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

카토

다른 표기 언어 Marcus Porcius Cato 동의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Marcus Porcius Cato, 대 카토
요약 테이블
출생 BC 95
사망 BC 46, 아프리카 우티카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정치가.
별칭은 Cato the Younger.

카토(Marcus Porcius Cato)
카토(Marcus Porcius Cato)

켄소르(감찰관)를 역임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증손자로 카이사르를 비롯한 권력가들에 맞서서 로마의 공화정을 수호하려고 애쓴 보수적인 원로원 귀족들(옵티마테스)의 지도자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친척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BC 91년에 호민관을 지냄)의 집에서 자랐다. BC 72년 노예인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에 들어가 일반 병사로서 이에 맞서 싸웠다.

그뒤 마케도니아의 군지휘관(BC 67)을 거쳐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고(BC 64경) 다시 아시아 지역에 있는 속주의 관리가 되었다. 호민관 임명 예정자(BC 62 정식임명됨)로서 카틸리나 음모사건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데 찬성표를 던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분노를 샀다. 카토의 반대에 부딪힌 폼페이우스·카이사르·크라수스는 이른바 제1차 삼두정이라 불리는 연합을 결성했다. 카토는 옵티마테스 편이었던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토지 분배법 제정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키프로스 병합을 위해 로마를 떠난 적(BC 58)도 있었으나 BC 56년에 돌아온 뒤 삼두정치에 반대해 투쟁을 계속 벌였다. BC 51년 콘술(집정관)이 되는 데 실패한 카토는 내전(BC 49~45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의 보수 귀족들과 맞선 싸움)이 벌어지자 공직에서 은퇴할 결심을 했다. 그는 공화정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 과거에 자신이 반대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시칠리아 방어를 맡았으며 도저히 그 섬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테살리아에 있는 마을)에서 패배하자 카토는 소규모의 패잔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도착해 우티카에 은거했다. 공화파 군대가 타프수스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BC 46)도 문을 굳게 잠그고 나오지 않다가 결국 바다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을 내보낸 뒤 마지막 수송선이 떠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토는 원칙주의적이고 반대를 일삼는 정치인이었으나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에 원로원 보수 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렴한 지도자였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키케로의 〈우정론 Ad familiares〉 중 15편 5장에 수록됨)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카토가 죽자 곧 그의 성품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키케로의 작품으로 카토를 찬양하는 내용의 〈카토 Cato〉는 그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카이사르의 〈반카토 Anticato〉에 답하여 쓴 것이다. 시인 루카누스(AD 1세기에 활동)는 〈내전 Bellum civile〉에서 카토를 덕인(德人)의 모범으로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