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

표트르 1세

다른 표기 언어 Pyotr I 동의어 임페라토르, 대제, 빌리키
요약 테이블
출생 1672년 6월 9일, (구력 5월 30일), 모스크바
사망 1725년 2월 8일, (구력 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됐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젊은시절과 왕위계승
  3. 내부 개혁
  4. 대외정책
  5. 인격과 업적
표트르 1세(Pyotr I)
표트르 1세(Pyotr I)

개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가였다.

표트르는 알렉세이와 그의 2번째 부인 나탈랴 키릴로브나 나리슈키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표트르는 그의 이복형제들과는 달리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젊은시절과 왕위계승

1676년 알렉세이가 죽었을 때 표트르는 4세에 불과했다.

병색이 짙은 그의 이복형이 표도르 3세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실권은 표도르의 외척인 밀로슬라브스키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표트르와 나리슈킨가(家) 사람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켰다. 1682년 표도르가 후사 없이 죽자 밀로슬라브스키가와 나리슈킨가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크렘린에 모인 여러 신분의 대표들은 밀로슬라브스키가의 연약하고 소심한 이반 대신 건강하고 영리한 표트르를 지지했지만 결국 이반과 표트르는 공동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반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표트르는 어렸기 때문에 25세 된 이반의 누이 소피아가 섭정이 되었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표트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 근처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린 차르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표트르는 통상적인 차르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궁정이라는 좁은 곳에 갇혀 지내는 대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밖에서의 놀이를 좋아했으며 특히 군대놀이를 즐겼다. 또한 그는 목수일·대장장이일·인쇄일도 해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마을 근처에는 외국인 거주지가 있었다. 그 주민들과 친숙해진 관계로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헛간에 버려져 있던 영국의 범선은 항해에 대한 그의 정열을 불러일으켰다. 수학·축성·항해는 표트르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또 그는 모형 요새를 하나 건설했고 최초로'놀이'로 군대를 조직했다. 근대 러시아군의 핵심이 되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와 세묘노프스키 연대는 이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1689년 표트르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아름다운 예브도키야와 결혼했는데 이는 17세의 표트르가 이제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결혼은 오래가지 않았다. 표트르는 곧 왕비를 무시했고 1698년에는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그가 결혼한 해에 스트렐치(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소피아와 그의 파벌은 이 반란을 쿠데타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표트르는 소피아를 권력으로부터 제거했다. 이때부터 1696년 이반이 죽을 때까지 나리슈킨가가 권력을 장악했다.

한편 표트르는 군대놀이와 항해놀이를 계속했는데, 그의 놀이는 장차 그에게 놓여진 과업을 위해서는 좋은 훈련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내부 개혁

표트르의 재위초에 러시아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이 후진성이 대외정책을 저해했으며 심지어는 러시아의 독립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표트르의 목표는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 바다로의 접근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서유럽 국가들의 발전을 따라 잡는 것이었다. 구래의 토지귀족인 보야르(boyar)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엄하게 처벌한 그는 25년간 국민생활의 모든 부문(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에 걸쳐 일련의 개혁에 착수했다.

표트르의 재위초에는 이미 러시아 여러 지방에서 경제적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수공업자들이 소기업을 세우고, 소규모 생산은 팽창하고 있었으며 노동자와 농노를 고용한 작업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에는 막 탄생한 부르주아지가 국민적 산업과 교역의 발전을 목표로 한 표트르의 정책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다. 도시행정의 개혁은 특히 중요했다. 1699년의 칙령에 의해 도시민들(수공업자·상인)은 지방의 군사총독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들 자신의 시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지방도시의 시 정부는 모스크바의 시정부(라투샤)에 종속되었다. 모든 도시민들은 '정규시민'과 '하급시민'으로 나누어졌다. 정규시민들은 2개의 길드에 속했는데 하나는 부유한 상인과 자유업 종사자(의사·배우·예술가)를 포함했으며 또다른 하나는 직업에 따라 분류된 장인들과 소상인들로 구성되었다.

상인은 그 자본의 크기에 따라 첫째 길드나 둘째 길드에 소속되었다. 제조업자들은 특권을 누려 제조업자단의 재판관할하에 들어갔으며 병사들의 숙영할당이나 군사적 의무 등으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하급시민들은 고용된 노동자들로서 정규시민들이 갖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개혁에 힘입어 경제활동과 도시인구가 증대되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시에 정착하여 해당 시민범주에 등록하는 것이 법으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모든 계급의 인민들에게 자유로운 상업'의 권리가 부여되었다.

중앙권력에 의해 한층 융통성 있게 통제되는 체제의 확립을 위해 러시아는 8개의 '구베르니'라는 행정단위로 나누어졌다(1708). 각 구베르니들은 차르에 의해 임명된 행정·사법·군사적 권한을 가진 총독의 통제하에 두었다.

1719년 구베르니들은 해체되어 50개의 '프로빈치'(provintsy)로 다시 조직되었다. 한편 1722년의 인구조사에 이어 이전의 가구세를 대신한 인두세를 신설했다. 이는 민중의 불만을 크게 자극했는데 이에 대해 표트르는 전국에 걸친 주둔지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이 주둔군의 유지 부담을 지역 주민들에게 지웠다. 그래서 행정구역과는 일치하지 않는 '군관구'가 생겨났다. 독립된 사법권을 가진 군관구 사령관은 이미 복잡해진 지방권력 체계에 또 하나의 권력층이 되었다.

표트르의 재위기간 동안 중세적이고 낡은 정부형태는 효율적인 전제정으로 대치되었다(→ 색인:절대주의). 그는 1711년에 보야르 회의를 폐지하고 법령으로 원로원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설치했다.

원로원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기관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세수와 지출을 감독하며 차르의 칙령에 부응하는 법을 제정했다. 군대 규율이 민간제도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근위대의 장교는 원로원에서 상주 근무했다. 더욱이 1722년 원로원과 그 사무국의 일상작업을 감시하고 '군주의 눈'의 역할을 하는 검찰총장직이 생겼다.

표트르가 권력을 잡았을 때 국가의 중앙부서들은 혼란스럽고 제각기 기능하는 '프리카지'(Prikazy)라는 80개의 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표트르는 이 낡은 체제를 없애고 9개의 '콜레기'(Kollegy)라는 국(局)으로 대체했다. 이 수는 1722년까지 13개로 늘어났다. 콜레기의 활동은 총괄규제령으로 통제되는 한편 각 콜레기에 대한 특별 규정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래서 국가행정의 각 부문마다 엄격한 규율이 세워졌다. 국가에 대한 범죄는 차르에게 책임을 지는 프레오브라젠스키국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여졌다. 1697년에 출발한 대사절단의 둘째 목표는 선진적인 산업기술을 직접 보고 익히는 것이었다.

1700년부터 스웨덴에 대한 전쟁으로 인해 산업발전은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무기를 공급하고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러시아에는 전함이 사실상 없었음) 대규모 야금업과 제조업이 세워져야 했다. 표트르는 지치지 않고 이러한 일에 헌신했다. 대규모 자본투자가 이루어지고 많은 특권들이 기업가들과 산업가들에게 부여되었으며 이러한 특권들 가운데는 작업장의 노동력을 위해 농노를 구입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있었다.

그래서 특정한 지역에서 생활하고 공장에 예속된 '등록' 농노계급이 생겨났다. 다른 나라의 생산방법이 더욱 연구되고 외국의 전문가들이 초청되었다. 전반적인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육군과 해군의 물자 수요가 충당되었고 주로 농노노동력을 이용한 다수의 제조업체들이 세워졌다. 야금업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여 18세기 중엽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유럽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그의 치세중 외국과의 교역량은 7배나 증가했다.

표트르는 신뢰할 수 없는 스트렐치와 젠트리들의 민병을 대신하여 완전히 근대적인 정규군을 창설했다. 그는 귀족으로부터 장교들을 충원했으며 농민들과 도시민들을 다른 사병으로 징집했다. 복무는 평생 계속되었으며 병사들은 러시아제 화승총과 총검으로 무장했고, 군복이 지급되었으며 정규훈련이 도입되었다.

포병을 위해서 낡은 대포를 대신하여 러시아인 전문가나 표트르 자신에 의해 설계된 새로운 대포가 배치되었다. 1716년의 군대법령은 특히 중요하다. 여기에 따르면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전투에서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했고 '병사의 일을 기초원칙부터 알고 전투교리에 얽매이지 않아야' 했으며 적의 면전에서 솔선수범을 보여야만 했다. 해군에 있어서는 표트르의 통치시기에 52척의 전함, 수백 척의 갤리선, 그리고 기타 다른 종류의 배들이 건조되어 강력한 발틱 함대가 창설되었다.

여러 가지 특수학교들이 육군과 해군 복무를 위해 학생들을 교육시켰으며 그 덕분에 마침내 표트르는 외국의 전문가들에게 더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1700년 1월 1일부터 표트르는 연도에 관해서는 유럽에서 통용되던 달력과 일치시킨 새로운 책력을 도입했다(→ 역법). 러시아에서는 그때까지 '창세'로부터 햇수를 산정해왔었다. 1710년에는 고대교회 슬라브식 알파벳이 세속적 서체로 탈바꿈 했다.

표트르는 세속적인 원리 위에서 교육을 후원하고 그 부문에 국가의 통제를 가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였다. 여러 세속 학교들이 세워졌다. 귀족 자제들만으로 학생수를 채우기는 힘들었으므로 병사·관리·성직자의 자식들에게 입학이 허용되었다. 많은 경우에 국가에 대한 강제적인 봉사를 위한 의무적인 교육이 선행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교육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종종 국가의 부담으로 강제로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유럽 서적의 번역도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최초의 러시아 신문인 〈베도모스티 Vedomosti〉('기록'이라는 뜻)가 1703년에 등장했으며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도 1724년에 세워졌다. 이러한 유익한 조처들 외에도 표트르는 종종 잔혹할 정도로 피상적인 유럽화를 강요했다. 예를 들어 그가 턱수염을 깎고 서구의 의복을 입도록 칙령을 내렸을 때 그는 자신이 직접 귀족들의 턱수염과 그들이 입고 있는 긴 코트 자락을 잘라냈다.

턱수염을 고집한 라스콜니키(구신자)들과 상인들은 특별세를 내야 했으나 농민들이나 정교회 성직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허용되었다.

1721년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기 위해 표트르는 모스크바 총교구를 폐지했다. 그로부터 교회의 우두머리 지위는 차르의 뜻에 따르는 위계적인 대표자들로 구성된 성의회(Holy Synod)로 넘어갔다.

세속관리인 총감찰관이 성의회의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차르에 의해 임명되었다. 성의회는 이단을 가혹하게 박해했으며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수행했다. 차르는 교회에서 시무하는 성직자들로 하여금 농민에게 '이성에 귀기울이도록' 설교하고 권하게 했으며 아이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두려워 하고' 차르를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도를 가르치도록 했다. 수도원은 30세 이하의 남자나 농노들을 수도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절대주의 체제의 한 기둥이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귀족을 위해 교회소유 토지의 한도가 정해졌다. 표트르는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수입을 국가적 필요에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했다.

표트르의 국내정책은 러시아 지배계급인 지주들과 막 탄생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 토지귀족의 물적 지위는 그의 통치하에서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었다. 통치의 전반기에만 거의 1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17만 5,000명의 농노들이 귀족들에 할당되었다.

더욱이 장자상속제를 제도화하여 대토지재산의 분할을 방지한 1714년의 칙령은 '포메스치야'(귀족들의 봉사에 대해 차르가 귀족에게 양도해 준 토지)와 '보트치니'(세습재산 또는 자유보유지) 간의 오랜 구분을 없애고 이제 모든 토지는 세습재산으로 되었다. 귀족의 지위는 표트르가 제정한 관등표(1722 제정)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로 인해 혈통에 따라 차등지워진 낡은 승급체계가 업무에 따른 승급체계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체계에서 모든 직무는(군대나 일반행정 모두) 14등급으로 구분되었고 세습귀족은 8등급부터 시작되었다.

관료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나 공장주도 귀족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혈통을 형성했다. 보야르의 우위는 이로써 끝나게 되었다.

대외정책

표트르의 재위초에도 러시아는 영토면에서는 큰 나라였으나 흑해, 카스피 해, 발트 해로 나아가는 통로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통로를 얻는 것이 표트르의 대외정책이 가진 주된 목표였다. 이러한 의도로 수행된 것이 투르크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던 크림 타타르족으로부터 아조프 해를 빼앗기 위한 전쟁이었다(→ 색인:오스만 제국, 러시아-투르크 전쟁)(1695~96). 이 전쟁은 투르크에 대항한 '신성동맹'(오스트리아·폴란·베네치아와 결성)에 러시아가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행된 것이기도 했지만 흑해로 접근하고, 타타르의 공격에 대해 남부 국경지역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 원정을 계기로 그는 돈 강에 함대를 건설했으며 1696년에는 아조프를 차지했다.

그 전쟁 이후 표트르는 250명이나 되는 인원으로 구성된 대사절단을 이끌고 서유럽을 순방했다(1697~98). 주목적은 국제상황을 검토하고 반투르크 동맹을 견고히 하는 것이었으나 유럽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다.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여행한 그는 사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조선소에서 4개월간 목수로 일하기도 했으며 그후 영국으로 건너가 공장들·병기창·학교·박물관을 찾아다니고, 의회의 회의를 참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일할 전문가들도 고용했다. 대사절단의 외교적 목적인 반투르크 동맹을 위해 표트르는 네덜란드·영국 정부와 협상했으나 해양강국들은 다가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신경을 쓰느라 그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표트르가 영국에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있는 동안 다시금 스트렐치의 반란 소식이 들려왔다.

1698년 여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수백 명의 군위병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추방했다. 이로써 스트렐치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양강국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조차도 다가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준비하고 투르크와는 화평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는 아조프에서 흑해로 남하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투르크와 화친했다(콘스탄티노플 조약, 1700). 대신 그는 선왕들의 전통을 따라 발트 해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스웨덴은 카렐리아·잉그리아·에스토니아·리보니아 등을 장악하고 발트 해로 나아가려는 러시아를 막고 있었다. 표트르는 작센, 덴마크-노르웨이 등을 끌어들여 스웨덴과 전쟁을 했는데 이렇게 해서 1700년에 시작된 북방전쟁은 2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표트르는 이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엄청난 정력을 쏟았다. 그는 전투를 직접 지휘도 하고 외교에도 나서고 심지어는 도끼를 들고 조선소에서 직접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외교를 위해 다시 덴마크·북독일·네덜란드·프랑스를 방문했다(1716~17). 1703년에 네바 강변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712년에는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니스타드 조약에 의해 발트 해 동부 연안 지역은 러시아에 넘어가고 스웨덴은 이류국가로 전락했다. 이제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은 1722년 표트르의 칭호를 차르에서 전러시아의 황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정에서, 그리고 그의 근대화 작업으로 농노들과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장 큰 부담을 져야 했다. 그들의 고통은 다수의 민중반란을 야기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반란은 아스트라한의 반란(1705~06)과 돈 강 유역에서 일어난 불라빈의 반란(1707~08)이었다. 그러나 모든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표트르에게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그는 버림받은 예브도키야가 난 알렉세이였다.

알렉세이는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으며 표트르의 개혁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표트르는 미천한 신분의 여성 예카테리나(뒤의 예카테리나 1세)와 관계를 가졌으며 1721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든지 아니면 그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수사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은 알렉세이는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피신했으나 곧 돌아왔다.

그후 그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1722년 표트르는 후계자를 자신이 지명할 수 있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다. 그는 과중한 일로 건강이 나빠져 1725년 2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예카테리나가 후에 표트르 2세가 되는 표트르의 손자를 제치고 1724년에 여제(女帝)가 되었다.

표트르 1세(Pyotr I)
표트르 1세(Pyotr I)

인격과 업적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으며 조야한 농담을 즐기기는 했으나 즐겁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통치자로서 표트르는 전제적 영주의 방법, 즉 채찍과 자의적인 지배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제군주로 늘상 행동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 있고 근면했으며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교역·교육·과학·문화·대외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