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1세

안티고노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Antigonus I Monophthalmos
요약 테이블
출생 BC 382
사망 301, 소아시아 프리지아 입소스
국적 마케도니아

요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
(영). Antigonus Ⅰ Monophthalmus. Antigonus Ⅰ Cyclops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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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군사적 활약
  3. 그리스에서의 활동
  4. 마지막 전투

개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BC 306~168)를 창건해 BC 306년 왕이 되었다.

탁월한 전략가이며 지휘관이었던 그는 또한 명민한 통치자로서 아테네 및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이룩했다. 애꾸눈인 까닭에 모노프탈모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군사적 활약

BC 333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프리지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에는 섭정 페르디카스로부터 팜필리아와 리키아의 총독직까지 받았다.

뒤에 그는 페르디카스에 반대하여 마케도니아 총독 안티파트로스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그리고 크라테로스 등과 동맹을 맺었다(이들은 모두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이었음). 페르디카스가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섭정이 된 안티파트로스는 BC 321년 안티고노스를 아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파견해 카파도키아 총독이며 페르디카스의 지지자인 에우메네스를 공격하도록 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패주시켜 산악요새 노라에서 그를 포위공격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폴리페르콘이 안티파트로스를 계승하여 섭정이 되자 안티고노스는 BC 319년 그에게 반대해 카산드로스(안티파트로스의 아들)·프톨레마이오스·리시마코스·에우메네스와 합세했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다스리던 경쟁자 에우메네스가 폴리페르콘 편으로 넘어가자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바빌로니아 총독)와 페이톤(메디아 총독)의 지원을 받아 가비에네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나서 안티고노스는 모든 잠재적인 경쟁세력을 제거할 생각으로 에우메네스와 페이톤을 모두 처형해버렸으며 셀레우코스만 간신히 이집트로 피신했다(디아도코이).

이리하여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리시마코스·카산드로스·셀레우코스는 그에게 대적해 동맹을 맺고 제1차 동맹전쟁(BC 315~311)을 벌여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제국을 재통일하려던 그의 구상을 무너뜨리려 했다.

이에 안티고노스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헬레니즘 왕국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장애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저항을 무마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자신의 군대에게 그리스인은 모두 자유인이며 그리스에 자치를 허락하고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같은 정치적 구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즉각 되풀이한 데 이어 196년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거듭해서 사용되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부하 장교들의 도움을 얻어 카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몰아내고 에게 해의 섬지방 도시들을 '섬사람 동맹'으로 결속해 그리스 침공을 준비했으며 동맹국인 로도스 시로부터 함대를 제공받았다.

그가 카리아 정복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아들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는 가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했다(BC 312). 동방에서 이같은 새로운 위협이 닥치자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외한 모든 적대세력과 평화조약을 맺기로 작정했다.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의 계승자들)는 모두 다 그리스 도시들의 기존 경계선과 자유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안티고노스는 더이상 섭정이 아니라 단순히 아시아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담당관리)로 격하되었으며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지역과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리스에서의 활동

프톨레마이오스가 실리시아를 공격함에 따라 안티고노스에 반대하는 제2차 동맹전쟁(BC 310~301)이 벌어졌다.

BC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가 임명한 아테네 총독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축출하고 아테네의 옛 정치체제를 복원했다. 이에 감사한 아테네인들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를 '거룩한 구원자'(테오이 소테레스)로 기렸다. 이제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의 영향력은 소멸되었으며 BC 306년 디미트리오스는 키프로스 섬 연안의 살라미스 부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는 에게 해와 지중해 동부, 그리고 바빌로니아를 제외한 근동 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군대는 그를 왕으로 선포했고 친구들은 그에게 왕관을 증정했다. 안티고노스 자신은 디미트리오스를 국왕 겸 공동섭정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왕관을 보냈다. 이러한 관행은 이후 헬레니즘 세계 군주제의 전통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BC 305년 안티고노스가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자 프톨레마이오스도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도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정식으로 5개 국가로 분할되었다. 그해에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싸울 때 군사원조를 거부했던 로도스를 정복하기 위해 디미트리오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1년간 성과 없는 포위공격 끝에 로도스와 평화조약 및 동맹을 체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에서 로도스의 자율성과 중립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이같은 양보가 불가피했던 것은 그동안에 카산드로스가 아티카 지역을 침공하여 아테네를 포위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를 중부 그리스에서 몰아냈으며 아테네인들은 그 보답으로 아테네 신전의 '신나오스'('같은 신전을 소유한다'라는 뜻)라는 새로운 종교적 영예를 그에게 부여했다. BC 303년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코린트·시키온·아르고스를 점령했으며, 아카이아와 엘리스를 비롯해 아르카디아의 거의 모든 도시가 그의 편을 들었다. BC 302년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BC 337년에 창설한 범(汎)그리스 동맹을 다시 구축해 승리를 기념했다.

안티고노스 왕국의 지도 (BC 303)
안티고노스 왕국의 지도 (BC 303)

스파르타·메세니아·테살리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사절을 파견해 코린트에서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를 새로운 동맹의 수호자로 선출했다. 이 동맹의 조약은 영구적인 것으로서 당대 왕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각 회원국들은 동맹군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왕들이나 그 대리인이 지휘를 맡았다.

동맹은 그리스 세계 전반의 평화를 보장하는 한편 무엇보다도 카산드로스에 대항해 안티고노스를 지원하는 것을 첫째 임무로 삼았다(코린트 동맹).

마지막 전투

권력의 절정에 오른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는 자기 왕조의 본거지인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옛 제국 전체에 지배권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에게 경각심을 느낀 다른 경쟁자들은 서로 합세해 이제 욕심 많은 늙은이 안티고노스를 공격하고 나섰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부터 소아시아를,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를,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 서부로 쳐들어왔다. 프리지아의 섭정인 도키모스와 리키아의 스트라테고스인 포이닉스는 안티고노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안티고노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수도인 안티고네이아(BC 306년에 오론테스 강변에 세움)로 불러들이고 자신은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갔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를 기다리면서 안티고노스와 접전을 피했다. 안티고노스는 기습부대를 바빌로니아로 보내 적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BC 301년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의 연합군은 프리지아의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 및 디미트리오스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디미트리오스는 적군의 기병대를 지나치게 멀리까지 추격하는 잘못을 범했으며 그로 인해 80세 노령의 안티고노스는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안티고노스는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한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는 그리스 문명을 진심으로 찬양했으며 주로 소아시아에 여러 도시를 세우는 한편, 작은 부락 여러 개를 통합하여 레베도스와 테오스 같은 단일한 대규모 중심도시를 만들었다.

몇몇 그리스 예술가들은 그의 궁정을 아름답게 꾸몄다. 아펠레스는 그가 애꾸눈인 점(원인은 알 수 없음)을 감안해 그의 초상화를 옆면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