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트

코린트

다른 표기 언어 Corinth
요약 테이블
위치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코린트 지협
인구 30,000명 (2015 추계)
면적 102.2㎢
대륙 유럽
국가 그리스

요약 아테네 서쪽 약 80㎞의 코린트만 동단에 고대도시 유적이 있다. BC 8세기 초 도시국가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정치적 영향력은 키웠으며 식민지 건설로 서지중해 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BC 8, 7세기 무렵 아드리아 해 연안과 마케도니아의 내륙까지 식민지를 확장했으나 약화되기 시작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등에서 성과를 나타냈으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BC 146년 로마에 정복되었다. BC 44년 로마 식민지에서 재건된 코린트는 로마 속주의 행정 수도로 번영했지만 중세 후기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코린트 시는 그리스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주요수출항이다.

고대 도시의 유적이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코린트 만 동단의 한 단구(해발 약 90m)에 있다. 이 고대 도시는 지브롤터처럼 돌출한 아크로코린토스 언덕(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지방을 연결하며, 사로니코스 만과 코린트 만을 가르기도 하는 코린트 지협에서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은 남쪽으로 약 2.5㎞ 떨어져 있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고대 도시의 위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육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옛날 코린트는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중요성을 지녔다.

이 지역에서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BC 8세기초에 코린트 도시국가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이전의 역사는 불투명하다. 코린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증대되었고, BC 8세기말까지 지협을 확고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코린트인들은 코르키라와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건설한 결과 서지중해 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BC 8, 7세기에 코린트를 다스리던 바키아드가(家)의 귀족들은 결국 키프셀로스에 의해 타도되었으며, 키프셀로스와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가 대를 이어 BC 657~550년경 이 도시를 참주로서 통치했다. 이 참주들은 새로운 식민지들을 건설했지만, 코린트가 계속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주된 원천은 여전히 지협의 점령에 있었다. 그 지협은 아티카와 펠로폰네소스 사이의 육상교통뿐만 아니라 코린트 만과 사로니코스 만을 경유하는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 사이의 교통도 지배했다.

페리안드로스는 만과 만 사이에 석조 도로를 건설하여 선박과 화물을 그 위로 운반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결과 뱃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을 도는 험난한 항해를 하지 않고도 그들의 배와 화물이 두 만 사이를 쉽게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무렵 코린트는 양쪽의 두 만에 레카이움 항(코린트 만)과 켄크레아이 항(사로니코스 만)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확장은 참주들의 지배하에서 아드리아 해 연안과 마케도니아의 내륙까지 미쳤다.

BC 550년경 키프셀로스가의 참주 정치에 이어 과두 정부가 들어서 코린트 시의 대대적인 건설작업을 착수했다. 하지만 BC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아테네가 선박조종술과 무역에서 코린트를 앞질렀으며, 그후 200년 동안 두 도시 사이의 치열한 무역경쟁이 원인이 되어 그리스의 정치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BC 546~448경)의 뒤를 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중에 코린트는 스파르타와 합세하여 아테네와 싸웠다. 그러나 그 전쟁은 아테네에 군사적 패배를 안겼음에도 불구하고 코린트의 세력을 회복하는 데는 거의 영향을 못 미쳤다. 그후 과거의 동맹국 일부와 연합한 코린트는 코린트 전쟁(BC 395~387)을 일으켜 스파르타를 격파했다.

코린트는 그후로 그리스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전쟁에 말려들었지만 그것은 여기 성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주로 보다 강력한 도시국가들의 쟁투에서 하나의 저당물 노릇을 한 것이었다.

이곳의 독립은 BC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이 도시를 코린트 동맹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코린트 시는 마케도니아에 이어 아카이아 동맹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나중에 후자의 일원으로 로마와 파멸적인 전쟁에 말려들었으며, 그결과 BC 146년 로마의 루키우스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BC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코린트를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했다. 새로운 코린트는 번창했고 로마의 속주 아카이아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

〈신약성서〉의 독자들에게는 사도 바울로가 이 도시의 그리스도교도에게 보낸 편지(Ⅰ고린·Ⅱ고린)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 시대에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쇠퇴했으며, 1458년 투르크에 정복된 후로는 하나의 지방 소도시로 몰락했다.

고대 코린트 시의 유적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의 정북쪽에 있으며, 그 도시와 언덕은 둘레 약 10㎞의 원형 성벽으로 결합되어 있다. 도시와 주항(主港)인 레카이움은 평행으로 뻗어 있는 2개의 성벽과 아고라(시의 중앙 시장) 입구인 프로필라이움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포장된 간선도로에 의해 연결된다.

아고라에 있는 중요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들이지만, 아고라가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BC 4세기의 일이었다. 그때 아고라의 남쪽을 둘러싼 길이 160m의 거대한 주랑(柱廊:포르티코)이 건설되었다. 이 남쪽 주랑의 바로 뒤에서 사로니코스 만에 있는 또 하나의 항구인 켄크레아이 항으로 향하는 도로가 시작되었다.

아고라의 북서쪽으로 약간 높은 곳에 서 있는 도리아 양식의 7개 기둥은 BC 550년경에 건립된 아폴론 신전의 유적이다. 그밖의 신전, 별장,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도기제조소, 단련장, 거대한 개선문, 기타 건물들의 유적이 점점이 들어서 있는 아고라 일대는 1896년부터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고대의 코린트 시가가 지진으로 무너진 후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현대의 코린트 시가 건설되었다.

현대의 코린트 시는 1차적으로 그리스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과일·건포도·담배의 주요수출항이다. 또한 코린트 주의 주도이자 대주교관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