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라

술라

다른 표기 언어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요약 테이블
출생 BC 138
사망 78, 나폴리 근처 푸테올리(포추올리)
국적 로마

요약 로마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인 내전(BC 88~82)에 승리했으며 뒤이어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내면서(BC 82~79)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에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한 헌정개혁을 실시했다. BC 82년말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마음에서 펠릭스라는 이름을 썼다.
BC 94년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어 동맹시 전쟁에 참전했으며(BC 90~89), BC 88년 공화정 최고의 직책인 2인 콘술(집정관)의 한 사람이 되었고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 벌인 전쟁의 지휘관을 맡았다. 내전 후 술라는 발레리아 법에 따라 딕타토르로 임명되었는데 이 법령은 그에게 정치체제와 입법·군사·사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으며 로마 역사상 최초로 딕타토르의 임기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술라는 공화정 개혁을 완료하고 물러났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로마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인 내전(BC 88~82)에 승리했으며 뒤이어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내면서(BC 82~79)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에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한 헌정개혁을 실시했다.

BC 82년말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마음에서 펠릭스라는 이름을 썼다.

정치적으로 대단치 않은 한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사치를 좋아했으며 정치가를 지망했다. BC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휘를 받으며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와 맞서 싸웠을 때 콰이스토르(재무관)를 맡아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계략을 써서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으나 이 공적은 마리우스와 분쟁을 일으키는 출발점도 되었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의 침공을 물리치는 전쟁에 술라를 계속 기용하기는 했으나 BC 103년 시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술라는 마리우스와 공동 지휘관직을 맡게 되었다.

BC 94년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어 동맹시 전쟁에 참전했으며(BC 90~89), BC 88년 공화정 최고의 직책인 2인 콘술(집정관)의 한 사람이 되었고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 벌인 전쟁의 지휘관을 맡았다.

BC 88년 카이킬리아 메텔라와의 4번째 결혼으로 그는 중요한 동맹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평민파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결탁하여 술라 대신 지휘관으로 임명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술피키우스를 살해했으며 마리우스는 피신했다. BC 88년 미트라다테스와 전투를 위해 그리스로 떠난 그는 BC 87년 봄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했고 오랜 포위전 끝에 BC 86년 아테네도 함락했다. 미트라다테스 군대의 지휘관은 보이오티아로 달아났으나 BC 86년 뒤쫓아간 로마군과 2차례의 전투 끝에 마침내 패배했다.

BC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면한 다르다노스에서 만나 미트라다테스를 응징하는 성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아시아와 그리스에 로마 지배의 질서가 회복되고 미트라다테스는 또다시 로마의 봉신(封臣)이 되었다. 아테네에 오랫동안 머문 뒤 술라는 BC 83년 여름 병력 4만 명과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남부 이탈리아의 브룬디시움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로마를 비운 동안 평민파가 지배권을 장악해 술라는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어 있었다.

그의 법령은 폐지되고 저택은 파괴당했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리스로 피신하여 그와 합류했다. 콘술을 역임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BC 86년 술라 대신 아시아 지휘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술라에게는 여전히 행운이 따랐다. 플라쿠스는 부관에게 살해당하고 술라는 브룬디시움에서 평민파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로마로 진군을 개시했다.

뒤이은 내전기간 내내 술라는 콘술인 그나이우스파(派) 피리우스 카르보 및 소(小)마리우스(그의 아버지인 마리우스는 BC 86년에 죽음)와 싸웠다. 로마 북쪽 교외의 콜리네 성문에서 술라가 승리하고 BC 82년말 프라이네스테가 함락되어 내전은 끝났으나 학살과 추방이 뒤따랐다.

술라는 발레리아 법(Lex Valeria)에 따라 딕타토르로 임명되었는데 이 법령은 그에게 정치체제와 입법·군사·사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으며 로마 역사상 최초로 딕타토르의 임기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않았다.

BC 81년 국가체제가 개편되고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그해 벽두(1. 27~28)에 술라는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벌였다. 기념식 끝무렵의 연설에서 그는 자신에게 펠릭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그리스의 문헌에는 에파프로디토스라고 나옴). 폭넓은 헌정개혁을 추진하면서 그는 주로 로마 국가체제에서 원로원이 갖는 최고지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했으며 그가 실시한 개혁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공화정의 최후까지 존속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형사재판의 법정 수를 늘리고, 속주총독 및 군지휘관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새로운 반역죄 처벌법(Lex Cornelia Majestatis)을 고안하고, 호민관들이 입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해 승인을 받게 하고, 사법·행정 기관의 권력남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한 것을 들 수 있다.

BC 79년초 술라는 직책을 사임하고 캄파니아의 푸테올리 근처로 은퇴했다.

이 조치는 로마에 일대 화제를 일으켰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대 작가들을 비롯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술라가 개혁이 완수되는 대로 권좌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약속을 정직하게 지켰다고 보는 것이다. 사임 이후에 술라는 일개 시민으로 지내면서 줄곧 회고록 집필에 매달렸다. 마지막 날까지 원기왕성하던 그는 78년 봄 열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의 후손으로는 메텔라에게서 난 두 아이와 다섯째 부인 발레리아가 낳은 유복자인 딸이 있었다.

술라에 대한 평가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독재자이고 개혁자인 동시에 모순된 시대를 산 모순된 인간이었던 술라에 대한 평가는 고대와 현대의 여러 문필가들에 따라 각기 달랐다.

술라의 시대나 그 직후에 속하는 고대 문필가들은 그에 대해 일관된 견해를 갖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선한 의도로 시작했으나 악한 행동으로 일을 처리했던" 술라의 일관되지 못한 점에 주목했다. 술라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대체로 전제정치라든가 노예제, 잔인함, 비인간성, 훌륭한 정부가 갖추고 있어야 할 원칙의 부재 등을 부각시키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현대 학자들의 견해는 술라를 수수께끼의 인물로 보는 관점(그가 사임한 사실 때문에)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를 군주 또는 성실한 개혁가로 간주하는 시각이 많다.

술라는 당시 쇠퇴하고 있던 귀족계급의 대변자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사용해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귀족계급을 구하려 했다. 이때문에 그의 개혁은 어느정도 민주적 측면을 가지기는 하지만 내적인 지속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긴 안목으로 보자면 술라의 행동은 무의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그의 시대가 군사적·정치적으로 과도기 성격을 가졌음을 고려한다면 술라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영광스런 과거에서 힘을 얻고 극도로 혼란했던 현재를 잘 파악하면서 전통이 되살아나는 미래를 예고했던 술라는 궁극적으로 공화정 몰락 직전의 시기에 공화정의 이상을 구체화하고 그 전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실시한 개혁의 의미는 오해를 받아왔다. 즉 그는 일시적인 딕타토르일 뿐이었으며 자기 뒤를 이어 종신 딕타토르가 될 사람을 원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