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1세

안티오코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Antiochus I Soter
요약 테이블
출생 BC 324
사망 262/261
국적 시리아

요약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국의 왕(BC 280~262 재위).

BC 292경~281년에는 왕국의 동쪽을, BC 281~261년에는 왕국 전체를 다스렸다.

외국의 압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도시 건설을 장려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을 세운 셀레우코스 1세와 소그드인(人) 왕비인 아파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아버지가 다스리던 영토의 동부지역(카스피·아랄 해와 인도양 사이의 지역)이 위협받고 있을 때 그 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어(BC 292) 침입자들에게 입은 손실 일부를 회복하고 3개 도시를 다시 세웠다.

셀레우코스 1세가 동방 무역을 확대하는 데 계속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이름난 지리학자와 장군을 보내 카스피 해 주변을 탐험시켰다. BC 281년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안티오코스는 그 뒤를 이어 제국 전체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곧 이집트가 부추긴 시리아의 반란, 북부 아나톨리아의 독립운동, 그리스 도시들과 마케도니아를 다스리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일으킨 전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BC 279년 갈리아인이 그리스를 침입하여 안티고노스를 거의 파멸시킨 뒤 안티고노스와 안티오코스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다음해 갈리아인 2만 명이 소아시아로 건너왔을 때 북부지역에 있는 독립국들은 이들을 신병으로 받아들여 안티오코스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왕은 시리아를 평온하게 만드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BC 275년 동쪽에서 들여온 인도코끼리를 써서 갈리아인들을 제압했다.

갈리아인은 뒤에 동맹세력에 의해 프리지아에 정착하여 그곳을 완충국으로 만들었다. 안티오코스 덕택에 갈리아인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던 이오니아의 도시국가에서는 그를 신이라 부르며 환호하면서 '소테르'(구제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BC 275년 안티오코스는 마케도니아 전부를 통치하게 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복 누이가 안티고노스와 결혼하게 되자 양자의 동맹관계는 더욱 확고해졌다.

갈리아인이 그리스로 쳐들어오자 안티오코스는 그리스인을 자신의 영토로 옮겨 살게 하고 소아시아에 많은 도시를 새로 세워 갈리아인의 세력에 대응하도록 했다.

이란에도 도시를 세워 파르티아인이 동쪽 국경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비했다. 바빌로니아의 문화와 종교를 되살려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을 상쇄하려 했던 듯하다. 바빌론의 주민들을 티그리스 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셀레우코스의 큰 도시로 이주시켰으나 바빌론에 고대 에사길라 사원을 다시 짓기도 했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야욕이 두 나라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했다.

BC 279년 안티오코스는 남서부 소아시아의 밀레투스를 잃었고 이집트는 BC 276년 북부 시리아를 습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물리쳤으며 키레네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복 형제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력적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한 뒤 전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불리하게 바뀌기 시작했으며, 결국 안티오코스는 BC 273~272년경 페니키아와 소아시아 해안을 이집트에 빼앗기게 되었다.

서쪽에서 계속된 마찰로 제국의 극동지역에 대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력이 약해졌다. BC 280년 안티오코스는 큰아들을 동부지역의 왕으로 임명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BC 266~261년 안티오코스는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으나 BC 262년 패하고 나서 더 많은 영토를 잃었다. 얼마 후 그는 죽었고 아들 안티오코스 2세가 뒤를 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에 대해 영어로 된 1차 자료로는 에드윈 로버트 베번의 〈셀레우코스 왕가 The House of Seleucus〉(2권 1902, 재판 196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