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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은 중국의 문화적 풍토를 완성했기 때문에, 중국인을 '한인'이라 부른다. 유방이 창건했으며 중용과 덕을 강조하는 유교이념을 채택해서 전한, 후한을 통틀어 400년 이상 중국을 지배했다.
한은 교양 있는 사회였을 뿐만 아니라 기록의 보존을 중시하는 사회였으므로, 당시 문화적인 분위기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시가 장려되었고, 운문과 산문을 결합시킨 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대의 황제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추구해서 이 시기에 종이가 발명되었고, 물시계와 해시계가 사용되었으며, 지진계가 개발되었다. 한대에 이룩된 행정적·문화적·기술적 업적은 매우 훌륭하여 후대의 나라들이 이를 답습하려 했다.

한(Han Dynasty)
한(Han Dynasty)

후세 모든 중국 국가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은 후세의 중국인들이 중국의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완성했기 때문에, 중국인을 '한인'(漢人)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은 유방(劉邦 : BC 256~195)이 창건했다(유방). 그는 평민 출신으로서, 단명했던 진(秦 : BC 221~206)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반란군 두목이었다. 한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진의 행정제도를 답습해서 전국을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그곳에 관리를 파견했으며, 관료제를 발전시켜 업적에 따라 관료를 승진시키고 급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진과는 달리 중용과 덕을 강조하는 유교이념을 채택해서 국가의 전제적인 정책을 은폐했다. 이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오래 지속되었다.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해서 신(新 : 9~25)을 세웠던 시기를 포함해서 한은 400년 이상이나 중국을 지배했다. 한을 2부분으로 나누어, 왕망의 찬탈 이전에 서부의 도시인 장안(長安)에 도읍을 두고 있던 시기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 BC 206~AD 25), 왕망의 신왕조 이후에 동쪽의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 : 25~220)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진의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문자체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문화적 표현을 근절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자비한 진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에, 진을 이은 한에 의해서 문화의 유적이 소생될 수 있었다. 한은 교양 있는 사회였을 뿐만 아니라 기록의 보존을 중시하는 사회였으므로, 당시 문화적인 분위기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던 악부(樂府)에서는 한대의 음악·악기·연주법 및 노래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편찬했다. 궁정과 문묘(文廟)에서 음악은 2가지 범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연회용 음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의례용 음악이었다.

문묘의 제례(祭禮)에서는 종종 춤도 중요한 요소였다. 춤에 대한 해석서라고 생각되는 것에서는 대규모 악단과 무용수들의 공연 기록이 있다. 또한 개인이 오락의 일부로 즐기는 격식 없는 춤도 있었는데, 이 춤은 몸동작은 많지만 발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대에는 몇 가지 현악기도 이용되었다.

불교가 한대에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낭랑한 소리를 내는 청동제 범종도 전해졌다. 일종의 연극이라 할 만한 것도 나타났는데, 극중에서 연기자들이 유명한 무사들의 영웅적인 고사를 연기했다.

한대의 건축물은 건물의 벽이나 무덤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명기(明器 : 장사 지낼 때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묻는 여러 가지 기물)에 나타난 주택 견본과 무덤의 벽화로부터 당시의 건축유형이 많이 알려져 있다. 황실의 기록에 의하면 뤄양에 있던 후한의 중심 궁전은 엄청나게 큰 규모였고, 사방에는 목재·돌·벽돌로 된 여러 가지 높은 탑들이 둘러서 있었다고 한다.

둥근 지붕이 있는 무덤은 거대한 흙둔덕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이 거대한 흙둔덕은 무덤이 도굴당한 뒤에도 여러 세기 동안 건재하다. 이 황실 기록에 의하면 중요한 건물의 내벽에는 회반죽을 바르고, 인물화·초상화 및 역사적인 사건의 장면 등을 벽화로 그려넣었다. 한대 예술가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들 중 최고 지위에 있던 사람은 황제의 측근 인물이었고, 이러한 전통은 후세에도 전해져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벽화 외에도 방 사이의 칸막이와 비단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중국 최초의 무덤인 석조도 한대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진흙으로 빚은 살아 있는 듯한 자그마한 인물조각이나 동물조각도 한대에 나타났다. 전한시대에 청동기는 주(周)나라 말기의 유형을 답습해서 종종 은과 금으로 상감했다. 청동기는 제기(祭器)와 생활용기로 주조되었다.

생활용기로는 사람, 동물, 신비로운 짐승들의 모양을 본뜬 등잔·거울·옷걸이 등이 있었다. 기하학적인 도형의 무늬나 구름·산 같은 소재를 여러 가지 색깔로 짜넣은 비단의 직조가 주요산업이 되었고, 수출무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한대의 도공들은 장례용 기물에 집과 인물을 새겨 넣었다. 생활용기로는 2가지 유형의 유약칠을 한 도자기가 쓰였는데 청동기의 모양과 무늬를 본뜬 것이 많았다. 그릇에 옻칠을 한 것은 은대(殷代)에 발견되었지만 칠기가 만연하게 된 것은 한대이며, 칠기로 된 한대의 술잔들이 완전한 상태로 화베이[華北]의 수중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한대에는 시(詩)가 장려되었고, 운문과 산문을 결합시킨 새로운 장르의 (賦)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는 길이가 길고 서술적이며 즐기기 위해 지어졌는데, 이러한 것들이 창조적인 작품의 기준이 되었다. 현재 약 1,000수의 부가 남아 있다. 한대의 산문 작품 중에는 역사서·철학서 및 정치에 관한 저술이 들어 있다. 가장 위대한 초기 역사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대에 저술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이다. 문화를 억압하고자 했던 진과는 대조적으로 한대에는 관리들에게 문화적인 소양을 쌓도록 요구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숙달 정도를 관리 임용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한대 황실 도서의 방대한 목록이 중국 최초의 문헌학이 되었다. 황실 도서에는 철학·종교·예술 외에도 수학·약학 같은 실용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대의 황제들은 또한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추구해서 이 시기에 종이가 발명되었고, 물시계와 해시계가 사용되었으며, 지진계가 개발되었다. 한대에는 달력도 자주 간행되었다.

한대에 이룩된 행정적·문화적·기술적 업적은 매우 훌륭하여 후대의 나라들이 이를 답습하려 했다.→ 중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