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다른 표기 언어 Russian Orthodox Church

요약 러시아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988년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었고 1439년 독립자치교회가 되어 서열 제5위의 총대주교를 가질 만큼의 위상이 되었다. 1721년 후 표트르 대제의 탄압을 받다가 1917년에 부활되지만 1918년 이후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1943년 스탈린의 종교정책 전환으로 부흥하여 교회의 공식적 조직이 크게 확장되었고 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국제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다른 정교회들로부터 널리 승인을 받았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후 미국, 일본, 만주 등의 러시아 정교회 지체들이 모교회와 접촉할 수 없게 되자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이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1970년 이들 정교회의 자치권을 승인하게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신도수는 2,500만~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전파한 그리스도교는 988년 성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었다(키예프 루스). 1037~1448년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임명한 수도 대주교가 통치했는데, 키예프의 그리스인 수도 대주교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일시적인 연합을 선언했던 피렌체 연합(1439)에 서명한 후 러시아 교회는 독립자치교회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욥(Job)은 총대주교의 지위로 승격(1589)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 이어 서열 제5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명목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관할이었던 '키예프 및 전(全)러시아' 독립 수도 대주교구가 1458~1687년 폴란드 통치지역에 있었다. 1596년 다수의 우크라이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로마 가톨릭과 연합했으나, 1687년 키예프 수도 대주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 재편입되고 19세기와 20세기에 폴란드가 분할되자 대부분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를 탄압해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신성종무원(Holy Governing Synod)으로 대체했다.

총대주교구는 1917년 10월혁명으로 비로소 부활되었다. 1918~39년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1922년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개혁운동의 일환인 갱신교회(Renovated Church)가 총대주교 티혼(Tikhon)의 교회에서 탈퇴하고, 신성종무원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한편 성직자와 신도들을 분열시키자 러시아 정교회는 더욱 약해졌다(갱신교회). 티혼이 죽은(1925) 뒤 정부는 총대주교 선거를 금지시켰다.

1927년 교회를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수도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으며 이후 일체의 정부 비판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부에 '충성'하는 태도는 교회 자체 내에 보다 큰 분열을 가져왔다. 러시아 국내의 수많은 신도들이 세르기우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국외에서는 미국과 서유럽의 러시아 수도 대주교들이 모스크바와 관계를 끊었다. 그러다가 1943년 스탈린 종교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 덕택에 러시아 정교회는 놀랄 만한 부흥을 이루었다.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새 총대주교가 선출되었고, 신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며, 수천 개의 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45~59년에 비록 몇몇 성직자들이 체포·유배되기는 했으나 교회의 공식적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문을 연 교회의 수가 2만 5,000개에 달했다. 그러나 1959~64년에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문을 연 교회 및 교회 기구의 수가 1만 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소련 정부가 지지하는 평화운동을 비롯한 국제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다른 정교회들로부터 널리 승인을 받았으며, 이들과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사이에 정기적인 상호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8년 러시아 교회 독립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정교회 지도자 회의는 바티칸과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미제국주의'와 결탁했다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반서구적 입장을 채택했다. 이러한 입장은 스탈린이 죽은 뒤 수정되어 총대주교구가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했으며(196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와 동시에 내부 불만의 소리도 높아져 갔는데 정부가 교구 성직자를 지방관료의 지배 아래에 두는 교구법령을 강요하자, 1965년 대주교 예르모겐과 사제 에슐리만·야쿠닌 등이 공공연히 항거한 것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난민들은 물론 미국, 일본, 만주 주교구(diocese)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러시아 정교회 지체들이 모교회(母敎會)와의 정기적 접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자신들의 러시아 소재 주교구를 떠나온 일군의 주교들은 유고슬라비아의 스렘스키카를로프치에 모여 명백하게 군주제를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유' 러시아 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교회회의라고 자처했다. 오늘날까지도 상당수의 러시아 이민을 포함, 존속하고 있는 이들 단체는 1922년 총대주교 티혼에 의해 형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티혼은 그후 총대주교 플라톤과 예블로기를 각각 미국과 유럽 교회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두 수도 대주교는 모두 카를로프치의 교회회의와 일정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교회법적 권위를 가진 기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1931년 플라톤과 예블로기는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세르기우스로부터 소련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플라톤은 미국에서 '임시 독립자치'를 선언했으며, 예블로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70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마침내 미국 정교회의 자치권을 승인하면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이전에 보유했던 교회법적 권리들을 포기했으며, 일본에 창설된 자치 교회도 같은 해에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