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모스크바

다른 표기 언어 Moskva
요약 테이블
위치 유럽 러시아의 중부
인구 12,641,000명 (2022년 추계)
면적 1,035㎢
언어 러시아어
대륙 유럽
국가 러시아

요약 러시아 연방의 수도.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광활한 유럽권 러시아 평원의 가운데에서, 오카 강의 지류인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있는 이 도시는 모스크바 강과 그 지류들이 이루는 드넓으면서 극히 지대가 낮은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고,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서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지도를 펼쳐보면 대략 삼각 형태를 이루는 크렘린과 그곳 주변의 직사각형 모양의 키타이고로트 및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심원들과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동심원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목차

접기
  1. 지리
  2. 기후
  3. 시가지와 건축물
  4. 주민
  5. 경제
  6. 교통
  7. 정치와 행정
  8. 교육
  9. 사회와 문화
  10. 역사
모스크바(Moskva)
모스크바(Moskva)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1147년의 연대기에 처음 언급된 이래 러시아 역사의 주요무대로서 자리잡아왔으며, 또한 600년 이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구심이 되어왔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구, 공업 생산성, 문화, 과학, 교육 등의 면에서도 중심적인 도시이다. 1991년 8월의 쿠데타에 의해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뒤에 소련의 공화국들이 이룬 독립국가연합에서도 많은 행정기능의 중추역할을 계속 맡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640km, 폴란드 국경에서 960km 떨어져 있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모스크바 환상도로가 대략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도로 너머의 지역은 대부분이 산림-공원 지대, 즉 녹지대로 지정되어 도시개발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모스크바
모스크바
지도
모스크바

지리

광활한 유럽권 러시아 평원의 가운데에서, 오카 강의 지류인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있는 이 도시는 모스크바 강과 그 지류들이 이루는 드넓으면서 극히 지대가 낮은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심장부에는 모스크바 시와 그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 주가 있다. 모스크바 강 유역의 아래쪽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결정암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대지의 향사곡 구조가 두껍게 나타나는데 이 향사곡은 지표면으로부터 깊이가 1.6km 이상의 화강암층이다. 한때 모스크바 시내로 흘러들었던 작은 하천들은 거의 모두 복개되거나 매립되었다. 오늘날 지상을 흐르는 지류로는 좌안(북안)의 야우자 강과 우안의 고로드냐 강 및 코틀로프카 강뿐이다.

모스크바 강
모스크바 강

기후

모스크바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서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강수량은 연평균 582㎜로 적당한 편이며 7월을 정점으로 여름에 최고치를 기록한다. 강수량 가운데 상당량을 차지하는 눈은 통상 10월 중순에 내리기 시작하여 보통 4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겨울은 길고 어둡다. 북극지방에서 북풍이 불어오면 기온이 떨어짐과 동시에 상대습도가 낮은 쾌청한 날씨를 보이기도 한다. 12~2월은 연중 가장 건조한 기간이다. 1월평균기온은 -10℃이지만 변화의 폭이 커서 최저 -42℃를 기록한 적도 있다.

겨울이 길고 봄은 상대적으로 짧으며 4월말부터는 기온이 크게 올라간다. 여름은 따뜻하며 그중 평균기온이 18℃인 7월이 가장 따뜻한 달이지만, 역사상 최고 기온이었던 37℃는 8월에 기록된 것이다. 여름에는 비가 자주 오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가을도 봄과 마찬가지로 짧으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1950년대말까지 대기오염의 정도는 계속해서 심해졌다. 스모그에 뒤덮이기 일쑤였고 이산화황의 농도 또한 높아졌다. 이에 유해 가스 방출을 규제하자는 대규모 캠페인이 벌어졌고 주연료로 석탄 대신 천연 가스를 쓰도록 조치함으로써 이 캠페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가지와 건축물

모스크바의 지도를 펼쳐보면 대략 삼각 형태를 이루는 크렘린과 그곳 주변의 직사각형 모양의 키타이고로트 및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심원들과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동심원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스크바 강이 시가지 사이를 북서-남서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이런 동심원과 방사상 구조는 이 시가 성장해온 역사적 단계를 나타내며 오늘날까지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요새의 성벽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든 불바르노에 환상도로와 사도보예 환상도로, 그리고 더 큰 원을 그리며 있는 모스크바 소(小)환상철도, 모스크바 환상도로 등은 이 시가 계속해서 확대되어왔음을 보여준다. 196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모스크바 순환도로가 이 시의 행정적 경계선을 이루었으나 그후로 도로 건너편에 있던 몇몇 대규모 그린벨트 지역이 이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와 소련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크렘린의 총안이 뚫린 붉은 벽돌벽과 20개의 탑은 15세기말에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붉은광장'으로 이어지는 스파스스카야(구세주) 탑은 주요탑 중의 하나로, 1491년 페트로 솔라리오가 건축했는데 그는 크렘린의 주요탑 대부분을 설계했다. 붉은광장 앞에 있는 또 하나의 탑인 상트니콜스카야 탑은 1491년에 세워졌으며 1806년에 재건되었다. 또다른 2개의 주요관문탑은 서쪽 벽에 있다.

크렘린 성벽 안에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와 궁전들이 있다.

대성당 광장(소보르나냐플로시차트) 주변에는 3개의 웅장한 대성당이 서 있는데, 이들은 15세기말부터 16세기초에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교회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중 흰 돌로 지은 성모승천 대성당(우스펜스키소보르)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475~79년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광장 건너편에 있는 성모영보 대성당(블라고베시첸스키소보르)은 1484~89년 프스코프 출신의 장인들이 만들었으며, 1547년 불에 탔으나 1562~64년 재건되었다. 1505~08년 재건된 대천사 대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기 전까지 많은 모스크바의 공후(公侯)와 러시아 황제들의 영묘가 모셔졌던 곳이다.

광장 바로 바깥쪽에는 백색의 화려한 이반 3세 종탑이 높이 솟아 있다.

이 탑은 16세기에 건설되었으나 1812년 훼손되어 몇 년 뒤 복구되었다. 종탑 아래에는 1733~35년에 주조된 거대한 차르 종(차르 콜로콜)이 있는데 한번도 울린 적이 없다. 종 가까이에 1586년에 만든 차르 대포(차르푸슈카)가 있고 그 옆에는 17세기 중엽에 지은 12사도 대성당(소보르드베나트차티아포스톨로프)과 총대주교 관저가 있다. 대성당 광장 서쪽에는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궁전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그라노비타야팔라타)은 1487~91년, 그뒤에 있는 테렘 궁전은 1635~36년에 세워졌다.

테렘 궁전 안에는 나사로 부활교회(보스크레세니예라자랴) 를 비롯해 이 궁전이 세워지기 이전인 1393년 무렵부터 지어진 오래된 교회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과 테렘 궁전 모두 1838~49년 황실 거처로 지은 크렘린 대(大)궁전의 일부가 되었다. 1844~51년에 세운 무기 궁전(오루제이나야팔라타)은 크렘린 대궁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은 차르 시대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크렘린의 북동쪽 벽을 따라 무기고(1702~36), 옛 의사당 건물(1776~88), 적군(赤軍) 사관학교(1932~34), 의회(1960~61)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모스크바 시에서 벌이는 모든 의식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크라스나야플로스차트)은 크렘린 동쪽 벽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레닌 영묘는 벽 바로 밑에 있다. 붉은광장 남단에 있는 대도(代禱) 교회(포크로프스키소보르)는 복자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하고 웅장한 건축양식을 보이는 이 대성당은 이반 4세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있던 타타르족(몽골족)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1554~60년에 세웠다.

붉은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 맞은편에 국영백화점(GUM)이 있고 광장 북단에는 국립역사박물관(1875~83)이 있다.

키타이고로트에는 오래된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들로는 니키트니키에 있는 삼위일체 교회(1628~34), 수태한 상트안나 교회(15세기), 예수 공현(公現) 대성당(1693~96) 등이 꼽힌다. 러시아 호텔 북면을 끼고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대귀족들이 살던 16세기의 저택, 16세기 옛 영국 대사관, 17세기의 성호 수도원을 비롯한 일련의 건물들이 보존되어 늘어서 있다.

사도보예 환상도로 안의 모스크바 중심부에는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 시의 모든 성장단계를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있다. 도심에 흩어져 있는 17세기 모스크바 바로크 시대의 훌륭한 유산들 가운데 1670~80년대에 지은 쿨리슈키의 모든 성인 대성당과 푸틴키의 예수성탄 교회(1649~52)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뒤 고전주의 시대에는 원주 홀이 딸린 옛 귀족의회 건물과 옛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이 두 건축물은 1780년대에 카자코프가 만들었다.

그밖에도 레닌 국립도서관의 일부로 쓰이는 우아한 파슈코프 극장(1785~86), 동양예술박물관의 전신인 루닌 하우스(1818~23), 한때 전시장으로 쓰였던 마네슈(승마학교, 1817), 웅장한 볼쇼이 극장(1821~24) 등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는 옛 러시아 양식의 재현과 함께 국립 트레티아코프 미술관(1906)과 야로슬라블 기차역(1902~04) 등이 세워졌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거리들이 넓혀지고 도심의 오래된 건물들을 헐은 자리에 대규모 사무실이나 아파트, 정부부서건물, 국내외 기구·조직의 본부, 호텔, 넓은 상점, 주요 문화 센터 등이 들어섰다.

사도보예 환상도로 밖의 중간지역은 대부분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개발되었다. 이곳에는 공장, 주요기차역, 화물 승강장들이 많으며 최근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최고회의 간부회 건물이 된 18세기 궁전을 비롯하여 고전주의 시대 최고의 건축물들도 있다. 남서쪽 모스크바 강 기슭에는 요새화된 수도원들 중 가장 유명한 16세기의 노보데비치 수녀원과 그 부속건물로 아름다운 스몰렌스크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총안이 뚫린 벽과 탑들로 둘러싸인 수녀원 안에는 모든 교회와 건물들 위로 종탑(1690)이 높이 솟아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소비에트 시대에 이르러 새롭게 개발되었다. 1940년대말부터 1950년대초는 도로변에 고층건물들을 세웠는데,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결혼 케이크'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 건너편에 있는 우크라이나 호텔과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단지 안의 거대한 빌딩도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다. 1960년부터는 도로를 넓히고 아파트 단지들을 세웠다. 사도보예 환상도로 외곽에는 공장 개발단지와 광범위한 주택 지역이 있으며 더 바깥쪽으로는 고층건물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건물들 1층은 모두 상점이며 도로는 넓고 가로수들이 줄줄이 서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들 사이에는 쐐기 모양(V자형)의 공터들이 있다.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메드베트코보에 있는 17세기의 대도 대성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옛 건축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시가 성장함에 따라 이전에는 교외였던 지역들이 시 안으로 편입되었는데, 이곳에는 대부분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들이 많다.

예수승천 교회(1532)는 뛰어난 건축물 중 하나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카잔 교회와 문루는 17세기 후반에 세워졌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공원에는 각지에서 수집해온 초기 러시아 양식의 목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디아코보 마을에는 사치스럽게 장식된 1557년의 세례자 요한 교회가 있다. 모스크바 환상도로 안쪽에는 가장 최근에 개발된 주택지 너머로 숲과 공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1960년 모스크바의 경계확장에 따라 시 안으로 흡수된 옛 공업 위성도시들과 주택단지들이 있다.

주민

모스크바 주민 가운데는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소련에 속했던 100개 이상의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들도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소수민족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은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타타르족 등이며 그밖의 소수민족으로는 카프카스 산맥에서 온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중앙 아시아 지역의 우즈베크인·투르크멘인·카자크인 등이 있다.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모스크바 태생이 아니고 이 시가 발전함에 따라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노년층 가운데는 스탈린 시대의 숙청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어려웠던 상황을 겪은 사람도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주택단지가 계속 건설됨에 따라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결과 모스크바 시민들의 생활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교외지역 거주자들은 출퇴근하는 데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지하철 노선이 새 주택지구까지 차츰 연장되고 있지만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에 적어도 2시간씩은 길에서 보내야 하며 중심부에 있었던 지역공동체들은 새 주택단지 조성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시 중심의 인구밀도는 교외지역보다 여전히 훨씬 높다.

경제

모스크바는 그 자체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업 중심지일 뿐 아니라 주변에 형성된 광범위한 공업지역의 핵심부이기도 하다. 시 자체의 공업으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숙련된 노동력을 요구하는 업종이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원료 자체를 다루는 업종은 한정적으로 행해진다.

기계류(자동차·트럭·볼베어링·기계공구·정밀기계) 제조업 및 금속 세공업이 그중에서도 큰 몫을 차지하는데, 산업 노동력의 1/2 이상이 이 2가지 업종에 종사한다. 그밖에 섬유, 화학관련 제품, 소비재(식품·신발·피아노) 등의 제조업과 목재가공업·건축업·출판업·인쇄업도 중요한 산업으로 꼽힌다. 한편 많은 공장들, 특히 도시환경을 크게 오염시켰다고 판단된 공장들이 모스크바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도심 밖으로 옮겨졌으며 시내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서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매년 생산고를 유지·증대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은 상공부의 실질적인 행정은 이 계획과는 다르게 이루어졌다. 몇몇 공장들이 시외로 옮겨갔지만 산업체 이전은 계획처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심지어 공장을 확장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고 컬러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흐로모트론사처럼 시내에 새 공장이 들어선 경우도 있었다. 이 시에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편이며 고도로 전문화된 제품을 만드는 오래된 업체들이다.

이 시는 여러 지역에서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시내에 있는 발전소들은 근교에 건설된 대규모 가스 저장시설에서 공급되는 천연 가스를 원료로 작동된다. 그밖에도 원자력발전소들과 볼가 강의 수력발전소들에서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러시아에서 제일 큰 도시이자 중심지인 이 시는 러시아 최대의 유통 중심지로, 주요 보험회사와 은행들의 본점이 들어서 있다. 시내의 소매상점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대도시들과 비교해보면 상품의 공급이 매우 부족해 물품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주요 식료품가게들과 백화점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규모가 크다. 중세 무역시장들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국영백화점(GUM)이 가장 유명한 백화점인데 식료품을 제외한 시 전체 소매상품 매매량의 1/10 가량을 맡고 있다. 지역마다 쇼핑 센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건물의 1층에 상점들이 흩어져 있어 쇼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식당이 수없이 많으나 대부분 직장에 딸린 간이식당 형태로 대부분이 카페, 뷔페 식당, 스낵바 등도 함께 갖추고 있다. 국제적인 명성답게 러시아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지만 수년 동안 이들을 수용할 만큼 호텔의 공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1970년대말부터 코스모스, 인투리스트, 국제무역 센터 내의 메즈두나로드나야 제1·2 호텔 등을 비롯해 몇몇 호텔이 새로 건설되었다.

교통

자가용 소유자가 드물어 대중교통 수단인 메트로폴리탄(메트로 지하철)·버스·시가전차·무궤도 전차에 대한 시민들의 의존도가 아주 높다. 메트로는 모스크바 시의 도로형태를 감안하여 건설되었으며 정교하게 건축된 역들로 유명하다.

이 시는 국내 철도망의 중심지인데 특히 화물 수송은 이 철도망을 통해 주요하게 이루어진다. 간선철도들을 통해 주요 인구 밀집도시와 공업도시, 나아가 동유럽 및 중앙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다. 교외 통근자들은 모스크바 소환상철도(1908)와 모스크바 대환상철도를 이용하는데 이 두 철도는 방사상으로 퍼져나가는 간선철도들과 연결된다. 여객열차들이 러시아 전역과 유럽으로 운행된다.

이 시는 또한 중요한 하항으로서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는 운하와 항양선들이 다니는 모스크바 운하가 있으며 볼가 강이 이루는 많은 수로들을 통해 유럽권 러시아와 면하는 모든 바다와 통해 있다. 국내 항공망의 중추인 이 시의 북쪽 약 38km 지점에는 국제공항인 셰레메티예보 공항이 있다.

정치와 행정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모스크바에는 11개의 행정구역이 설정되었으나 1960년 시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6개의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그후 정책적으로 대형 건축물들을 세우고 도심에서 교외로 인구를 이주시키면서 1968, 1976년에 또다시 새로운 행정구역들이 생겨나 1976년에는 그 수가 30개로 늘어났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더 많은 영역이 합병되면서 32개로 늘어났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마다 인구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일수록 면적도 넓고 인구수도 많아지는 경향을 띤다. 각 행정구역에서 뽑힌 대표자들로 모스크바 시 당국하의 시 의회가 구성된다. 이들의 주요업무는 중앙정부에서 나오는 모스크바 시의 연간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시가 '연방에 종속된' 상태이므로 시 의회는 행정구역보다는 러시아 연방 정부에 대해 책임을 진다.

소련 정부청사가 이 시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행정업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국가 기구·조직뿐 아니라 정부부처, 외국 대사관들도 이곳에 있다. 이전에는 크렘린이 정부 행정의 중심무대로서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대회 등의 회의를 개최했지만 정부부처 건물들은 도심에 널리 흩어져 있다. 외무부는 스탈린 시대에 사도보예 환상도로변에 지은 초고층 건물에 있으며 몇몇 부서들은 프로스페크트칼리니나에 새로 지은 고층 빌딩 안에, 그리고 프로스페크트칼리니나의 외곽에는 각료회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외국 대사관들은 남서쪽 교외 레닌 구릉으로 옮겨졌지만 도심에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모스크바 시 당국은 약칭인 모소베트(Mossovet)로 흔히 알려진 모스크바 인민대표 소비에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와 같은 인민대표기관의 형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5년 러시아 혁명중이었다. 1917년 노동자와 군인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소비에트를 따로 갖고 있다가 10월혁명이 끝난 뒤 이 두 평의회를 하나로 합쳤다. 모소베트는 고르바초프 집권 시절에 선거개혁이 단행되고 나서야 소련 공산당의 지도·통제에서 벗어났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는 2년 6개월마다 선출되는 1,0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시 당국의 실질적 행정업무는 이소폴콤(Isopolkom)이라는 모소베트의 실행위원회가 관장했다. 모소베트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구성된 이 기구는 교통·건강·문화·교육·산업·무역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여러 부서와 정부기관들을 감독했다. 최근에 일어난 대변동에도 이 부서들은 여전히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각 행정구역은 독자적인 의회와 실행위원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의회들과 모소베트 사이에는 당연히 갈등이 존재했다.

1987년 및 그후에 잇달아 이루어진 선거개혁으로 지역 공산당 사무국의 역할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결과 지역 소비에트들이 그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1990년 보리스 옐친이 공산당에서 탈퇴했고, 그를 따라 모스크바 시장도 탈당했다. 그뒤 계속된 선거에서 개혁주의자들이 승리하여 모소베트를 장악했다. 초기 개혁조치의 하나로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모스크바의 모든 주택 채권을 평의회가 소유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주민들에게 그 소유권을 넘겨주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이어서 이름바꾸기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많은 거리·공원·지역들이 1917년 이전의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

교육

시의 규모와 정치적 중요성을 감안하더라도 교육기관이 지나치게 많이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학령 전 아동들을 위한 탁아소·유치원 등이 주로 직장에 딸려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유로이 일할 수 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일반 고등학교,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 외국어학교, 기숙학교 등이 있다.

이 시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러시아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든다. 학생 대다수는 러시아 국적을 가졌으나 러시아의 모든 소수민족 출신들도 골고루 모여 있으며 외국 유학생도 상당히 있다. 1755년에 설립된 모스크바 M.V. 로모노소프국립대학교가 가장 우수한 고등교육기관으로 꼽히며 2번째로 손꼽히는 곳은 파트리사루뭄비인민친선대학교로 전세계 개발도상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1960년에 창립된 이래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온 많은 학생들을 수용했다.

전문 고등교육기관들로는 시 북쪽에 있는 모스크바 티미랴체프 농업 아카데미와 모스크바 P.I.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학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음악학교에서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음악가들을 배출해왔다. 많은 교육기관들이 특수 산업체를 목표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역점을 둔다. 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행해지는 방대한 연구 외에도 과학 연구기관이 매우 많은데 그중 과학 아카데미가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의학·교육학·농학을 연구하는 아카데미들도 있다.

과학기관들은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를 하며 모스크바의 산업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연구단체는 설계기관과 많이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도서관들 중 하나인 V.I. 레닌 국립도서관은 모스크바의 대표적 도서관이다. 이밖에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전문 도서관들도 많이 있다.

사회와 문화

모스크바 시민들은 보건문제는 가까이에 있는 수백 개의 진료소·의료시설·치과·조산소 등에서 해결한다. 가장 유명한 병원은 1911년에 개원한 보트킨스카야 병원이다. 산부인과·정신과·결핵 병원 등은 매우 전문화되어 있으며 많은 전문의학 연구기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노동자나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월평균임금은 공공복지 기금에서 나오는 수당으로 상당히 높다. 임금 수준은 근무조건이나 업종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업무형태, 즉 업무의 과중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건축업·운수업·광산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평균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다.

정부예산·기업·노동조합 등에서 나오는 공공복지 기금은 물질적·사회적으로 노동자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쓰이며 특히 무료 의료혜택, 교육, 연금, 장학금 등에 많이 투자된다. 옛 공산당은 사무직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 사이의 차이를 줄이고 인종집단간의 물질적·문화적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상교육, 노동자들의 문화·기술 수준의 향상, 기계화·자동화 등을 추진했다.

모스크바에는 극장, 콘서트 홀, 박물관, 미술관 등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국립 볼쇼이 극장(1825)과 말리 극장이 특히 유명하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대표적인 연극 극장으로 1898년 배우·감독·제작자였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와 극작가 겸 연출자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함께 세웠다(→ 모스크바 예술극단).

바흐탄고프 극장과 국립중앙인형극장도 주요한 극장으로 꼽힌다. 극장 출신의 연극인 가운데 능력있는 사람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연극협회에 속해 있다. 콘서트홀도 여러 개 있는데, 이중 차이코프스키 콘서트 홀과 음악학교 내에 있는 2개의 콘서트 홀이 특히 유명하다.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모스크바풍 민속무용곡과 합창곡 연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영화는 시민들이 즐기는 대중문화 수단 가운데 하나로 영화를 상영하는 수많은 클럽과 문화단체들까지 포함하여 영화관이 무척 많다.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들도 모스크바에 본국을 두고 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가운데는 국제적인 수준의 것도 여러 개 있다. 세계적인 미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푸슈킨 미술박물관과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곳들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856년 미술품 감정가인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미술품을 바탕으로 하여 문을 열었는데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몇몇 작품들을 비롯한 훌륭한 성상을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크렘린 궁전 안에 있는 무기박물관과 붉은광장의 국립역사박물관도 유명하다.

모스크바는 책·신문·잡지 등의 출판 중심지이기도 하다. 주요출판사로는 소베츠카야로시야와 프로그레스사를 들 수 있으며, 모스크바대학교 부속 출판사가 있다. 모스크바에서 간행되는 문학잡지로는 〈노비 미르 Novy Mir〉·〈오고뇨크 Ogonyok〉 등이 있으며, 〈아르구멘티 이 팍티 Argumenti i Fakty〉는 러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이다.

이 시에는 공원과 공공장소가 많다. 모스크바 강 우안을 끼고 있는 고리키 중앙 문화공원은 도심에서 가장 가깝고 유원지가 있다. 도심 북쪽에는 도시 여러 곳에 있는 식물원들 중 하나인 과학 아카데미 식물원과 모스크바 티미랴제프 농업 아카데미 부지가 있으며, 서쪽에는 세계적 수준의 모스크바 동물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역사

모스크바는 수도사들이 기록한 1147년도 연대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그해 4월 4일 수즈달의 공(公)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돌고루키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인 노브고로트 세베르스키 공을 위해 '대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라 1147년 4월 4일을 오래 전부터 이 시의 전통적 기원 날짜로 여기고 있지만, 신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정착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혼란기는 방어시설을 불가피하게 하여 돌고루키 공은 1156년에 처음으로 참호를 두른 요새를 세우고 흙으로 방벽을 쌓은 후 그 위에 목재 벽을 쌓고 방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크렘린의 기원이다. 오늘날 크렘린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성채'나 '가파름'이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주장이 있는 한편, 건축용으로 알맞은 목재를 공급하는 침엽수라는 뜻으로 쓰였던 초기 러시아어 '크렘'(krem)이 그 기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무역 중심지가 크렘린 동쪽지역에 들어서는 등 이 시는 곧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주요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러시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1236~40년 몽골의 대(大)침략 당시 함락당해 불탔으며, 공들은 몽골족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수모를 겪었다. 1293년에 몽골족에게 다시 약탈당했으나 곧 복구되었다. 무역·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오래된 중심지들을 앞지르게 되었다. 또 하계와 연수육로들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았으므로 유럽권 러시아 전역에 무역로를 틀 수 있었다.

시 동쪽지역은 러시아 북쪽에 비해 토질이 좋아서 농업이 발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유한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1326년 러시아 정교회의 대교정(大敎正)이 관구를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김으로써 이 시의 권위는 매우 높아졌다. 그뒤로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왔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되자 제3의 로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국은 곧 블라디미르 공국을 합병했고 모스크바의 공들은 점차 주위에 있는 다른 러시아 공국들에게로 지배권을 넓혀갔다.

또한 모스크바는 몽골의 영향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진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모스크바와 몽골 간에 팽팽하게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1378년에 몽골족이 먼저 공격해왔으나 모스크바의 군대가 승리했으며, 1380년에 드미트리 공은 몽골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367년 크렘린을 확대·강화했으나 1382년 전열을 재정비하고 침략해온 몽골족을 막아내지는 못하여 결국 함락·약탈당했다. 그러나 1408년 몽골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이를 격퇴시켰다.

모스크바는 주위 공국들을 계속 흡수하여 크기나 중요도 면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1326년 크렘린 내부에 최초의 석조 건물인 성모승천 대성당이 세워졌다. 공후와 대귀족들의 저택·수도원·교회 등도 들어섰다. 성벽 밖의 크렘린 동쪽지역에 형성된 상업·수공업 구역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키타이고로트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특히 1478년에 노브고로트를 합병한 후 모스크바는 통일된 러시아의 중심지로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대공 이반 3세의 통치기간중에 크렘린의 재확장, 성모승천 대성당의 재건, 아름다운 성모영보 대성당의 건축, 대천사 대성당의 재건, 파세츠 궁전, 이반 3세 종탑 등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 영역이 계속 커짐에 따라 성벽 또한 더 바깥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크렘린과 키타이고로트를 둘러싼 반원형 지역이 형성되었고, 이 지역은 벨리고로트('하얀 도시'라는 뜻)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벽을 다시 쌓기는 했으나 재난과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547년 2차례의 화재로 대부분의 지역이 잿더미로 변했다. 16세기 중엽 뇌제 이반 4세는 타타르족(몽골족)들의 카잔 한국(1552)과 아스트라한 한국(1556)을 정복했으나 1571년 크림 반도에서 온 타타르족에게 점령당하여 크렘린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태워졌다. 이당시의 연대기에는 20만 주민 가운데 3만 명만이 이 화재에서 살아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1년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이 더 강도가 높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스크바의 완강한 대항에 밀려 패배했다.

이 싸움에서는 벨리고로트를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새 성벽이 큰 몫을 했다. 벨리고로트 너머로 확장된 시 영역은 처음에는 스코로돔이라고 불렸으나 후에 흙으로 된 도시라는 뜻의 젬랴노이고로트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정세가 크게 안정되면서 상업·수공업이 번창했고 특정업종이 전문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역들이 생겨났는데, 이 구역들은 오늘날 거리나 구역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차르 시대에는 황실과 황실 소속 귀족들이 부유한 상인들을 보호·후원했으며 점차 대귀족들이 키타이고로트를 장악하게 되었고 수공업자 및 상인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결과 크렘린에서는 정치적·종교적 기능만이 행해지고 상업활동은 크렘린과 키타이고로트 사이의 붉은광장에 있는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에는 다양한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붉은'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크라스나야라는 단어에는 '아름다운'이라는 뜻도 있는데 오늘날 붉은광장은 원래 이 뜻으로 지어졌던 이름이다.

서유럽(특히 영국과 네덜란드), 중앙 아시아, 자카프카지예, 페르시아, 흑해 연안 등의 지역들과 매우 활발하게 교역을 행했으며 주요거래품목은 모피였다. 외국 상인들은 네메츠카야슬로보다('독일인의 구역'이라는 뜻)에 거주했으며, 서적 교류가 늘어나고 1553년 인쇄소가 생김으로써 문화가 발전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혼란시대'를 맞아 이 도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다름없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의 통치기간중 1601~03년에는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였다.

(가짜 드미트리)1605~12년 모스크바·크렘린 곳곳에서 폴란드인들과의 소규모 충돌이 자주 발생했으나 1612년 10월 폴란드인들이 항복하여 분쟁은 마감되었다.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 황제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평화가 다시 찾아왔고 경제도 한층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폭동과 소요가 잦았다. 장인·노동자·상인들도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남부에서 스텐카 라진이 이끈 대반란(1667~71)의 영향으로 모스크바도 동요하자 1671년 이 도시에서 라진을 처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소요가 일어나면 러시아의 전통적 민병대 스트렐치(Streltsy)가 진압에 나섰는데 대제 표트르 1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698년에 오히려 이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대대적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빈번한 소요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꽃을 피웠다.

1687년 키타이고로트에 있는 자이코노스스파스키 수도원에 부속으로 러시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슬라브어·그리스어·라틴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701년 표트르 대제는 수학·항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70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1703년 표트르 1세는 핀란드 만 연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712년에 '서구적'이면서 진취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새 도시로 수도를 옮겼다.

이에 귀족들뿐만 아니라 상인·장인들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갔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인구 및 건축물 증가 기세가 잠시 꺾였다. 그러나 표트르 1세가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자 새 공장들을 세우고 기업가들도 뒤따라 모스크바에 투자를 하자, 표트르 1세의 재위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수도의 지위를 잃음으로써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도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로모노소프)1755년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대학교(지금의 모스크바 M.V. 로모노소프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786년 대학교 내에 의학부가 신설되었다. 1737, 1748, 1752년에 발생한 화재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 자리에 기아코모 쿠아렝기, 바실리 바제노프, 마트베이 카자코프, 바실리 스트소프 등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훌륭한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다.

한편 공업이 발전하여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시내에 300여 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그중 1/2이상이 직물공장이었다. 1811년에는 인구가 27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그해 9월 7일 러시아 최고사령관 M.I.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길목인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에 맞서서 15시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모스크바에서 군대와 시민들을 철수시켰다.

프랑스군은 1주일 뒤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시가지 건물들의 2/3 이상이 파괴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유격대들이 계속해서 소규모 전투를 걸어오고 식량과 거처할 곳이 부족해지자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19일 군대를 철수하여 비참한 귀로에 올랐다. 1813년 모스크바 시 건설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도심을 부분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등 대규모 재건계획을 세우고 이에 착수했다.

공업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으며 19세기말까지 계속 성장곡선을 그렸다. 1837년에 모스크바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다.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철도 개통과 함께 철도시대가 시작되고 1861년 농노 해방이 단행되자 노동인구의 유동이 현격하게 늘어났는데 특히 시골에서 이주해오는 농부들이 많아졌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철도 교통의 중추가 되었으며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1890년대에는 중공업·금속가공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공장들이 많이 세워졌다. 1897~1915년에 인구가 2배로 늘어 198만 3,700명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에 공공단체나 부유한 개인들이 '옛 러시아' 양식과 현대양식을 골고루 흉내내어 화려한 건축물들을 세웠는데, 시청(후에 레닌 중앙박물관)·국립역사박물관·국영백화점 등이 대표적 건물들이다.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소요사태와 파업의 횟수가 늘어났으며 혁명을 꾀하는 많은 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을 전개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모스크바에서 소규모 소요가 일어났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17년 모스크바 시에서 노동자 및 병사 대의원 평의회가 발족되었으나, 이 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7일(구력 10. 25)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이 도시에서도 곧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관학교 소속 병력이 크렘린에서 얼마 동안 버텼으나 결국 11월 16일(구력 11. 3) 항복하여 볼셰비키 권력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1917년 러시아 혁명). 1918년 3월에 레닌이 모스크바를 소련의 수도로 정하고 정부청사들을 옮김으로써 이 도시는 옛 지위를 다시 찾았다.

또한 1922년 12월 30일 공산당이 권력을 잡고 전(全)소련 연방 의회가 볼쇼이 극장에서 회의를 열어 소련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창설을 입법화함으로써 모스크바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혁명 후 내란이 계속되었던 시기에는 소련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식량부족과 인구감소(1920년에 102만 7,300으로 감소), 공업 생산력 저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러시아 내전). 그러나 그후 몇 년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이 정착되고 평화가 찾아오자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1928년 이래로 5개년 계획들이 진행되면서 공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모스크바의 공장들과 노동력은 소련 공업화의 발판이 되었다. 1926, 1939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1959년까지의 시 경계선 내의 인구 수는 또다시 2배로 늘어 202만 9,425명에서 418만 2,916명이 되었다. 투자는 공업부문에 우선적으로 행해졌고 주택건설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주택수는 늘지 않고 가구당 사람들의 수는 지나치게 많아져서 인구밀도가 극도로 높아졌고 생활수준은 전반적으로 낮았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사회구조를 완전히 개편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은행을 국영화하고 사유재산제를 폐지했으며, 교회재산을 압수하고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했다. 또한 공산당 1당 체제를 확립했으며 고도의 중앙집권을 이루어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1928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소련은 몇몇 경제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며 풍부한 원료·연료·동력자원 등을 활용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으며, 모스크바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말 독일이 크렘린에서 40km도 채 안 떨어진 시 외곽까지 접근하자 공장과 정부기관들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해 10월 20일 독일군이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철수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공중폭격을 당하면서도 전차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물을 설치하고 곳곳에 인원을 배치했다. 12월 6일 소련은 필사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시를 수복했다. 종전 후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난 2년 뒤인 1947년에는 모스크바 시의 설립 800주년을 맞아 축하행사가 열렸다.

종전 후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져서 주택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50년대에는 절정에 달했다. 1959년에는 사도보예 환상도로 안쪽의 인구밀도가 ㎢당 5만 1,000명을 넘어섰다. 흐루시초프의 집권 당시 대규모 건설사업이 이루어졌다.

대부분 단층이고 목재로 지어졌던 옛 주택들을 철거하고 크렘린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광범위하게 조성했다. 또한 도심 재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고층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1935년에도 대규모 개발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에 실시한 개발계획은 훨씬 규모가 컸으며, 이 계획에 따라 인접 위성도시들이 모스크바 시로 합병되었다. 한편 이 계획은 도시개발을 모스크바 환상도로 안쪽으로 제한했고 주거·공업 지역과 녹지대 등을 세심하게 배치했다. 이 계획의 시행으로 주택난을 해소하고 교통혼잡을 줄이며 도심의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이르자 원래 예상보다 시 성장이 초과되어 1980년대에 들어서 환상도로 바깥 부분까지 시가지를 확대하는 새 계획이 마련되었다.

모스크바(Moskva)
모스크바(Mosk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