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태조

다른 표기 언어 太祖 동의어 조선 제 1대왕, 이성계, 李成桂, 군진, 君晉,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요약 테이블
출생 1335(충숙왕 복위 4)
사망 1408(태종 8)
국적 조선, 한국
종교 불교
재위 1392년∼1398년
시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능묘 건원릉(健元陵)

요약 조선 제 1대 왕으로 고려 말의 무신이며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인물. 본관은 전주, 성은 이, 이름은 단, 초명은 성계, 자는 중결, 호는 송헌으로 고려 말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을 바탕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후 정도전, 조준 등의 개혁파의 지원을 받아 고려 공양왕을 폐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건국 후 국가제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했다. 왕위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왕자들과의 불화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조선 태조 어진
조선 태조 어진

탁월한 무장으로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크게 활약했으며, 개혁파 사류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李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和寧:永興)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춘(子春)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조상은 전주의 향리였으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관리와 다툰 일로 170여 가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후 다시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했는데, 원나라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자 1,000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원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후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을 역임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안변(安邊) 이북과 함주(咸州)지역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했다. 아버지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고려를 도와 그 공으로 고려의 벼슬을 받았으며 1361년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려는 남북에서 대규모 외침에 직면하고 있었으나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군사제도가 와해된 상태였으므로 이자춘 집안의 번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들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을 바탕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361년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군을 격파하자 고려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박의를 살해했다.

이어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의 탈환작전에 참여하여 선봉으로 성을 돌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하는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탁월한 용병술로 대적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364년 최유(崔濡)가 기황후(奇皇后)를 통해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왕으로 내세우고 요양성의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평안도지방을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隨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그가 출전한 틈을 타 여진족들이 그의 외종사촌 삼선(三善)·삼개(三介) 형제를 앞세워 동북면에 침입하여 함주까지 함락시키자 즉시 회군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그해에 밀직부사가 되었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0년에는 원정군을 이끌고 요동까지 가서 원의 잔병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고려를 위협하던 김백안(金伯顔) 등을 물리쳤다.

1371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1372년 이후에는 북방은 안정된 반면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는데, 대규모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성계의 군대는 맹활약을 했다. 특히 1377년(우왕 3)에는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왜구와 격전을 벌여 승리했다. 1380년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해로가 끊긴 왜구들이 내륙으로 들어와 상주·경산·함양을 차례로 함락시키자 운봉에서 이들과 교전하여 적장 아기발도(阿其拔都)를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인데 이때 노획한 말만 1,600필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에 침입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출전하여 길주에서 궤멸시켰다. 1383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스스로 찾아와 합류했으며 이후 차츰 주변에 혁명세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하고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고 그와 함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여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정벌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정벌에 나선 그는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설득하여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을 점령한 그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시중(右侍中)이 되었으며, 조준(趙浚)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사류와 연합하여 정도전과 함께 개혁추진 세력을 확보했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운 후에는 수시중(守侍中)과 판상서사(判尙書事)가 되어 정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병권까지 장악했다. 다음해 공양왕을 옹립하고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1)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준 등의 상소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양전(量田), 관찰사제 실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으며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법제도 고려의 법제를 사용한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태조의 치세에는 도평의사사·상서사(尙瑞司) 등 외형상으로는 고려의 유제가 많이 보존되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조선 국제의 기초가 된 많은 개혁조치가 시행되었다. 1393년(태조 2)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해부터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는 한편 정도전과 조준을 내세워 국가제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했다. 토지제도와 함께 재정제도도 개혁하고 노비변정사업을 실시했다.

인사제도를 정비하여 서리출신의 관료등용을 제한하고 지방의 사족들에게 문호를 넓혔다. 성균관과 향교제도도 정비하여 전국 군현에 교수관을 파견했으며, 과거제도도 개혁했다. 또한 피폐한 토지의 개간정책을 시행하고 농민안정을 위해 의창제를 복구했다. 군현제도 정비하여 도제(道制)를 시행하고 도별로 재상급의 관찰사가 지방행정을 총괄하게 했다. 군제에 있어서는 부병제와 무과를 시행하고, 전국의 군사조직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이로써 국가의 통치력이 일신되었으며 왜구의 침입도 잠잠해졌다. 한편 도첩제와 사원 정리 등 억불정책도 시행했는데 태조 자신이 독실한 불교도였던 관계로 철저하게 시행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개혁조치를 정리하여 1397년에는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편찬했다. 건국 초에는 정도전·조준·남은(南誾) 등 개국공신 계열이 득세했고,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권근(權近)·하륜(河崙)·성석린(成石璘) 등의 신진사류 중에서 중도·온건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종학(李鍾學)·이숭인(李崇仁) 등이 살해되기도 했으나, 태조는 곧 이들을 복권시켰다.

이후 이들은 표전사건(表箋事件)을 통해 정도전 계열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태조는 강씨 소생의 어린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것이 이방원(李芳遠) 이하 왕자들의 불만을 싹트게 했다(왕자의 난). 1398년 태조의 와병을 계기로 이방원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남은 일파를 제거하고 곧이어 방석·방번(芳蕃)마저 살해했다.

결국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태종 즉위 후에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태조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의 사택 등에 머물며, 사냥과 불공으로 소일하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는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낼 때마다 죽여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402년(태종 2) 무학(無學)의 설득으로 귀경하여 불도에 정진하며 지내다가 1408년 5월 24일에 죽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