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

투키디데스

다른 표기 언어 Thucydi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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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그리스

요약 BC 5세기에 일어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이다. 이 책은 한 국가의 전쟁수행 정책을 정치적·도덕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기록이었다. 투키디데스는 금광의 채굴권을 비롯하여 재산을 많이 소유했고, 트라키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실력자였다. BC 430~429년 흑사병이 돌았을 때 그는 전염병에 걸렸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목격했다. BC 424년에는 군사행정관인 스트라테고스로 뽑혔고, 트라키아 방면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암피폴리스를 점령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재판을 받고, 추방을 선고받았다.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은 아테네가 몰락하고 BC 404년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에야 끝났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예정된 결말에 이르기 전에 갑자기 중단된 사실로 미루어 BC 404년 직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투키디데스(Thucydides)
투키디데스(Thucydides)

개요

BC 5세기에 일어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이하 〈전쟁사〉)의 저자이다.

이 책은 한 국가의 전쟁수행 정책을 정치적·도덕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기록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역사편찬).

생애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대하여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그가 저서 속에서 자신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사실(고대 학자들도 그 이상은 알고 있지 못했던 것 같음)뿐이다.

그는 아테네인으로 BC 431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중대한 사건임을 인식한 동시에 그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예측하고 전쟁을 처음부터 관찰·기록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할 만큼 연륜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늦어도 BC 46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의 자세한 서술이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들, 즉 BC 431년 직전에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BC 424년 막중한 군사행정관인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 이상이었던 게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의 또다른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보다 젊은 세대에 속한다.

투키디데스의 아버지 이름은 올로로스였고, 아테네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올로로스는 아마 어머니쪽으로 트라키아인의 피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밀티아데스의 인척이었는데, 밀티아데스는 올로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트라키아(트라케)군주의 딸과 결혼했다.

투키디데스는 타소스 섬 맞은편에 있는 금광의 채굴권을 비롯하여 트라키아에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트라키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실력자였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BC 430~429년 흑사병이 돌았을 때 그는 아테네에 있었다. 그 자신도 전염병에 걸렸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후 BC 424년 그는 그해의 10인의 스트라테고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고, 지역적 연고 때문에 타소스에 기지를 두고 있는 트라키아 방면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한겨울에 기습 공격을 시작해 중요한 도시인 암피폴리스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이 실수 때문에 투키디데스는 소환당해 재판을 받고, 추방을 선고받았다. 투키디데스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이 추방령 덕분에 〈전쟁사〉집필에 전념할 수 있었고, 특히 펠로폰네소스 쪽(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널리 여행하면서 좀더 많은 정보에 접할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았다.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은 아테네가 몰락하고 BC 404년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에야 끝났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쟁사〉가 예정된 결말에 이르기 훨씬 전에 갑자기 중단된 사실로 미루어보아 BC 404년 직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강화조약 체결 뒤에 이어진 혼란기에 폭력에 희생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의 무덤과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아테네에 세워진 것은 2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후세의 명성

그가 후세에 얻은 명성의 내력은 기묘하다.

그가 죽은 지 2세대 뒤에 3명의 역사가가 그가 중단한 부분부터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서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이 말없는 존경의 표시와 그가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후세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투키디데스는 오늘날 남아 있는 BC 4세기의 문헌 어디에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도 BC 411년에 아테네에서 일어난 혁명을 묘사한 〈아테네 헌법 Constitution of Athens〉에서 투키디데스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설명은 많은 점에서 투키디데스와 다르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투키디데스를 헤로도토스와 함께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 언급한 것은 BC 4세기말에 이르러서였다.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의 학자들이 그의 책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책은 1~5세기에 이집트에서 많이 복사되었고,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을 게 분명하다. 키케로와 디오니시오스(그는 투키디데스의 탁월함에 대해 무모한 이의를 제기했음)의 글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BC 1세기에는 투키디데스가 위대한 역사가로 자리잡았고, 이후 그의 명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사

〈전쟁사〉 집필 계획과 범위

8권으로 나누어진(투키디데스 자신이 나눈 것은 아닌 듯함) 〈전쟁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기 6년 반 전인 BC 411년 가을에 일어난 사건들까지만 기술하고 갑자기 중단되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즉 그리스의 3명의 역사가로 투키디데스보다 젊은 동시대인인 크라티포스, 한 세대 뒤에 살았던 크세노폰, BC 4세기말에 살았던 테오폼포스는 모두 투키디데스가 중단한 부분부터 그리스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크세노폰은 투키디데스가 돌연히 중단한 부분 거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부터 느닷없이 시작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저술은 발표된 직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8권 이외에는 더이상 발표된 것이 없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자료나 정보를 이용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저술은 모두 그가 죽은 뒤에 발표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크세노폰(Xenophon)
크세노폰(Xenophon)

또한 〈전쟁사〉의 몇몇 부분, 특히 마지막 권은 불완전한 상태로 발표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 대해 그가 좀더 많이 알았다면 훨씬 더 길게 썼을 것이고, 또한 '불안한 휴전' 기간의 아테네 정치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알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서술 가운데에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다소 포함되어 있다.

그는 글을 쓸 때 뚜렷한 3단계를 밟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사건들을 기록해두었으며, 2번째 단계에서는 이 기록을 정리하고 수정해서 일정한 순서를 가진 연대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투키디데스가 의도한 최종 형태는 아니었다. 마지막 3번째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정교하게 다듬는 마무리 서술이 이루어졌는데, 전쟁의 예비단계(제1권), '10년전쟁', 시칠리아 섬을 정복하기 위한 아테네군의 원정에 관한 서술이 그 보기이다.

투키디데스는 계획에 따라 집필하면서도 '기록' 보완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어쩌면 〈전쟁사〉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부분마저도 죽을 때까지 보완했을지 모른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부분이 새로 덧붙여진 것은 확실하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투키디데스가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집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자신이 겪었던 사건들과 성년이 된 후 거의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을 그야말로 동시대인의 관점에서 역사로 쓰는 일이다. 투키디데스는 사건들(그는 이 모든 사건들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찰했으며, 그중 몇몇 사건에는 적극 참여하기도 했음)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했다.

그는 후세를 위해 완벽한 역사를 쓰고자 했으며, 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이 일에 성공했다. 그가 작업을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완전한 서술(위에서 말한 3번째 단계)까지 끝낸 부분은 전쟁이 끝나기 8년 반 전인 BC 413년 가을까지였고, 2번째 단계까지 끝낸 것은 전쟁이 끝나기 6년 반 전까지였다.

전쟁 말기에 그는 잇따라 일어나는 사건들을 관찰하고 조사하여 초고를 쓰는 동시에 이미 쓴 것을 수정하거나 보완했다. 27년이나 계속된 전쟁 동안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언제쯤 전쟁이 끝날지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신의 〈전쟁사〉가 어느 정도의 길이가 될지, 그리고 그 〈전쟁사〉의 마지막 모습이 어떤 것이 될지 알지 못했다. 전쟁의 마지막 6년에 대해서는 2번째 단계의 작업조차 일관성있게 끝내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전쟁이 끝난 얼마 후에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완성할 수 있었던 부분은 문자 그대로 결정판 역사이다.

성격 연구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정치적 원인 말고도 2가지 유형의 성격, 즉 항상 활동적이고 혁신적이며 혁명적이고 불온한 아테네인들과 동작이 느리고 좀더 신중한 펠로폰네소스인들, 특히 '성공으로 흥분하거나 불행으로 절망하지 않는', 조용하고 자신만만한 스파르타인들 사이의 대립에 관해서도 흥미를 가졌으며 또한 그것을 강조했다.

투키디데스는 사실은 개인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활동과 고통 및 전체 시민의 성격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개개의 인물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했다. 아테네의 무자비한 선동가 클레온, 시라쿠사의 자칭 온건파 지도자인 헤르모크라테스, 용감한 니코스트라토스, 그리고 무능한 알키다스처럼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몇몇 인물들의 성격을 그들의 언행으로 묘사하는 외에, 테미스토클레스(이 인물은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본 줄거리에서는 벗어난 인물임)와 페리클레스 및 브라시다스알키비아데스의 성격과 영향력을 뚜렷이 묘사하기 위해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갔다.

이 4명은 모두 적극적이고 혁명적인 유형의 인물이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행동이 신중하고 온건하며 안정된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담한 상상력과 지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투키디데스가 생각하기에 정말 독특한 인물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였다. 전쟁 동안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각각 자기 나라 안의 보수적인 무사안일주의자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넓게 보면 혁명가와 보수주의자의 갈등은 대담한 편인 아테네와 신중한 편인 펠로폰네소스인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페리클레스(Pericles)
페리클레스(Pericles)

투키디데스가 스파르타의 위대한 혁명가 리산드로스가 아테네를 물리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한 전쟁 말기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죽은 것은 참으로 아까운 노릇이다. 아테네의 이 패배는 어떤 측면에서는 지적으로 우월하고 대담한 성격이 완고하고 안정된 성격(특히 안정성은 전쟁 후반기에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아테네인 알키비아데스에게 가장 부족한 자질이었음)에 패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에 패배를 안겨준 사람은 주로 아테네인 못지 않은 대담성과 지성을 겸비한 스파르타인 브라시다스와 리산드로스였다.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연구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상전 중에 식량 공급을 어떻게 지탱하느냐 하는 문제 외에 막강한 육군(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막강한 해군(아테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어떤 어려움에 부딪치며, 또 그러한 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울러 투키디데스가 연구한 것은 포위 전투의 세세한 측면, 산악지방에서 중무장한 부대가 치르는 전투의 어려움, 사납고 다루기 어려운 북부 이민족들과 싸우는 어려움, 해변에 진을 친 적군의 저항을 무릅쓰고 상륙 작전을 강행하려는 군대, 시라쿠사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간 전투, 아테네 해군의 기량과 대담한 작전, 시라쿠사인들이 이 작전을 이겨낸 방법, 시칠리아에서 참패를 당한 뒤 아테네 함대의 예기치 못한 회복 등이다.

전쟁의 이러한 온갖 측면에 대해서 그는 날카롭고 전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 초기 역사를 다룬 서문에서 투키디데스는 해상 무역과 해군력의 발달 및 주요자원의 축적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글은 육군과 해군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체와 역사적 목적

투키디데스는 아테네형 지식인이었다.

눈에 띄게 개성적인 그의 문체는 극작가인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당시의 소피스트들과 같은 시대에 살며 자라난 한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글은 압축되어 있고 직설적이며, 때로는 엄격할 만큼 꾸밈이 없고, 입으로 낭송하기보다는 눈으로 읽기에 적합하게 쓴 글이다. 자신이 관찰한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을 과학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가 이따금 서술적 산문의 명쾌함을 잃는 것은 자신의 발언을 삽입하는 경우뿐이다.

그는 추상적인 표현과 수사적 대구법의 모호함을 좋아하는데, 이때문에 문장이 난해해지는 경우가 많다.

〈전쟁사〉를 시작하는 서문에서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작업과 목표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설(직접 들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거나 간에)과 전쟁 활동에서는 진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몇몇 전투는 직접 목격했음에도 모든 전쟁 활동을 최대한 철저히 조사했다.

잘못된 기억이나 편견으로 인해 직접 목격한 것조차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설을 옮겨 적을 경우, 그는 본래의 상황에 걸맞게 자신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실제 연설의 전체적 의미가 반영되도록 충실을 기했다. 그로서는 연설을 생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연설은 지도자와 국가의 동기와 야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며, 전쟁에 휘말린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주요목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마지막 권에서 연설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큰 손실이며, 이것은 그가 당시 아테네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임이 분명함). 그는 모든 '이야기'(이것은 헤로도토스의 문제점이라고 비판되기도 함)를 피했고, 따라서 자신의 저술은 덜 매력적인 것이 되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즉각적인 갈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를 위해 글을 썼다. 이 사건, 또는 인간성으로 미루어 후세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미래의 연구자들에게 내 저술이 쓸모 있는 것으로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가 자신의 목적과 방법을 뚜렷이 밝히고 있는 것은 이 대목뿐이다. 게다가 서술 과정에서(BC 430년의 흑사병과 BC 424년에 자신이 함대를 지휘한 부분은 제외) 어떤 진술에 대해 결코 자신의 눈과 귀를 근거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어떤 연설을 실제로 들었는가, 어떤 전투에 실제로 참여했는가, 어떤 장소를 실제로 방문했는가 또는 어떤 사람들한테서 정보를 얻었는가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투키디데스는 모든 일을 스스로 했다고 주장했고, 완성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어떤 구상을 가지고 누구에게 자문했는지는 밝히지 않은 채 완성된 구조만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전쟁사〉의 권위

역사가로서 투키디데스의 권위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엄격한 편년체를 고수했고,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일식이나 월식을 근거로 정밀히 검증해보면, 이 체계는 상당히 정확하다. 또한 동시대의 많은 비문들도 대부분 전체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세부적인 면에서도 그의 서술이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그가 중단한 부분부터 역사를 쓰기 시작한 역사가 3명이 제각기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미 쓴 부분을 고치려 하지 않았고, 그가 분명히 마무리짓지 못한 마지막 권조차도 손대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서술이 정확함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이다.

또다른 역사가인 시라쿠사의 필리스토스는 아테네군이 시라쿠사를 포위했을 때 소년이었는데, 나중에 〈시칠리아 역사 History of Sicily〉를 쓰면서 투키디데스의 글을 첨삭 없이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는 동시대의 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투키디데스보다 15세쯤 아래인 그는 투키디데스와는 전혀 다른 기질을 갖고 있었고, 글을 쓰는 목적도 전혀 달랐음)가 쓴 정치희극이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이 작품들은 전쟁 당시의 아테네를 암울하게 묘사한 역사가의 신뢰성을 크게 뒷받침해준다. 이 전쟁을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도 고대 역사가들과 거의 같은 입장에 있다. 그들은 투키디데스의 저서를 번역하거나 요약하거나 보완하는 것 말고는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주제를 엄격히 고수하고 있다.

그의 주제는 전쟁의 역사, 즉 전투와 포위 공격, 급히 체결되었다가 곧 깨진 동맹,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이 취한 행동, 그리고 '인간 정신의 불가피한 소모'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흥미진진한 일화를 생생하게 서술하고, 지상전과 해전의 전술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테네인의 야심만만한 제국주의(페리클레스의 통제된 야망, 알키비아데스의 무모한 야망, 클레온의 타락한 야망 등)를 연설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서술에서는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최악의 재난을 겪은 뒤에도 되살아나는 아테네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확신했다. 투키디데스는 또한 아테네와 대조적인 스파르타의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침착성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때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적에게 너무 관대할 경우도 있다고 보았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첫해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테네인과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격찬으로서 선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은 찬사인 것이다.

이어서(당연히 시대순으로) 흑사병의 증상에 대한 자세하고 정확한 설명(이 병이 다시 발생할 경우, 의사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이 나오고, 그토록 심한 고통과 많은 손실(이 병으로 대부분 아테네 성벽 안에 밀집해 살던 인구의 1/4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됨)을 겪은 뒤 사람들에게 닥쳐온 우울한 절망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라쿠사의 큰 항구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와 아테네군의 퇴각에 대한 설명도 그에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투키디데스는 가장 유명한 한 구절에서, 거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용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면서, 전시에 한 나라의 시민들 사이에 일어나는 불화가 도덕과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한 플라타이아라는 도시가 테베의 오랜 질시와 잔인함 및 스파르타의 배신 때문에 겪는 가혹한 운명, 그리고 에게 해의 섬에 있는 미틸레네라는 도시의 주민을 모조리 처형하자고 제안하는 클레온의 무자비한 잔인성을 연설이라는 또다른 방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플라타이아 전투).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고 있던 고결한 성품의 아테네인 니키아스의 가련한 운명 등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논평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인으로서나 아테네 시민으로서나 강렬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목격한 진실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런 열정 덕분에 적에 대한 통속적인 편파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 사건의 자세한 내용과 순서뿐만 아니라, 사건의 상대적인 중요성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직접 지휘한 전투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았고,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의 추방을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언급하지 않고, '2번째 서문'(BC 421년 강화조약이 맺어진 뒤에 씀)에서 사람들을 좀더 폭넓게 접촉할 수 있었던 기회로 언급한 것은 투키디데스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