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Ch'ing dynasty , 동의어 대청국, 大淸國, 대청제국, 大淸帝國, 청조, 淸朝

요약 중국대륙의 마지막 왕조(1644~1911).
(병). Qing. (웨). Ch'ing dynasty.

목차

접기
  1. 정치
  2. 사회와 경제
  3. 문화와 예술
  4. 청과 조선의 관계
청(淸)
청(淸)

만주족이 세운 나라로서, 청나라 때에 중국의 영토와 인구는 명나라에 비해 3배로 확장되었다. 또한 제국 내의 한족이 아닌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청나라에 동화되었으며, 전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일되었다.

명의 지배 아래 있던 만주의 여진족은 1616년 누르하치의 지도 아래 흥경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라 칭하며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주변국을 계속 정복하여 중국 동북부의 만주 전체와 내몽골을 차지한 뒤, 1636년 국호를 중국식 명칭인 청(淸)으로 고쳤다.

1643년 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예친왕이 섭정이 되었다. 이듬해 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이 이자성(李自成) 휘하의 농민 반란군에게 함락되려고 하자, 명의 황제(崇禎帝)는 동북부를 지키던 오삼계(吳三柱)를 불러들여 방위하게 했으나 오삼계가 도착하기 전에 베이징이 함락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당할 수가 없어 청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은 오삼계와 합세하여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점령한 후(오삼계는 곧 청에 복속) 중국 전토를 제압했다.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명나라의 뒤를 잇는 중국 왕조가 되었으며, 1683년 명나라의 마지막 유신으로 타이완에 웅거했던 정선공의 후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의 중국통일이 완성되었다.

정치

청은 명나라의 행정제도를 답습하는 한편, 결함을 보완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300만이 넘지 않았던 만주족이 100배의 인구를 가진 데다 사회·경제면에서 휠씬 앞서 있는 한족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민을 개병(皆兵)으로 한 압도적인 군사력뿐만 아니라, 명나라 관리를 계속 등용하고 항복한 장군에게는 작위를 주는 등의 회유책이 적중했던 듯하다. 그러나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은 만주족이 차지했으며, 전국 각지에 녹영(綠營)을 배치해 지방 반란을 막게 하고 수도와 지방의 전략적 요지에 상비군인 만주족 기병(旗兵)을 배치했다.

군사 및 행정 조직으로는 8기제도(八旗制度)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는데, 황·백·홍·남의 4색기와 각 색기에 천으로 테를 두른 4기를 합한 8기로서 모든 만주족이 이 안에 편성되었다. 정무 집행기관은 이(吏)·호(戶)·예(禮)·병·형(刑)·공(工)의 6부, 대리시 이하의 5시, 도찰원, 한림원(翰林院), 국자감·흠천감(欽天監) 등 기본적으로 명나라 제도를 계승했다. 세제 역시 명나라 말기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계승했으나, 강희제 말년에 인두세가 토지세에 포함되는 등 여러 차례 개혁이 있었다.

강희제(康熙帝:1661~1722 재위)에서 옹정제(雍正帝:1722~35 재위)를 거쳐 건륭제(乾隆帝:1735~96) 중엽까지의 약 130년간을 청나라의 전성기로 본다. 강희제는 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으로 진출한 러시아와 대결하여 그들을 알바진의 요새에서 물러나게 했다. 1689년에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만주의 북쪽 국경을 아르군 강으로 정했다.

그후 40여 년 간 몽골의 준갈이부(準喝爾部)를 토벌하는 등 정벌을 계속하여 제국의 영토를 외몽골·티베트·준가얼·투르키스탄·네팔 지역에까지 확장했다. 옹정제건륭제 때는 상업과 수공업이 번창했고, 로마 가톨릭교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 또한 회화·인쇄술·도자기 제조가 번성했으며, 문헌학에 대한 연구도 잇달았다. 그러나 그뒤를 이은 황제들은 인구 팽창과 토지소유의 집중으로 생겨난 문제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심한 홍수와 기근으로 생긴 민중 소요는 태평천국운동(1850~64)과 염군(捻軍)의 난(1853~68)으로 발전했으나 사기가 떨어진 기병은 이를 진압할 능력을 잃었다. 근대화·서구화를 위한 시도는 보수 관료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행정관리의 비효율성과 관리의 부패가 확산되었다. 제1차 아편전쟁(1839~42), 제2차 아편전쟁(1856~58), 청일전쟁(1894~95), 의화단 사건(1900)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서구열강에게 여러 가지 이권들을 허용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선통제(宣統帝:이름은 푸이[溥儀])가 퇴위하고 권력은 위안스카이[袁世凱] 휘하의 임시정부에게 이양되었다(→ 중국사).

사회와 경제

송·원·명과 마찬가지로 관료·지주·상인이 사회의 지배층이었으며, 그들의 소유지는 전호에 의해 경작되었다. 도시의 직인·상인은 영세민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관료의 통제하에 있었다. 명나라 중기 이후 은이 유통되자, 농촌에 정기시장이 늘어났고, 이들은 진이나 시로 발달했다. 그 사이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져 농민이 토지를 잃고 전호 또는 유민이 되었다. 한편 몰락한 자의 토지를 매수한 대지주가 출현했으며, 그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을 손에 넣어 신분상승을 꾀했다. 이에 비해 도시는 지배층이나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농업에서는 양쯔강[揚子江] 중류의 후난[湖南]·후베이[湖北] 지방의 개발이 진척되어 양쯔 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을 능가하는 곡창지대가 형성되었으며, 청나라 후기에는 타이완·광시[廣西]·둥베이[東北] 및 동북 3개 성에서도 개척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벼·보리·조를 중심으로 하는 2모작·2기작 등의 집약농업이 행해졌고, 양잠과 목화 재배 외에 차·종이·소금·마·콩 등의 수공업의 원료생산이 증가했다. 또한 옥수수·고구마·담배·땅콩 등이 새로이 재배되어 농민과 도시 서민의 생활 안정에 기여했다.

공업은 전통적인 생사·견직물 외에 양쯔 강 하류의 삼각주 지대의 상하이[上海] 부근에 면직물의 가내공업이 보급되었으며, 징더전[景德鎭]의 도자기 생산에는 수십만 명이 종사했고, 생산과정에서의 분업도 행해졌다. 농업·공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상인들은 각지에서 회관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결속해 전국적인 거래를 추진했으며, 점차 해외에서의 활동도 증가했다. 1757년 이후 대외무역은 광저우 항[廣州港] 하나에 한정되어 있었다. 경제 발전과 함께 인구도 격증했다.

18세기에는 중국의 구석구석까지 개발이 진행되어 곳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거주지까지 손길이 미쳤는데, 이는 소수민족의 반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도망해온 농민은 백련교 등의 비밀종교에 가담했고, 자주 반란을 주도했다. 또 농촌의 과잉 인구는 흔히 도시로 유입되어 유랑인이나 무뢰배가 되었는데, 이러한 계층이 중심이 되어 청대에는 정치적 비밀결사인방과 회당이 생겼다. 청말의 태평천국운동이나 신해혁명에서도 이러한 회당운동을 볼 수 있었다.

한편 해금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여 차·생사·수출을 주로 하던 청나라 초기와는 달리, 19세기에 인도산 아편이 수입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아편전쟁 후 계속된 아편 수입과 은의 유출로 인해 중국의 경제는 피폐해졌다. 또한 1880년대에는 전쟁과 조약의 체결, 정치적 압력 등으로 인해 면제품의 수입이 아편보다 많아지는 반면 목화가 수출초과로 바뀌는 등 중국의 무역구조는 원료식민지적 형태를 보였다.

이 시기에 양무운동이 전개되어, 군수공업 외에 상하이 기기 직포국 등 민수기업에도 관료자본이 진출했는데, 민수기업의 발전을 억제하는 역효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후 열강의 중국 분할 정책이 노골화되고, 차관·금융·철도이권 등 각 분야에 걸쳐 외국 기업의 직접진출 형식에 의한 침투가 이루어짐으로써 중국은 반식민지화했다.

문화와 예술

청나라에는 학문을 중시한 황제가 많았다. 특히 강희제는 강남 사대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학자를 초빙해 강학을 열었고, 주자학을 정통 관학으로 삼는 등 한족의 문화에 융합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명나라말의 학자 고염무(顧炎武)·황종희·왕부지 등이 반만주족적인 민족의식 내지 정치관을 가진 서적을 저술하자, 청나라는 이들을 탄압했으며 서적 편찬사업을 핑계로 국가검정을 시행했다. 이때문에 학문은 정치에서 유리되어 오로지 고전의 실증과 해석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을 고증학이라고 하는데, 이 학문을 시작한 고염무가 견지했던 과격한 경세의 이념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밖에 역사학에 전대흔, 계몽사상에 대진(戴震), 문자음운학에 단옥재 등의 학자가 배출되어 강희재의 〈강희자전〉, 강희재·옹정제의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건륭제의 〈사고전서 四庫全書〉 등의 대규모 서적 편찬사업에 동원되었다.

고증학에서는 근대적 비판정신이나 과학사상이 싹트기도 했으나, 그 비실천성 때문에 도광제 이후의 중국사회의 위기 속에서 경세를 중시했던 공양학파의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이 대두되었고, 고문학과에서도 증국번(曾國藩)·장지동이 주도하는 송학(宋學)의 부흥을 초래했다. 이들의 주장은 양무운동 속에서 '중체서용'으로 전개되었지만, 엔푸[嚴復] 등이 서양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래, 신사상·신학문을 경험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쑨원[孫文]의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 사상을 끝으로 청나라 문화는 쇠퇴해 갔다.

청나라 문학은 원·명에 이어 희곡과 소설이 발달했다(→ 중국문학). 희곡에서는 〈장생전전기 長生殿傳奇〉·〈도화선전기 桃花扇傳奇〉가 2대 명작으로 꼽히며, 소설에서는 〈요재지이 聊齋志理〉·〈부생육기 浮生六記〉·〈유림외사 儒齋志異〉·〈홍루몽 紅樓夢〉 등의 장편이 저술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린수[林] 등이 서양 근대소설을 번역·소개했으며, 〈관장현형기 官場現形記〉·〈노잔유기 老殘遊記〉·〈이십년목도지괴현상 二十年目睹至怪現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소설이 등장했다. 또한 〈선바오 申報〉·〈쑤바오 蘇報〉·〈익문록 益文錄〉 등의 신문도 발간되었다.

미술에서는 회화와 공예가 특히 발달했다. 회화의 주류는 명나라에서 이어지는 남화였다. 청나라초에는 동기창의 유파에 속하는 왕시민·왕감·왕휘·왕원기·오력·운수평의 '4왕오운'이 등장해 궁정화단을 형성했으며, 이 무렵 서양으로부터 원근법·음영법을 받아들였다.

서도는 청나라 중기까지 명나라말의 동기창 유파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나라말에는 완원(阮元)·포세신 등이 새로운 풍조를 일으켰다. 또한 공예는 화려하고 정교한 도자기·옥기·유리그릇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강희제 때인 1680년 관요가 설치된 징더전의 도자기는 원·명대의 명성을 유지했으며, 궁정 또는 관료사대부의 문인취미를 반영한 문방구의 생산도 성행했다(→ 중국미술).

청과 조선의 관계

누르하치가 1616년에 후금을 세우자, 이전까지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지키던 조선은 그 대외관계를 조절하고자 했다. 이때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력이 약해진 명과 강력해진 후금에 대해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는 양단정책(兩端政策)을 표명했다. 따라서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했을 때 조선은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금으로 사람을 보내어 이 출병이 조선의 뜻이 아님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숭명배금(崇明排金)을 표명하며 후금에 대항해왔다. 이에 후금에서는 1627년에 조선을 침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전쟁 후 후금은 조선과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서로안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로 화약을 맺었는데, 이후 조선의 숭명배금사상은 더욱 고취되고 있었다.

1636년에는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뒤 조선에게 사신의 예를 요구했는데 이에 따르지 않자 조선을 재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켜서 조선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청은 조선에게 사대의 예를 지키게 하고 조공(朝貢)을 바치게 하여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조선에서는 숭명배청사상이 더욱 강해져 효종연간에는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했는데 실행되지는 않았다.

1658년(효종 9)에는 러시아와 분쟁을 할 때 조선에게서 원병을 2번이나 차출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조선과 국경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는데, 그후 이 정계비문중에 도문강을 두만강이라는 억지주장을 하면서 간도에 대한 소유권을 조선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 백두산정계비).

1876년(고종 13)의 조선개항 이후에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함께 조선지배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다가, 1894년 청일 전쟁 때 일본에게 패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잃었다. 1909년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갖고 있는 일본에게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주고 그 대신 간도를 받아 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