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몬

키몬

다른 표기 언어 Cimon
요약 테이블
출생 BC 510경
사망 451경, 키프로스
국적 아테네, 그리스

요약 아테네의 정치가·장군.

페르시아 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보수주의적이고 스파르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펴서 페리클레스와 의견대립을 빚었다.

그가 거둔 가장 큰 군사적 승리는 BC 466년 팜필리아 지방의 에우리메돈 강 어귀에서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한 것이다.

키몬은 아테네의 귀족가문 출신인 밀티아데스와 트라키아(트라케) 지방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티아데스는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영웅이었지만, 이후 전투에서 실수를 한 혐의로 막중한 벌금을 물게 되었으며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이듬해에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키몬은 자신의 누이를 아테네의 부유한 인물과 결혼시킨 뒤 아버지가 물어야 했던 벌금을 치렀다. 키몬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벌인 살라미스 해전(BC 480)에서였다. 이 덕분에 그는 스트라테고스(장군)로 뽑혔으며, BC 461년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를 당하기 전까지 매년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다. BC 478년 그는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아리스티데스를 도와서 그리스 해상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로부터 아테네로 넘어오도록 했다.

그리스 해상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 되었으며 이들과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자 키몬은 동맹의 주요사령관이 되었다.

키몬은 사령관이 된 이후 예전에 페르시아와 반역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스파르타의 장군직에서 해임된 파우사니아스를 비잔티움에서 쫓아냈으며 트라키아 지방의 해변에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대부분 몰아냈다. 다음으로 그는 스키로스 섬의 해적들을 제압하고 아테네인들을 그 섬에 정착시켰으며 아테네의 선대 왕으로 스키로스에 묻혔다는 테세우스의 유골을 아테네로 가져오는 예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또한 BC 466년경 200척의 동맹군 함대를 거느리고 팜필리아의 에우리메돈 강 어귀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페니키아 함대를 격파했으며 육상에서도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이로써 지중해 동부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력은 아주 약해졌다.

키몬은 다시 에게 해로 눈길을 돌려 트라키아 지방의 케르소네소스(갈리폴리) 반도에서 페르시아인을 몰아냈다. 부유한 섬나라인 타소스가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하자 타소스인들을 해전에서 무찔렀으며 2년 동안 섬을 봉쇄해 항복시켰다(BC 463).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민주적 정치가들에 의해 뇌물을 받은 대가로 마케도니아 왕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기소되었다(당시 마케도니아 왕은 남몰래 타소스를 원조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었음). 키몬은 무죄가 되었으나 그의 운세는 예전같이 상승세를 타지 못했다.

그가 이끄는 귀족파는 영향력을 잃어갔고 다만 중장비 보병들이나 스파르타의 육상 패권을 선망하는 부유시민계층의 지원에 의존할 뿐이었다(호플리테스). 키몬은 전쟁에서 얻은 부(富)를 도시 미화와 시민 위안에 썼을 뿐 아니라 무공(武功)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거둔 승리의 대부분은 빈민층 아테네인들로 충원된 함대 덕택이었고 이 빈민계층은 스파르타에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승전에 자신감을 얻고 아울러 자신들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한 수병들은 키몬 대신 새로운 지도자에게 기대려고 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를 싫어한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그들이 정치·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 새로운 지도자들은 곧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했다. BC 462년 스파르타인들은 대규모 노예병력(헤일로타이)이 반란을 일으키고 은신해 있는 메세니아 지방의 이토메 산 기지를 공략하려다가 실패하자, 이전의 페르시아 전쟁 때 동맹을 맺었던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키몬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쟁기와 소로 비유하면서 그리스 전체의 발전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이론을 펴 원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에피알테스는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세력을 다투는 경쟁 상대이므로 제 갈 길을 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폈다. 결국 키몬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키몬은 4,000명의 중장비 보병을 이끌고 이토메 산으로 갔다. 그러나 요새를 공략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가 과연 자신들의 편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동맹군들은 남겨둔 채 키몬과 아테네 군대만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고 난 뒤 아테네에서 키몬의 인기는 급속히 떨어졌다. 그뒤 오스트라키스모스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을 때 키몬은 최다득표를 차지해 10년 동안 아테네를 떠나야만 했다(BC 461).

그의 빛나는 생애의 말기에는 아테네에 민주개혁이 이루어졌고 스파르타와 맺었던 동맹이 깨졌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곧 전쟁에 돌입했으며, BC 457년 양쪽의 육군은 보이오피아의 타나그라에서 격돌했다. 키몬은 아테네의 장군들과 만나 자신도 백의종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 편으로 의심받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용감히 싸울 것을 부탁했으며 이들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아마도 이 일에 크게 감동을 받은 듯한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추방기간을 단축시키자고 제의했다. 아테네로 돌아오자 곧 키몬은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결국 BC 451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리스의 이집트 원정이 크게 실패했음에도(BC 459~454) 그는 페르시아를 정벌할 대규모의 새로운 해군 원정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200척의 배를 이끌고 키프로스에 갔으며 그 가운데 60척을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을 원조하기 위해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페니키아의 도시 키티움을 공격하던 중 죽었는데 병에 의한 것인지 부상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키몬은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개방적이고 부드러운 태도에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였고 아테네 최고의 장군이었다. 그는 2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아내는 아르카디아 출신의 여자였고 2번째는 아테네의 귀족가문인 알크마이온 가문의 이소디케였다.

그의 아들 6명 중 3명의 이름은 스파르타·엘리스·테살리아의 이름을 따 지었으며, 키몬은 아테네에서 이 세 도시국가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는 에게 해에서의 아테네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 페리클레스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페리클레스와는 달리 그리스 본토에서 스파르타의 주도권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