시움에서 스페인까지 행군했다. 53세 때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뛰어난 수영 솜씨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면했다.

카이사르의 육체적 정력은 그의 난잡한 성생활이 부분적으로 설명해줄 것이다. 그의 방탕은 당시의 그리스나 로마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동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이 소문은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했고, 카이사르가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은 생전에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카이사르의 이성연애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연애 상대는 대부분 유부녀였다. 아마 카이사르는 이런 정사를 사소한 오락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2번은 그의 경력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불장난에 빠졌다.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와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그는 폼페이우스와 맺은 협상을 위험에 내맡긴 셈이다.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무키아와의 관계만큼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악명이 높았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짐으로써 파르살루스에서 얻은 명성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 그는 BC 46년에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방문하도록 허락해 대중의 분노를 샀다. 이런 행위들이 차츰 쌓이면서 옛날의 전우들과 사면받은 정적들을 자극해 결국 그는 암살당했다.

성적 정력이 넘치는 별난 성향과 냉정한 머리를 가진 이 천재는 분명 구대륙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나라에 파탄을 가져온 부패한 로마 귀족 계급의 지배를 폐지함으로써 로마 국가 및 그리스 로마 문명의 멸망을 잠시 미루었다. 이 유예기간은 동방에서는 60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서양에서도 비교적 낙후된 지역에서는 4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과두정치를 독재정치로 바꾸었는데, 이 독재정치는 그가 죽은 뒤에도 폐기되지 않았다. 그가 그때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서양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이민족 침략자들에게, 동방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파르티아 제국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문명의 생명이 연장된 것은 중대한 역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근동 지방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600~700년 동안 헬레니즘 문명이 깊이 스며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의 요소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만큼 강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리아 지방 역시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지 않아 500년이 넘도록 지중해 연안의 문명세계와 접촉하지 않았다면, 프랑크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미개 상태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업적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 영향은 구대륙의 서쪽 끝에 국한되었고,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다. BC 3세기에 진(秦)의 시황제가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가 아직까지 건재하다면 그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더 위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시황제보다 위대하지 못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라도 보통 사람과 비교해보면 그는 여전히 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