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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역대 통일제국의 하나(1368~1644).
(병). Ming. (웨). Ming.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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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국
  2. 정치
  3. 사회와 경제
  4. 사상과 예술
  5. 명과 조선과의 관계

몽골족이 세운 원조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로 만주족이 세운 청조가 등장할 때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북쪽으로는 조선·몽골·투르키스탄, 남쪽으로는 베트남·미얀마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명(明)
명(明)

건국

1세기 동안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던 한족은 14세기 중엽 원나라 정권의 내부분열이 심해져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저항을 시작했다. 반원 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당시 화북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백련교도였는데, 1351년 유복통의 지도하에 화이허 강[淮河]유역에서 거병했다.

그들은 스스로 홍건적이라 칭하고 송조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소명왕 한림아를 추대하고, 송조를 부흥시킨다고 했다. 이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방국진(方國珍)·서수휘·장사성·곽자흥 등이 거병했지만, 이후 홍건적의 북벌 실패에 의해 한림아는 권위를 잃었고, 진우량(陳友諒)·명옥진·장사성·주원장(朱元璋) 등이 권력투쟁을 했다.

주원장은 처음에는 곽자흥 휘하의 한 병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두각을 나타내어 1356년에 양쯔 강[揚子江]을 건너 집경(지금의 난징)을 본거지로 해서 판도를 넓혔다. 그뒤 주원장은 서쪽 강주의 진우량과 동쪽 쑤저우[蘇州]의 장사성을 격파함으로써, 1367년에 화중 일대를 제압하여 양쯔 강 중하류의 경제적 거점을 모두 차지했다.

주원장은 1368년 1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명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라 했다. 1368년 북벌군을 일으켜 원군을 격파하고 조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중화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1371년에는 쓰촨[四川]의 명승을 무너뜨리고, 1381년 윈난[雲南]의 양왕(몽골족)까지 격퇴함으로써 중국 전체를 완전히 통일했다.

정치

건국초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답습하여 중서성(中書省)이 정치를 총괄하고, 그 장관인 승상(丞相)이 강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태조(太祖:洪武帝)는 곧 통일제국 완성과 전제군주체제의 확립을 위해 중서성과 승상을 폐지하고, 중서성에 예속되어 있던 6부(吏·戶·禮·兵·刑·工)를 황제에게 직접 귀속하게 했다. 군사관청으로 건국초에 설치했던 대도독부(大都督府)를 폐지하고,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로 고침으로써 그 통수권을 분할했다. 감찰기관으로는 원제를 답습했던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도찰원(都察院)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병부와 오군도독부는 병사를 분담하고 형부 대리시(大理寺) 도찰원(都察院)은 형옥을 분담하여 상호견제하게 했으며, 이러한 일체의 병·형 대권을 모두 황제가 총괄했다. 지방통치로는 원대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을 폐지하고 전국에 13포정사사(布政使司:省)를 두어 황제가 직접 지배했다. 포정사사의 관할구역은 성(省)이라 불리는데, 각 성에는 감찰기관으로서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군사기관으로서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설치했다. 그리하여 세 기관의 장관인 포정사·안찰사·지휘사는 대등한 권한을 갖고 각각 병·민·전·곡을 나누어 관리하게 했으며, 그들은 모두 황제에게 직속되었다.

국가의 무장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고대 이래의 병제(兵制)를 검토하고 징병제(徵兵制)와 모병제(募兵制)의 장점을 받아들여 위소제도(衛所制度)를 창설했다. 또한 율령을 정비하여 대명률(大明律)과 대명령(大明令)을 제정하고, 주자학을 관학으로 하여 과거를 정비했다. 조세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적 호구조사를 거쳐 황책(黃冊)을 편제하고 각지에 거주하는 백성의 정구(丁口)와 산업현황을 상세히 조사했다. 한편 군주집권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 1380년 호유용(胡惟庸) 사건과 1393년 남옥(藍玉) 사건에 연루된 5만여 명을 살육했으며, 탐관오리에 대해서도 엄격한 징벌을 내렸다.

이리하여 중앙정부와 황제의 권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태조는 북방 몽골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24명의 아들과 1명의 종손에게 화북 주변지대를 분봉했는데, 분봉받은 여러 왕들은 점차로 세력이 강대해졌다.

1398년 태조가 죽고 그 손자인 건문제(建文帝:惠帝)가 즉위했는데, 북방의 왕들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의 세력이 되었다. 이에 건문제는 그들의 세력을 감축하려 했는데, 태조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이 '정난(靖難)의 역(役)'을 일으켜 4년 동안의 항쟁 끝에 제위를 빼앗아 영락이라 건원하고 즉위했다.

영락제(永樂帝:成祖)는 국내정책으로는 삭번(削藩) 정책을 실시하여 북방에 봉해진 왕들을 남방으로 옮기거나 서인으로 폐했으며, 중앙행정기구에는 내각제도를 설립했다. 또한 환관에게 출사(出使)·전정(專征)·감군(監軍)·분진(分鎭)·관민의 음사(陰事)를 단죄하는 등의 대권을 맡겼다. 영락제는 내정을 정비함과 아울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펴 나갔다. 1421년 북쪽 변방에서 습격해오는 몽골 기병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도성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영락제 자신이 직접 몽골 원정을 하는 한편, 중국 동북부의 여진족을 정복하고, 남방으로는 베트남의 진조를 병합했다.

15세기초에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鄭和)에게 남해(南海) 원정을 단행하게 함으로써 남방의 30여 국이 명나라에 조공하게 되었고, 동남아시아로의 화교(華僑)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명은 초기 태조와 영락제의 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으나, 정통제(正統帝:英宗) 때에 이르러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입이 잦았다. 몽골 고원에서는 오이라트가 다시 세력을 형성해 중국을 침입하여 정통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명의 엄격한 무역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밀무역과 약탈을 일삼아 연안은 물론 내륙지방까지 큰 피해를 주었다.

그리하여 명의 대외정책은 점점 소극적으로 되고, 만리장성의 수축 등 북방 방위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당시 국내정치면에서도 환관의 전정(專政)의 양상이 나타나는 등 쇠퇴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푸젠 성[福建省], 저장 성[浙江省]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계속해서 성화제(成化帝:憲宗)·홍치제(弘治帝:孝宗) 시대에는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정덕제(正德帝:武宗)에 이르면 환관 유근(劉瑾)이 정치를 전담하는 등 환관의 권세가 절정에 이르렀고, 지방에서도 진수태감(鎭守太監)이 전권을 휘둘렀으며, 종실(宗室)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생겨나는 등 정치혼란이 극에 달했다.

또한 지주들의 토지겸병과 봉건수탈이 심해짐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정덕제에 이어 즉위한 가정제(嘉靖帝:世宗)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고, 조은(租銀)을 경감하고 부역을 정돈하며, 환관을 억제하고 토지를 농민에게 되돌려주는 정책을 시행했으나 통치집단 내부의 모순이 심해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6세기 후반에 즉위한 만력제(萬曆帝:神宗)는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해 폐정을 개혁하고 전국적인 토지측량을 시행하여 국가의 재원을 확보했고, 화이허 강의 치수공사를 진행시키는 등 중흥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은 후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안으로는 황제·환관·왕공·훈척·권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림당(東林黨)과 중소지주·중하급관리와 일부 지주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이 격렬했으며, 조선에 대한 원군의 파견, 파주(播州)의 난, 여진족과의 싸움 등으로 인한 군비의 부담으로 재정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의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만력제 이후 즉위한 태창제(泰昌帝:光宗)·천계제(天啓帝:熹宗) 때에도 당쟁으로 국내의 정치는 더욱 혼란해지고, 요동지방에서의 여진족의 활동으로 위기가 점점 심화되었다.

이어 숭정제(崇禎帝:毅宗)가 즉위한 1627년에는 농민봉기가 발생했으며, 이듬해에도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관군의 필사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점차 세력이 강대해졌다.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군은 명조 타도를 목표로 북방으로 돌진하여 1644년 3월에 베이징에 입성함으로써, 명조는 건국된 지 277년 만에 멸망했다.

그러나 베이징은 곧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淸)나라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이때부터 1912년까지 만주족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사회와 경제

명 태조가 통일제국과 전제군주체제의 완성에 힘쓰는 동안, 그 통일적인 지배기구는 지방의 향촌까지 미쳤다.

태조는 사제(社制)를 해체하고 지방말단 행정기관인 현 아래에 이갑제(里甲制)를 신설하여 사실상의 국가말단조직으로 삼았다. 이갑제로 이장(里長)과 수장(首長)이 징세와 부역의 업무를 수행하고, 치안과 교화도 책임졌다. 이갑제에 의한 부역수취를 위해 태조는 어린도책(魚麟圖冊)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조세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이갑의 요역부담은 많은 향촌의 상층농민을 파산시켰고, 결국 명 중기 이래 요역을 면제받는 특권층인 관료·향신(鄕紳) 등에 의해 격심한 토지겸병과 지주소작제의 확대가 초래되었다. 호등제 요역조직인 이갑제가 붕괴되어가자, 정부에서는 부역제도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했는데, 이것이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서 장거정 때의 토지측량으로 일단 완결을 짓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호등제를 폐기하고 전토(田土)와 정남(丁男)을 단위로 직접 부과함으로써 각종 이갑요역을 지은(地銀)과 정은(丁銀)으로 통일하여 전부 은납(銀納)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본위제의 확립과 더불어 이 무렵부터 유럽 세계와의 통상이 이루어져 견직물·면직물·자기 등을 수출함으로써 중국에 대량으로 은이 유입되었다.

한편 이갑제를 통한 향촌사회의 교화는 유교적인 이념을 국시로 하던 당시의 전제군주체제의 확립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태조는 육유(六諭:孝順父母·和睦鄕黨·尊敬長上·敎訓子孫·各安生理·莫作非違)를 제정, 반포하여 향신(鄕紳), 촌락의 장로, 이노인(里老人:자치적 재판 교화 담당)을 매개로 하여 농민 교화·통제에 주력했다.

지배신분은 관료층과 그 모태로서의 지주층이었으며, 명대에는 향신(鄕紳)이란 새로운 신분계층이 등장했다.

원의 지배하에 한때 폐지된 과거제가 부활되고, 과거준비를 위한 학교제도가 부활되자, 학교의 학생인 생원과 향시에 통과한 거인(擧人)이 사회신분화되어, 전직·현직 관료와 같이 지방정치에 큰 발언권을 가졌다. 이들을 일괄해서 향신이라 했는데, 일반 서민과는 명확히 구분된 사회지배신분을 구성했다. 특히 명 말기에 향신들이 주도가 되어 반환운동(反宦運動)이 일어났다.

이러한 관료·향신 등에 대응되는 피치자계급은 민(民)·군(軍)·장(匠)으로 대별되고 그 아래에 소수의 노예와 천민이 있어 부세와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토지는 도시에 거주하는 관료·상인의 수중에 집중되었고, 농민들은 인식적 지배를 매개로 지주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명대에 와서는 원대말 전란기에 쇠퇴한 유통경제가 활기를 되찾고, 강남지역의 개발, 은본위제의 확립 등으로 상품화폐경제, 사회적 분업이 발달했다.

특히 목화의 재배와 상품화가 진전되어, 원대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된 목면이 명대에 와서 대중의 옷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목면생산의 중심지는 양쯔 강 유역이었고, 목화의 재배와 더불어 면방직이 발달했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주로 북중국과 양쯔 강 유역에서 판매되었는데, 해외에까지도 선전되었다. 한편 견직업도 이 시기에 오면 상당히 발전하는데, 가장 우수한 생사와 견직이 생산되어, 면직물과 같이 강남농촌을 발달시켰다.

이와 같은 상품생산의 농가경제 침투와 생산물의 전국적인 유통은 먼 지방의 유통권을 지배하는 상업자본(客商資本)을 대두시켰는데, 북중국 시장을 독점한 산서상인과 남중국 시장을 독점한 신안상인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상업활동뿐 아니라 고리대 자본으로 농촌을 수탈하여, 소농민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에 따라 농촌내에서는 지주전호의 대립과 항조운동이 일어났으며, 명 말기에는 노변(奴變)이라는 노예의 반란, 직용(織傭)의 변(變)이라는 직물공장 고용인들의 반항, 군대에서의 병변(兵變) 등 여러 민의 항쟁이 일어났다.

사상과 예술

명의 건국은 중국민족 독립의 회복임과 동시에 그 문화의 회복이었다.

유목적인 풍속과 문화가 금지되고 한족의 그것이 복원되었다. 따라서 유교주의를 내세운 태조를 이은 영락제는 칙명으로 〈오경대전〉·〈사서대전〉·〈성리대전〉 등을 편찬·간행하여 과거의 표준으로 삼고, 〈영락대전〉을 편찬해서 유교주의를 강조했다. 그런데 명초에는 주자학 이외의 사상은 탄압을 받아 전제군주체제에 맞지 않는 〈맹자〉의 학습을 대학에서 금지할 정도로 사상통제가 심했다. 이에 따라 과거의 형식도 팔고문(八股文)으로 고정되었고, 학술상의 새로운 경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설이 대두해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 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해서 당시의 주자학에 도전했다. 말기에 들어 양명학도 대체로 쇠퇴한 주자학과 같이 허학화하게 되자, 이에 대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이 발흥했다. 이는 청대 고증학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대 중·후기부터 서민들도 생활이 풍요롭게 되면서, 이전에는 사대부층에게만 독점되었던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송·원 이래 차츰 발달된 연극·소설 등의 통속문화가 유행했다. 소설로서 4대 기서(奇書)라고 불리는 〈삼국지연의〉·〈수호전〉·〈서유기〉·〈금병매〉와 〈봉신연의〉 등이 이무렵 완성되고, 기전적(奇傳的)인 남곡(南曲)이 잡극(雜劇)의 북곡(北曲)을 누르고 성행했다(중국문학). 이 연극·소설은 민중의 예술로 발달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두 계급의 혼합문화의 경향을 이루었다.

건축은 전대와 비교해 커다란 변화는 없지만 도성·궁궐·절·도관(道觀)·능묘 등의 규모가 커지고, 화려한 것이 많다. 15세기에 영락제가 베이징에 지은 쯔진청[紫禁城]의 우먼[午門]·타이먀오[太廟]·톈탄[天壇] 등을 보면 제국의 힘을 상징하듯 규모가 크지만 건축미에서는 송대 이후 퇴조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외에 베이징의 창핑 구[昌平區]에 있는 영락제 이하 13명의 황제능묘인 스싼링[十三陵]에서도 그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절의 규모와 탑파(塔婆)는 일반적으로 작아진다. 공예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원대 이전의 청자·백자·천목(天目) 등과 같은 전통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각종 문양을 시문하고 실용적인 기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청색·홍색·녹색·황색 등의 단색유자기(單色釉磁器)가 제작되었고, 원대 이래의 코발트 색으로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칠한 청화자기(靑華磁器)가 장시 성[江西省] 징더진[景德鎭] 가마에 제작되어 외국에까지 수출되었다.

칠기(漆器)는 송(宋) 이래의 침금(沈金)·조칠(雕漆)·전칠(塡漆)·나전(螺鈿) 등 기법이 더욱 정교해졌고, 한국과 일본의 시회(蒔繪)에 영향을 주었다. 관영인 과원창(果園廠)이란 공장이 설립되어 뛰어난 칠기제품들이 제작되었다. 명 중기에는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법랑기인 경태람(景泰藍)이 유행했다. 회화는 양식상 절파(浙派)·오파(吳派)·원파(院派)로 나눌 수 있다.

절파는 송원 이래의 화원(畵院) 전통을 이은 직업화가들로 기교위주의 형식적인 화풍을 보이며, 명초의 화단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화가는 화조화(花鳥畵)에서는 변문진(邊文進)·여기(呂紀)·임량(林良) 등이고, 산수화에는 대진(戴進)·이재(李在)·오위(吳偉)·장숭(蔣嵩)·장로(張路) 등이 있다. 오파는 원4대가(元四大家)의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을 이은 남종화가들로 15세기 후반에 대두하여 16세기 화단을 주도했으며 뒤에 여러 화파로 나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심주(沈周)·문징명(文徵明)·문가(文嘉)·문백인(文伯仁)·진순(陳淳)·육치(陸治)·전곡(錢穀)·주천구(周天球)·육사도(陸師道) 등이다. 원파는 직업화와 문인화의 양식을 절충한 것으로 주신(周臣)·당인(唐寅)·구영(仇英) 등이 있다. 명말에는 동기창(董其昌)이 문인화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장했다. 서예는 명초에는 원말 조맹부의 단정전아한 서체가 유행했지만, 16세기에 서도(書道)를 주도했던 축윤명(祝允明)과 문징명은 송대 황정견(黃庭堅)의 서풍(書風)을 중시했다.

17세기 동기창은 당의 안진경(顔眞卿), 송의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의 서법을 섭렵하여 새로운 서체를 이룩해냈으며, 왕탁(王鐸)과 장서도(張瑞圖)는 자유분방한 초서를 구사했다(→ 명대 미술).

명대는 서방과의 육로가 거의 두절되었고, 해로도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시대였다. 외계와의 접촉이 가장 결핍된 시대였기에 국수적 발달을 성취했고 지나친 민족문화적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서양인의 내항을 통해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종래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던 당시에 마테오 리치가 전래한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인의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이후 계속해서 찾아온 서양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양의 지식과 과학은 중국적인 지식을 세계적인 과학으로 계몽하고, 향상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서광계의 〈농정전서〉·〈숭정역서〉, 초사정의 〈신기보 神器譜〉 등이 나왔다.

명과 조선과의 관계

원의 지배하에 있던 고려는 1368년공민왕 17명의 건국으로 내부적으로 친명·친원의 2파로 갈려 분명한 외교노선을 견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신흥사대부층의 대립의 반영이기도 했다. 공민왕은 즉위와 더불어 친원세력을 배격하고 실지(失地)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실시하다가, 결국 원의 압력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1369년 명의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접대했고, 1370년 원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폐지하고 명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사용하기로 했으며, 이성계를 보내어 동녕부를 공격, 사실상 원과 절교하게 되었다. 한편 원의 잔여세력이 건국한 북원은 여전히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으며,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권력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파로서 북원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으며,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명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고려는 북원과 명나라에 이중외교를 전개했는데, 1385년 명이 고려와의 통교를 알리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하는 등 양국관계는 정착되어갔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명에 대해 사대로서 친선을 유지해가려 했다. 신흥사대부층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가 당시 권문세족과의 투쟁에서 내세웠던 친명정책은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필요했다. 명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왕이 명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며, 중요한 국정을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따위의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정치상 기본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에 따르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선진문화를 수입했으며,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따라서 조공의 횟수에 있어서 명은 3년에 1공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1년에 3공을 주장하여 2가지가 얽혀서 실시되었다.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으나, 건국 초기에는 고명·인신(印信)의 문제, 환관·처녀의 진헌문제,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종계변무문제는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달라는 요청으로 약 200년을 끈 다음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해결되었다. 또한 명에서 제정된 명률은 조선 초기 〈대명률직해〉로 번역되어, 〈경국대전〉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상면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7세기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자, 조선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를 표방하여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청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았다.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