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학

그리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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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리스 본토, 에게 해의 섬들, 시칠리아 및 남부 이탈리아, 소아시아 등지의 사람들이 그리스어로 쓴 저작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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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고대
  3. 동로마 시대
  4. 현대

개요

그 역사는 고대(4세기 이전), 동로마기(4세기~1453), 현대(1453 이후)로 구분된다.

고대

현대 서구의 문학 장르들 대부분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시작되거나 형성되었다.

즉 서사시, 비가(悲歌)나 서정시, 희곡, 목가시, 역사서(단순한 연대기와 상반되는 개념), 웅변술(고대에는 수사학의 일부로서 연구됨), 철학 등이 이러한 분야들이다. BC 4세기 후반부터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일련의 그리스 문헌들을 선택·수집·주해했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면모는 최초의 선집에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 사화집).

서사시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그것들은 수세기에 걸친 구전의 소산으로서 BC 7세기 이전으로 추측되지만 언제 씌어졌는지 작가가 호메로스라는 실재의 한 개인이었는지 등은 모두 불확실하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중의 한 일화이고, 〈오디세이아〉는 그 전쟁의 후일담이다. 이들 작품의 생생하고 회화적인 언어, 극적인 대결들, 영웅적인 인물들은 현대의 독자들에게까지도 강한 인상을 준다.

헤시오도스의 교훈적 서사시들(BC 7세기경)은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씌어졌는데, 〈신통기 Theogony〉는 신들의 계보, 〈일과 나날 Works and Days〉은 달력·농경론·훈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사형식의 문학이다.

비가풍의 시는 8세기말부터 발전했고 연애, 군사 등의 여러 이야기를 다루어 서사시와는 달리 개인적인 시야를 표출하면서 서정시의 내면성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었다.

BC 7~6세기에는 3명의 위대한 비가 시인들이 나왔는데, 고결한 심성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티르타이오스, 우울한 기미가 있는 쾌락주의자인 콜로폰의 밈네르모스, 귀족이며 전통주의자인 테오그니스이다. 서정시인으로는 BC 7~5세기에 활동한 파로스의 아르킬로코스, 알카이오스, 알크만, 스테시코로스, 이비코스, 바킬리데스 등이 알려져 있다.

들의 작품들은 대개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아 궁금증을 더해준다. 시인 사포는 직접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강렬한 감정들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테오스의 아나크레온의 특징은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에 있다.

핀다로스의 작품으로는 올림픽의 승자들을 축하하여 쓴 〈올림피아드 Olympiads〉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리스어처럼 변화무쌍하고 창의적인 언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데, 특히 극작가 아이스킬로스(BC 525~456/455)의 비극들이 그렇다. 그의 희곡들은 여러 나라 말로 옮겨져서 아직도 상연되며 때로 강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번역도 그의 시상(詩想)의 풍부함과 복잡함을 다 전하지는 못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그의 중심주제는 〈오레스테이아 Oresteia〉 3부작에 잘 나타나 있다.

소포클레스(BC 496~406경)는, 공권력의 명령과 가족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티고네 Antigone〉와 같이 보다 개인적인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에우리피데스(BC 480~406)는 〈히폴리토스 Hippolytos〉에 나오는 좌절된 사랑처럼 극단적인 감정들의 병리학에 대한 극히 현대적인 관심을 나타내 당시에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의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BC 450~385경)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그는 아테네를 배경으로 속되고도 인간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희극 〈개구리 The Frogs〉·〈구름 The Clouds〉·〈새 The Birds〉는 제목이 풍자적이지만 근저에는 진지함이 있으며, 〈리시스트라타 Lysistrata〉는 감동적인 반전극(反戰劇)이다.

BC 4세기 메난드로스의 가정 희극들은 좀더 후기인 헬레니즘시대에 속하며 온갖 부류의 전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테오크리토스는 이딜(전원 소곡)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전원시들을 썼다. 전원 소곡이란 문자 그대로 '작은 시'를 의미하나 때로는 좀더 길어지기도 한다. 그는 또한 목가(牧歌 bucolic), 무언광대극(mime), 경구(epigram) 등도 썼다.

서구 문화에서 사실의 검증을 위시한 진정한 역사적 방법이 시작되는 것은 헤로도토스(BC 484경~420이전)부터이다.

그는 널리 여행하여 견문을 갖추었으며 이야기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쓴 역사는 오랫동안 불신되어 왔으나, 현대 고고학은 그 일부를 사실로 확증했다. 투키디데스(BC 460~400경)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을 객관적이고 초연한 입장에서 기록했으며, 압축과 간결함의 전형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크세노폰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복잡한 시기에 많은 글을 썼으며, 〈아나바시스 Anabasis〉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웅변에 있어서는 데모스테네스(BC 384~322)의 담화(談話)가 설득술의 전형으로 고대 이후 줄곧 연구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대한 그의 독설이 특히 유명하다. 플라톤(BC 428경~348/347)의 철학 저작들은 그 철학적 내용 외에도 막강한 힘을 가진 광대한 산문시로서 의미가 있다.

기념비적 존재인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문학 비평과 철학적·과학적 사고를 위한 온갖 어휘들을 창출하여 서구 문명에 남겼다.

동로마 시대

소위 동로마 시대(AD 330~1453)에 그리스어로 씌어진 문학은 동로마 문화의 참된 표현으로서, 고대 그리스어로 씌어진 고대 문학과 속어 또는 현존하는 그리스어로 된 현대 작품들 사이의 중간기에 해당한다(→ 동로마 예술). 동로마 문학은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의 궁정 생활과 제국의 정치에서 영향을 받았다.

제국 내의 모든 중요한 세력들은 수도로 집중되었으므로 동로마 문학은 대도시적·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황제 및 그의 가족에게 바치는 찬양문의 수효와 장엄성, 황제의 훌륭한 업적에 관한 시들의 압도적인 편중 등 그 문학이 갖는 특수성들이 설명된다.

동로마 사회의 정적인 성격은 외형적인 문학형식 및 언어사용에서의 보수주의에 반영되어 있다. 이 언어는 그리스 고전문학뿐 아니라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담화형식들을 견지해야만 했다. 성서와 고전 저작들에 남아 있는 아티카어는 그 당시까지의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양인들의 언어였다.

그러므로 동로마인들은 그 언어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거치게 되었던 평준화·단순화의 영향들이 문학에서 드러나는 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의 언어는 현대 그리스어로 발전하는 반면, 문학의 영역에서 동로마 문학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어의 담화 형식들을 고수했다.

다른 많은 동로마 문학의 결점들과는 대조적으로 동로마의 역사 저술은 로마 역사의 가장 훌륭한 전통들을 수세기에 걸쳐 지켰으며 동로마 역사가 끝날 때까지 함께 하면서 사건들을 고도로 세련된 기록으로 남겼다.

서유럽에서 이에 견줄 만한 것이 나온 것은 12세기나 되어서였다. 또한 동로마인들의 전통주의로 고대 그리스 문학의 정수가 후세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에게 함락되고,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자, 그리스의 많은 지식인들은 고국을 떠나 외국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어로 글을 썼지만, 자주 그 외국어들을 쓰기도 했다.

현대 그리스는 2가지 문어체, 즉 카타레부사(Katharevusa)라는 고어체와 데모티케(Demotic)라는 현대어의 문체를 계승했다. 이 두 문학적 조류의 전개 속에서, 1880년대의 데모티케 운동은 코스티스 팔라마스를 위시한 젊고 재능있는 일군의 작가들이 소위 신(新)아테네 학파를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전기(轉期)를 맞았다.

이는 그리스 낭만주의자들의 사어(死語)와 장황함에 대한 반동이었다.

1888년 요아네스 프시카리스(1854~1929)는 〈Tótaxídi mou〉(외견상으로는 일련의 여행기이나, 사실은 그리스인들의 언어의식을 일깨우려 한 작품)를 펴내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카타레부사의 지배에 맞선 데모티케 지지자들의 투쟁은 곧 고전적 전통 전반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어 그리스 미술과 문학이 현대적 삶으로 복귀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당시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주창한 현대 그리스 민담의 연구와 콘스탄티노스 파파리고풀로스의 중세 및 현대 그리스 역사연구를 통해서도 전개되었다. 싸움은 마침내 모든 상상적 문학에 있어 살아 있는 언어인 데모티케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과학적 저술이나 관공서의 문서에서도 데모티케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부터 그리스 독립전쟁(1821~29)에 이르기까지 가장 발전된 시는 크레타·로도스·키프로스를 비롯한 비(非)터키 점령지역의 그리스 섬들에서 나왔다.

터키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시는 민요와 클레프틱(klephtic) 담시(그리스 무법자들의 담시)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리스어로 씌어진 가장 아름답고 생생한 운문이 몇 편 들어 있다.

터키로부터의 독립(1828)으로 새로운 왕국의 수도가 된 아테네는 그리스 지적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아테네에서 1880년대 중반에 알렉산드로스 수트소스는 낭만주의 시파를 만들었으며,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 시에 영향을 주었다. 아킬레프스 파라스코스는 낭만파 후기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카타레부사 대신 데모티케를 문학언어로 택한 시인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는 1880년대의 데모티케 운동 이후 그리스 시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는 서구의 여러 가지 운율 형식들을 도입함으로써, 그리스 시를 이전에 주로 쓰이던 15음절 정치(政治) 운문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스 시가 전적으로 불모화해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동요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은 1880년경 신아테네 학파를 수립했다.

그들은 그리스 고답파(高踏派 Parnassian), 즉 엄격하고 객관적인 예술의 거장들이 되고자 하는 동시에, 당대의 그리스로부터 영감을 끌어내며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했다. 신아테네 학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위대한 그리스 시인으로는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가 있다. 다른 어떤 그리스 시인도, 인생의 비극을 그처럼 관능적으로 표현하거나 비극적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암울한 시야는 절묘하게 서정적이거나 때로는 반어적(反語的)인 구절들로 인해 완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그리스에서 활동한 많은 시인들 중에 다음 몇 사람을 들 수 있다. 코스타스 카리오타키스는 그의 비관적이고 때로 야유적인 시들로 매우 인상적이며, 게오르게 세페리스는 진정한 상징주의자로서 현대인의 숙명을 참된 시적 필치로 그려내어 196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더 잘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또한 3만 3,333행의 긴 '서사시' 〈오디세이아 Odysseia〉의 저자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주요한 시인들은, 대개가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 또는 부조리시인들로 게오르기오스 테멜리스, 밀토스 자크투리스, 조이 카렐리, 디미트리오스 파파디차스, 타키스 시노풀로스, 타키스 바르비치오티스 등이 있다.

1888년 요아네스 프시카리스의 〈Tótaxídimou〉의 출판과 데모티케 운동의 전개에 따라 현대 그리스 산문은 아주 바뀌었다.

속어는 시에서 뿐 아니라 상상적인 모든 산문 작품들에서도 사용되었다. 단편작가들 특히,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와 안드레아스 카르카비차스는 영감을 얻기 위해 그들의 '살아 있는 뿌리'로 돌아가, 그리스 촌락의 삶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19세기 후반 그리스 문학에 도회 소설을 도입한 것은 요아네스 프시카리스와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이다. 20세기초에는 콘스탄티노스 크리스토마노스가 그들의 뒤를 이었다.

1930년대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리스 속어 산문은 완숙에 이르렀으며 진정으로 의의있는 그리스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트라티스 미리빌리스는 발랄하면서도 강건한 '전쟁 3부작'에 이어, 힘차고 독창적인 보다 짧은 이야기들을 많이 썼다. 일리아스 베네치스는 터키인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충격적인 책 〈제31328번 Noumero 31328〉(1922~23)으로 등단했다.

1930년대의 가장 재능있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인 코스마스 폴리티스는, 한떼의 아이들의 행동과 반응들에 관한 책 〈에로이카 Eroica〉(1938)나 그의 후기 소설들에서도 긴 서술체의 거장임을 입증했다. 게오르기오스 테오토카스의 긴 소설 〈아르고 Argo〉(1936) 및 그의 기타 저작들은 그가 능력있고 다채로운 작가이며, 유려하고 단순한 데모티케를 구사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들 중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전(戰前) 세대는 시와 산문에 있어 모두 젊은 작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들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취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그리고 긴 문학적 경력 후에야 소설로 돌아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소설들은 걸출한 창조력과 거장다운 언어의 구사를 보여준다. 간혹 거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데모티케 산문의 가장 위대한 거장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산문의 풍부함과 강건함을 깊이 탐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내전의 전화(戰禍) 뒤에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도 1960년대까지에는 자신들의 음성을 확립했다.

바실리스 바실리코스, 로디스 프로벨렌기오스, 니코스 카즈다글리스, 코스타스 타크치스 등은 산문으로, 레노스 아포스톨리디스와 스피로스 플라스코비티스는 단편소설로 각기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