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

다른 표기 언어 Pericles
요약 테이블
출생 BC 495년
사망 BC 429년
국적 그리스 아테네

요약 BC 5세기 후반에 아테네 민주주의와 아테네 제국을 완전히 발전시켜 아테네를 그리스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업적에는 BC 447년에 착공된 아크로폴리스의 건설도 포함된다.
페리클레스는 낡은 족벌정치에 대항하여 대중투표라는 신무기를 이용할 수 있었던 첫 시대의 인물로 태어났다. BC 461년에 암살당한 에피알테스의 뒤를 이어 곧바로 민주주의 정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문화·정치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의 실행에 착수했다. 공물납부를 존속시키는 데 대한 동맹국의 불만과 산발적인 반란도 없지 않았으나, 지역 곳곳에 아테네인 정착촌을 늘려 아테네인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늘어나는 아테네 인구에게 토지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그 상황에 대응해나갔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출신배경과 교육
  3. 민주정치 지도자로 부상
  4. 아테네의 부흥
  5. 제국 내부의 반란
  6. 정치·군사적 업적
  7. 전쟁의 소용돌이
  8. 페리클레스의 전략상의 약점
페리클레스(Pericles)
페리클레스(Pericles)

개요

BC 5세기 후반에 아테네 민주주의와 아테네 제국을 완전히 발전시켜 아테네를 그리스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업적에는 BC 447년에 착공된 아크로폴리스의 건설도 포함된다.

출신배경과 교육

페리클레스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주로 2가지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를 극찬했으며 어떤 비판도 거부했다. 그의 설명은 40년이나 연하인 그가 페리클레스의 초기생애에 관한 아무런 직접적인 지식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부족한 점이 있다. 또한 투키디데스가 상세한 전기적 내용을 소홀히 여겨 생략하고, 페리클레스의 지적 능력과 전쟁지도력 위주로 접근하고 있는 것도 약점의 하나이다. 이런 점을 그리스의 문필가 플루타르코스가 부분적으로 채워주고 있다.

그는 500년 뒤 비길 데 없는 미덕과 위대함을 지닌 인물이 군중의 변덕에 희생된 것을 밝히기 위해 페리클레스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으나 결국에는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여러 자료에서 발견하고 당혹스러운 상태로 글을 마쳤다. 이런 자료들은 모두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때로 유용성 있는 당대의 일화와 값진 많은 사실들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는 낡은 족벌정치에 대항하여 대중투표라는 신무기를 이용할 수 있었던 첫 시대의 인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산티포스는 구세대의 전형적인 인물로 오래된 족벌 가문 출신이며 말썽 많은 알크마이온 가문과의 결혼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관계 문제로 이견이 생기자 곧 그들의 진영을 떠나 법률적 고소를 정치적 무기로 삼는 새로운 길을 밟았다.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여 크산티포스는 BC 484년에 패각 추방을 당했다가 BC 480년에 다시 돌아와 BC 479년 미칼레에서 아테네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그후 오래지 않아 죽은 것 같다. 그로부터 페리클레스는 인민에 대한 애정과 아울러 아테네 북쪽에 있는 콜라르고스의 땅을 물려받았다. 이 재산으로 그는 아테네에서 상당한 부유층 대열에 올랐다.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의 어머니 아가리스테는 정치적 지위가 급격히 쇠퇴해가는 인척관계와 그녀 가문의 불운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의 적들은 이따금 이를 이용하여 그에게 종교적인 비방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아가리스테는 사자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상징적 의미는 애매하기는 하지만 흉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페리클레스의 두개골이 유별나게 생겼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어떤 심리학적 영향을 미쳤는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의 초기 교육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유일한 인물은 음악이론가 다몬으로 그의 영향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궤변학파 철학자들이 아테네로 왔으며 그는 제논이라든가 아낙사고라스와의 교분을 충분히 유리하게 활용했던 것 같다.

특히 아낙사고라스에게서 그는 곤란과 모욕에 직면했을 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법과 이른바 신성하다고 하는 현상들에 대한 회의론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서 분명하게 알려진 최초의 연도는 BC 472년이다. 이때에 그는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 3부작의 상연을 위한 비용을 댔다.

그뒤로 더 알려진 사실이 없다가 BC 463년에 그는 당대의 으뜸가는 장군이며 정치가인 키몬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할 기회를 태만하게 지나쳤다는 죄목으로 고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사실은 페리클레스가 호전적인 팽창정책을 지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다음 2년간의 정치적 격변에 직접 관계했다는 설은 단지 풍문일 뿐이다. 이 시기에 키몬이 추방당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동맹이 결렬되었으며 아테네 헌법의 민주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마도 민주정치 지도자인 에피알테스를 지원했던 것 같다. 그가 유급 배심원 제도를 도입한 것은 불행하게도 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에피알테스의 개혁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었다.

민주정치 지도자로 부상

BC 461년에 페리클레스가 암살당한 에피알테스의 뒤를 이어 곧바로 민주주의 정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고대 사람들의 주장은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그뒤 15년간 아테네에는 상당한 비중을 갖는 또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BC 459년에 그리스 국가들간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군사적 재능이 중시되기에 이르렀을 때 페리클레스가 이후 몇 년 동안 참가한 전투는 기록상으로 BC 454년의 코린토스 만 해전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아카이아를 물리쳤으나 더 중요한 전략목표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키몬과 모종의 친분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키몬은 다시 복귀하여 페르시아와 전쟁을 재개하도록 허락받았지만 그는 그보다 다른 그리스인들과 싸우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키몬이 복귀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이야기가 있어 사실을 가려내기가 어렵다. BC 451(또는 450)년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 부모를 둔 사람에게만 아테네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추진했다. 이 법안의 배경에 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그것이 소급되는 것인지 어떤지도 분명하지 않다. 페리클레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지만 해석이 상당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단지 외국인 어머니를 둔 키몬을 겨냥하여 졸렬한 정치적 수단을 부린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테네의 상류계급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아무런 편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반편 하층계급은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합해볼 때 당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사회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이민자들을 배척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100년 후에 한 웅변가는 그 법률이 가장 가난한 아테네인의 딸에게도 그녀의 시민권에 따라 지참금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신분의 구별이 뚜렷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법률이 통과된 것은 아테네인들이 전반적으로 공직과 공공재산 분배의 혜택을 소수에게 제한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들 입장에서 외국인들의 경제 참여를 제한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은 함대에 복무하고 공공건물에서 일했으며 중요하지만 당연한 사실로 토지와 가옥을 제하고는 상거래와 투자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므로 이 법률이 '지배민족'을 창출하려는 시도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 법률이 지니는 선동적인 성격은 분명한 듯하다.

키몬은 BC 451년 이후에 페르시아와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이던 중에 죽었다(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와의 전쟁정책은 폐기되었고 정식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던 것 같다. BC 499년에 잘못된 상황판단에서 출발한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성공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 시는 물질적으로 여전히 BC 480년의 약탈 이후와 같았고 신들도 제자리에 모시지 못한 상태였다.

아테네의 부흥

BC 451년에 5년간의 휴전협정으로 그리스 국가들 간의 적대관계도 끝이 났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문화·정치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의 실행에 착수했다. 아테네는 이미 BC 478년에 스파르타가 물러난 이후에 페르시아 전쟁을 계속해온 동맹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BC 454년에 동맹의 막대한 금고가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짐에 따라 아테네의 주도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페르시아와의 평화협정으로 동맹이 중단되지는 않더라도 금고에 매년 납부하는 공물은 중단될 수도 있었다(델로스 동맹). 그 공물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아니면 단지 아테네의 주도권을 내세우기 위해서 페리클레스는 모든 그리스 국가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의 주제는 페르시아인들이 파괴한 그리스 신전의 재건, 구원을 빌기 위해 신들에게 바쳐야 하는 희생제의 비용분담, 해상의 자유항해 문제 등이었다. 스파르타는 협력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동맹의 기반을 계속 밀고 나갔다. 공물납부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고 아테네는 동맹의 적립금에 크게 의지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건설계획을 추진했다.

BC 447년이후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전과 그 신전에 모실 금과 상아로 만든 피디아스의 아테네 여신상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크로폴리스 건설계획에는 승리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과 입구의 현관건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관건물은 이전에 그리스에서 지은 어떤 일반 건물보다도 더 웅장하고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의 비판도 있었다.

멜레시아스의 아들이며 키몬의 친척인 투키디데스(역사가와는 다른 사람)는 그 계획의 낭비성과 동맹의 기금을 재원으로 이용하는 것의 부도덕성을 비난했다. 페리클레스는 그에 대해 동맹국들은 자국의 방위를 위해 기금을 내는 것이므로 동맹국들의 방위가 확실히 보장되는 한 아테네로서는 그 돈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BC 443년에 패각 추방으로 결론이 났다. 투키디데스는 10년간의 추방 명령을 받았으며 이로 해서 페리클레스의 지위가 공고해졌다.

건설계획의 매력이 아테네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페리클레스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경제활동과 고용을 촉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했지만 그같은 동기는 시대적으로 걸맞지 않으며 사실상 투표에도 별반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국 내부의 반란

처음에는 공물납부를 존속시키는 데 대한 동맹국의 불만과 산발적인 반란도 일부 있었다.

한편으로 페리클레스는 오늘날 아테네 제국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지역 곳곳에 아테네인 정착촌을 늘려 아테네인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늘어나는 아테네 인구에게 토지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그 상황에 대응해나갔다. 그런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페리클레스는 그의 가장 큰 공적으로 칭송받는 전투, 곧 트라키아의 케르소네소스(갈리폴리)에서 이민족을 쫓아내는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BC 447(또는 446)년에 더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BC 458년 이래로 아테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이오티아의 도시들이 이해에 아테네의 소규모 병력을 물리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아테네의 해상지배와 식량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에우보이아메가라가 곧이어 그 본을 따랐다.

메가라의 전략적 중요성은 12년 만에 처음으로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카의 코린토스 지협 북방에 진출함으로써 즉각 입증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생각과 행동을 신속하게 했다. 상세한 경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국 아테네는 내륙의 영토를 포기하고 지배 영역을 대체로 해상제국에 한정하기로 했다. 스파르타군은 물러나고 에우보이아는 신속하게 항복했으며 그 합의는 30년간의 평화협정(BC 446~445 겨울)으로 구체화되었다.

아테네로서는 메가라를 잃은 것이 중대한 손실이었다. 그것은 스파르타 군대가 언제든지 아티카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페리클레스가 정착촌의 안전에 의구심을 갖고 아테네의 기본전략 대안을 세울 필요를 느꼈다는 것은 그가 아테네와 피레에프 항구의 방위태세 개선을 위해 즉각 3번째 장성(長城)을 건축한 데서 알 수 있다.

그 이래로 사실상 아테네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섬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다.

정치·군사적 업적

한동안 갈등이 잠시 중지되었다.

투키디데스가 추방당한 이후 페리클레스에게는 내부의 반대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는 연이어 장군으로 재선되는 한편,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출중한 지혜와 청렴함에 근거를 둔 명망에 힘입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청년시절의 선동정치에서 벗어나 그는 좀 더 중용적인 정치로 나아갔으며 말년에는 좀 더 급진적인 대변자들에게 추월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네는 명목상으로 민주정치였지만 사실상 가장 으뜸가는 한 사람의 지배를 받았다. 아테네 민주정치는 행정관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있었지만 의회는 페리클레스가 바라는 것을 모두 허락해주었다.

투키디데스는 지적 능력에 초점을 둔 나머지 정치가의 근면성이라는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그런 면모는 플루타르코스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재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공직수행 외에는 다른 어떤 길로도 나서지 않았으며 한 가지 사회적 목적만을 추구하다가 일찍 활동을 마친 인물이었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개인생활에 관해 알려진 이야기로 어느 정도 완화되고 있다.

그러나 부유층이며 귀족 신분 출신이 분명한 그의 부인은 신원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20대 후반에 그녀와 결혼했으나 약 10년 뒤에 이혼했다. 50세 가까이 되어 그는 밀레토스 출신 아스파시아를 집에 맞아들였다. 자신이 제정한 법률에 따라 결혼은 불가능했으며 적자인 그의 두 아들이 죽은 이후 그들 사이에 난 아들 페리클레스를 적자로 삼아야 했다. 아스파시아는 추문과 전설에 가려져 있지만 대단한 매력과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자유민이며 위대한 지적 전통을 지닌 밀레토스의 좋은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녀 자신의 행동과 그녀에 대한 페리클레스의 태도는 상류계급 여성들이 격리생활을 하는 아테네의 풍습으로는 놀라운 것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출퇴근할 때마다 그녀에게 입맞춤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그에게, 그리고 아테네 정치에 영향을 행사한다고 추측했다. 건설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다른 여러 방식으로 아테네의 우월성을 과시했다. BC 443년에 아테네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 남부 투리이에 범(汎)그리스 식민지가 창설되었으나 애초에 기대했던 대로 서방에 아테네의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중심지 역할은 하지 못했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함대를 이끌고 흑해로 진출하여 아테네의 힘을 과시하고 타우로스의 케르소네소스(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크림 반도)에서 이어지는 곡물 보급로를 확보했다. 아크로폴리스에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판아테나이아를 기념하는 의식은 갈수록 더 세밀해졌고 다른 무엇보다도 곡식과 문명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아테네인의 주장을 상징하는 엘레우시스 제전의 성가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엘레우시스 신비의식). 그의 마지막 대규모 원정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BC 440년 아테네의 주요동맹국인 사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사모스를 되찾기 위한 원정은 오랫동안에 걸쳐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 승리했으며 후대의 아테네인 장군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이 원정 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이 개입할 가능성이 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BC 430년대말까지도 30년간의 평화협정이 지켜졌다.

이 시기가 지나면서 특히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를 둘러싸고 긴장이 격화되었다. 코린토스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분명하게 아테네와 이해관계가 대립되었다. BC 433년에 상황이 심각해져 아테네는 전쟁을 통해 재정을 타개해나가야 할 정도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전쟁의 소용돌이가 이어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외교적 입장을 기술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공작을 벌이는 한편 강경책을 구사했다.

그가 취한 강경책은 동시대인들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특히 메가라와의 교역을 아테네 제국에서 배제하는 포고령을 강행하기로 결단한 것은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아스파시아의 어떤 개인적인 원한에 영향받은 것일까? 아니면 전쟁을 벌임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피해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 것일까? 투키디데스는 이 물음에 대해 충분히 타당해보이는 자기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메가라 그 자체는 작은 문제지만 아테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결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투키디데스가 일관되게 과소 평가하고 있는 메가라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고려는 메가라 포고령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페리클레스가 이미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한 BC 431년 봄에 시작된 전쟁의 첫 신호일 뿐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리클레스의 주된 전략구상은 명백했다.

그는 육군지휘관이라기보다 해군제독이었으며 아테네의 해군력은 지상군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세했다. 그는 아테네의 농촌지역 주민들을 장성(長城) 안으로 대피시켰으며 스파르타 육군과 전투하는 것을 피하고 함대에 의지하여 아테네의 식량공급을 확보하는 한편, 값비싼 해군 유지비의 원천인 제국의 틀을 굳건하게 지키고자 했다. 건축공사에 드는 비용은 해마다 비축되는 공물로 상쇄되었으며 그가 생각하기에 장기전을 치르기에 충분한 자금이 비축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상의 약점

그러나 이 전략은 뚜렷한 정치적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 주민은 농촌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싸움도 한 번 없이 자신들의 토지를 스파르타인들이 짓밟게 내버려두도록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결단력이 필요했다.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육군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하층계급은 함대에서 일하도록 허용되기는 했지만 인구 과잉의 도시에서 생활상태가 악화되었다. 인구의 과잉은 예기치 못한 전염병의 발생을 초래했으며 그로 인해 전쟁 2년째의 여름에 인구의 1/4이 감소했다. 어떤 명백한 전과도 전쟁이 가져오는 불편을 상쇄시켜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직위에서 쫓겨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오래지 않아 재선출되었으나 BC 429년 가을에 죽기까지 아무런 새로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전쟁 첫해의 원정이 마무리된 뒤 페리클레스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 연설을 했는데 투키디데스는 그 내용을 길게 인용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들의 희생은 그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어떤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테네인의 생활은 페리클레스가 이야기하는 이상형에는 못미치는 것이 상례였지만 그는 명료한 해석을 제기하여 그것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교양'을 책임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