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

왕부지

다른 표기 언어 Wang Fuchih , 王夫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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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19. 10. 7, 중국 형주(衡州 :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헝양[衡陽])
사망 1692. 2. 18, 헝양
국적 청(淸), 중국

요약 중국 고대의 <시경>, <서경>, <역경> 등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유물사상 및 음양5행에 바탕을 둔 기론적 세계관 전통의 집대성자로서, 황종희, 고염무와 함께 명말 청초의 3대학자로 꼽힌다. 그의 저작들은 19세기 중엽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명대(1368~1644) 말엽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그는 만주족의 중국 지배에 대해 맹렬히 저항한 애국자였다. 그는 병사를 일으켜 명의 유신들이 이끄는 반청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1650년에 이르러 그 운동이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에 힘쓰면서 역사·철학·문학에 관한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독통감론>, <송론>인데, 이 책들을 통해 유교 경전에서 인정하는 고대 중국의 제도와 그 경전들이 기록된 봉건시대 이후의 국가제도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을 제시했다.

자는 이농, 호는 강재. 선산선생이라고도 한다. 그의 저작들은 19세기 중엽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대(1368~1644) 말엽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그는 만주족의 중국 지배에 대해 맹렬히 저항한 애국자였다.

그는 병사를 일으켜 명의 유신(遺臣)들이 이끄는 반청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1650년에 이르러 그 운동이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에 힘쓰면서 역사·철학·문학에 관한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독통감론 讀通鑑論〉·〈송론 宋論〉인데, 그는 이 책들을 통해 유교 경전에서 인정하는 고대 중국의 제도와 그 경전들이 기록된 봉건시대 이후의 국가제도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을 제시했다.

그는 그러한 고대 제도가 자신의 시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나라의 목표는 백성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민족주의적인 풍조가 중국에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그는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인과 그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어야 하며, 윤리는 우선 민족보존에 이바지한 다음에라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민족 통치자들은 아무리 중국화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중앙 아시아 여러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중국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운 과거의 영웅들을 칭송했다.

그는 철학사상 중국 고대 〈시경 詩經〉·〈서경 書經〉·〈역경 易經〉 등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유물사상 및 음양5행에 바탕을 둔 기론적 세계관 전통의 집대성자로서, 황종희·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 청초의 3대학자로 꼽힌다.

이(理)와 기(氣)의 관계에서 '이(理)가 있은 후에 기(氣)가 있다'라는 정주학파의 사상을 비판하고 (氣)를 세계의 실체로 보았다. 도(道)와 (器)의 관계에서는 '천하는 오로지 기(器)임'을 내세워 세계에는 구체적인 사물만이 존재함을 강조했다. 즉 도(道 : 규율)는 기(器)의 도일 뿐, 기(器)가 도의 기(器)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규율이 사물을 초월한다고 본 정주학파의 유심주의 관점을 배척했다. 지행의 문제에서는 주희(朱熹)·육구연의 지선행후설을 비판하고, 지와 행은 서로 의지하며 각자 구별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행은 지를 포함하나, 지는 행을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행은 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나, 지는 행의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행은 지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후인들이 그의 저작을 모아 〈선산유서 船山遺書〉를 편찬했는데, 그중 철학상의 주요저작으로는 〈주역외전 周易外傳〉·〈상서인의 尙書引義〉·〈독사서대전설 讀四書大全說〉·〈장자정몽주 張子正蒙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