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론

솔론

다른 표기 언어 Solon
요약 테이블
출생 BC 630경
사망 560경
국적 그리스

요약 그리스 7현인 중 한 사람으로 배타적인 귀족정치를 종식시키고 금권정치로 대체했으며 새로이 인도적인 법을 도입했다. BC 600년경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섬의 영유를 둘러싸고 메가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해 낙심해 있을 때 대중 앞에서 시를 낭송, 전쟁 재개를 부추기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BC 594년경 1년 임기의 최고 통치자인 아르콘의 직책을 맡았다. 당시 채무로 겪는 직접적인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솔론의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단행했고, 아테네 최초 성문법인 드라코 법전의 여러 조항을 개정, 인도적인 내용으로 바꿔놓았다. 말년에 친구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서 참주가 되려는 야심을 느껴 이를 반대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다.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솔론의 시대
  3. 경제개혁
  4. 정치개혁
  5. 법전
  6. 솔론의 개혁에 대한 반응
  7. 말년
  8. 평가
솔론(Solon)
솔론(Solon)

개요

그리스의 7현인(七賢人)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배타적인 귀족정치를 종식시키고 금권정치로 대체했으며 새로이 좀더 인도적인 법을 도입했다.

솔론의 시대

솔론이 살아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아직 역사나 전기를 쓰지 않았다.

BC 5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기록이 그의 시작품(불과 일부분인 300행가량의 시가 다른 작품에 인용되어 보존되어 있음)과 그의 법전, 구전자료, 기존제도에 근거한 추론 등을 토대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에 관한 기록은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일부 전설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큰 줄거리에서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솔론은 귀족가문 출신이지만 집안의 재산은 많지 않았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나 그의 여행 및 경제적 조처들로 미루어볼 때 그는 상인이었던 것 같다.

그가 최초로 유명해진 것은 BC 600년경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 섬의 소유권을 놓고 이웃 메가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해 낙심해 있을 때였다(살라미스 해전). 솔론은 그 일을 국가의 명예문제로 규정하고 아테네인들에게, "일어나 살라미스로 가자. 그 아름다운 섬을 찾아 수치를 씻어내자"고 촉구하는 시를 대중 앞에서 낭송해 전쟁의 재개를 부추겼고 결국 아테네는 전쟁에서 이겼다.

6세기초는 아테네인들에게 또다른 면에서도 어려운 시기였다. 세습 귀족계급인 에우파트리다이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가장 좋은 땅을 소유하고 정치를 독점하며 자신들끼리 파벌싸움에 골몰해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쉽게 그들의 채무자로 전락해 빚을 갚지 못할 때는 자기 소유의 땅에서 농노 신세가 되거나 심한 경우는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중간계급인 중농·수공업자·상인은 정치에서 배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솔론이 다음과 같이 설명했듯이 아테네인은 어느 누구도 이같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해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공중(公衆)의 해악은 어느 집에나 들이닥치기에 대문으로도 막지 못하고 높은 담이라도 뛰어넘으며 누가 침실 한 모퉁이로 몸을 숨긴다 해도 끝내 찾아내고 만다." 솔론이 아니었더라면 공중의 해악은 다른 그리스 여러 도시에서 그랬듯이 혁명과 뒤이은 참주정치(독재)로 귀결되었을지도 모른다.

아테네인들은 어느 계급을 막론하고 모두가 전반적으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희망을 품고 솔론에게 의지했다. 솔론은 중용을 믿고, 각 계급이 고유한 지위와 역할을 갖는 질서있는 사회를 신봉했기 때문에 그의 해결책은 혁명이라기보다는 개혁이었다.

경제개혁

솔론은 BC 594년경 이미 아르콘(1년 임기의 최고 통치자)의 직책을 지냈다.

그가 개혁가이자 입법가로서 충분한 권한을 지녔던 때는 아마도 그보다 20년쯤 뒤였던 것 같다. 그의 최초의 관심사는 채무로 겪는 직접적인 고통을 경감하는 것이었다. 그가 빚 때문에 빼앗긴 땅을 전부 되돌려주고 노예가 된 시민들을 모두 해방하도록 한 것은 포고령을 통해서인 것 같다. '모든 짐을 내던지는 것'이라고 널리 알려진 이 조치는 솔론의 시 1편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 일들은 후세의 판단을 위해…… 검은 대지가 잘 증언할 것이다.

나는 그 대지의 표면 곳곳에 박혀 있는 표석(아마도 농민들의 부채 표시)을 뽑아냈으며 그리하여 이제 예속되었던 땅이 자유롭게 되었도다. 그로써 나는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팔려간 많은 사람들, 빚의 멍에를 피해 달아나 먼 곳에서 방랑하면서 더이상 아티카 말도 쓰지 못했던 사람들을 아테네로 되돌아오게 해주었도다. 수치스러운 노예생활에 고통받으면서 주인의 변덕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을 내가 자유롭게 해주었도다."

그는 또한 장차 차용인의 인신(人身)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대부행위를 금지했으나 토지의 재분재를 요구하는 빈민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전체의 번영을 증진하기 위한 조치를 통과시키고 농업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체할 직업을 제공해주었다. 예컨대 상업과 전문직이 장려되었으며 올리브유를 제외한 농업 생산물의 수출이 금지되었다(곡물 수출이 늘어나면서 아테네인들이 먹을 곡식이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임). 한편 여태까지 사용하던 것보다 더 적절한 기준에 의거해 아테네 고유의 주화를 제조함으로써 주화 사용이 촉진되었고 새로운 도량형이 도입되었다.

고고학적 증거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당대의 상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주화와 아테네의 생산품, 특히 올리브유와 도기가 급속히 보급된 것은 그같은 조치의 효력을 입증해준다. 빈곤은 완전히 퇴치되지는 않았어도 솔론의 개혁 이전과 같은 절박한 문제는 더이상 아니었다.

정치개혁

솔론의 새로운 정치체제는 귀족계급의 권력독점을 폐지하고 대신 부유한 시민이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곡물·기름·포도주 등 주요농산물을 기준으로 연간 소득을 조사해 그에 따라 시민을 4가지 소득층으로 나누었다(화폐를 포함한 다른 형태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도 같은 가격의 농산물을 기준으로 평가했음). 이때부터 정치적 특권은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이같은 구분을 토대로 배분되었다. 모든 시민은 민회(→ 에클레시아)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고 민회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최고주권기관으로서 법률과 포고령을 의결하고 관리를 선출하며 법원의 가장 중요한 판결에 대한 상소를 다루었다(에클레시아). 극빈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민회의 일을 미리 준비하는 신설된 400인회(불레)에서 1년 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

그보다 높은 정부 직책은 상위의 두 소득층에 속하는 시민의 몫이었다. 이리하여 장차 민주정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유서 깊은 아레스 언덕 협의회(아레오파고스)에는 강한 보수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오랜 기간 평민들 스스로 옛 귀족가문 출신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법전

솔론이 미래의 아테네 복지에 공헌한 3번째 큰 업적은 새로운 법전을 만든 것이었다(그리스법).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인 드라코 법전(BC 624경)은 당시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었다.

드라코 법전은 놀라울 정도로 엄한 것이 특징이었기 때문에('가혹하다'라는 뜻의 영어 'draconian'은 여기서 유래했음) 잉크가 아니라 피로 씌어졌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민법적 측면에서 이 법은 채무로 인한 노예화를 허용했고 거의 모든 형사 범죄에 대해 사형을 내리도록 규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솔론은 살인죄에 관한 것만 빼고 이 법의 모든 조항을 개정해 아테네의 법률을 훨씬 더 인도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의 법전은 이후 보완·수정되기는 했지만 BC 5세기말까지 아테네 성문법의 기본이 되었으며 BC 5세기에 새로 제정된 법전에도 그 일부가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솔론의 개혁에 대한 반응

솔론이 자신의 과업을 완수했을 때 각계 각층에서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다가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귀족들은 그가 부분적인 개혁에 머물기를 바랐고, 빈민들은 거꾸로 모든 토지의 평등한 분배를 원하면서 그같은 재분배를 실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가 참주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비록 자유·정의·인도주의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결코 평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독재권력을 장악하려는 야심도 없었다. 그의 시에는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많은 특권을 주었노라……부자와 권세가들이 잘못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으며 양측 모두에게 강력한 보호자가 되어 어느 쪽도 부당하게 득세하는 일이 없도록 했노라. 참주가 되어 강제로 무언가를 이루거나 귀족과 하층민들이 풍요한 땅을 똑같이 나누어 갖게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도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불만을 갖기는 했어도 솔론의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그의 조치는 100년간 효력을 갖는 것으로 선포되었고 회전 나무판에 새겨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게시되었다. 이후 그는 더이상의 논란과 해명을 피하기 위해 약속하고 여행을 떠났다.

말년

그가 방문한 곳 가운데는 이집트와 키프로스가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시에서 확인된다. 전설 속의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와 만났다는 유명한 일화는 연대의 차이 때문에 신빙성이 적지만 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통해서 부와 권력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솔론이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은 귀족출신 권력자들을 우두머리로 한 지역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솔론은 살라미스의 최후 결전 때 장군이었으며 아티카 북동부의 지도자인 친구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로한 정치가 솔론의 절박한 경고를 무시했으며 심지어는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다. "머지 않아 시민들은 나의 광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진실이 우리 가슴속에 모습을 나타낼 때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옳았음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BC 560년 참주가 되었다. 그는 곧 쫓겨나기는 했지만 솔론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다.

평가

솔론은 그리스인의 기본 미덕인 중용의 덕을 구현했다.

아티카에서 그는 최악의 빈곤상태를 종식시키고 동료 시민들에게 조화로운 정치체제와 인도적인 법전을 제시해주었다. 시기상으로 서사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BC 800경 활동), 그리고 5세기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중간에 자리잡았던 솔론은 아테네의 제일 가는 시인이자 진정으로 아테네에 속했던 최초의 시인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도전하며 조언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매개수단이었던 그의 시는 그의 정치술을 발휘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리스인들이 BC 6세기에 활동한 사람들 중 지적·정치적으로 탁월했던 7대 현인의 명단을 작성한 것은 BC 5세기말부터였던 것 같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인정한 가장 초기의 명단은 후세의 문필가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으며 그때문에 그들은 여러 경쟁자들을 포함시켜 10명에서 심지어는 17명까지 그 명단을 늘렸다. 어쨌든 그 모든 명단에는 4명의 이름이 어김없이 포함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테네의 솔론이었다.

이 사실은 그에 대해 사람들이 변치 않고 존경심을 품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