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황조가

다른 표기 언어 黃鳥歌

요약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왕이 암수가 다정히 노니는 꾀꼬리의 모습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심정을 대비해 부른 노래이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조에 가사와 창작배경이 실려 전한다. 기원전 17년 왕비 송씨가 죽어 골천 사람 화희와 한인 치희를 계실로 들였는데,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두 여자는 또 다투다 결국 치희는 마음이 상해 제 나라로 돌아갔다. 유리왕이 쫓아갔지만 화가 난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왕이 나무 밑에서 쉴 때 황조가 날아와 노니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집단적·종교적인 특성을 지니는 원시종합예술 형태에서 벗어나 개인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서정시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조에 가사와 창작배경이 실려 전한다. BC 17년(유리왕 3)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어 2명의 여자를 계실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는 화희로 골천 사람이고 한 여자는 치희로 한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살게 했다.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7일간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는 또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으며 "너는 한 나라 비첩이면서 어찌 그리 무례한가"라고 말하자 치희는 이에 마음이 상해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화가 난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쉴 때 황조가 날아와 노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창작연대는 동궁과 서궁의 축조에 소요되는 기간을 계산에 넣고, 봄인 것을 감안한다면 BC 15년경으로 추정된다. 노래의 전문을 해석과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암수 서로 정다운데/외로운 이내 몸은/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암수가 다정히 노니는 꾀꼬리의 모습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심정을 대비한 단순한 내용이다.

이 노래의 작자와 창작과정에 대한 추정은 다양하다. 고구려 건국 이전에 이미 한자가 전래되어 유리왕이 애초부터 한자로 이 노래를 지었을 것이라는 유리왕의 한시 창작설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 개인에 의해 창작되어 성적 제의에서 가창되거나 민요로 널리 불리던 것이 영웅활동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에 따라 당시의 영웅적 인물이던 유리왕의 사적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 당대에 널리 불린 민요를 유리왕이 단지 가창했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 유리왕의 창작설을 받아들이되 애초에 우리말로 지은 것을 후대에 한역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하다.

이 노래는 집단적·종교적인 특성을 지니는 원시종합예술 형태에서 점차 벗어나 개인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서정시로 꼽힌다. 그러나 서정시가 아닌 서사적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치희 개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화희와 치희가 대표하는 두 종족간의 대립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한 추장의 탄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 두 여인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을 고려하여 당시 경제생활 상태의 한 면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리왕의 성격이 호화스럽고 인접국과의 평화를 힘써 도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당시의 경제활동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노래의 성격을 서정성에서 벗어나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 자신이 이 노래를 지었건,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지어진 것이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져 민요화되었건 간에 이 노래는 짝을 잃은 외로운 심정을 표현한 서정성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리왕 창작설을 받아들인다면 이 노래는 남아 있는 고대가요 가운데 최고의 순수 개인서정시가 된다. 고대인의 순박한 서정성을 담은 서정시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