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

북벌론

다른 표기 언어 北伐論

요약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조정과 유림에서는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복수를 외치는 척화론이 지배적이었으나 본격적인 북벌계획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은 척화론의 중심인물로 당시 낙향해 있던 김집, 송시열 등 기호사림을 등용하여 훈신세력이며 친청파였던 김자점 일파를 제거한 후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군비확충을 꾀하여 남한산성과 수어청을 정비하고, 중앙군 병력을 증강했다. 군기와 전술개량에도 힘을 기울여 네덜란드의 표류인 하멜을 시켜 조총을 개량하고, 효종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군을 가상하여 군복, 무기와 마상전술을 개조했다. 또한 영장제와 관무재를 부활하고 이완, 유혁연 등의 무신을 파격적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중앙군 확충과 이들에 대한 왕의 직접적인 통제력의 강화라는 성과에 머물렀을 뿐이다.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조정과 유림에서는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복수를 외치는 척화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벌계획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은 척화론의 중심인물로 당시 낙향해 있던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 등 기호사림을 등용하여 훈신 세력이며 친청파였던 김자점(金自點) 일파를 제거한 후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송시열(宋時烈)
송시열(宋時烈)

먼저 군비확충을 꾀하여 남한산성과 수어청을 정비하고, 중앙군 병력을 금군 1,000명, 어영청 2만 명, 훈련도감 1만 명으로 증강했다. 기병강화를 위해 금군의 완전기병화를 추진했으며, 어영청에 기병대인 별마대와 포병대인 별파진을 신설하고 전국의 목장을 정비했다. 군기와 전술개량에도 힘을 기울여 네덜란드의 표류인 하멜을 시켜 조총을 개량하고, 효종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군을 가상하여 군복·무기와 마상 전술을 개조했다. 또한 영장제와 관무재를 부활하고 이완·유혁연 등의 무신을 파격적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중앙군 확충과 이들에 대한 왕의 직접적인 통제력의 강화라는 성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때문에 북벌론의 진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못한 점이 많다. 효종 자신은 만주지역의 경계가 허술하고 청의 중국 지배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북정하면 한인의 내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며, 10년간의 준비와 10만 명의 북정군 양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 중신들은 전쟁과 군비확충을 통한 왕의 전제권력 강화를 우려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경제적 측면에도 있었다.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역 자원인 농민경제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당시 지주제가 발달함에 따라 많은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반면,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던 왕실과 양반층의 토지집적은 가속되어 공민과 공전은 계속 감소하고 있었다.

효종대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대규모 양정색출작업과 노비추쇄작업을 펼쳤으나 별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토지제도의 개혁이나 양반층의 면역특권을 철폐하는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양반층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그결과 훈련도감의 1만 병력 확보조차 재정과 양정부족으로 벽에 부딪혔으며 효종이 무리하게 강행한 양인색출작업으로 농민의 부담이 과중되었다. 북벌론을 제창하던 송시열 등도 이러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북벌론은 춘추대의론에 따라 '존왕양이'의 입장에서 전개한 것으로, 군사적 행동이 아닌 정신적인 북벌론이었다.

따라서 그는 효종의 전제정치를 실정으로 비판하고 북벌의 방법으로 양병보다는 군주의 수신, 부세경감 등을 통한 민생의 안정, 그리고 춘추대의를 밝힘으로써 양란 이후 동요된 사회를 안정시키고 신분질서와 강상윤리를 회복할 것을 내세웠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서거함으로써(계획적인 암살이라는 설도 있음)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효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