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난

왕자의 난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 방석의난, 무인정사, 戊寅定社

요약 조선 성립 후 태조의 후계자를 놓고 두 왕후 소생 간에 발생한 정치적 갈등. 1차 왕자의 난을 방원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 하며 2차를 방간의 난이라 한다. 이방원은 입장 차이가 컸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일파, 세자 방석 등을 기습 살해한 후 정종을 옹립했다. 이후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은 다시 방간과 무력충돌을 벌여 승리한 후 세자 자리에 책봉되었고, 후에 왕위에 올랐다.

먼저 일어난 것을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하며 다음에 일어난 것을 방간의 난, 박포(朴苞)의 난이라고도 한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방우·방과·방원(후의 태종)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 방번·방석을 두었다.

조선 성립 후 태조의 후계자 지위를 놓고 양쪽 소생 간에 일련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먼저 태조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개국공신의 반대로 막내인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소외당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불만이 상당히 컸다. 특히 개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경우는 논공에서 제외되었던 사실에 대해 불평이 대단히 컸을 뿐만 아니라 방석을 보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계를 좌우하고 있던 정도전·남은과의 입장 차이로 인해 한층 더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특히 정도전은 최고의 군통솔기관인 의흥삼군부의 판사직을 차지하고서 이를 바탕으로 병권의 집중과 일련의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권력구조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유신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방원을 비롯한 왕자와 종친세력은 그 힘을 급속히 잃게 되었다.

정도전계열은 1398년 진법훈련의 실시를 계기로 권력의 마지막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하고자 했다. 마침내 그해 8월 진법훈련에 불참한 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정도전 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때 방원은 이숙번 등의 휘하 인물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일파를 불의에 기습하여 살해하고, 이에 대항하는 세자 방석과 그의 동모형도 아울러 살해했다. 결국 방원과 정치적으로 대결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정세는 크게 바뀌어 정도전의 권력 증대에 불안을 느끼던 왕자·종친과 일부 개국공신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에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우선 태조의 제2자 방과를 옹립했다. 이가 곧 정종이다. 그런데 정종은 정비인 정안왕후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서자들만 낳았다. 이때문에 그의 후계자 선정문제가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1400년 1월에 신의왕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무력충돌을 벌였다.

이 사건은 왕자간의 왕위계승전쟁에서 기인된 것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지중추부사 박포가 방간을 충동시킨 데 있었다. 박포는 개국공신의 일원으로 무인정사 때 방원을 도운 공이 있으나, 일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것을 불만으로 여겨 방원과 반목을 보이던 중, 방원에 대한 방간의 불평을 이용하여 방간의 거병을 선동한 것이었다. 양자는 치열하게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이라고 한다.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지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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