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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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Confucianism , 儒敎

요약 공자가 창시하여 맹자·순자로 계승되어온 유교는 한 무제와 동중서에 의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BC 136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남북조시대에 신도교가 융성하고 불교가 전파되면서 유교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교전통의 소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유교는 당의 한유에 의해 부흥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호원·범중엄·왕안석·구양수·사마광 등의 사대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되었다. 원대에는 쿠빌라이 칸이 등용한 허형이 국가제도를 세우는 데 유교를 바탕으로 했다.
중국에서 유교는 명대의 유학자 주희·왕양명을 거쳐 청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19세기 이후 서양사상이 유입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유교는 쇠퇴해갔지만, 유교의 전통은 중국인의 생활 속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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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유교 전통의 형성
    1. 개요
    2. 전형적인 유가 지식인 맹자
    3. 유가의 학문적 계승자인 순자
    4. 정치의 유교화
    5. 5경
    6. 동중서
    7. 도교·불교에 대비한 유교 도덕윤리
  2. 부흥
    1. 개요
    2. 송대의 대유학자들
    3. 금·원·명대의 유교
    4. 청대의 유교
  3. 현대의 유교
  4. 한국 유교의 역사
    1. 고대에서 고려시대까지
    2. 조선시대
    3. 한말에서 현대까지
  5. 한국문화와 유교
  6. 한국 유교의 교단과 의례
    1. 성균관
    2. 유도회(儒道會)
    3. 제사의례
  7. 현대의 한국 유교
    1. 변혁요구와 대응
    2. 교세와 활동

공자가 창시하여 맹자·순자로 계승되어온 유교는 한(漢) 무제와 동중서에 의해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BC 136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남북조시대에 신도교가 융성하고 불교가 전파되면서 유교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교전통의 소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유교는 당의 한유에 의해 부흥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호원·범중엄·왕안석·구양수·사마광 등의 사대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되었다. 원대에는 쿠빌라이 칸이 등용한 허형(許衡)이 국가제도를 세우는 데 유교를 바탕으로 했다.

중국에서 유교는 명대의 유학자 주희·왕양명을 거쳐 청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19세기 이후 서양사상이 유입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유교는 쇠퇴해갔지만, 유교의 전통은 중국인의 생활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고대 유교 전통의 형성

개요

공자가 죽자 추종자들에 의해 8개 학파로 나뉘었으며, 그들은 각각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자처했다.

공자의 사상과 가르침은 〈논어〉에 잘 나타나 있으며, 맹자(BC 371경~289경)는 공자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 초기에 묵자(墨子:BC 476경~390경)의 집산주의(集産主義)와 양주(楊朱:BC 440~360경)의 개인주의로 물들어 있던 사상계를 비난했다. 봉건왕조 주(周)의 해체와 패권정치의 부상으로 힘과 부(富)의 목소리가 커졌다. 초기 도가(道家)와 법가(法家)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으며, 유가(儒家)의 지식인들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최고 덕목인 덕치(德治)가 실현될 수 없는 현실 정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가가 처한 상황이었다.

전형적인 유가 지식인 맹자

맹자는 유가사상의 정통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맹자는 사회비판자, 도덕철학가, 정치적 활동가로서 위대한 삶을 살았다. 맹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대부(士大夫) 계층을 중용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을 최우선시하고 임금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한 농가(農家)의 주장에 대해 맹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으로 답했다. 맹자에게 유교 사대부는 관리(官吏)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왕이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가르치는 책임을 지닌 학자를 의미했다.

맹자는 봉건군주에게 단순한 정치적 조언자가 아니라 왕의 스승으로서 임하고자 했다.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결합시키기 위해, 맹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상조류인 묵자의 집산주의와 양주의 개인주의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묵자의 집산주의는 보편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자기 가족과 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같이 무관심하게 자기 아버지를 대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양주는 묵자와는 반대로 자기를 우선시했는데, 맹자는 양주의 주장이 정치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두 사상가에 대해 맹자는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요, 양주는 자기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사회개혁의 방도를 밝혔다. 그것은 왕들이 추구하는 이(利)·부(富)·권(權) 등을 정의·공공정신·복지·영향력 등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맹자는 다스림의 첩경은 민의(民意)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왕보다 나라가 중하고 나라보다 백성이 더 중하며 왕도(王道)를 행하지 않는 군주는 군주일 수 없다고 한, 강한 '민본주의' 사상에 따른 것이었다.

이 사상에는 맹자가 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완전해진다는 '성선설'(性善說)의 철학적 신념이 있다. 맹자는 한 인간의 형성에서 생물학적·환경적 요인이 갖는 구속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늘이 부여해준 고귀한 근본인 '대체'(大體)를 넓히고 순화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마음의 힘을 완전히 깨달으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했다.

유가의 학문적 계승자인 순자
순자
순자

맹자가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완성한 인물이라면, 순자(荀子:BC 300~230)는 예(禮)와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유교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현실적·체계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BC 3세기에 부강했던 제(齊)나라의 직하(稷下)학파에서 논리학, 경험론, 실천적 사고, 논쟁 등에 탁월했던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요한 사상조류를 대표하는 이른바 12명의 철학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는데, 이로써 유가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적·사회적 학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자의 가장 주된 비판대상은 맹자의 '성선설'이었다.

공자·맹자와 같이 순자도 자기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순자는 맹자와는 반대로 인간본성의 악함을 주장했다(성악설). 인간의 본성을 자기욕구의 충족에 있다고 본 그는 사회적 강제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강제가 없으면 인간의 생존조건인 사회적 안정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순자가 보기에 맹자의 최대 약점은 사회의 안정을 위한 예(禮)와 권위의 필요성을 간과한 것이었다. 순자는 도덕성의 기초를 인간 정신의 인식능력인 지능(知能)에서 찾았다. 인간은 '지'(知)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이기적인 자기본성을 제어한다.

그에 따르면 유가의 학문은 '사회화'이다. 사회화의 과정에는 고대 성인(聖人)의 권위, 관습, 스승, 군주, 법, 관리 등이 모두 필요하다. 법·질서·권위·예에 대한 순자의 강조는 이후 법가와 연결되었다. 행동의 객관적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후 진(秦)나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전제주의의 이념적 바탕으로 작용했다. 순자는 유교의 학문적 영속에 크게 기여했다.

하늘[天]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 문화에 대한 세련된 이해, 정신의 인식론적 측면과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통찰, 올바른 논리적 정의와 논쟁에 대한 강조, 진보에 대한 신념, 정치적 제도에 대한 관심 등은 유교의 학문적 자산을 매우 풍부하게 했다. 순자는 이후 3세기 이상 유가의 모범으로 존경받았다.

정치의 유교화

진대에는 법가사상이 크게 유행했지만, 전한(前漢:BC 206~AD 25) 초기의 통치사상은 법가에서 조화와 불간섭의 청정무위(淸靜無爲)를 주장하는 도가사상으로 바뀌었다(황로학파). 그러나 (漢) 무제(武帝:BC 141~87)의 치세와 동중서(董仲舒:BC 179경~104경)의 출현으로, 유교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의례(儀禮)가 통치행위, 사회적 관계의 정립, 분쟁의 해결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유교사상은 관료체제와 법률체계 속에서 굳게 자리를 잡았다. BC 136년 유학은 국교로 선포되었다. BC 124년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세워졌으며, 오경박사(五經博士)와 50명의 박사제자원(博士第子員)이 설치되었다.

BC 50년에는 태학에 3,000여 명의 학생이 있었고, AD 1세기에는 매년 1,000여 명이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관리로 충원되었다(과거). 즉 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관료제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58년 모든 관학(官學)에서는 사원에 공자를 모셨고, 175년에는 황제의 후원 아래 학자들이 합의본 경전에 대한 해설을 몇 십 년에 걸쳐 거대한 석판에 새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수도인 뤄양[洛陽]에 세워진 이 석비는 고전적 유교전통 형성의 완성을 상징했다(고등교육).

5경

〈시경〉·〈서경〉·〈예기〉·〈주역〉·〈춘추〉의 5경이 형성된 것은 유학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구체적으로 선포한 것과 같았다.

5경의 구성을 보면 유학교육의 보편적 정신을 알 수 있다. 5경은 형이상학·정치·사회·역사·시(詩)에 대한 이상(理想)을 나타내고 있다. 형이상학적 이상을 담고 있는 〈주역〉은 점복술을 수점술(數占術)과 윤리적 통찰에 결합시켰다. 음양(陰陽)에 의하여 우주는 항상 유기적인 통일성과 역동성을 나타낸다.

군자(君子)는 이러한 우주의 조화를 감지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최고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 이상을 담은 〈서경〉은 인정(仁政)을 편 3황(三皇:堯·舜·禹)과 3대(三代:夏·殷·周)를 통해 왕도를 밝혔다. 즉 평등한 백성과 군자·성군은 유기적 통일성을 이룬다. 정치는 도덕적 권유를 의미했고, 정부의 목적은 백성을 먹이고 질서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의 교화에도 있다(왕). 〈시경〉에 있는 시의 대부분은 사회 각층의 공동체와 개인들이 여러 가지 경우에서 나타내는 감정과 감상들이다.

시경은 이들 시를 통해 보통 인간의 감정에 대한 유교적 가치판단을 드러내고 있다. 〈시경〉의 근본 주제는 상호 감응이며, 전체적인 경향은 정직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사회적 이상을 담은 〈예기〉에서는 사회를 계약관계에 기초한 대립관계가 아니라 신뢰에 기초한 공동체로 본다.

사·농·공·상의 사회계층과 군신·부자·부부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선을 위해 협동해야 한다. 각자는 자기의 직분과 위치를 지켜야 하고 이는 '예'로 나타난다. 〈예기〉 대학(大學) 편은 이러한 예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춘추〉에 나타나는 역사에 대한 중시는 유교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공자는 이를 '온고이지신'(溫古以知新)이란 말로 표현했다. 〈춘추〉는 BC 8~5세기의 모든 중요한 정치적 인물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춘추필법'은 후대에 사마천(司馬遷)을 위시하여 많은 중국의 왕조사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

동중서는 한대에 유학을 독특하게 발전시킨 인물이다.

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선포했지만, 당시 지식인계층 사이에서는 도교·음양가·일원론자·법가·무당·강신술사 등이 여전히 크게 활약하면서 우주론적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중서는 이러한 지적 혼합주의의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에 음양사상을 가미하여 유명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일은 자연과 감응하는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이론이다. 만물의 조직 속에서 군주·아버지·남편은 양이고 신하·자식·아내는 음이다.

그러므로 군주·아버지·남편은 신하·자식·아내의 '강'(綱)이다. 동중서에 의하면 '강'은 천(天)으로서 절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군주·아버지·남편을 3강이라고 함에 따라 군권(君權)·부권(父權)·부권(夫權)의 절대화가 이루어졌다. 동중서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유학자들이 모두 그의 사상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전한시대에 이미 고문(古文)학파가 출현했는데, 이들은 진(秦) 이전에 씌어진 유교경전을 엄격하게 다시 편집하여 이를 보다 이성적·도덕적 방향에서 연구했다.

이 학파는 후한 시대(AD 25~220)에 크게 유행했다. 한대에 유학자들은 사회적·도덕적 개념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관리했으며, 정치를 독점하여 유교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했다. 또한 이러한 분야에서 유학자의 지배력을 확립시켰으며, 이것은 20세기까지 면면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전문적인 것으로서 광범위한 정신세계 전반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형이상학과 종교의 측면에서 유학은 여전히 도교나 불교의 그늘 아래 있었다.

도교·불교에 대비한 유교 도덕윤리

후한 말기의 한나라 실정은 관학 유생들의 광범위한 항의를 초래했다.

이후 농민반란은 신앙요법파의 도가들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에 의해서도 주도되었다. 한이 멸망하고 북방에서 이민족이 침입해 들어와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3세기 초반에서 6세기 후반에 이르는 이 기간에는 신(新)도교가 융성하고 불교가 전파되었다. 반면에 유교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지식계층과 서민 사이에 도교와 불교가 우세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유교전통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유교윤리는 이때에 비로소 중국사회의 도덕으로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계속해서 보편적인 존경을 받았다. 유교경전은 계속 모든 문자문화의 기초로서 기능했고, 경전에 대한 면밀한 주석들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유교는 그 유용성으로 인해 중앙의 관료제도, 관리의 충원, 지방제도 등의 정치제도에서 계속 활용되었다. 북위(北魏)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이민족 국가의 중국화는 대체로 유교적인 것이었고, 남조에서는 유교 윤리와 예법에 기초하여 가족제도가 체계적으로 강화되었다. 수(隋:581~618)의 통일과 (唐:618~907)의 융성에 따라 유학은 다시 크게 발전했다.

국가에 의하여 5경이 간행되었고, 모든 정부관행의 유교예법화가 이루어졌다. 유교경전에 입각한 과거시험의 시행은 지식계층의 문화를 유교화하는 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대는 불교와 도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불교의 학승인 길장(吉藏:549~623)·현장(玄奘 : 602~664) 등이야말로 당대의 독창적 철학을 대변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도 유교사상은 〈중용 中庸〉과 〈역전 易傳〉(〈주역〉의 주해서)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발견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이고(李翺 : ?~844경)의 〈복성서 復性書〉는 송대 성리학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부흥의 가장 탁월한 선구자는 한유(韓愈:768~824)이다. 그는 사회적 윤리와 문화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했고 유교의 '도통'(道通)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도'의 올바른 계승을 의미하는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1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부흥

개요

불교사상은 도가사상을 매개로 해서 중국에 도입되었고, 도가사상의 도교화는 불교의 체제와 수련법에서 크게 영향받으며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와 도교는 중세 중국의 정신계를 지배했다. 유교가 지도적인 사상으로 재등장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을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했고, 고대 유교의 통찰력을 다시 회복해야 했다. 더욱이 당의 멸망 이후 거란족·여진족·몽골족 등 북방민족의 침략은 중국의 문화적 유산을 위협했다. 개인적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중국을 보전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은 유학을 살아 있는 전통으로 만들 수 있는 상징적·정신적 자원을 개발했다.

송대의 대유학자들

(960~1279)은 군사력이 약했고 그 판도도 당보다 매우 축소되었다.

그러나 송대의 경제적 번창과 과학기술·예술 등의 문화적 발전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당의 귀족제가 무너지고 서책과 교육의 광범위한 보급과 확산, 과거제도의 완전한 시행은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사대부를 출현시켰다. 그들은 특히 높은 학문적 소양과 사회의식, 정치적 참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의 탁월한 사대부로는 고전학자인 호원(胡瑗:993~1059)과 손복(孫復:992~1057), 개혁가인 범중엄(范仲淹:989~1052)과 왕안석(王安石:1021~86), 관직에 있던 문학가인 구양수(歐陽修:1007~72)와 소동파(蘇東坡:1036~1101), 정치가·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1019~86) 등을 들 수 있다.

사마광
사마광

이들은 교육·정치·문학·역사에서 유교를 부활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부활의 과정을 성리학 사상가들의 학통(學統)으로 살펴보면 주돈이(周敦頤 : 1017~73)·소옹(邵雍:1011~77)·장재(張載:1020~77)·정호(程顥:1032~85)·정이(程頤 : 1033~1107)와 위대한 집대성자인 주희(朱熹:1130~1200)로 이어진다.

이들은 개인과 사회의 윤리, 도덕적 형이상학이 통합되어 있는 포괄적인 인(仁)을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를 발전시켰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새로운 철학이 유교경전의 정신을 충실히 회복시키면서 동시에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돈이는 〈주역〉과 부분적으로 도교사상을 계승하여 태극(太極)을 중심으로 간단하면서도 체계 있는 우주구성론을 제시했다. 그는 만물의 중심에 가장 빼어난(秀) 지적 존재로서 인간을 위치시켰다(형이상학). 소옹은 〈주역〉의 8괘 형성에 관한 해석에 근거를 두면서 도교사상을 섞어 하나의 우주 구조 학설을 구성했고, 이를 통해 그의 상수학(象數學)을 완성했다.

주돈이(Chou Tuni)
주돈이(Chou Tuni)

장재는 우주의 실체인 ''(氣)의 변화에서 모든 사물과 현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사람과 사물이 똑같이 '천지의 기'(天地之氣)를 받았으므로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이고 사물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과 인간의 상호관계, 인간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사상은 정호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다.

그는 "인자(仁者)는 혼연히 모든 사물과 한몸[同體]을 이룬다"고 했고, 또한 이 이치를 깨달으면 다만 성실함(誠)과 경건함(敬)으로 보존하면 된다고 했다. 그의 동생 정이는 "함양(涵養:덕을 기르는 것)은 반드시 경건함으로 해야 하며, 배움에 나아가는 것은 앎을 넓힘(致知)에 있다"고 했다. 그는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앎)을 언급하면서 자기수양에서 마음의 밝힘을 중시한 정호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호가 주장한 심학(心學)과 정이가 주장한 이학(理學)은 북송 유학사상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

주희는 정이의 이학파를 계승했으며, 은연중에 정호의 심학은 배격했다(성리학). 주희는 유학을 단순히 종합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유학에 새로운 구조·특색·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을 구성했다.

〈예기〉에 포함된 〈중용〉과 〈대학〉은 주희 이전 시기에 이미 독립된 책자로 되어 있었으며, 유교 교육의 중심 교과목이었다. 그러나 〈중용〉과 〈대학〉을 〈논어〉·〈맹자〉와 더불어 4서(四書)에 포함시킨 것은 주희였다. 4서는 5경보다 중시되었고, 중국에서는 14세기부터 과거시험과 초급교육의 중심교재가 되었다.

공자와 맹자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최고 유학자의 계보인 '도통'(道統)의 해설가·전달자로서 주희는 북송의 유학자들을 선별하여 도통에 포함시켰다. 그는 주돈이·장재·정호·정이는 포함시켰지만, 소옹·사마광은 제외시켰다. 또한 '격물'의 과정을 사물에 있는 이치를 탐구하기(窮理) 위하여 마음을 엄격히 수련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중의 독서방법을 권장하여, 먼저 경건하게(居敬) 하면서 그 뜻을 확고히 하도록 했다. 이것은 덕성과 지식을 결합한 포괄적 교육관이었다. 주희는 남송 최대의 유학자였지만, 동시대의 육구연(陸九淵:1139~93)에 의해 크게 비판받았다.

육구연은 맹자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높이 평가하여 주희의 도통론을 비판했다.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고 주장하면서 하늘·사람·사물의 이치가 모두 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주희의 '격물치지'의 해설을 반박했다. 또한 나의 본심만 알면 "6경(六經)도 나의 마음에 풀어놓은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독서 등의 강학을 중심으로 하는 주희의 주지주의적 교육관을 비판했다. 그의 심학(心學)은 당시에는 소수파에 머물렀지만 명대에 와서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성립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德川幕府時代]에 융성했다.

육구연
육구연
금·원·명대의 유교

1127년 남송의 건립을 전후한 150여 년간 중국 북부는 요(遼:907~1125)·서하(西夏:1038~1227)·금(金:1115~1234)이 통치했다.

요와 서하에서는 유학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서는 비록 유교가 부흥한 남송과의 교류가 적었지만, 북부의 사대부들이 학문과 예술의 전통을 지속시켰고, 그들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1279년 몽골족의 원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하자, 남부의 학문사상은 북부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라(1279~1368)는 학자들에게 가혹했으나, 탁월한 유학자들이 원의 전시대에 걸쳐 배출되었다.

그들은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기도 했고 출사하여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허형(許衡:1209~81)은 정치 참여의 길을 택했다. 원의 쿠빌라이 칸에 의해 등용된 그는 조정의 의례와 관직제도를 정하고, 국가제도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이를 유교적으로 이끌었다. 사실상 과거시험에서 4서를 교본으로 삼은 것은 원나라였다. 원대에는 허형에 의해 주희의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었지만, 이는 매우 단순화된 것이었다.

은거한 학자 가운데 유인(劉因:1249~93)은 고전연구에 철학적 방법론을 엄격하게 적용했고, 역사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그는 주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심학을 크게 강조했다. 같은 시대의 오징(吳澄:1249~1333) 또한 심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준비 끝에 (明:1368~1644)에 이르러 육구연의 심학이 재흥하게 되었다.

명대 최초의 뛰어난 유학자들인 설선(薛瑄:1389~1464)·오여필(吳與弼:1391~1469)·진헌장(陳獻章:1428~1500) 등의 사상에서 도덕의 주체 문제가 관심을 모았다.

이들을 바탕으로 주희 이후 최대의 사상가인 왕양명(王陽明:1472~1529)이 출현할 수 있었다. 왕양명은 육구연의 심리학을 발전시켜 경전에만 매달리는 정주학(程朱學)에 대항했다. 그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여 지식과 실천을 구분하는 정이 등의 학설에 반대했고, 맹자의 도덕적 이상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학문과 더불어 관직에 나아갔고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것은 그가 행동하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왕양명(王陽明)
왕양명(王陽明)

실무에 소질이 있었음에도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마음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 도덕적 수양에 있었고, 이것을 나중에 '양지'(良知)라는 말로 나타냈다. 양지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래적인 지식이다. 나아가 도덕의 원리(天理)인 양지는 최고의 정신적 존재에서부터 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의 본래적인 것이라고 했다(수신). 왕양명의 제자 중에서 왕기(王畿:1498~1583)는 오랫동안 동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했고, 왕양명의 양지 이론을 한층 선학(禪學)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지(李贄:1527~1602)는 급진적인 개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모든 인간관계를 우애로 환원시키자고 주장했다. 왕양명을 비평한 사람 중에서는 유종주(劉宗周:1578~1645)가 대표적이다. 유종주의 제자 황종희(黃宗羲)는 유종주의 저작을 바탕으로 명대의 유학자에 대한 광범위한 전기를 편집했다.

고염무(顧炎武) 또한 왕양명을 비판했는데, 그는 고대 음성학·문헌학·정치제도의 연구에 뛰어났다. 그는 당시에 명성을 날렸고 18세기 고증학(古證學)의 비조로 알려졌다. 이와는 달리 같은 시대의 왕부지(王夫之:1619~92)는 200년 후에야 이름을 떨쳤다. 그는 유교사상사에서 명민하고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형이상학·역사·경전에 대한 광범위한 저술 속에서 양명학파를 철저하게 비판했다(교육철학).

청대의 유교

중국에서 유교의 발전은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여 세운 청조(淸朝:1644~1911) 때 절정에 달했다.

청의 황제들은 유교의 가르침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말 그대로 통치의 수단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일종의 학문 사찰인 '문자(文字)의 옥(獄)'과 같은 가혹한 방법으로 도덕적 전통을 잇는 유생들을 탄압했다. 고염무로부터 18세기에 고증학이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정치적 개혁 지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연구가 현실정치와 상관 없는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대진(戴震:1723~77)은 〈맹자자의소증 孟子字義疎證〉에서 송학에 대해 탁월한 비판을 했다. 그는 건륭제(乾隆帝)가 1773년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수찬자로 임명한 학자였다. 〈사고전서〉는 경학·역사·철학·문학 분야의 모든 주요저작에 대해 해설을 붙이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현대의 유교

19세기 초엽 이후 서양으로부터의 충격을 유교문화가 막아줄 것이라는 중국 지식인들의 신념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학의 본령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 장지동(張之洞:1837~1909)의 노력과 캉유웨이[康有爲]의 정치개혁 시도와 같이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입각하여 서양사상과의 현상적인 조화를 모색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가고, 결국 1919년 구습타파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공식적인 이념이 되었고, 유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비록 현대 중국 지식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만 유교의 전통은 중국의 모든 생활 수준, 즉 행동과 태도, 말과 믿음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적·심리적 구조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정치철학). 현대 중국에서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몇몇 학자들은 아직도 유학에 근원을 두고 사상활동을 하고 있다. 슝스리[熊十力:1884~1968]의 신유식론(新唯識論), 량수밍[梁漱溟:1893~1988]의 문화분석, 펑유란[馮友蘭:1894~1990]의 신이학(新理學), 허린[賀麟]의 신심학(新心學)이 그 대표적인 사상들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유교의 유산을 전제주의·관료주의·친족주의·보수주의·남성우월주의의 온상으로 비판하지만, 타이완·홍콩·북아메리카 등지의 일부 학자들은 유교의 인본주의와 중국 근대화 사이의 상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학자들은 사회주의적 맥락 속에서 유교의 인본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 사이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대해서 탐색을 시도하고 있다(사회적 상호작용).

장지동(張之洞)
장지동(張之洞)

한국 유교의 역사

고대에서 고려시대까지

한국유교의 시원에 관한 견해는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BC 12세기경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범금팔조(犯禁八條)로 우리 사회를 교화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둘째,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燕)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 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셋째,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漢四郡:BC 108~AD 313)이 설치되면서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삼국시대 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太學)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파했다.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삼국의 유교문화는 경전교육에 기초한 실천적 성격을 띠며, 사회제도의 정비에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반기에는 과거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의례제도 등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비가 확산되어갔다(고려의 유학).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문에 내재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의 이념적 각성이 뚜렷이 드러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이는 유교적 역사의식도 이 시대 유교사상의 심화양상을 보여준다.

고려 후반기의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와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다. 이색·정몽주 등의 학자들은 이 학풍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정도전·권근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이념적 뒷받침이 되어 유교적 사회제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했다.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세종 때에는 유교적 국가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유교적 교화체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공신과 관료의 기존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도학정신의 실천에 진력하던 신진세력인 사림파(士林派) 사이에 대립을 보여 여러 차례 사림파의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도학의 이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 의해 추구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이들이 정치의 담당자가 되는 사림정치시대를 열었다. 사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자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서원 설립이 활발해져서 향촌의 유림활동이 확산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향촌 질서의 유교적 교화가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이 인간의 심성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이르러 불붙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은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 논쟁으로서, 학문적인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는 가정의례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의 발전과 성리학적 논쟁의 확대, 청나라를 배척하는 의리론의 강화에 따라 정통도학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사변적 공허성과 의리론의 비실리적 명분주의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현실 사회제도의 개혁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 대두했다.

18세기초에는 심학파(心學派:陽明學)가 형성되었다. 당시 새로 전래해온 서유럽 문물(西學)을 수용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신앙운동이 일어나자, 도학파는 이단사설로 배척하고 정부는 형벌로 금압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신념들이 서로 비판하는 다원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한말에서 현대까지

19세기말 서유럽 열강과 일본의 침략위협이 높아지면서 도학자들은 강경한 저항논리로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제기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뒷받침했다.

한말 도학자들은 침략자에 대한 배척이론의 강화와 의병운동의 전개 사이에서 다양하고 열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무력 위협 앞에 마침내 개항했으며,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에 의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1896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유학자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다. 1910년 조선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체계는 허물어졌다.

그러나 도학파의 선비들은 의리론적 신념에 의해 의병운동을 일으켜 항거하거나, 단발령, 창씨개명, 일본어 사용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비타협적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전통수호의 보수적 태도를 지켜갔다. 소수의 각성된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고 유교개혁을 추구하여, 1910년경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대동교(大同敎)를 조직했고, 1920년경 이병헌(李炳憲)은 공교(孔敎)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적 유학자들과 서민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15해방 후 1946년 성균관(成均館) 유도회(儒道會)의 조직이 유림독립운동가의 대표적 인물인 김창숙(金昌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그뒤에도 유림분규를 수습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도덕운동을 중심으로 사회교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적 규범형식과 가치관은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서,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국문화와 유교

유교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은 전통사회의 일상적 실천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효경 孝經〉이 중요시되면서 효(孝)의 덕목이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충(忠)의 규범은 국가 성장기의 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忠·孝·勇·信·仁)도 유교윤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강(三綱:忠·孝·烈)의 규범은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를 통해 모범적 인물들이 포상되고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3강과 5륜의 규범이 대중 속에 널리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면서, 전통사회의 도덕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로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의리정신을 유교윤리의 표준으로 확인하여, 절의(節義)가 숭상되고 불의에 대한 강인한 저항정신을 실현했으며, 청백(淸白)의 풍속과 염치(廉恥)의 도덕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지나친 도덕적 순수성의 추구로 물질적 가치와 욕망의 현실성이 무시되는 문제점은 실학파의 실용적 관심을 통해 그의 보완이 탐색되기도 한다.

유교사회에서 풍속의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법의 제도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양(辭讓)의 예법을 비롯한 각종 유교예절이 삼국시대이래 시행되어 풍속을 이루었으며, 이 때문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려왔다. 특히 〈주자가례 朱子家禮〉가 들어온 뒤로, 조선시대에는 이에 따른 의례절차의 모든 법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어 실천되었다. 유교의례가 대중생활 속에 확산되면서 전통사회는 미풍양속을 확립했으나, 반면 의례의 형식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유교의 사회제도는 신분계급의식과 장자(長子) 중심의 종법(宗法)제도를 기초로 한다.

사대부(良班)·중인·양인·천인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하여, 사회적 진출과 통혼(通婚)의 범위가 한정되며, 의복과 언어까지도 차이를 두는 상하의 수직적 계층질서를 형성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권은 장자만이 지닐 수 있고, 남녀 사이도 실질적으로 남자 중심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질서를 확립한다. 유교사회는 가족제도에 기초하며, 군신관계의 모범을 부자관계에서 찾았다. 대가족 형태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친족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전통사회에 안정의 기초를 확보해주었다. 국가도 가족의 확산으로 인식함으로써 사회의 유기적 공동체 의식을 확보하지만, 폐쇄적 문벌주의로 서로 대립하여 분파적 대립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유교의 정치이념은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속에서 천명을 발견하고,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민본(民本)사상과 덕치(德治)주의에 근거한다. 따라서 백성의 교화에 도덕을 앞세우며, 법률은 유교의 기본윤리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제정된다. 지배층과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로(言路)를 넓히고, 그 임무를 전담시키기 위해 언관(言官)의 비중을 높여놓았다. 또한 임금도 경전을 비롯한 유교 교육을 받는 경연(經筵)제도를 통해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과거(科擧)를 통하여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고, 관리의 업적이 유교적 통치목표에 따라 평가되게 함으로써 전통사회는 치밀하게 유교정신으로 다스려지도록 했다. 유교문화는 한자의 문자생활을 통해 중국 문화의 신속한 수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자는 대중의 문맹화를 초래했고, 더구나 우리 언어의 고유한 세계를 한자에 예속시킴으로써 문화적 예속성을 초래하게 했다.

한문의 시가(詩歌)는 우리의 고유 음률과 어긋남에 따라, 중국문화를 지향하는 사대부 문화와 우리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는 서민 문화 사이의 이질성을 보여주게 된다.

한국 유교의 교단과 의례

성균관

재단법인 성균관(성균관재단)은 유교조직을 대표하는 중앙기구이고, 산하조직으로서 각 시도별 향교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전국(남한) 231개소의 각 지방 향교가 있다. 성균관재단은 그 목적을 도의의 천명, 윤리의 부식, 문화의 발전, 공덕의 작흥 등으로 밝히고 그 기본사업은 문묘향사(文廟享祀), 성균관 및 지방향교의 통할관리, 교화 및 사회사업의 경영 및 보조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균관재단은 이사장이 대표하고, 이사회가 최고의결기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서울의 성균관은 관장·부관장·전의(典儀)·전학(典學) 등 임원이 있고, 성균관총회를 최고의결기구로 한다. 지방의 향교는 전교(典校)·장의(掌議) 등의 임원이 있다.

유도회(儒道會)

유교의 전국적 조직으로서 유교인의 단체이다. 중앙에 유도회총본부가 있고, 각 시도에 본부, 구·시·군에 지부, 통·리·동의 단위에 지회를 둔다. 시도의 본부는 1969년 결성이 완료되었으나, 지회는 아직 결성되지 않은 곳도 많은 형편이다.

총본부에는 유도회 총회가 최고의결기구이며, 위원장·부위원장·중앙위원회·상임위원회·감찰위원회의 조직이 있으며, 중앙위원회에는 사무총장이 사무를 집행한다. 유도회의 산하기구로서 여성유도회·청년유도회가 있다. 1975년 여성유도회가 창립되었고, 1976년 한국청년유도회가 창립되어 여성과 청년 유교인의 조직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유교조직의 기관지는 1964년 창간된 〈유림시보 儒林時報〉에서 시작하여, 그후 〈유림월보〉로 개칭되어 월간으로 간행되다가, 1987년 격주간의 〈유교신보 儒敎新報〉로 간행되고 있다. 그밖에 연관조직으로는 성균관의 교육사업에 따라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고, 유학대학에서는 유학과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을 교육하고 있으며, 유학대학원에서는 유교지도자를 교육하고, 그밖에 유림의 계획적인 훈련·연수 기구도 있다.

제사의례

국가의례로서 제천(祭天)의례는 고려 전기, 조선초의 세조 때 및 대한제국의 성립 후 일시적으로 지냈다. 사직제(社稷祭)와 종묘제(宗廟祭)는 국가의례의 대표적 제사로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속되어왔으나, 일제강점기 사직제는 단절되고, 종묘제는 전주이씨의 가족의례가 되고 말아 유교적 국가의례로서는 소멸되었다. 성균관·향교의 문묘에서 공자와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유교정신의 계승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의 사우(祠宇)에서도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가 매우 성행했다. 가묘에서 조상에 제사하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확립된 유교제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조선시대에는 4대의 조상에 제사드리는 전통(四代奉祀)이 성립되었으며, 가정의례로서 관례·혼례·상례(喪禮)·제례는 광범하게 실천되었다.

현대의 한국 유교

변혁요구와 대응

오늘의 한국사회는 서유럽적 근대화 과정에 따라 전통의 형식이 광범하게 변화를 겪었으며, 유교전통은 밖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품성교육은 높은 교육열과 함께 노동인력을 질적으로 향상시켜 놓았다.

이러한 점이 한국사회가 근대적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데에 가속력을 주는 요소로 작용한데 대해 서구의 물질문명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유교가 지닌 최대의 과제는 전통적인 낡은 형식을 떨쳐버리고 유교정신의 핵심적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다.

교세와 활동

1982년 교세의 지표가 되는 유교인의 수를 700만(690만 9,960) 명이라 했지만, 1983년에 정부의 전국 상주인구조사에서는 유교인의 수가 80만 명에 못 미치는 78만 6,955명 으로 나타났다. 그 원인은 유교조직의 허술함과 소속감의 애매성으로 나타났다. 유교조직의 지도층이 현실인식이 첨예하지 못한 노인층이고 세대교체나 세대간의 역할분담이 원만하지 못한 점이 제도와 의식의 개혁을 더디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근래에는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 '도의선양대회'를 개최하고, '윤리선언문 및 실천요강'(1973)을 발표하여 사회도덕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공자학회(1980)·유교학회(1985)·예학회(1989) 등이 유교 연구단체로 등장하여 전문 유교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교학회와 성균관의 협력으로 〈유교대백과사전〉(1990)이 편찬되어 한국 유교의 한 단계를 결산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