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Ptolemaeos I Soter
요약 테이블
출생 BC 367/366(또는 BC 364), 마케도니아
사망 283/282, 이집트
국적 이집트

요약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
(Soter는 그리스어로 '구원자'라는 뜻).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이집트 총독 시절
  4. 이집트의 왕 시절

개요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BC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BC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색인:헬레니즘).

초기생애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BC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BC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BC 336~335년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원정에 참여했던 그는 BC 330년 가을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이 자리에 있을 때인 BC 329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원지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음)에서 인더스 강으로 진격하던 중에(BC 327~325)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히다스페스 강(지금의 인도 젤룸 강)을 지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같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 대해 여러 번 영예를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페르시아인 아르타카마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인과 이란인들을 서로 섞으려 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행사였다(→ 색인:베수스).

이집트 총독 시절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신중하고 믿음직한 군대 사령관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외교술과 전략적 능력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 점은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오랜 기간에 걸친 분쟁에서 입증되었다.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바빌론에서 열린 회합을 통해 거대한 제국의 여러 속주(satrapy)들을 장군들끼리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서 인접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고, 나일 강 유역이 갖는 지리적 고립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이곳을 헬레니즘 문화권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내의 행정을 정비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하고 키레나이카(리비아의 최동부 지역)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해안선 지역도 획득했다. 그의 바람은 이를 통해 군사적 안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우호 정책을 취해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유지했으며, 이집트 원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BC 32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BC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색인:디아도코이). 그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카산드로스는 그에 앞서 BC 319년 아버지가 죽자 그가 사전에 지명해놓은 계승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그는 BC 305년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15~311년 '제국의 계승자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키프로스를 얻었다. 이 전쟁중 그는 가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BC 312)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집트인 부대가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BC 310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BC 306년 키프로스를 다시 잃었다.

키레네도 한동안 상실했으며 BC 308년 손에 넣었던 코린트를 비롯해 인접한 시키온과 메가라에 있는 중요한 그리스 도시들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BC 306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근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 해전의 승자인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도움을 받아 BC 306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그를 추종하고 있던 나머지 총독들도 BC 305~304년 제각기 왕이라 칭했다.

이집트의 왕 시절

자신을 왕이라 칭한 프톨레마이오스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계속되는 안티고노스와의 전쟁 문제였다.

이제 전쟁의 초점은 로도스 섬에 집중되어 있었다. BC 304년 그는 로도스 섬의 주민들을 지원해 안티고노스에 대항했으며, 이때 '구원자'(Soter)라는 성스러운 칭호를 얻었고 그뒤부터 그를 부를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해체는 BC 301년 소아시아의 입소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눈앞에 다가왔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에게 패배를 당했고, 이는 이들이 자기들의 왕국에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같은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간에 시리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특히 대상(隊商) 무역로의 종착지 역할을 했던 시리아 남부의 항구들이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타협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코엘레시리아(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팜필리아와 리키아, 소아시아 남부의 피시디아 일부까지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색인:입소스 전투, 시리아 전쟁).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08~306년 군사적 패배를 당해 타격을 입었고 따라서 재위 말기 15년간은 전쟁보다 동맹과 정략 결혼으로 자신의 제국을 보전하고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BC 300년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의 리시마코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BC 299(또는 298)년 그에게 자신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를 주어 결혼하게 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의붓딸인 테옥세나를 시라쿠스(시칠리아 남동부)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시집보냈으며, BC 296년경에는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자기 딸인 프톨레마이스와 그를 약혼시켰다.

디미트리오스의 매부로 이집트 궁정에 인질로 와 있던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는 의붓딸인 안티고네를 주었다. BC 298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키레네를 복속시키고 BC 294년경에는 키프로스를 비롯해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인 티루스와 시돈을 손아귀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제국의 계승자들간의 전쟁(BC 288~286)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피로스와 함께 디미트리오스에 대항했다.

이집트 함대는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 1세가 BC 315년 결성해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 섬들을 포괄했던 군도 동맹(League of Islanders)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가 그뒤 수십 년 간 지중해에서 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군도 동맹 덕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현실적인 정치적 여건에 따라 동맹과 연합 관계를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국제정세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해외 영토를 직접 통치하거나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방법으로 이집트의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정을 정비하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BC 290년 그는 아내인 베레니케 1세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세웠으며 BC 285년에는 베레니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BC 308) 둘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공동 섭정이자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이같은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 때의 형식을 따른 왕위 계승 규정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BC 283년에서 BC 28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었을 때 권력 승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왕들은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데 몰두해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없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어떤 식으로 착취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중에 이집트인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건설한 유일한 도시는 상(上)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마이스였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군사 지휘관들을 이집트 내 각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 곁에 배치한 듯하며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법적·재정적 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정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 이집트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폐제도를 도입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유화정책을 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4,000명이라는 보잘 것 없는 수에 불과한 자신의 군대에 병사들을 충원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멤피스에서 이집트와 그리스의 종교를 융합시키는 사라피스 의식을 정례화했으며 페르시아인들에게 파괴당한 파라오의 신전들을 복구했고,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편 이집트의 귀족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자와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의 장소인 무제이온(Mouseion:박물관)을 세웠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건립했다. 그는 예술과 학문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글을 쓰는 작가였다. 죽기 전 몇 년 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대한 신빙성있는 내용의 역사책을 썼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후세에 이 책을 대량으로 인용해 글을 쓴 역사가인 아리아노스를 통해 상당 부분의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생전에 몇 차례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에 이른 사람으로 찬양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모든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