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강희제

다른 표기 언어 K'ang-hsi , 康熙帝 동의어 청나라 제4대 황제,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얼허 타이핀 한, Elhe Taifin Han, 엔크 암갈란 칸, Amgalan Khaan
요약 테이블
출생 1654. 5. 4∼
사망 1722. 12. 20, 베이징
국적 청(淸), 중국

요약 강희제는 청제국에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외몽골을 합병시켰고 티베트에까지 세력판도를 넓혔다. 4개의 대외무역항을 개항했고 서구의 교육·예술, 천주교의 도입을 장려했다.
순치제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7세 때 왕위에 올랐다. 13세가 되어 친정을 할 때까지 선제 때의 공신들이 국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것은 15세부터였다. 중국 남부의 윈난, 광둥, 푸젠을 통치하는 번왕들의 처리문제를 맞았고 이는 삼번의 난으로 이어졌다. 강희제의 추진력과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진 타이완 정벌, 헤이룽 강 유역과 만주, 외몽골 합병에 성공하여 중국 본토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타이완 정벌 이후에 광둥을 포함한 4개의 항구를 개방하여 교역을 활성화하고 양쯔 강 이남 지역의 산업성장을 촉진시켰다. 또한 4만 2,000자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과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등을 편찬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유년시대
  3. 실권의 장악
  4. 제국의 행정
건륭제(乾隆帝)
건륭제(乾隆帝)

개요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2대 황제가 된다.

연호는 강희, 이름은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청제국에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외몽골을 합병시켰고 티베트에까지 세력판도를 넓혔다. 4개의 대외무역항을 개항했고 서구의 교육·예술, 천주교의 도입을 장려했다.

유년시대

현엽은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효강장(孝康章) 황후는 명문가 [泈]씨 출신의 유명한 만주족 장군인 툴라이[圖賴]의 딸이었다(만주족은 만주지방에서 사는 퉁구스족을 말하며 1616년 후금을 세웠고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 1644년 명을 정복하고 중국을 지배했음). 1661년 2월 순치제가 천연두로 23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자, 현엽은 5명의 형제를 제치고 즉시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보다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연호인 강희(만주어로는 에레타이핀)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등극한 황제가 아직 7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제(先帝) 때의 공신인 소닌·숙사하·에빌룬·오보이가 정권을 담당했다.

보수적인 만주족 출신인 이들 4명의 대신이 취한 첫 조치는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고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선제인 순치제 때 도입한, 황실 내의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 왕조인 명대에 번성했던 환관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모두 한족(漢族) 출신 환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설치된 이래 만주족들의 혐오를 받아왔다. 십삼아문 대신에 내무부가 설치되면서 그 구성인원도 만주족 출신의 충성스런 종복들로 바뀌었고 황제의 사생활은 이들이 관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는 환관들이 정사(政事)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많은 왕조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특히 대에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1667년 13세가 된 강희제는 소닌과 다른 대신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그의 선제도 13세부터 통치했음).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4명의 대신에게 있었다.

소닌이 죽자 오보이가 정권을 장악했고 날조된 죄명을 뒤집어씌워 숙사하를 처형한 뒤, 에빌룬을 위협하여 복종시켰다. 1669년 강희제는 할머니인 태황후와 한족 출신 태부(太傅)의 도움을 받아 오보이와 에빌룬을 제거했다. 오보이가 실제로 체포된 것은 황제의 알현실에서였다. 황제의 뒤에 숨어 있던 젊은 무사가 오보이에게 갑자기 덤벼들어 체포한 것이다.

15세가 된 강희제는 이같은 조치를 취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군주임을 입증했다.

유년시절의 강희제(康熙帝)
유년시절의 강희제(康熙帝)

실권의 장악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강희제는 중국 남부의 세 번왕(藩王)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 번왕이란 윈난[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경계무(耿繼茂 : 그가 죽은 뒤 아들 耿情忠이 뒤를 이었음)를 가리킨다. 이들은 중국의 군벌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만주족이 명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만주족 진영의 환대를 받아왔다.

1644년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할 때 중국의 다른 지역들은 여전히 명의 잔군(殘軍)과 비적(匪賊)의 수중에 있었는데, 세 군벌이 이들의 진압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왕(王)으로 책봉되었고, 사병(私兵)을 보유한 채 중국 남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실상의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 세 번왕이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큰 위협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1673년에 찾아왔다.

상가희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고향인 만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강희제가 이 제의를 즉각 받아들이자 다른 두 번왕들도 예의상 똑같은 제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영토를 황제가 회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번왕인 오삼계는 남쪽의 윈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태 진전에 매우 놀랐다. 그는 자신 역시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중앙 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만주족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 큰 공을 세운 오삼계의 강력한 군대와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하는 중대 문제가 어전각의에 제기되었다. 젊은 강희제는 오삼계의 군대를 쳐부수겠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세 번왕이 결국은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 확실한 이상 이 기회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결정에 충격을 받은 오삼계는 즉각 만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개전 초기에 관군(官軍)이 밀리게 되자 차하르 몽골족(만주족이 1635년 내몽골을 정복하기 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던 왕족)의 부르니가 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그밖의 다른 동아시아 제국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추진력과 탁월한 군사전략이 마침내 늙은 오삼계를 압도했고, 오삼계는 베이징으로 진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황제임을 선포한 뒤 곧 죽고 말았다. 관군이 1681년 윈난의 쿤밍[昆明]에 입성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왕조는 굳건하게 되었다.

세 번왕을 제거하고 난 뒤에 강희제는 타이완 정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타이완을 다스리고 있던 정(鄭)씨 일가는 원래 푸젠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광대한 중국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해온 해상세력이었다. 만주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거부한 정성공(鄭成功 : 서방에는 콕싱가[國姓爺]로 알려져 있음)은 1662년 네덜란드로부터 타이완을 빼앗고 근거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그의 자손들은 타이완에서 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청은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타이완 정벌을 수행할 수 없었다. 1661년에 채택된 청의 유일한 전략은 푸젠 연안의 주민을 내지(內地)로 강제이주시켜 정씨 일가를 고립시키는 것이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683년 정씨 가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강희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타이완 정벌을 명했다.

정씨 일가는 투항해왔고 타이완은 푸젠 성으로 편입되었다.

중국 본토를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자, 강희제는 북방의 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17세기 중반에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까지 남진했던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인들은 강희제의 통치 이전부터도 알바진과 네르친스크까지 내려와 요새를 세웠으나 청군에 의해 격퇴된 바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그뒤 요새를 곧 수복했고, 그 지역에 더 많은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들에게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1685년 청군은 알바진을 공격하여 며칠 만에 그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청군이 철군하자마자 러시아인들은 그 요새에 또다시 인원을 배치했다. 강희제는 그 이듬해 다시 정벌을 명령했고, 포위공격은 오래 지속되었다. 동시에 강희제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외교협상을 벌여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맺었다.

네르친스크에 파견한 청의 대군(大軍)에 압도되어 맺게 된 이 조약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헤이룽 강의 외곽지류인 고르비트사 강 유역과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다. 이로써 헤이룽 강 유역과 청조의 본거지인 만주는 청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강희제는 외몽골을 합병시켰다. 외몽골의 서쪽과 톈산 산[天山] 북쪽에 사는 유목민 준갈이부(準噶爾部 : 몽골4부의 하나) 오이라트족의 통치자인 간덴은 야심만만한 인물로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했고, 이어서 외몽골의 할하족 영토를 침입한 바 있었다.

많은 수의 할하족 난민들이 내몽골로 피해와서 청의 보호를 요청했다. 1691년에 강희제는 내몽골의 돌론노르(나중에 둬룬 현[多倫縣]으로 개명)에서 할하족의 대표들을 접견했고, 또 이곳에서 그들의 공식적인 합병맹세를 받았다.

1696년에 강희제는 불모의 고비 사막을 건너 외몽골 원정에 나섰다. 과감하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그 원정에서 강희제는 중군(中軍)을 손수 지휘했다. 적대적인 이역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겨냈고, 오늘날의 울란바토르 동쪽인 준모드에서 준갈이부를 궤멸시켰다. 간덴은 그 다음해 알타이 산맥의 은신처에서 자결했다.

할하족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외몽골은 청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준갈이 부족이 1717년 티베트를 침입하여 라싸[拉薩]를 함락시킬 때까지 20여 년 동안 청과 준갈이부족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가 몽골족에 미치는 정신적 영향력을 염려한 나머지 강희제는 1720년 티베트로 군대를 보내, 준갈이부족들을 라싸에서 축출하면서 이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강희제는 1712년 준갈이부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7세기 초반에 남러시아로 이주해온 투르구트족, 또는 볼가 칼미크족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무수한 수로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전역을 여행한 만주사절들이 3년 뒤에 돌아오자, 그 일행 가운데 사람인 툴리센[圖理琛]이 〈이역록 異域錄〉이라는 상세한 여행기를 써냈다.

제국의 행정

강희제는 천부적으로 놀라운 정력과 뛰어난 궁술(弓術)의 재주를 지닌 탁월한 군사지도자였다.

그는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쏟았다. 중국의 전통적인 황실제도에 따르면, 제국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소한 일도 황제가 몸소 보살피게 되어 있었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제출되는 보고서와 비망록들을 모두 읽으면서 심지어 아주 사소한 오자(誤字)까지 지적해냈다. 또 하루에 300~400건에 달하는 문서를 모두 결재했는데 그는 심지어 전시(戰時)에도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

강희제가 늘 신경썼던 문제는 황허 강[黃河]의 치수(治水)였다.

오랫동안 치수사업을 하지 않은 탓으로 황허 강과 화이허 강[淮河]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의 유역은 자주 침수되었다. 이 때문에 장시[江西] 북부지역은 큰 피해를 당하곤 했다. 1677년 강희제는 근보(靳輔)를 치수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했고, 근보는 1683년에 제방축조와 준설사업을 완성하여 황허 강의 흐름을 안정시켰다.

아울러 황허 강과 남쪽의 양쯔 강[揚子江]을 잇는 인공운하인 대운하의 개수작업이 활발히 진척되어 남쪽의 곡창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을 북쪽으로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치수사업의 결과를 검사하고, 남쪽의 부유한 문화·경제 지도자들과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강희제는 양쯔 강 이남의 지역을 1684~1707년 사이에 6번이나 방문했고, 그때마다 여비는 황제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

개인생활은 근검절약으로 일관했고, 시중을 드는 궁녀와 환관도 몇 사람에 불과했다. 강희제는 세수입(稅收入)을 증대시키는 일이 결코 없었고, 전시에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다. 실제 그의 통치 시기에 세금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감면되었다. 1711년부터 3년 동안 각 성(省)은 도합 3,000만 은량이 넘는 세금감면을 받았다.

강희제는 1711년부터 인두세를 내는 성인(成人)의 수를 당시의 수준에서 영원히 동결한다고 선포했다.

타이완 정벌 이후 강희제는 연안무역의 규제를 해제하고 광둥[廣東]을 포함한 4개의 항구를 외국 선박들에게 개방했다. 외국 상인들은 차·비단·도자기 같은 중국제품을 사기 위해 중국에 은(銀)을 가져왔다. 이같은 교역과 내부의 평안은 특히 양쯔 강 이남 지역에 엄청난 산업성장을 촉진시켰다.

강희제는 학문을 매우 좋아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깊어져 과로로 병석에 누웠을 때에도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1677년 쯔진청[紫禁城]에 '남서방'(南書房)이라는 서실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철학·역사 등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는 특히 주자(朱子) 철학에 심취하여 주자가 내세운 유교적 이상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만주족이 세운 청조가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신임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유교철학으로 교육을 받은 중국 관리들을 선발하는 전통적인 과거제도 외에도 강희제는 1678년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을 추천에 의해 관리로 등용하는 특별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임명된 50명의 인사들(이중에는 유명한 학자 朱彛尊도 끼어 있다)은 명조의 공식 사서인 〈명사 明史〉를 편찬했다.

강희제가 편찬을 명한 다른 책들로 유명한 것은 4만 2,000자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 康熙字典〉(1716), 중국어의 운율(韻律) 사서인 〈패문운부 佩文韻府〉(1711), 운율의 백과사전인 〈연감유함 淵監類函〉(1710) 등이 있다.

또 다른 훌륭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은 10만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또한 강희제 때 시작된 것이다.

교육분야를 본다면, 1669년 16개조로 된 칙서를 반포했다. 이것은 선제인 순치제가 반포한 6개조를 수정·확대한 것으로 향리의 생활실천수칙을 상술한 것이다. 이 교육이념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옹정제(雍正帝)에 의해 확대되었고, 거의 250여 년 동안 중국 농민들의 도덕적 지침이 되어왔다.

유럽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열렬히 받아들였던 강희제는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고용했다.

페르디낭 베르비스트로부터 기하학을 배웠는데, 베르비스트는 황실측후소의 부소장격인 흠천감부(欽天監副)가 되어 제국의 공식책력을 편찬했고, 또한 대포 제조에도 간여했다.

이 대포는 삼번의 난과 준갈이부족 정벌 때에 위력을 발휘했다.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조아생 부베는 강희제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강희제는 또한 피에르 자르투, 장 바티스트 레지 등에게 명하여 제국의 정확한 지도를 편찬토록 했다. 측량조사는 1708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했다.

장기간에 걸친 끈질긴 측량조사 끝에 1717년에 〈황여전람도 皇輿全覽圖〉가 완성되었다.

장 바티스트 부르귀뇽 당빌이 펴낸 유명한 〈중국·타타르·티베트의 새 지도〉는 이 중국어판 지도를 프랑스어로 펴낸 것이다. 유럽의 회화 역시 강희제를 매혹시켰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부베가 데려온 이탈리아인 조 기라르디니는 강희제가 총애했던 궁중화가였고, 이들은 유럽식 원근화법과 다른 활동들로 중국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같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청조에 기여하게 되자, 강희제는 로마 가톨릭교를 좋게 보게 되어 1692년에는 로마 가톨릭교의 중국 내 포교를 공식으로 허락했고, 그뒤에는 쯔진청 안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또 자신이 말라리아에 걸려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을 완치시켜 준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베이징에 교회를 지어 이들에게 하사했다. 황제가 로마 가톨릭교에 호의를 보이자, 도미니쿠스·프란체스코·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종단(宗團) 출신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건너오게 되었다.

제사나 공자사당 및 천신단에 의식을 올리는 전통적인 중국의례에 관대했던 예수회와는 달리, 이들 다른 종단의 선교사들은 이같은 전통의례가 로마 가톨릭교 신앙과 배치되는 미신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의례논쟁은 1704년까지 맹렬하게 계속되었고, 이 해에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이같은 의례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회칙을 내렸다.

자신의 제국 내에 이같은 내정간섭이 벌어지는 것에 격분한 강희제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명하여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중국으로 오는 교황특사 카를로 토마스 톰마소 마일라르드 데 토우르논을 체포했고, 1706년에는 예수회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축출했다.

1720년에 또 다른 교황특사인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는 황제의 명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당했다.

강희제는 3명의 황후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 한 황후는 헤세리 문중인 소닌의 손녀이고, 다른 황후는 니오후루 문중인 에빌룬의 딸이며, 세번째 황후는 퉁 문중인 툴라이의 손녀였다. 이들 비(妃)와 빈(嬪)들은 모두 35명의 아들을 낳았다. 강희제는 1675년 한 살 반밖에 되지 않은 두번째 아들 윤잉(胤芿)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 조치는 왕자들에게 동등한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만주족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자들 사이에 끔찍한 싸움이 벌어졌다. 불운한 윤잉은 1708년에 폐위되었다가 1709년에 복권되었으나 1712년에 다시 폐위되어 영원히 복권되지 못했다. 이같은 일에 크게 상심한 강희제와 후대 황제들은 다시는 황태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1722년 설날, 황제는 궁중에서 대연회를 베풀고, 많은 원로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장기간에 걸친 복된 치세를 자축했다.

그해 겨울, 강희제는 베이징의 북서쪽 교외에 있는 별궁 장춘원(長春苑)에 머물다가, 12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 다음해 베이징의 북동쪽에 있는 마란유에 묻혔고, 능은 징링[景陵]이라 불린다. 제위는 그의 4번째 아들인 윤정(옹정제)에 의해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