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

소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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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소피스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sophistes에서 유래했으며, '영리한' 또는 '능숙한 사람'을 뜻했으나 점차 '현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자·산문작가를 뜻했고, 이들이 2차 소피스트 운동을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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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C 5세기의 소피스트
  2. 소피스트 사상의 본질
  3. 교의
    1. 개요
    2. 이론적 문제
    3. 인문주의 문제
  4. 2차 소피스트 운동

그리스어권 세계를 다니면서 수업료를 받고 광범한 주제에 대해 가르쳤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sophistes에서 유래했으며, '영리한' 또는 '능숙한 사람'을 뜻했으나 점차 '현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BC 7~6세기의 '7현인'도 소피스트라고 불렸다(→ 그리스 7현인).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를 '직업적 교사'라는 뜻으로 썼지만 사실은 현인이라는 뜻과 연결된, 지혜의 교사라는 뜻도 나타내려고 했다. 소피스트가 '궤변가'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순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자·산문작가를 뜻했고, 이들이 2차 소피스트 운동을 했다.

소피스트들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 대부분 제목만 남아 있지만 최근에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들의 저술을 베낀 약간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의 주장을 요약·모방한 후대의 저술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AD 3세기 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자 이암블리코스가 쓴 〈철학에 대한 충고 Protrepticus〉와 섹스토스 엠피리코스(AD 3세기)의 원고에서 발견된 이른바 〈이중 논리 Dissologoi〉 등이다.

BC 5세기의 소피스트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소피스트는 약 30명이며 중요한 인물은 프로타고라스·고르기아스·안티폰·프로디코스·트라시마코스 등이다. 이들의 가르침은 BC 380년경까지 대략 70여 년 동안 그리스 사회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이끈 유일한 원천이었다. 주요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지만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것은 누구나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특수한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아테네 사회가 변하면서 예부터 내려오는 가문의 배경이 없는 다양한 출신의 시민들이 새롭게 진출했다. 특히 청년들은 이성적인 논증술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반대로 전통주의자들은 그들에게 크나큰 반감을 보였다. 플라톤은 전통에 대한 소피스트의 공격을 극히 부당하게 여겼다. 그러나 플라톤도 소피스트들로부터 1가지 사실, 즉 기존의 가치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전통이나 무비판적 신앙이 아니라 이성에 의거한 논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피스트 운동은 BC 5세기 아테네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피스트들은 공적 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계획된 교육을 제공했고 수사학과 웅변술을 가르쳤다(교육사). 그러나 현재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소피스트들이 웅변술과 수사학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연설의 기법뿐만 아니라 문법, 덕(aretē), 도덕의 기초 등도 가르쳤다. 그리고 사회와 예술의 역사, 시와 음악, 천문학과 물리학도 가르쳤다. BC 5세기 소피스트들은 학문의 범위와 방법에서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하는 인문주의의 수준 높은 교육방법을 처음으로 실행했다.

소피스트 사상의 본질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고 논쟁에서의 승리만을 가르쳤다는 플라톤의 평가는 아직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 논쟁술).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어떤 논증에 대해 항상 그 논증을 부정하는 반대논증을 제시해 두 논증이 모두 참이라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논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논리를 폭넓게 사용하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플라톤도 현상세계에는 반논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키가 한 대상보다는 크고, 다른 대상보다는 작은 것처럼, 한 진술이 그와 모순되는 다른 진술에 비해 진리의 정도가 더 크다고 할 수 없을 때, 이 현상은 반논리적이다(→ 관념). 그리고 플라톤은 이 반논리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진리를 얻는 데 꼭 필요한 예비단계라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반논리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고대와 근세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소피스트들을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사상도 철학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근세 사상가 중 소피스트를 그리스 철학의 역사 속에 다시 끼워넣은 최초의 인물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에 비추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정립'에 대해 '반정립'을 제시했다고 해석했다. 탈레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세계를 설명하면서 관찰자를 문제삼지 않았고 현상세계 자체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점점 배제해나갔다. 결국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 학파는 모든 현상세계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완전한 회의주의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이 자연현상의 궁극적 기초를 알 수 없다는 불신을 팽배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극단적 처지가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반정립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스트 운동은 객관주의자들의 정립을 거부하고 자연 대신 인간에 관심을 집중했다. 헤겔은 소피스트들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은 오직 정신과 그 내용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고, 그결과 인식의 주관적 요소에 관심을 둠으로써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관념론).

소피스트들과 이전 철학자들의 대조적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되었다.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철학의 최고봉으로 생각했고, 소피스트들이 너무나 반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철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더이상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 현대에 와서 BC 5~4세기 소피스트들이 제시한 많은 문제와 교의는 점점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교의

개요

소피스트들의 어떤 저술도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각 소피스트의 교의를 엄밀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사라는 직업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영국 역사학자 조지 그로트(1794~1871)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소피스트들은 동일한 신념과 교의를 지닌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명백하게 정의된 방식에 따라 해답을 찾으려고 한 일련의 질문 속에는 공통된 관심이 있었다.

이론적 문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소피스트 운동 전체의 공통점으로 여겨졌다(윤리적 상대주의). 이러한 특징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에서 잘 나타나지만, 섹스토스 엠피리코스가 지적했듯이 두 사람 모두 회의주의자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식을 감각경험에 제한했지만 감각으로 안 것은 틀림없이 참이라고 생각했다. 고르기아스는 존재하는 것은 없고, 존재한다고 해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르기아스가 공격하고 있는 것은 지각된 실재나 지각능력이 아니라, 지각된 것에 존재나 비존재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감각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는 엘레아 학파의 주장을 거부했다.

소피스트들은 현상세계 내에 관찰자를 포함시킴으로써 현상 외부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현상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소피스트들은 과학과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를 반대했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히피아스·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프로디코스 등을 보면 사정은 정반대이다. 그들은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원리에 호소하여 물질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대했을 뿐이다.

소피스트 운동의 가장 유명한 교의는 도덕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관례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고 본 점이다(자연법). 소피스트들은 흔히 자연의 법보다 인간의 법을 더 우선시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호소도 행동규범의 원천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호소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도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다는 의미에서 소피스트들이 시작한 접근법을 계승한 것이다.

인문주의 문제

소피스트의 특징으로 그들이 그리스의 전통적 종교관을 공격한 점이 자주 거론된다(그리스 종교). 사실 프로타고라스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말했고 프로디코스는 종교의 발전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했다.

크리티아스는 신을 악인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발명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은 소피스트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었다. BC 6~5세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대부분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소피스트의 인간중시 사상은 곧 인간사회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역사철학). BC 5세기 무렵 인간의 역사는 단순히 황금시대의 몰락과정 또는 선과 악의 주기적 순환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2가지 이해방식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인간의 역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진보의 과정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예술·기술·정의감 등으로 문명사회를 성취하는 과정을 묘사했다. 많은 소피스트들의 사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소피스트 교의에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덕은 교육된다고 본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덕이 귀족신분 등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다거나 특수한 개인의 특별한 자질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교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소피스트의 견해는 후세의 교육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인문주의 전통의 한 부분이 되었다.

2차 소피스트 운동

그리스 문학은 BC 1세기와 초기 로마 제국시기에 쇠퇴했지만, AD 1세기에 이르러 그리스어 문화권에서는 소피스트들의 웅변술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졌다. 이러한 그리스 정신의 부활은 수사학자·웅변술가·산문작가 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소피스트'라 불렀다(아티카 학파). 그뒤 2세기에 들어 그리스 시인들은 이른바 '제2차 소피스트 운동'을 폈다. 그러나 이 운동은 BC 5~4세기 아테네 작가를 본보기로 삼은 퇴행적 운동이었다. AD 3세기가 되면서 이 운동은 곧 쇠퇴해 그리스 문학의 주된 흐름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