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조공

다른 표기 언어 朝貢

요약 중국은 한대 이후 중화사상에 근거하여 주변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천자에 대한 조빙사대를 요구했다. 주변국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주변국에 하사품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주는 책봉 정책을 통해 정치적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고구려는 중국 남북조의 여러 나라와 수·당에 대해 조공했으며, 중국에 수출한 물품은 금·은·말·활 등이고, 수입한 물품은 주로 직물류였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수출품은 금포·해물·과하마·금갑 등, 수입품은 비단과 불교경전이 대부분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중국과 접촉했으나 이후 해상으로 직접 교류했다. 금·은·유황·포물류·인삼 등을 조빙한 반면 답례로 비단과 금·은 세공품 등을 받았다. 고려는 중국 5대의 여러 왕조와 교빙했는데, 송이 중국을 통일하자 중국 대륙과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은 건국 이후에도 친명사대의 외교를 지속했다.

본래 제후가 방물(方物)을 가지고 직접 천자를 알현하여 신하로서 예를 다하고 군신간의 의리를 밝히는 정치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중국 한족(漢族) 사이에 전개되던 이런 현상이 점차 주변 이민족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조공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사회 국제정치의 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국은 한대 이후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하여, 주변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천자에 대한 정례적인 조빙사대(朝聘事大)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주변국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답례로 하사품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주는 책봉 정책을 통해 상호간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시켜나갔다(중국사). 비록 조공이 형식상으로는 천자국과 제후국, 즉 종주국과 속국의 모습을 띠었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것일 뿐 실제로 정치적인 주종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조공·책봉 관계는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해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외교정책으로서, 상호공존을 바탕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형성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정치적 교류에는 반드시 경제적·문화적인 교류가 동반되었으며, 이는 조빙공헌과 하사(下賜)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정치적 사신왕래는 단순히 형식적인 데 그치고 오히려 조공을 통한 문물교류와 외국의 발달된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데 보다 큰 비중을 두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의 조공이 이루어졌다.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인 49년에 부여왕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광무제도 이에 대한 답례물을 준 적이 있으며, 고구려도 광무제시대에 교역을 벌인 이후 80여 년 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과의 교류는 단순한 입조(入朝)에 불과할 뿐 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조공관계는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났다. 고구려는 243년(동천왕 17) 전연(前燕)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한 이후, 진(晉)·연(燕)·위(魏)·송(宋)·양(梁) 등 중국 남북조의 여러 나라와 수(隋)·당(唐)에 대해 조공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중국에 수출한 물품은 대체로 금·은·말·피물류·활 등이며, 수입한 물품은 주로 비단을 비롯한 직물류가 중심을 이루었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수출한 물품은 주로 금포(錦布)·해물(海物)·과하마(果下馬)·금갑(金甲)·명광개(明光鎧)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과 불교경전이 대부분이었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중국과 접촉했으나 이후 해상을 통해 직접적인 교류를 했다. 신라는 주로 금·은·유황·포물류·인삼·수달피·명주·말 등을 조빙한 반면, 답례로 비단과 금·은 세공품, 서적 등을 받아왔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신라와 나라는 나당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을 해소하고 이전과 같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와의 사신왕래에는 조공사절 이외에 도당(渡唐) 유학생이나 유학승도 상당수 동행함으로써 선진국의 학문과 문화를 수용하는 대외창구의 역할도 수행했다. 조공물은 통일 이전에는 원료적인 토산품 중심이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금·은·과하마·우황·인삼·해표피 등 이외에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 고급 견직물도 포함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중국 5대(五代)의 여러 왕조와 교빙(交聘)했는데, 송이 중국을 통일하자 중국 대륙과의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비록 중간에 거란과 금(金)나라가 강성해짐에 따라 송과의 교류가 약해졌으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고려에 대한 의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이 있었던 데 비해 고려는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피하고 문화적·경제적 교류에 중점을 둠으로써 송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데 힘썼다.

즉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에 파견하여 그들의 발달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임으로써 고려의 학문 사상적 수준이 심화되었다. 또 송나라 판본(板本)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했으며, 송나라 도자기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조공물은 주로 금·은 세공품과 나전세공품, 모시·삼베, 인삼 등이 대부분이었으며, 송나라의 답례품은 대체로 비단·약재·서적 등이었다. 양국간의 조공무역에서는 고려가 얻는 실질적 이익이 더 많았기 때문에 중국의 소동파(蘇東坡)와 같은 학자는 "고려의 사신일행을 접대하는 데 10만 관(貫)의 비용이 들고, 이들이 머무르는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많은 인력을 동원하지만 관리들이 받는 사소한 선물 이외에는 조금도 이득이 없으며, 고려 사신이 가져오는 공물은 그다지 요긴하지 않은 사치품에 불과하다"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책부원구 冊府元龜〉·〈태평어람 太平御覽〉 등의 책을 고려에 주지 말라고 했다.

소동파
소동파

고려와 몽골족인 원(元)나라와의 조공무역은 원의 일방적인 수탈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정기적인 사신왕래에 의한 조공 이외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은·포(布) 등의 공물은 물론, 인삼·잣·약재·매(鷹) 등 특산물을 요구함에 따라 고려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을 건국한 주체세력은 친명반원(親明反元) 정책을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조선 건국 이후에도 친명사대(親明事大)의 외교를 지속했다.

태조는 즉위직후 왕조개창에 대한 국제적인 확인과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에게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승인해줄 것과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국호를 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명은 고려에 대한 역성(易姓)은 승인했지만, 여진족 유민에 대한 쇄환(刷還)·세공(歲貢) 문제를 트집잡아 태조에게 인장(印章)과 고명(誥命)을 보내지 않다가, 태종 때에 해결되었다.

또한 조선의 사신이 명에 자주 오는 것이 중국측으로서는 경제적·문화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3년에 1번만 사신을 파견하는 3년1사(三年一使)를 원했으나, 조선은 1년3사(一年三使)를 끊임없이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리하여 해마다 정례적으로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賀正使), 황제 생일 때에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생일 때 천추사(千秋使)를 보냈는데, 뒤에는 동지사(冬至使)까지 추가되었다.

이밖에도 중국 황제의 사위(嗣位)·훙거(薨去)·책비(冊妃) 등이 있을 때에는 진하사(進賀使)·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 등의 명목으로 부정기적인 사신을 파견했으며, 이것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한 뒤에도 지속되었다. 사신단의 규모는 사행의 성격에 따라 달랐으나 사(使) 1명, 부사(副使) 1명, 서장관(書狀官) 1명, 대통관 3명, 압통관 24명 등 30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외에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이 200~300명 정도 되었다. 1번의 사행에 걸리는 기간은 약 5개월이 었고, 베이징[北京]에 체류하는 기간도 명대에는 40일, 청대에는 60일까지 허용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집권층의 자제들이 중국의 사행에 동행하여 발달된 중국의 문물을 직접 보고 이를 조선에 소개하는 한편, 그동안 만주족이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공물에는 세폐와 황제에게 보내는 방물이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조공은 형식상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진행되었으며, 때로는 조공을 통해 선진국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여 자국의 발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