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

갑옷

다른 표기 언어 armour

요약 전투에서 사용되는 보호장구.
armor, body armour라고도 함.

전투에서 공격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화살·창·작살·칼·총알 등의 여러 가지 무기를 빗나가게 하거나 흡수하는 데 쓰인다.

갑옷의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가죽이나 직물 또는 이 2가지 재료를 겹쳐서 만든 갑옷인데, 누빈 천이나 펠트 천을 보강하기도 한다. 둘째는 철 고리나 강철 고리를 엮어서 짠 쇠사슬 갑옷이고, 셋째는 금속·나무·플라스틱과 짐승의 뿔처럼 단단하고 저항력이 강한 물질로 만든 딱딱한 갑옷이다. 중세 기사들을 보호해준 판금 갑옷은 3번째 유형에 속한다.

이런 갑옷은 큼직한 강철판이나 쇠판을 대갈못으로 헐겁게 연결하고 안에 가죽을 대어서 입는 사람이 최대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갑옷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선사시대부터일 것이다. 원시시대의 전사들은 짐승 가죽과 투구로 자신을 보호했다. BC 11세기에 중국 전사들은 코뿔소 가죽을 5~7겹으로 겹쳐 만든 갑옷을 입었고, 13세기에 몽골인들도 황소가죽을 이용해 갑옷을 만들었다.

직물 갑옷도 역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BC 5세기에 그리스 중장비 보병대는 아마 섬유를 여러 겹 겹친 두꺼운 허리갑옷을 입었고, 인도 북부에서는 19세기까지 아마포를 누빈 외투를 입었다.

쇠사슬 갑옷의 이점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유연하게 바뀌면서도 적이 휘두르는 칼날을 비교적 잘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그러나 정면으로 돌진하는 무기는 대갈못으로 고정된 쇠사슬을 끊을 수 있음). 로마 제국 전역과 그 국경 너머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단순한 셔츠 모양의 쇠사슬 갑옷을 입었고, 쇠사슬 갑옷은 14세기까지 서유럽의 주요한 갑옷이었다.

유럽에서는 또한 딱딱한 철판 사이의 틈을 막기 위해 판금 갑옷 밑에 쇠사슬 조각을 대기도 했다.

인도와 페르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셔츠 모양의 쇠사슬 갑옷을 입었으며, 일본은 14세기부터 제한된 규모로 쇠사슬 갑옷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 갑옷의 쇠사슬은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유럽보다 훨씬 개방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팔에 두르는 쇠사슬과 다리에 대는 각반 및 머리에 쓰는 두건도 사용되었다.

단단한 철판으로 만든 갑옷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사용했는데, 13세기경에 다시 유럽에 등장했다.

그후 판금 갑옷은 유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갑옷이 되었지만, 17세기에 화기가 사용되면서부터 갑옷은 시대에 뒤떨어진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보병들은 허리 갑옷(목에서 허리까지 몸통 부분을 덮는 갑옷), 기다란 정강이받이(무릎 아래의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 긴 투구를 착용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로마 군단은 4~7개의 강철고리를 수평으로 잇대어 만든 원통형 허리 갑옷을 입었는데, 앞과 뒤가 열려 있어서 끈으로 졸라매도록 되어 있었다. 허리 갑옷은 목부분에 죔쇠로 고정시켰고, 목 둘레에는 두 어깨를 보호하는 수직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투구를 제외하고는 큼직한 철판으로 만든 갑옷이 암흑시대의 서유럽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쇠사슬 갑옷은 12, 13세기에 몸통과 팔다리를 보호하는 주요한 방어물이었다.

머리와 목에는 쇠사슬 두건을 썼고, 다리에는 쇠사슬로 만든 정강이받이를 댔다.

그러나 쇠사슬 갑옷은 화살이나 칼날이 빗나가는 판금 갑옷만큼 표면이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이 발달하여 몸의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판금 갑옷을 만들 수 있게 되자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세기에는 강철로 만든 판금 갑옷이 쇠사슬 갑옷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무릎과 팔꿈치 및 정강이 부분에 철판을 덧대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여러 조각의 철판을 잇대어 몸을 완전히 덮는 갑옷이 개발되었다.

1510년경부터 사용된 독일의 완전한 갑옷은 접합부분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금속옷인데, 문자 그대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몸을 완전히 감싸고, 벼린 금속으로 만든 투구에 눈 구멍과 작은 숨 구멍만 뚫려 있을 뿐이다.

왕족과 귀족의 갑옷은 금으로 정교하게 도금하고 무늬를 새겨넣거나 아름다운 돋을 새김무늬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16, 17세기에 소형 화기의 성능이 개량되자 갑옷은 더욱 두꺼워져야 했고, 따라서 무게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에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판금 갑옷을 단념해야만 했다. 허리 갑옷과 투구는 17세기에도 계속 사용되었지만, 판금 갑옷은 18세기에 완전히 사라졌다.

이무렵에는 판금 갑옷이 군인의 기동성만 방해할 뿐, 대부분의 소형 화기를 막아내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옷의 기본요소인 투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다시 나타났고, 그후 대부분의 군인들이 사용하는 기본 장비가 되었다.

오늘날 갑옷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총알과 포탄이나 수류탄의 파편을 막거나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갑옷이 일부 사용되었지만, 전투에서 일상적으로 입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오늘날의 갑옷은 작은 합금 강철판을 잇대거나 꺾쇠로 고정시켜 가슴과 샅을 덮는 데 사용한다.

여러 조각을 이어붙인 이 강철판은 서로 겹쳐지기 때문에 몸을 보호할 뿐 아니라 움직임도 자유롭다.

금속판 대신 유리섬유나 탄화붕소 및 여러 겹의 나일론 섬유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몸을 더 잘 보호해줄 뿐 아니라 입은 느낌도 훨씬 편안하다.

몸통을 덮는 오늘날의 갑옷은 흔히 방탄조끼라고 불린다.

한국의 갑옷

우리나라에서 갑옷의 제작과 사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갑옷 중에는 단단한 나무나 짐승가죽으로 만든 것도 물론 있었을 것이나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전혀 없고 대부분 쇠로 만든 것들이다. 뼈로 만든 것으로는 백제 유적인 서울시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갑옷
갑옷

쇠갑옷은 제작방법에 따라 판갑옷[板甲]과 미늘갑옷[札甲]으로 구분된다.

판갑옷은 장방형, 혹은 삼각형의 얇은 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엮어서 상체를 가리도록 고안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3~4세기경부터 등장하는데 경주 구정동고분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판갑옷은 부산 복천동, 함양 상백리, 합천 성산리(옥전), 고령 지산동 등 가야고분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으며 최근 백제 지역인 청주 신봉동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미늘갑옷은 모가 죽은 장방형의 작은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것으로서 하반신까지 가리게 되어 있다. 판갑옷에 비해 움직임이 훨씬 수월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기능적인 면에서 보다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주로 말탄 기병의 갑옷으로 이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미늘갑옷을 착용한 무사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러한 선진적인 고구려문화는 백제·신라·가야지역에까지 파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胄]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늘고 긴 여러 개의 쇠판을 끈으로 엮은 형태의 종장판주(縱長板胄)가 있고 이외에도 이마 부분에 챙이 붙은 것, 머리 위에 관모형의 가장식이 붙은 것, 옆모습은 반타원형이며 앞이 뾰족하게 처리된 것 등 다양한 형태의 투구가 존재하였다. 한편 어깨와 목, 팔뚝 등의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판갑옷과 한벌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삼국시대의 전투는 보병에 의한 육박전과 함께 기병에 의한 기마전이 있었으므로 말은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말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구가 필요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미늘로 된 갑옷[馬甲]을 입히고 얼굴에는 가리개[馬胄]를 착용한 전투용 말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며 실제로 가야지역에서는 이러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기마인물형토기의 말은 이러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으며 부산 복천동이나 합천 성산리(옥전)고분에서는 쇠판으로 만들어진 말얼굴가리개나 말갑옷이 출토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갑옷의 발달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 같으며 남아 있는 자료도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갑옷이 많이 제작·사용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들로는 두석린갑(頭錫鱗甲)·두정갑(頭釘甲)·피갑(皮甲)·면갑(綿甲)·흉갑(胸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