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다른 표기 언어 Euripides
요약 테이블
출생 BC 484경, 아테네
사망 BC 406, 마케도니아
국적 그리스

요약 고대 아테네 3대 비극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대인들은 에우리피데스가 쓴 희곡을 92편으로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는 제목만 알려진 것까지 포함해 67편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남아 있는 희곡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레소스>까지 포함해 19편이다. 그는 연극계전에서 1등상을 4번 받았지만, 계관시인으로 20번이 넘게 뽑혔다. BC 431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전쟁 초기에 <헤라클레스의 아이들>과 <애원하는 여자들>을 썼다. 이후 전쟁의 양면성을 그린 <헤카베>와 <트로이의 여인들>을 썼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이온>, <헬레네> 등 ‘비극’이 아닌 비극을 썼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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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전기적 자료
  3. 생애
  4. 극작생활
  5.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개요

18세기의 영국 문인 호레이스 월폴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고대 아테네의 3대 비극 시인 가운데 가장 젊은 에우리피데스는 세상을 깊이 생각하고 깊이 느꼈지만,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것은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희곡들은 윤리적·사회적인 논평으로 가득 차 있으며, 후세의 작가와 연설가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논평들을 원래의 극적 문맥에서 쉽게 떼어내 도덕론이나 문집,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설교문에까지 원용했다.

철학자들의 친구이며 드물게 많은 서적을 소유한 장서가이자 유쾌함을 알지 못했던 이 사려 깊은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략적인 일대기를 복원할 수 있을 뿐이다.

전기적 자료

에우리피데스에 관한 필사본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1세기의 것으로, 그 가운데 〈에우리피데스의 생애〉라는 것이 있다.

고대 말기에 편찬된 이 필사본은 이전 작가들의 글에서 발췌한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모아놓은 책이다. 이 작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이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필로코루스인데, 〈에우리피데스의 생애〉를 썼다. 필로코루스는 연극 제전에 관한 몇몇 공식기록을 손에 넣었을 것이나, 그밖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구전뿐이었다.

현존하는 〈에우리피데스의 생애〉는 대부분 문학적 잡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일부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자체에서 끌어낸 다소간의 지적인 추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은 에우리피데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희극작가들이 에우리피데스에게 던진 우스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우스개가 오늘날에는 진지한 역사적 사실로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전기적 '사실' 가운데 하나는 에우리피데스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약초를 팔던 채소장수였다는 것으로, 위대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여러 편의 희곡에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항상 웃음을 자아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필로코루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테오프라스토스(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는 에우리피데스가 소년시절에 2차례의 종교의식에서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결코 채소장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에우리피데스가 말년에 전문적이고 귀찮은 소송에 말려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그가 부자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청과물을 팔아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희곡을 써도 돈을 벌지는 못했다.

생애

에우리피데스의 어머니 이름은 클레이토였고, 아버지 이름은 므네사르코스 또는 므네사르키데스였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그는 BC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아테네가 페르시아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해전)이 벌어진 바로 그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꾸며낸 이야기다. 아테네의 위대한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투에 직접 참여했고 또다른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경축하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했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날을 에우리피데스의 생일로 선택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축제 날짜를 기록한 BC 3세기의 비문은 그가 BC 484년에 태어났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마 정확할 것이다. 그밖에 그의 생애에서 확실한 연대(일부 희곡을 쓴 연대는 제외)는 그가 처음으로 연극 제전에서 우승한 BC 441년(어떤 희곡으로 우승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음), 마케도니아의 왕 아르켈라오스한테서 영광스러운 초청을 받아 아테네를 영원히 떠난 BC 408년, 그리고 마케도니아에서 세상을 떠난 BC 406년뿐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극작가답게 극적인 상황에서 죽었다.

즉 개떼나 여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BC 406년에 소포클레스가 극장으로 합창단을 데리고 들어갈 때 에우리피데스의 죽음을 애도하여 합창단과 함께 상복을 입었고, BC 405년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에서 더이상 위대한 비극 시인이 없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희곡 〈개구리들〉을 상연했다는 것이 더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역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이 별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몇 가지 일화는 에우리피데스가 죽은 뒤에 얼마나 큰 예우를 받았는가를 입증해준다. 〈에우리피데스의 생애〉는 역사가 투키디데스나 음악가 티모테우스가 아테네에 세워진 에우리피데스 기념비를 위해 쓴(또는 썼다고 전해짐) 묘비명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뼈는 마케도니아에 누워 있다. 그가 인생을 마친 마케도니아에. 그의 무덤은? 그리스 전체이다.

아테네는 그의 모국이다. 그의 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찬사를 바친다."

에우리피데스의 생애에 대한 자료에는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아이스킬로스가 마라톤 전투(BC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친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의 10명의 고위 관직 장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1~2번 선출되었고, 나중에는 아테네 헌법개정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공적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에우리피데스가 외교적 사명을 띠고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 간 적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주석을 단 고대 주해자가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일부 근대 학자들은 이 고대 주해자가 아테네 웅변가인 히페리데스와 그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음). 에우리피데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후세의 전설은 그를 위해 극적일 만큼 비참한 결혼생활을 꾸며냈다. 이것은 분명 희극작가들이 그에게 던진 우스개를 바탕으로 한 허구이며, 그의 희곡에서 자주 나오는 사악한 여인들은 분명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멜리토와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들 가운데 하나는 꽤 유명한 시인이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 〈주신 바코스의 시녀들 Bacchae〉을 무대에 올렸으며, 아버지의 미완성 작품인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eia en Aulidi〉를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극작생활

고대인들은 에우리피데스가 쓴 희곡을 92편으로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는 제목만 알려진 것까지 포함해 67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희곡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레소스 Rhesos〉까지 포함하여 19편이다. 92편이라면 무척 많아 보이지만, 이것은 충분히 믿을 만한 숫자이다. 매년 열리는 연극 제전에 참가 자격을 얻은 시인은 4부작(3편의 비극과 사티로스극이라고 부르는 쾌활한 광대극)을 출품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 연극은 짧았기 때문에, 보통 4부작의 길이가 6,000행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셰익스피어의 〈햄릿 Hamlet〉은 약 8,000행에 이름). 92편의 희곡은 4부작 23편에 해당할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거의 50년 동안 활동했으으므로, 4부작을 2년에 평균 1편씩 쓴 셈이다. 이것은 에우리피데스가 미친 듯이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꽤 부지런히 작품을 썼다는 것을 시사한다. 셰익스피어의 1년 평균 작품 집필량은 에우리피데스보다 훨씬 더 많다. 에우리피데스가 연극 제전에서 1등상을 받은 것은 4번뿐이다.

그나마 4번째는 그가 죽은 뒤 〈주신 바코스의 시녀들〉과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포함한 4부작으로 받았다. 소포클레스가 18~24번이나 우승한 데 비하면 에우리피데스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보다는 에우리피데스가 모든 경쟁자들 중에서 매년 3명을 뽑는 계관시인으로 20번이 넘게 뽑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점일 것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를 끊임없이 풍자적으로 모방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주목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충분한 증거이다. 흔히 말하기를, 그가 노년에 아테네를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실망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추측에 불과할지라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 지 23년째 되는 해에 늙은 시인이 아테네를 떠난 데에는 그보다 훨씬 타당한 이유가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적을 만들었고, 신성모독죄로 고발되었으며(몇 년 뒤의 소크라테스처럼), 부도덕한 여인들을 무대에 세워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가 하면, 존경할 만한 견해를 은밀한 수단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여성을 혐오한다는 비난을 받았다(아직도 때로는 이런 비난을 받음). 확실히 오늘날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작품들을 포함하여 그의 희곡에서는, 성질이 드세거나 정직하지 못하거나 부정한 짓을 저지르거나 이 3가지 나쁜 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여주인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가 BC 455년에 쓴 첫번째 4부작 가운데 하나가 〈펠리아스의 딸들 Peliades〉(전설에 따르면 이 딸들은 사악한 메데이아에게 속아 아버지의 팔다리를 잘라 솥에 넣고 끓이면 아버지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다고 함)이라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몇 년 뒤, 그는 〈아이게우스 Aegeus〉를 상연했고, BC 431년에는 〈메데이아 Medeia〉를 상연했다. 이 세 작품에 모두 메데이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가 이 파괴적인 등장인물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희곡에는 그밖에도 메데이아만큼 부정직하고 파괴적인 여자들이 등장하지만, 그가 여성혐오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첫째, 오늘날 남아 있는 희곡에는 〈헤라클레스의 아이들 Heraclidae〉·〈헤카베 Hecabe〉·〈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등에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여인들도 나온다.

게다가 조금만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무서운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할 수 없는 남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남자들은 사실 여자들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 여자보다 더 비열하고 일부는 여자들보다 더 파괴적이다. 물론 〈애원하는 여자들〉의 테세우스나 〈미친 헤라클레스〉의 헤라클레스처럼 고귀한 남자 주인공도 있지만 그 수는 별로 많지 않다.

억압받는 여주인공도 에우리피데스의 독특한 특징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여주인공들은 처음에는 동정을 받지만, 마지막에는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만큼 사악한 복수심을 품게 된다. 예를 들면 〈메데이아〉에서 여성 합창단은 처음에는 메데이아를 위해 분개하지만, 마지막에는 메데이아가 한 짓에 대해 훨씬 더 분개하게 된다. 〈히폴리토스 Hippolytos〉에서 파이드라는 처음에는 의붓아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혐오하고, 그 열정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충실한 아내이지만, 마음 속에 감추어 둔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자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비참한 운명 속에 끌어들이게 될 허위 고발장을 쓴다.

이 모든 것과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메데이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자 마법사 메데이아가 황금 양털을 구하러 원정을 떠난 남편 이아손이 아니라 이아손과 관계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죽였을 때, 메데이아는 죽은 자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지붕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은 합창단이, 다음에는 메데이아의 남편 이아손이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에게 그토록 극악무도한 잔학행위를 한 메데이아에게 복수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은 전혀 메데이아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사실 태양의 신(신화에서는 메데이아의 조상)은 전차 1대를 내려보내 메데이아를 개선 장군처럼 아테네의 피난처로 태워다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결말을 '불합리하다'고 비난했는데, 그러나 그 불합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에우리피데스가 말하고자 한 요점이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관

에우리피데스의 관점은 감정적이었고, 걸핏하면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는 가혹하고 냉정하지만 대체로 지적인 기본질서를 보는 대신, 인간이 함께 살기에는 훨씬 더 가혹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우주를 보았다. 우연과 무질서, 인간 이성을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광기와 열정,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테오이'(힘들) 등이 그의 비극을 이루는 주요요소이며, 명백히 무의미한 고통이 그 소산이다. 흔히 말하기를,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을 화려한 색깔로 묘사하여 전통적인 올림포스 종교를 유치하고 거짓된 것으로 공격했다고 하나, 이것은 아마 오해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미 올림포스 종교를 공격했고, 이런 점에서 에우리피데스는 개혁가라기보다 오히려 전통적이었다.

BC 431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잔인성과 어리석음을 더해갔다.

에우리피데스는 전쟁 초기에 쓴 2편의 희곡, 〈헤라클레스의 아이들〉과 〈애원하는 여자들〉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정의의 전쟁에 착수하는 이상적인 아테네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전쟁의 양면성을 그린 〈헤카베〉가 나왔다. 거기서 그는 헤카베와 그밖의 트로이 포로들에 대한 정복자들의 극악하고 어리석은 잔학행위를 묘사하는 한편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왕비' 자신이 황금 때문에 왕자를 죽인 야만인에게 자행하는 무서운 복수를 그리고 있다.

이런 일련의 희곡은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에서도 정복자들은 피정복민들에게 잇따라 잔학행위를 저지르지만, 그들 또한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죽는다. 카산드라(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의 승리를 예언한 트로이 공주)처럼, 에우리피데스는 미래를 예언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이 희곡을 쓰고 있을 때, 그의 도시 아테네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에게 해의 멜로스 섬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 직후 아테네는 시칠리아 섬을 정복하기 위해 막강한 군대를 보냈지만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이 7년 동안 질질 끌면서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던 BC 408년에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간 것은 개인적인 실망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지닌 구조는 세련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유명한 그리스의 다른 미덕들도 항상 발견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그는 선정적인 것을 피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과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에우리피데스의 성격묘사는 풍부하거나 섬세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좀처럼 맞붙어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문제나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토론을 벌이지도 않고 훈계하지도 않는다.

합창용 송가는 가볍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가락은 약간 단조롭고, 때로는 진행중인 장면과 거의 무관한 경우도 있다. 진행중인 장면이 별다른 내용이 없이 다음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일 때에는 사실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힘은 그가 창조해내는 가공할 상황들과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전체적 효과에 있다.

그는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칼잡이였다.

에우리피데스는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근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비극'이 아닌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비극들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낭만적 희곡이나 희비극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런 유형의 희곡으로는 〈이온 Ion〉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및 〈헬레네 Helene〉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비극과는 달리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을 전혀 다루지 않았으며, 이 작품들에 신들이 등장한다 해도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희곡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순수한 '극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구제할 수 없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한 현실 세계에 잠시 등을 돌리고, 무대의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희비극 유형의 희곡들은 BC 4세기의 극문학을 예시하는 것 같다.

에우리피데스의 명성과 인기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를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는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세계주의적인 헬레니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보다 명백한 감정적 효과와 선정적 효과까지 갖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더 큰 호소력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어 자체가 에우리피데스의 언어보다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것도 당연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단편', 즉 후세 작가들의 글에서 발견된 인용문들에서도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