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

크라수스

다른 표기 언어 Marcus Licinius Crassus 동의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요약 테이블
출생 BC 115경
사망 53
국적 로마

요약 크라수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를 펼쳤다. BC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하자 그는 로마에서 도망갔다. 젊은 장교였던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BC 83~82) 술라를 지지했으며, 82년 로마로 돌아와 술라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BC 73년경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BC 72~71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했으나 공적을 폼페이우스에게 빼앗겼다. BC 70년 폼페이우스와 힘을 합쳐 자기들을 콘술(집정관)로 선출하라고 원로원에 압력을 넣었다. BC 60년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시리아 총독을 지내던 BC 54년 무공을 쌓기 위해 동쪽의 파르티아를 침략했으나 아나톨리아 남부의 카르하이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를 펼쳐 실제적으로 원로원의 세력에 도전했다. 그가 죽은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BC 49~45)이 일어났다. BC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하자 그는 로마에서 도망갔다.

젊은 장교였던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BC 83~82) 술라를 지지했으며, 82년 로마로 돌아와 술라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폼페이우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아마도 술라가 눈에 띄게 폼페이우스를 더 좋아했던 데서 비롯한 듯하다. BC 73년경 프라이토르가 되었으며, BC 72~71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했으나 공적을 폼페이우스에게 빼앗겼다. BC 70년 폼페이우스와 힘을 합쳐 자기들을 콘술(집정관)로 선출하라고 원로원에 압력을 넣었으며, 콘술이 되자 이들은 술라의 체제를 일부 뒤엎어버렸다.

BC 60년대 폼페이우스가 국외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그는 로마에서 정치적 추종세력을 만들었다. 주로 술라에게서 빼앗은 재산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그는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신용 대부를 해주었으며, 이런 식으로 BC 62년에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BC 65년에는 켄소르(감찰관)가 되었다.

BC 60년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께 소위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아시아에 벌여놓은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법을 통과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비공식적인 연합에 들어갔고, BC 58~56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을 지지했다. BC 56년 에트루리아의 루카에서 열린 3명의 지도자 회의에서 폼페이우스와 화해했으며, 이듬해 이 두 사람은 다시 콘술이 되었다. 시리아 총독을 지내던 BC 54년 무공을 떨치기 위해 동쪽의 파르티아를 침략했으나 아나톨리아 남부의 카르하이 전투에서 패배당하고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