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Seleucos I Nicator
요약 테이블
출생 BC 358/354, 마케도니아 에우로포스
사망 281. 8/9, 트라키아 리시마키아 근처
국적 셀레우코스

요약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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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권력을 잡기까지
  3. 왕조의 기반 강화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I Nicator)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I Nicator)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323)에 벌어진 내분 속에서 그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고, 다시 시리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권력을 잡기까지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알레산드로스 수하의 장교로서 페르시아 제국 정복전에 참전했고 BC 326년에는 히다스페스 강변에서 마케도니아 보병대를 이끌고 인도의 포루스 왕과 싸웠다. BC 324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동화시키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때 셀레우코스도 박트리아의 왕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하지 않은 마케도니아의 귀족은 셀레우코스뿐이었다.

BC 323년에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는 헤타이로이(hetairoi : 동료들) 기병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섭정왕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총독(satrap) 프톨레마이오스를 축출하려고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디아도코이). 그러나 이집트에 가서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가담했다.

BC 321년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애꾸왕)가 페르디카스의 후원자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에 대한 정벌전의 지휘를 맡았다. BC 317년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를 도왔지만 BC 316년 에우메네스가 처형된 뒤, 안티고노스는 그에게 영지의 수입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갔다. BC 316~312년에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편의 제공으로 이집트에 머물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트라키아의 왕),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를 요구한 사람)가 동맹을 맺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동맹전쟁(BC 315~311)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이 되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군대를 지휘하여 시리아 남부 가자 전투(BC 312)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다시 주의를 돌려 BC 312년 8월에 작은 병력으로 바빌론을 다시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 력으로 BC 312년 디오스(Dios) 1일(10. 7), 바빌로니아 력으로는 BC 311년 니산(Nisan) 1일(4. 3)로 기록되어 있다.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의 동쪽은 장군인 니카노르에게 서쪽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공격하게 했지만 결국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했다. BC 311년 안티고노스는 다른 적들과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셀레우코스는 여기서 제외시켰다.

왕조의 기반 강화

그뒤 몇 년 간 셀레우코스의 치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미 획득한 지위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BC 305년 다른 '후계자'(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디아도코이라고도 함)들처럼 그도 '왕'(바실레우스)이라 자칭했다. 그는 이란의 동부지역(위쪽 총독령들)을 지나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굽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고 영토를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인도에서 전쟁을 끝낸(BC 303) 것은 서부지역에서 정세가 변화한 탓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에 대항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을 때 셀레우코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BC 302년 겨울에 소아시아로 되돌아가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다(BC 301).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연합국들간에 분할되었는데, 셀레우코스는 시리아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당시 시리아 남부지방인 코일레 시리아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것이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벌인 시리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셀레우코스는 그 지방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의 수도를 티그리스 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에서 오론테스 강 유역의 안티오크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그쳤다(BC 301~300). 프톨레마이오스는 리시마코스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딸 아르시노에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에게 청혼하여 BC 298년 시리아의 로수스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가 실리시아·티레·시돈 등의 영토를 요구하자 데메트리오스와 맺은 우호관계에도 금이 갔다. BC 294년 셀레우코스의 궁정에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아파마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가 새어머니 스트라토니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건강까지 해쳤다.

셀레우코스는 아들에게 스트라토니케를 주고 그를 군의 총사령관직에 임명하여 위쪽 총동령을 맡기고 공동섭정의 지위도 주었다. BC 285년 셀레우코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사로잡음으로써 아시아를 정복하려 했던 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디미트리오스는 아파메아에 억류되었다가 BC 283년 그곳에서 죽었다. 이어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가(家)의 불화에 관계하여 그의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암살했다. BC 281년 2월 리시마코스는 코루페디움에서 셀레우코스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왕국을 차지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목표의 실현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쳐들어가기 위해 유럽을 횡단했다. 그러나 BC 281년 8월말 또는 9월초에 이집트 왕위의 '후계자'로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유골을 셀레우키아에 묻고 그에 대한 사후 숭배를 하게 했으며 그를 제우스 니카토르라는 이름으로 공경하도록 명령했다.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강력한 군주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의 치세 동안에 최대의 판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데 크나큰 관심을 쏟았고 신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또한 학술적인 조사를 장려하여, 파트로클레스가 카스피해를 탐험했고 메가스테네스가 갠지스 강을 조사했다.

그의 인상적인 얼굴과 당당한 인격을 잘 전해주는 청동흉상이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현재 나폴리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