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다른 표기 언어 motion picture , 映畵

요약 연결된 일련의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해 재현시킨 움직이는 영상 및 그 기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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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
    1. 개요
    2. 사진
    3. 소리
    4. 색채
    5.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2. 영화제작과 시나리오
    1. 개요
    2. 시나리오
    3. 감독
  3. 영화 제작방법
    1. 세트와 미술감독
    2. 조명
    3. 카메라
    4. 소리
    5. 음악
    6. 색채
    7. 와이드 스크린
    8. 편집
    9. 제작 기구
  4. 교육영화
  5. 애니메이션 영화
  6. 기록영화
  7. 영화제와 영화상
  8. 영화예술
  9. 초기 영화예술
    1. 개요(1885~1908)
    2. 프랑스
    3. 영국
    4. 미국
  10. 영화예술의 확립기
    1. 개요
    2. 프랑스
    3. 이탈리아
    4. 미국
  11. 무성 영화예술의 완성
    1. 개요
    2. 프랑스
    3. 스웨덴
    4. 독일
    5. 소련
    6. 미국
  12. 토키 초기영화
    1. 개요
    2. 미국
    3. 프랑스
    4. 독일
    5. 영국
    6. 소련
    7. 이탈리아
  13. 토기 혁신시대의 영화
    1. 개요
    2. 이탈리아
    3. 미국
    4. 프랑스
    5. 영국
  14. 대형 영화시대
    1. 개요
    2. 미국
    3. 프랑스
    4. 이탈리아
    5. 스웨덴
    6. 덴마크
    7. 영국
    8. 동유럽
    9. 소련
    10. 독일
    11. 라틴 아메리카
    12. 인도
  15. 한국의 영화
    1. 개척기
    2. 발성영화기
    3. 8·15해방 직후
    4. 6·25전쟁 이후
    5. 중흥기
    6. 전성기
    7. 1970년대 이후

지금은 영상에 음향을 포함시킨 뜻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카메라와 마이크로폰이 창출하는 현실의 신비와 영상 및 음성의 몽타주에 의해 독자적인 영화 예술이 탄생했는데, 즉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다. 영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유력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오락의 주체가 되어 막대한 제작비와 흥행상의 요청으로 산업화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발달과 보급은 영화의 존재 형태에 큰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

영화의 역사
영화의 역사
개요

1894년 4월 14일 영화는 어느 발명가의 이론과학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에디슨키네토스코프가 그것이다. 이것은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 1895년말에 런던·파리·뉴욕에서 각종 영사기가 완성되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루이·오귀스트)는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형식의 최초의 영화였다.

곧이어 에디슨이 발명한 비타스코프가 1896년 4월 23일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흑백의 그림자로써 살아 있는 움직임을 재현시켜 보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대하여 갑자기 높아진 대중의 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75년에 걸친 국제적 규모의 연구·실험·발명의 성과가 축적된 것이었다. 운동중인 물체의 광학적 특징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피터 마크 로제로부터 시작되어 존 허셀, 마이클 패어리 등에게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촉진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조제프 앙투안 플라토, 오스트리아의 지몬 리터 폰 슈탐퍼 등이 운동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련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1853년 오스트리아의 폰 우하티우스는 원반과 환동의 그림을 결합해서 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영사했다. 플라토와 슈탐퍼의 연구는 조이트로프의 발명에 공헌했다. 이것은 회전하는 원통 틈새로 들여다보면 속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에밀 레노가 발명한 같은 원리에 의한 프락시노스코프는 더욱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기계를 개량했고, 1892년에는 파리에서 테아트르 옵티크('시각 극장')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백 개의 그림을 연결해 15~20분 길이로 편집한 이야기 필름이었다. 1900년까지 레노는 이러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는데, 진짜 영화와의 경쟁에는 이기지 못하고 흥행을 중지했다.

사진

영국에서 로제가 시각적 성질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실용적인 사진기술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다.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조잡하지만 연속성 있는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루이 다게르의 협력을 얻어, 1839년에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사진술을 개발했다.

또 그해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은 근대 사진술의 기초가 된 네거와 포지티브에 의한 인화법을 개발했다. 1860년 미국의 콜먼 셀러스는 처음으로 사진을 조이트로프의 원리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 이듬해 키네마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방법을 응용하여 1870년에 헨리 레노 헤일은 파즈마트로프의 영사를 1,600명의 관객에게 공개했다.

1872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기사 존 D. 아이잭스와 공동으로 셔터가 장착된 12대(후에 2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1벌의 장치를 고안하여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을 찍었다. 그후 셔터 장치가 개량되어, 1877년에는 동작이 빠른 피사체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노광(露光) 속도 1/2,000초라는 단시간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발전상의 다음 단계는 고속의 속사 사진이 가능한 단일 카메라의 개발이었다(모션 픽쳐 카메라). 프랑스의 에티엔 쥘마레가 1882년에 발명한 '사진총'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것이었다.

사진총이란 라이플 총 모양으로 윤동(輪胴)에 인화지판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겨 연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그후 10년간 그는 조수 조르주 도메니노와 함께 일련의 실용 카메라의 개발을 계속하여, 1888년 크로노포토그래프를 발명, 이에 의해 매초 60매의 사진 촬영이 가능해졌다.

1885~95년 10년 동안에 전세계의 발명가들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에 주의를 돌렸다.

영국의 윌리엄 프리스 그린을 비롯한 몇 사람은 1890년을 전후해 촬영기·영사기 등의 특허를 땄지만, 상업적 성공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에디슨은 조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과 함께 띠 모양의 사진 필름 등의 실험 고안에 힘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딕슨은 조지 이스트먼이 1889년에 제조하기 시작했던 질화면(窒化綿)을 기초로 한 사진용 필름을 채용하여 1890년에 키네토그래프를 개발했다. 그후 에디슨이 그것을 다시 키네토스코프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체로 높이 122cm, 너비 61cm 크기의 기계로 필름은 내부의 확대경과 광원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 셔터에 의해 화면이 순간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필름의 길이는 50피트가 한도이고, 화상은 매초 48컷의 속도로 들여다보이는 구멍의 앞을 지나가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프레임). 화면수는 뒤에 매초 16컷으로 줄었지만 이것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토키의 경우는 매초 24컷).

필름의 너비(35㎜)나 화면의 형상, 필름을 보내는 스프로킷(필름 구멍과 맞물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원형의 톱니바퀴) 등도 대형 화면이나 대형 필름이 출현하는 1952년까지는 표준이었다.

키네토스코프는 실험실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1894년 4월 14일 처음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그것을 공개하는 축음기관이 개관했다. 가을에는 몇 대가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윽고 유럽에서도 영화는 최종 발전단계를 맞이 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는 로버트 W. 폴이 포터블 카메라를 고안했고, 독일에서는 스크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비오스코프를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레노의 테아트르 옵티크의 투영화상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영사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고안하여 1895년 2월 13일 특허를 받았다(오귀스트 뤼미에르, 루이 뤼미에르). 이것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것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즉시 유럽으로 퍼졌고, 이듬해에는 미국에까지 침투하여 에디슨의 경쟁 상대가 되자 에디슨 자신도 다른 발명가에 대한 대항 때문에 키네토스코프 영사기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드빌 레섬, W.K.L. 딕슨, 잔 릴로이, 유진 로스트 등도 각기 독자적인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표했고, 1895년 토머스 아멧이 현대 영사기의 원리를 고안했다.

이것은 연속되는 영상을 정지시키고, 그동안은 영상이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도 많은 광선을 받을 수 있는 몰타 십자형의 화면전송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 필름에 구멍을 내어 필름이 영사기 속을 통과할 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점에서 에디슨이나 뤼미에르의 영사기와는 달랐다(아멧 루프). 이것이 후에 비타스코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 에디슨의 영사기로 공개된 것은 이 아멧의 기계장치이다.

초기 영화는 미국·유럽 모두 50피트의 필름을 사용했고, 상영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모든 발명에 전기의 응용을 생각하고 있었던 에디슨은 거의 피아노만한 전지로 움직이는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제작했고, 이것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 호송차'라고 일컬어졌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것은 타르 칠을 한 종이를 바른 조그마한 스튜디오로, 거기에서 연예·서커스 같은 구경거리와 뉴욕의 인기있는 연극 따위가 상연되었다. 한편 유럽인은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있는 수동식 카메라에 만족했으며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는 행진이나 열차의 도착, 도시의 군중 등 현장감이 강조되었다(기록영화). 이 특징은 영화의 특성과도 잘 어울려서 에디슨도 그뒤를 따랐다.

연예장의 구경거리의 하나로 등장한 영화는 영사기의 능력에 맞추어 필름의 길이는 1,000피트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연예나 구경거리 1편의 상연시간과 같았으며, 이 길이가 현재 1권(305m)의 기준이 되었다(릴).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순한 움직임의 신기함만으로는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보다 야심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를 찾게 되었다.

최초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스토리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7년 호라만이 전문 배우와 본격적인 세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3권짜리 수난극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카메라 트릭을 주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여 도처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1900년 직후 이른바 '브라이튼파'의 활약이 활발해져 즉각 창조적인 영화 제작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토리 영화의 진정한 탄생은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S.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로 시작된다. 고작 8분 정도의 1권짜리였지만, 거기에는 현대의 편집기술의 싹이 보였고, 그 급속한 인기상승에 의해 여기에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예술·산업의 2분야에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소리

영화 초기부터 발명가는 영사에 소리를 접합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디슨은 처음부터 카메라는 축음기를 위해 제작한 부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온 고몽이 1900년 이전에 콩스탕 코크랑이나 사라 베르나르 등의 명배우가 출연하는 단편 토키 영화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에 축음기의 음성을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많은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바였는데, 에디슨도 1권짜리 토키를 몇 편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로스트가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내고 전시했다.

1912년경 영화 흥행은 니클오디언의 단계를 끝냈다.

극장이 커짐에 따라 토키 영화는 소리의 증폭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로스트의 기계나 초기의 축음기로는 홀 구석구석까지 퍼질 만한 충분한 음량을 낼 수는 없었다. 이 결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리 디 포리스트가 개발한 셀레늄 진공관을 사용한 오디오 증폭기에 의해 해결되었다(진공관 검파기). 제1차 세계대전 후 필름에 소리를 옮기는 방법이 개발된 데서부터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에서 뒷날의 폭스 무비턴이 생겨났다(포노필름). 한편 바이타폰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인 〈돈 주앙 Don Juan〉이 1926년에 워너브러더스사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듬해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일약 토키 시대로 돌입, 얼마 후 디스크식 음향장치는 필름식 음향장치로 대체되었다.

1930~52년은 기술혁신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영화의 음성기술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52년 시네라마의 등장은 스피커를 스크린 뒤로부터 해방시켰고, 해저드 리브스가 개발한 7채널 방식에 의해 보다 충실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등장한 시네마스코프에는 경제적 이유로 퍼스펙트 A. 사운드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색채

채색되어 움직이는 화상에 대한 탐구도 영화시대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20세기초까지는 필름의 화면마다 손으로 채색을 했는데, 프랑스의 파테사는 1905~30년경 반자동으로 인쇄해넣는 방식(형치법[stencil system])을 채택하고 있었다(스텐실). 1906년 영국에서 찰스 어번, G. 앨버터 스미스가 2색법의 키네마컬러의 특허를 땄는데 촬영과 영사 때 렌즈 앞에 빨강과 녹색의 회전 필터를 붙여 그것을 통해 발색시키는(필름 속도는 1초에 32컷)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매우 불완전했다. 1915년 허버트 캘머스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 팀에 의해 개발된 테크니컬러(선명한 색채)는 3색분해법에 의한 컬러 사진 재판법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그 방법에 의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 Becky Sharp〉(1935)는 예술적인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의 흥행 성공으로 컬러 영화 시대의 도래가 확실해졌다.

테크니컬러에 이어 다층식 발색법에 의한 미국의 코닥컬러, 독일의 아그파컬러, 이탈리아의 퍼라니아컬러가 실용화되었다. 다층식 발색법은 촬영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스트먼 코닥과 안스코 계통은 표준형일 뿐만 아니라 대형영화의 제작도 용이하게 했다.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1947년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미국의 영화 산업도 1948년말경부터 관객을 텔레비전에 빼앗기자 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1952년 대형영화 시네라마입체영화 3D(three dimensions picture)를 개발했다(영화관, 영사막). 3D 영화는 관객이 색안경을 껴야 했으므로 흥행에 실패했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3벌의 필름을 이어 합친 만곡된 대화면과 6개의 사운드 트랙으로 완전한 입체음향을 재현시킨 시네라마는 그 입체적인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1952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대형영화 시네마스코프도 발표되었다. 이것은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3의 스크린으로 3개의 입체음향장치를 가졌으며, 제1회 작품 〈성의(聖衣) The Robe〉(1953)의 대성공 이후,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유럽·아시아에까지 보급되었다. 얼마 후 시네라마와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효과를 노린 비스타비전에 기타의 여러 방식이 서양 여러 나라에 등장했다.

또한 〈오클라호마! Oklahoma!〉(1955)는 70㎜ 필름을 사용한 토드 AO(Todd-AO) 방식의 첫작품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이래 표준이었던 35㎜로부터 영화용 필름의 크기는 대폭적으로 바뀌었다. 이어 테크니컬러가 개발한 테크니라마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형화면이 등장했으나, 모두가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1954), 토드 AO 등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영화제작과 시나리오

개요

장편영화의 대부분은 극영화이고, 극영화는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하여 제작된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어떻게 제대로 스크린에 옮길 것인가가 극영화 제작상의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영화제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 먼저 시나리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나리오

시나리오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말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예산이나 흥행에도 신경써야 하며, 동시에 대본에 책임을 지는 제작자 밑에서 일하게 된다. 시나리오는 각본가와 감독의 협력에 의해 준비된다. 이러한 방식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관행으로 행해져 왔고, 미국에서도 독립 프로덕션의 증가에 의해 차츰 일반화되어가고 있으며 시나리오 작가가 감독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

시나리오는 보통 개요·경개(梗槪)·각본의 순서로 쓰인다.

개요는 이야기나 행동의 요점을 알리고, 창작물인가 혹은 앞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던 무대극, 또는 소설을 각색한 것인가를 알려준다. 다음에는 개요를 바탕으로 경개를 꾸민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쓰인 산문체의 이야기로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영상화될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경개는 시나리오 형식으로 분해되어 대사나 배우의 동작과 반응이 설명되고 낱낱의 장면이 분석되며, 간단한 역할의 지시를 덧붙이고, 각 장면에서의 카메라 사용과 음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해진다.

물론 시나리오는 세트·배역·의상·분장·음악에 대한 안내역할도 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말에 의한 대화는 물론이고, 영상에 의한 대화에도 숙달되어 있으며, 시각적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완성된 영화로서 그것을 머리 속에 그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것이면, 제작 일수나 경비 절약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감독에게 형식의 통일과 액션(연기)의 영화적 구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하며, 배우와 밀접하고도 집중적으로 일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초기의 시나리오는 아무런 극적 형식을 갖지 않은 단순한 예정 장면의 도표였을 뿐이었다.

그 내용은 영화화될 때에 표의 순서대로 이어 붙여지기만 할 뿐이고, 필요한 설명은 모두 자막으로 대용했다. 그러나 영화가 발달함에 따라 시나리오도 상세해졌다. 시나리오 작가의 선구자로 등장한 사람은 토머스 H. 인스였다. 그는 최종적으로 편집을 끝낸 영화를 머리에 그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세한 대본을 쓸 수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데이비드 W. 그리피스는 대본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 제작 기술에 대한 공헌도는 누구보다도 컸다.

1920년대 초기까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쇼트(장면)를 지시했지만, 지금은 영상보다 대화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영상 선택은 감독에게 맡기고 있다.

이 방법은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할 때 채택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가는 극적·영화적인 상세한 전개과정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작가라면 더 손쉽게 각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과 달라 막간이 없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극작가보다도 관객의 주의를 지속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영화는 연극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가장 영화에 가까운 것은 단편소설이다.

영화도 단편소설처럼, 관객의 주의를 클라이막스에 이르기까지 끌고 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플롯(줄거리)을 착실히 전개하고 흥미를 돋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어느 경우에든 특히 시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도록 표현되어야 한다. 주의를 끌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은 서스펜스인데 그것은 상황 자체 속에 잠겨 있거나,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에는 무엇이 일어날까?'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종류의 서스펜스여야 한다.

관객 자신이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스펜스는 장면 속의 등장인물이 모르는 정보를 관객에게 주는 과정에서부터 생겨난다.

연극에서는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흥미를 이어가기 때문에 말과 사상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영화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스크린 위에 전개되는 이야기의 광범위한 구성요소를 환경·인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사 속에 숨겨놓아야 한다.

연극을 각색하는 경우, 시나리오 작가는 좀더 광범한 영화적 방법을 구사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되도록 무대적 방법 그대로가 좋다. 3면이 벽인 무대에서는 '문간에 있는 것은 누군가?'하는 의문이 극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며, 만일 카메라가 방 밖으로 이동하면 극적인 긴장도 사라져 버린다. 무대를 그대로 사진으로 찍는 것을 피하려는 사고방식은 영화 고유의 기술발달과 함께 생겨났다. 그 가장 중요한 예로 그리피스가 꼽힌다.

일찍이 메리어스는 카메라를 무대 전면에 설치했는데, 그리피스는 그것을 배우의 클로즈업으로까지 이동시켰다. 다음 단계로 그리피스는 에드윈 S. 포터 등의 초기의 시도를 개선해나가면서 필름의 단편을 일련의 장면(sequence)과 리듬이 일체가 되게 연결했다. 이것이 몽타주로 알려진 것이다. 이것에 의해 연극을 영화화하는 경우에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극적 액션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소설가가 인물을 창조하는 것 같은 여유가 없다.

그는 그것을 줄거리의 전개와 병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소설가도 극작가도 가지지 않은 색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물건'을 사용한다는 것이다(미장센). 이것이 바로 영화의 요소 중 하나이다. 시각적으로 '물건'을 짜맞추고 시각적으로 이야기하며, 고유한 말과 정서적 효과를 가진 영상을 병치하여 극적 악센트를 구체화하는 것이 영화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전화박스라는 한정된 공간일지라도 충분히 영화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강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아무 데라도 자유롭게 옮겨질 수 있는 점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건' 또한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배우 못지않게 중요하며, 바로 물건에 의해서만 인물을 훌륭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숙련된 시나리오 작가라면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토키 출현 당시와 같이 지나치게 대사에 의존하는 일이란 없다.

토키의 출현으로 대사가 우세해지면서 영화는 연극과 같이 고정적으로 되어버렸다.

카메라의 기동성도 살리지 못해 그저 장면을 쫓아가 움직일 뿐, 영화적 양식과 상상력은 없어졌다. 대화가 영화에 도입된 결과 오로지 영상에 의해서만 인생을 전체적으로 표현한다는 영화 특유의 예술성이 상실되게 되었다. 세련된 시나리오 작가라면 두 요소를 나누어 대화 장면은 대화에, 그 이외의 장면은 시각적인 것에 주력하고, 항상 대사보다 영상에 의지해야 한다. 때로는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야 할지, 한 줄의 대화로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도 있는데, 액션을 구체화하는 경우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감독

영화용 카메라를 가진 어떤 남자가 그 카메라를 친구에게 맞추어 무슨 동작인가를 해보라고 신호한 것이 영화에서의 감독의 시초이다.

카메라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꾸며내는 일이 영화감독의 변함없는 목적이다. 기록영화의 감독은 이와는 달리 편집자이거나 '발견자'이다. 그 소재는 애초부터 사회에 실재하는 것으로서 카메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영화는 그것 자체가 현실적인 움직임과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어떤 남자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쇼트 1을 먼저 내고, 다음에 갓난아기의 쇼트 2를 보이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가 미소짓고 있는 쇼트 3을 낸다.

그리고는 이들 쇼트를 차례로 영사함으로써 감독은 이 남자가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는 특징을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있는 쇼트 1과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쇼트 3은 그대로 두고, 갓난아기 쇼트 2 대신에 수영복 차림의 여자 사진 쇼트 2를 보이면, 감독은 이 남자의 특성을 바꿔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영화감독은 연극을 떠나 독자의 세계로도 발을 들여놓았다.

또한 여러 가지 영상을 병치함으로써 영상의 크기에 현저한 변화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수한 감독은 이러한 가능성 모두를 알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 감독이 할 일의 절반은 이미 대본 속에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그때 대본은 카메라 앞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미리 머리 속에 완성시킨 스크린 위의 영상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영화감독은 이야기가 대평원이건 전화부스 안이건 그밖에 어디든 간에 카메라에 의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으로 전하도록 늘 연구해야 하며, 가장 절제된, 최소한의 쇼트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쇼트는 극적인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필름 편집이 가능하게 되도록이면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특히 관객들의 눈을 확실하게 고정시켜 두려면 강렬한 충격을 지닌 영상이 중요하다. 무대와는 달리 영화 관객은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려가기 때문에 카메라의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영화의 관객과 소설의 독자는 극장에 있건 독서 중이건 간에 눈앞에 제시된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감독은 어떤 식으로 영상을 구사하여 관객의 마음 속에 새로운 기분과 정서를 창출해내는가가 문제이다. 즉 영화는 강한 충격을 가진 영상에 의해 직접 관객의 감정에 호소한다. 영상에 온갖 변화를 부여하는 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해당하는데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스타일이다. 그것은 주제의 선정방법과 연출방법으로부터 알아볼 수 있다. 뛰어난 감독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에른스트 루비치와 찰리 채플린이 그 예다.

일반적으로 미국영화의 경우, 세실 B. 데밀의 대작이나 그리피스 및 인스의 작품 이외에는 스타일의 확립이 늦어졌다.

스튜디오 때문인지 개인적인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리츠 랑이나 F.W. 무르나우 등에게는 분명한 스타일이 있었다. 감독에 따라 새로운 주제를 찾기보다는 스타일이나 내용의 취급방법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즉 감독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에 있고, 그것이 참신할수록 진부한 것에 대한 반역이 된다. 그러한 감독은 멜로드라마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극히 평범한 것도 다루는 방법에 따라 비범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일종의 대위법(동시적인 2가지의 결합)이나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만일 관객이 작품의 질적 수준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영화는 더욱 풍부한 오락의 원천이 되리라 생각되지만, 미술이나 음악과 달라 대중은 영화기법에 대해 아무 것도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줄거리를 좇을 뿐이므로 영화는 그들의 옆을 지나치기만 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이점에 유의하여 시정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정서를 창출하기 위한 기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연출로 개성적인 스타일을 주장할 수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풍조를 드러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의 참담함을 다룬 네오레알리스모(신사실주의)라는 방법 또는 스타일이 생겨났다. 독일의 무성영화시대에도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발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감독은 영화적인 것에 뛰어난 이해를 가지고 있고, 독창성있는 카메라맨과 미술감독을 거느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리얼리즘으로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촬영이나 세트 같은 주요부문에서 감독은 아직도 인공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제작을 강요당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호화스런 세트는 순수한 분위기를 손상시키고 리얼리즘을 파괴하는 것이다. 장치·조명·음악 등은 감독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하지만, 잉그마르 베리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은 배우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관객의 눈을 끄는 것도 얼굴이고, 감독이 가장 고심하는 것도 이 달걀 모양의 얼굴을 어떻게 네모난 화면에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감독이 어떤 쇼트를 선정하든지 화면은 충격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극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고, 이 사실이 곧 정서적 충격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크린에는 정감이 넘쳐야 한다.

감독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의도가 낭비없이 표현될 수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가 될 만한 영상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제3자가 감독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액션을 실제로 영상화하는 것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연출은 액션을 짜맞추어 가는 기계적인 하나의 과정이고, 이것에 의해 배우는 감독의 엄격한 지도 아래 움직임과 감정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의 경우, 배우는 장기간 집중적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므로, 관객앞에서 생생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촬영소에서 배우는 토막토막의, 대개의 경우 비연속의 액션을 연출하는 감독에 의존하여 움직인다. 감독은 배우의 모든 동작을 조정하면서, 보통은 배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진행한다.

한 장면(scene)에 담기는 액션의 양은, 감독이 전하고자 의도한 것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여서도 안 된다. 배우는 임의로 즉흥적인 연기를 할 수 없다. 또 얼굴에도 특별한 고려가 기울여진다. 이 점에서 좋은 영화배우이기 위한 필수조건은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는 능력이다. 또한 감독은 그 원인이 알려질 때까지 관객에게는 표정의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이 표정의 반응은 극히 조심스럽다. 배우와 '물건' 양쪽이 똑같이 중요한 표현력을 가지는 세계에 대사를 도입한 것은 리얼리즘의 최후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대사의 등장으로 입은 움직이고 있지만 음성은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의 마지막 비현실성은 사라졌다. 극영화에서 본래 대사는 2차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스크린을 점유하고 있는 영화에서는 이야기는 대사로 말해지고, 카메라는 대사의 설명에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창의력이 부족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게서 발견하기 쉬운 결점은 대사로 이야기를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무성영화시대의 선배가 '자막으로 보충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영화 제작방법

영화
영화
세트와 미술감독

감독은 연출시 온갖 수단을 다 이용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세트의 설계 담당인 미술감독과 도구를 장치하는 장치담당의 기술과 지식이다.

원래 영화의 세트는 오늘날과 같이 완성된 것도 정교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의 세트는 일종의 속기 기호와도 같은 것이어서 곧잘 평범한 쇼트로 어떤 장소의 인상을 전한다. 낯선 광경을 사용하면 관객에게 혼란을 주게 되기 때문에 워싱턴 국회의사당, 뉴욕의 마천루 등의 낯익은 풍경을 비춘다. 미술감독에게는 건축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가 요구되는 한편, 어떤 주거의 형태로부터 거기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촬영현장
영화 촬영현장
영화 촬영현장
영화 촬영현장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직업을 나타내기 위하여 방의 벽에 걸려 있는 물건을 이용할 수가 있고, 또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모습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 현실을 실사(實寫)하는 카메라의 성능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감에 따라 실내의 세트에도 사실성이 요구되게 되었다. 따라서 널빤지와 회반죽으로 만든 세트는 뒤쪽에서 보면 매우 부자연스러울지라도 카메라를 향해서는 되도록 진짜같이 보이게 해야 한다. 재료비와 인건비가 높아질수록 세트는 예산상 중대한 문제 거리가 된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온갖 형태의 모형, 트릭 장치, 여러 가지 특수효과, 트릭 쇼트 등이 연구되었다.

경제적인 면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본을 쓰는 단계이다. 대본은 미술 관계 일을 착수하기 훨씬 이전에 준비해두어야 한다. 미술감독에 있어서는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스크린 상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눈의 움직임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명

세트의 조명(照明)은 일반적으로 디자이너의 일로 생각되기 쉬운데 사실은 사진사가 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카메라맨이라고 일컬어졌지만 지금은 조명담당이라고 불리며 카메라는 그의 지시를 받은 기사에 의해 조작된다. 전기기사나 촬영기사의 감독에 더하여 조명담당은 장면의 분위기와 영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한다. 세트는 조명을 위해 설계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세트의 조립단계에서 미리 조명 계획을 세울 수도 있지만, 실제 장면의 조명은 특수한 작업이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 및 구도에 관한 뛰어난 판단이 그 자리에서 요구된다.

카메라

어떠한 카메라 기술을 구사하든지 그 목표는 영상의 극적 충격을 낳는 것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에는 크게 나누어 2가지가 있다. 첫째,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경우로 관객에게 카메라의 움직임을 의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인물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움직임은 늘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카메라가 움직이고 있더라도 인물은 정지하고 있어 그 효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물은 정지한 채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경우로서 항상 극적 효과를 노린다. 처음에 카메라가 이동하여 인물의 표정을 근접촬영으로 잡거나 혹은 카메라를 끌고가 방 한가운데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인물을 비춘다.

카메라를 이렇게 사용함으로써 카메라는 어떤 상황을 말하는데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낱낱의 이야기의 종합인 것이다.

카메라 감독
카메라 감독
소리

토키와 무성영화에서 기술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던 점은 영상과 대사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였다.

씌어진 대사는 촬영 때에는 쓸데없는 여분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배우의 표정이 대사와 맞먹을 만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에는 다른 많은 용도가 있어서 액션의 진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는 의식의 흐름이나 인물의 내면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음악

음악이 없는 영화란 없다.

무성영화의 초기에는 적어도 1대의 피아노 즉흥 연주로 음악을 덧붙였다. 후에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쓰였는데, 때로는 특별히 영화용으로 작곡된 것도 있었다. 토키가 출현하면서 음악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일류 작곡가도 영화음악에 손을 대어 영화에 분위기를 더하는 한편 곡 자체가 하나의 독립 작품인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의 존재는 영화의 목적과 완전히 합치된 것으로서 그것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색채

색채도 소리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극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지만 사실적인 목적보다는 장식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성의 얼굴이나 풍경 등 미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색채를 써서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극 따위의 전투 장면이나 장려한 장면같이 극적·정서적인 효과를 북돋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색채는 용도가 다양해 장치에서부터 배우의 의상에까지 미치지만, 자연색에 의한 리얼리즘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색채는 주로 장식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와이드 스크린

와이드 스크린은 흥행을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시네마스코프이다. 가로로 넓게 퍼진 4각형의 스크린 탓에 현재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며 촬영소에 따라서는 스크린의 양끝을 잘라 폭을 좁히는 곳도 있다.

편집

편집은 때로 몽타주라고도 하는데 영화 제작 기술의 기초로 꼽히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순서로 필름을 이어붙이는 일이다. 최초에 필름은 단일 시퀀스로 연결되었다. 극영화의 선구자 조르주 멜리에스조차 고정된 카메라의 시점에서 줄거리를 따라가는 단순한 방식을 채택했다. 그런데 영국의 G.A. 스미스와 브라이튼파의 그의 동료들, 미국의 에드윈 S. 포터 등은 이른바 편집과 몽타주의 기본 원리에 의거한 실험을 시작했다. 에이젠슈테인이나 푸도프킨 같은 소련의 감독들은 1920년대 후반에 창조적인 편집 또는 그들이 말하는 몽타주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시퀀스뿐만 아니라 개개의 쇼트를 병치함으로써 인물을 표현하고 사상을 전하며 또는 정지된 대상을 병치하여 움직임까지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편집방법은 감독의 기호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영화 제작의 진행에 따라 편집자가 대본을 보고 자료를 모은다. 어떤 방법을 쓰건 간에 영화는 시각에 의한 서술이요, 영상은 그 언어라는 사실을 감독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영화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구문법을 가지며 거기에 따라 영상을 배치하고 정리하여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것이다.

제작 기구

영화 제작의 방법에 관해서는 1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것과 100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즉 개인적인 제작과 대규모 제작과의 구별이 필요하다. 독립 프로덕션이 기획하여 1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 간접비는 들지 않으며, 장소에 대해서도 제작중에만 적당한 장소를 빌리면 된다. 스탭도 그 기획에 필요한 사람을 모으고, 장치·비품류도 빌려 쓰면 된다. 독립영화제작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10년 동안 두드러지게 등장했었는데, 이것은 영화 제작면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 이론상으로는 다른 제작자보다도 영화의 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간 할리우드에서는 영화가 최성기를 맞아 아돌프 주커, 제세프 스켕크, 새뮤얼 골드윈, 워너 형제 등 수많은 제작자가 활약했다.

그들은 대중의 오락을 주도했으며 멜로드라마·코미디·뮤지컬 등을 산업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그들은 기술 개발을 위해 거액의 비용을 투입하여 카메라, 음성, 편집, 음악의 녹음, 입체영화나 와이드 스크린 등의 발달을 촉구했는데, 이와 같은 시도는 스크린에 매력을 부여하여 변덕스러운 관객을 새로운 것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계산된 것이었다. 현재의 영화 제작의 기본도 당시의 방법을 답습한 것으로서, 대본을 제작부에 돌리는 일로 제작이 시작된다.

제작부에서는 대본을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분석하고, 경비의 견적과 예산을 결정한다. 대본이 승인되고 예산이 통과되면 대본의 복사본이 모든 부문으로 보내어지고, 제작진의 책임자에 의해 결정된 일정표에 따라 촬영일에 맞춰질 수 있게 준비가 시작된다. 미국의 영화 제작 기구는 아직도 대개 제작자 중심이다. 이 제도는 영화의 대량생산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필요에서 생겨났다.

한때는 모든 책임이 제작자의 어깨에 걸렸고, 감독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단지 배역까지 결정된 완성대본을 건네받는 정도였다. 또한 감독이 이미 촬영을 끝낸 필름을 제작자가 새로 편집하는 일도 있었다. 배우·제작자·감독을 겸하는 일이 일반화되고부터는 이러한 제도도 사실상 없어졌다. 따라서 독립 제작자의 경우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일도 종종 있다.

교육영화

학술연구와 교육목적을 가진 영화의 총칭으로, 구체적이며 풍부한 영상표현이나 특수기술(고속도·미속도 촬영 등)에 의해 큰 교육성과를 올릴 수 있다. 연구와 교육의 목적을 위해 미국의 마이브리지와 프랑스의 마레는 동물의 움직임을 연속사진으로 촬영했다(1870, 1880년대). 1897년에는 독일의 오스카 메스터가 해군을 위한 교육영화를 제작했고, 1908년에는 미국의 농산부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촬영했다.

1900~20년에 교육영화는 프랑스·스웨덴·독일 및 남아메리카의 칠레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국가들에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1917년에 육군이 성병 예방 등의 계몽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교육수단으로서의 영화의 효과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에는 미국사의 에피소드를 극화한 〈미국연대기영화〉가 학교에서 상영되었다.

영국에서도 1919년에 H. 브루스 울프가 영국교육영화사를 설립, 이후 〈자연의 비밀〉 시리즈로 일컬어진 단편 과학영화를 수백 편 제작했다. 소련에서는 교육·교화의 수단으로서 영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1919년에 전영화산업을 선전 교육 인민위원회의 관할하에 두고, 1925~30년 이제는 고전이 된 작품을 제작하여 러시아 혁명의 목적을 농민에게 알렸다. 이들 영화는 무식한 대중들에 대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영화의 가능성을 실증했다.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니콜라스 카우프만 박사가 문화영화의 제작에 착수, 과학 지식의 보급에 공헌했다.

초기에는 영사기나 필름의 가연성에 난점이 많았기 때문에 교육영화의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1923년에 이스트먼코닥사가 16㎜의 불연성 필름 및 휴대용 영사기를 개발하여 학교용 교재로서의 교육영화 보급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또한 1934년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영화회의에서는 16㎜ 필름을 교육영화의 표준으로 정했다.

1933년 웨스턴일렉트릭사의 자회사가 토키에 의한 교육영화의 제작을 개발했는데 교사가 직접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성영화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미국의 로버트 플라어티, 영국의 존 그리어슨 등이 주창한 다큐멘터리 운동은 교육영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현저하게 높여, 1939년에 그리어슨의 노력으로 설치된 캐나다 국립영화국은 국민교육기관으로서 교육영화의 제작·배급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각국은 모두 전의고양을 위한 교육선전영화를 국가관리하에 제작했다. 전후에는 각국에서 교실용 교육영화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는데, 미국에서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의 영화를 비롯한 교육영화가 1960년경에는 연간 1,000편이나 제작되었고, 1960년대 중반에는 학교나 교회 등에 75만 대의 16㎜ 영사기가 정비되었다.

영화에 의한 교육은 영화 상영 전후에 교사가 적절한 학습지도를 행하는 것으로서, 종래의 강의보다도 이해도가 높아 큰 교육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또 시청각 교육의 한 교재로서 영화는 다른 교재와 연관되어 사용함으로써 더욱 큰 성과가 기대된다.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19세기 영화 발전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장의 둥근 마분지의 앞뒤에 새와 새장을 따로따로 그린 뒤 양끝의 끈으로 종이를 돌리면 새가 새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토마트로프(1825)나, 한 점으로부터 움직이는 단속화(斷續畵)를 들여다보는 페나키스토스코프(1831) 등이 있다. 또 프랑스에서는 에밀 레노의 거울, 환등을 사용한 테아트르 옵티크(1892)를 거쳐 에밀 콜이 만화영화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판타스마고리〉(1908)를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스튜어트 블랙턴이 컷 촬영방법을 고안해내어,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재미있는 얼굴의 익살스런 양상〉(1916)을 만들었고, 1911년부터 윈서 매케이가 〈리틀니모〉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는 1908년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 지에 게재했던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으로서, 그 이후로 신문 만화의 애니메이션이 활발했다. 1913년에는 J.R. 브레이가 애니메이션 기법의 특허권을 따고 처음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인 〈히서 라이어 대령〉 시리즈를 제작했다. 1914년에 얼 허드가 셀룰로이드 투명판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확립했고, 단편 만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융성기를 맞았다.

1922년 플라이셔 형제는 〈잉크 병에서부터〉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만화와 사진의 합성에 성공했고, 〈베티 부프〉·〈뽀빠이〉 등의 인기 시리즈를 발표했다.

월트 디즈니는 192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만화영화의 제작을 시작했고, 1928년 최초의 토키 영화로 미키마우스를 주역으로 등장시킨 〈증기선 윌리〉를 발표했다. 또 1932년에는 최초의 컬러 작품 〈숲속의 아침〉, 1938년에는 최초의 장편 작품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공개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제작에 4년이 걸렸고, 47만 7,000매의 촬영된 그림을 사용했으며, 13개의 외국어판이 만들어졌다. 1955년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작품 〈멍멍이야기〉를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각국에서 뛰어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는데, 〈제럴드 맥보인 트윈〉(1950)의 스티븐 보이스토(미국), 〈곱추 망아지〉(1947)의 이바노프 바(소련), 〈사팔뜨기 폭군〉(1952)의 폴 그리모(프랑스), 〈동물농장〉(1954)의 핼러스배철러(영국), 실험작가 노먼 매클레런(캐나다) 등이 활약했다.

애니메이션은 단속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피사체 그림과 인형을 1컷씩 촬영하여, 그 잔상 현상에 의해 그림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트릭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단속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의 그림을 셀룰로이드 투명판(보통 약 406×33cm)에 그리고, 그것을 배경에 겹쳐서 1컷씩 촬영한다. 또 멀티플레인 카메라는 셀룰로이드판을 몇 장 겹쳐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해 그림의 움직임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작화는 대사나 음악에 맞추어 셀룰로이드판에 윤곽을 그리고, 선을 살리기 위해 뒷면에 채색한다.

투명판의 촬영은 1피트에 16컷이 들어가는 필름 길이로 행해지며, 이것이 1분 동안 90피트로 영사된다.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는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55인 그림이 필요하고, 배경은 표준형의 2배 길이이다. 제작에 사람의 손이 대단히 많이 가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 초기 작품의 제작비가 1,000~2,000달러였던 데 대해 〈멍멍이야기〉에서는 제작비가 수백 만 달러에 이르렀다.

기록영화

사물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논픽션의 총칭으로, 시사영화·선전영화·미술영화 등 기록을 주로 한 영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영화는 극영화와 기록영화로 대별되는데 기록성은 영화에 있어 본질적인 성립조건이다. 미국의 로버트 플라어티는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 이후 인간과 자연의 투쟁 기록을 계속 찍어 기록성을 예술성으로 승화시킨 선구자였다. 영국의 존 그리어슨은 미국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던 중 플라어티 작품의 극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종래 여행영화나 사실의 기록영화에 쓰이고 있던 프랑스어 도퀴망테르(documentaire)에서 힌트를 얻어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리어슨은 영화의 대중매체 기능에 주목, 1928년 영국에 귀국한 후 제국의 시장개발 안으로 필름유닛을 설립했다. 그리어슨은 플라어티와 소련의 선전영화의 영향 아래 〈표류자 Drifters〉(1929)에서 북해의 청어잡이 어부들의 생활상을 그려 흥행에 성공했다. 또 그를 중심으로 사회 개혁과 진보를 표현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운동이 일어났고, 1935년에는 폴 로사의 〈조선소〉, 배질 라이트의 〈실론의 노래〉, 알베르트 카발칸티의 〈막장 Coalface〉 등이 발표되었다.

초기 영국의 다큐멘터리는 공업사회의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해 극적으로 그렸는데, 그리어슨은 더 나아가 기계문명의 문제까지 추구해 대기업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제작한 〈주택문제〉(1935)에서는 빈민가의 실태를 다루었다. 1930년대말에 영국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미국에서는 플라어티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원정〉(1923)의 마틴 부부, 〈지상〉(1925)의 쿠퍼와 세이드색 등의 기행(紀行)·탐험영화를 거쳐 소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사상을 반영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다시 1935년에 루이 드 로쉬 몽트와 타임사가 〈마치 오브 타임 March of Time〉 시리즈를 비롯하여, 뉴스와 인터뷰로 구성한 새로운 영상 저널리즘(pictorical journalism)을 개척하여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 페어 로렌츠의 〈대초원을 개척한 경작 The Plow that Broke the Plains〉(1936) 등의 사회적 주제의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정부와 기업의 협력을 얻지 못해 영국과 같이 다큐멘터리 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소련에서는 혁명 후, 몽타주 이론을 본받은 선전을 위한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빅토르 툴린의 〈투르크시브〉(1929)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대지 Earth〉(1930) 등이 있고, 또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프라우다 Kino-Pravda〉(1922~25) 시리즈 등을 제작하는 한편, 이론 활동도 했다.

독일에서는 1920년대에 문화영화의 명칭으로 니콜라스 카우프만 박사가 〈미와 힘의 길〉(1925) 등의 과학영화와 산악영화 같은 것 외에 전위영화운동과 결합된 발터 루트만의 〈베를린:대도시 교향악 Berlin:the Symphony of a Great City〉(1927)과 나치 선전의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픽 영화 〈민족의 제전〉(1938) 등이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는 〈다리〉(1928)·〈비 Rain〉(1929) 등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서는 해리 와트의 〈대륙 횡단자들 The Overlanders〉(1946)로 대표되는 장편화·극화의 성격을 이어받아 사회적 주제를 추구한 혁신적인 창작활동이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는 월트 디즈니의 〈대자연의 경이〉 시리즈와 컬럼비아텔레비전방송사의 〈20세기 Twentieth Century〉 시리즈 등이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자크 이브 쿠스토의 〈침묵의 세계〉(1956), 알베르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1956)과 베르토프의 〈키노-프라우다〉의 계보를 잇는 '시네마-베리테(영화-진실)운동'에 의해 〈여름의 기록〉(1961)을 제작한 장 루슈와 크리스 마커 등이 활약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푸른 대륙〉(1954)의 폴코 쿠이리치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영화제와 영화상

영화의 시상제도는 미국의 아카데미상 설정에서 비롯된다.

1927년 미국 내의 영화진흥을 목적으로 창립된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1929년 이후 매년 아카데미상(또는 오스카상)이 수여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선출된 약 3,200명의 회원(1969)이 전년도의 국내 개봉작 중에서 예비 심사를 하고, 3월의 시상식에서 최종 투표 결과 수상작이 결정된다.

제1회는 11개 부문이었는데, 현재는 작품상·감독상, 주연 남우·여우상 등 25개 부문에 이르며 상금은 없지만 수상자에게는 큰 영예가 되는 상이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국제영화제가 1932년에 설정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단되었고, 전후 1946년에 재개되었다. 매년 8~9월에 개최되는데 대상인 산마르코 금사자상(그랑프리)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칸 국제영화제도 1946년 이래 매년 5월에 개최되고 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는 1946년 이후 매년 6~7월에 개최된다. 대상으로는 금곰상(베를린의 市章)이 수여된다. 이밖에 모스크바·런던·뉴욕·몬트리올 등지에서도 영화제가 개최되고, 또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일본·홍콩·타이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이 참가하는 동남아시아 영화제가 3년마다 1번씩 개최되고 있다.

개최지는 참가국을 순회하면서 열리며 때때로 인도·파키스탄 등도 참가한다.

영화예술

영화에는 2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산업으로서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로서의 측면이다. 그 과학기술의 진보는 산업에 의해 이룩되며, 그 흥행도 기업가에 의해 행해진다. 또다른 의미에서 영화는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보도와 기록의 역할을 하는 논픽션 영화와 픽션 영화이다.

영화예술의 주체는 후자이지만 전자 또한 영화 특유의 표현없이는 존립하지 못한다. 또한 그 예술성도 과학기술의 진보에 밀착하여 전개된다. 영화에 있어서의 예술의 성립은 이와 같이 복잡한 구성을 지니며, 이것은 영화 이전의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성이다.

영화를 낳은 것은 19세기 부르주아의 과학만능 정신이었다. 그들은 과학에 의해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움직이는 사진'을 발명했다. 영화는 처음에 흑백 무성이었으나, 뒤에 흑백 토키(1929)에서 컬러 토키로 되고(1935), 대형영화가 되었다(1952).

이것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바라는 대중 의지에 의한 것으로, 예술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모든 실용품이 차츰 예술화되듯이 보도와 기록을 목적으로 한 움직이는 사진을 출발점으로 해 영화도 점차 예술표현을 갖추게 되었다. 즉 현실 사진의 객관성을 주체적인 예술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의 특성이다.

초기 영화예술

개요(1885~1908)

이 시기는 영화가 다만 장터나 연예장의 여흥으로 사용되고 있던 시대이다. 그러나 영화 특유의 표현기술은 그 싹을 보이고 있었다.

프랑스

현재의 영화와 같은 형식을 갖춘 시네마토그래프(1895)를 발명한 것은 뤼미에르 형제였다(→ 루이 뤼미에르, 오귀스트 뤼미에르).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는 현실 그대로를 실사한 것이라고 일컬어지지만, 그중 〈물을 뒤집어 쓴 물뿌리는 사람〉과 같이 연출이 가미된 희극도 있었다. 이와 같이 발명 당시에는 극히 자연스럽게 현실과 픽션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것이 영화의 타고난 실체였다.

뤼미에르에 이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조르주 멜리에스는 현실적인 실사와는 반대로 세트를 사용한 트릭 촬영에 의한 옛 이야기 영화를 창시했다. 현재의 SF 영화와 비슷한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1902)이 그 대표작이다. 뤼미에르는 영화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계통의, 멜리에스는 판타지 계통의 시조가 되었다. 또 멜리에스는 이야기를 분석하여 다수의 장면으로 나눈 다음 그것을 다시 종합하는 영화적인 이야기의 발명자이기도 했다.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

리얼리즘계의 드라마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페리디낭 제카이며, 대표작은 〈범죄이야기 Story of a Crime〉(1901)인데, 일반의 인기는 멜리에스 영화에 미치지 못했다.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일반 대중의 소망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했지만, 영화 탄생 후 얼마 되지 않아 축음기와 필름을 연동시키는 조잡한 토키와 손으로 필름에 직접 색깔을 칠하는 채색 영화가 시작된 일은 그런 의미에서는 암시적인 현상이었다. 또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1907년 에밀 콜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일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국

1900년을 중심으로, 영국-프랑스 해협에 있는 해수욕장인 브라이튼에 사는 사진가 등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브라이튼파'이다.

그중에서도 윌리엄슨의 작품인 〈뒤쫓아가기〉 장면에 나타난 간단한 몽타주 수법, 스미스 작품의 특징인 전경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를 번갈아 내는 수법은 세계 최초의 영화적 표현의 시도였으며, 두 사람 모두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인 제카의 리얼리즘 작품과 미국의 포터의 사회적 주제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일컬어 진다.

미국

에드윈 S. 포터는 프랑스의 멜리에스의 영화적 이야기, 브라이튼파의 몽타주 기법을 채택하여, 1902년에 〈미국 소방수의 생활 The Life of an American Fireman〉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영화적 표현방법을 사용한 작품이었다. 당시 포터의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대열차강도〉(1903)는 서부극의 시조이다.

영화예술의 확립기

개요

이 시기에 영화는 장터와 연예장의 구경거리에서 탈피하여 상설영화관의 흥행 주체가 되었다.

한편, 영화를 예술화하려는 시도가 프랑스의 지식인에 의해 행해졌는데 그것은 의사 예술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정한 의미의 예술화는 영화를 스펙터클화한 이탈리아인과 미국인에 의해 이룩되었다. 이것은 제2기 후반의 일이다.

프랑스

190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자와 코메디 프랑세즈의 명우들이 모여, 영화의 예술화를 목적으로 하는 필름 다르(예술영화)사를 창립하고, 〈귀즈 공작의 암살 L'Assassinat du duc de Guise〉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초기의 무대극 실사로 되돌아간 것으로서, 멜리에스가 발견한 표현기술과는 관계가 없다.

이에 반하여 영화의 독자적 표현기술을 지켜낸 것은 빅토랭 작세의 〈지고마〉(1911), 루이 푀야드의 〈팡토마 Fantomas〉(1913~14)와 같은 연속 영화였다. 특히 푀야드 작품은 거리에서의 해프닝을 즉흥적으로 채택한 점에서 현재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어쨌거나 제1기의 프랑스 영화의 국제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으며 이를 대신한 것이 이탈리아의 사극영화이다.

이탈리아

1908년 이탈리아에서는 스펙터클한 사극 영화의 제작이 일어나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1914년에 조반니 파스트로네(일명 피에로 포스코)가 만든 〈카비리아 Cabiria〉가 그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탈리아 사극 영화의 새로운 표현상의 특징은 영화를 종래의 세트 촬영에서 로케이션 촬영으로 해방한 점이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웅대한 고대 건조물, 거기에 호화스러운 오픈 세트를 배경으로, 타고난 배우라고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인이 직업 배우와 아마추어 배우의 구별없이 동작 큰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활극적인 군집장면 연출의 교묘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표현기술상의 최대의 기여는 다수의 쇼트를 선택하여 연결시키는 편집기술의 수립이었다. 〈카비리아〉의 영향으로 미국의 그리피스가 〈인톨러런스 Intolerance〉(1916)를 만든 것은 영화사상 유명하다.

사극영화의 제작이 최고조에 이른 1914년부터 현대극 영화의 제작도 왕성해졌다.

이것은 2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낭만적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리얼리즘 영화이다. 전자의 대표작은 〈불〉(1914)·〈왕가의 호랑이〉(1914)이고(둘 다 피에로 포스코 감독), 후자의 대표작은 〈어둠에 떨어진 사람들〉(1914, 니노 마르트리오)·〈앗순타 스키나〉(1915, 구스타보 세레나)이다. 낭만적 비극은 주연 여배우의 살아 있는 리얼리즘 표현에 특징이 있고, 리얼리즘 영화는 그 현실 재현에 뒷날의 네오레알리스모 영화의 디테일 표현 정신이 담겨 있었다.

이 두 경향의 조화를 보인 마리아 야군비니 주연의 〈잘 가거라 청춘〉(1918, 아우구스토 레니나)과 같은 걸작도 나타났다. 넨나로 리게리의 〈과거가 부르는 소리〉(1922)를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영화는 파시즘 정권하에 침체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

제1차 세계대전(1914~18)중 유럽 영화의 혼란을 틈타 미국 영화가 발흥한 것은 단순히 세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D.W. 그리피스나 토머스 H. 인스, 맥 세넷 같은 뛰어난 영화감독(제작자)이 영화 특유의 표현수단을 충분히 발달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1915)·〈인톨러런스〉(1916) 두 작품에 영화 표현의 기본적인 기술인 클로즈업과 컷백, 케이트인 아웃, 아이리스 인·아웃, 익스트림 롱 쇼트 등을 구사하여 빠른 편집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커팅의 신기술을 완성했다.

그가 '영화예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피스 혼자서 그것들을 발명한 것은 아니고, 미국 영화의 감독들이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이려고 힘쓴 결과 그와 같은 표현기술에 도달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스와 세넷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집대성했고, 〈인톨러런스〉에서와 같이 4시대의 이야기를 동시에 시작하여 동시에 끝내는, 영화가 아니면 안 될 독창적인 극술(劇術)을 실행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리피스가 발명한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피스의 동적인 영화에 비해, 인스는 정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자연묘사에 표현력을 부여한 점은 서부극을 대성시킨 이상으로 독창적이었다. 세넷은 '슬랩스틱 코미디'에 의해 무대의 느낌을 배제한 영화 특유의 옥외 희극을 창조했는데, 뚱보·키다리·사팔뜨기 등 색다른 배우와 수영복 미인으로 구성된 배우들이 기상천외한 우스꽝스런 연기를 하는 것이다.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찰리 채플린의 무언극 중심의 작품이었다. 그는 세넷의 소개로 영화계에 들어와, 슬랩스틱 코미디와는 다른 새로운 희극을 창조했다. 또 이 시대의 미국 영화로서 슬랩스틱 코미디와 마찬가지로, 뒷날의 세계 영화에 기여한 비예술적인 장르의 영화로는, 프랑스의 연속영화에 이어 미국에서 유행하던 서부극이 있다.

파괴적인 다이너미즘은 기성예술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의 매력으로서, 특히 전위영화인의 공감을 불러 그 영향은 뒷날의 영화 이론에까지 미쳤다.

제2기의 두 세력은 처음에는 프랑스·이탈리아에서, 나중에는 미국으로 옮아갔는데, 그밖의 나라들도 각기 국민적 영화를 탄생시켰다. 전쟁중 덴마크는 아스타 닐센 주연의 문예영화를 비롯하여 서부극과 서커스 영화에서 평판을 받고, 독일 이북을 중심으로 세계 영화계에 등장했다.

또한 스웨덴에서는 명감독 빅토르 시외스트렘과 마우리츠 스틸러가 이미 앞으로의 융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성 영화예술의 완성

개요

이 시기는 무성 영화예술의 최성기였다.

일반인은 발명 당초부터 토키와 컬러 영화를 바랐지만, 과학적으로는 아직 불가능했다. 영화작가는 흑백과 무성을 궁극의 유일한 영화라고 믿고 영상의 예술성만을 탐구했다. 그결과 프랑스에서의 포토제닉설과 리듬설, 소련에서의 몽타주 이론이 주창되어 그것들은 작품상으로 실행도 되었지만, 그 극단의 경우는 영화를 난해하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포토제닉설은, 영화에 의해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신비성을 존중했고, 리듬설은 영화 작품의 생사는 그 쇼트 내의 움직임의 리듬과 쇼트의 연속에 의해 생기는 리듬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으며 몽타주 이론은 상호 독립성이 없는 관계의 쇼트의 연속 또는 충돌에 의해 현실과는 별도로 새로운 영화적 현실이 생겨나는 것이야말로 영화 표현의 본질이라고 했다.

비(非)상업주의, 이야기 부정의 전위영화가 발생한 것도 이 시기의 중반 무렵이다. 그러나 그들 이론 및 작품도 예술과는 무관계한 토키의 출현으로 일단의 백지화 또는 많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어, 이에 무성영화는 종말을 고했다.

무성 영화
무성 영화
프랑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영화는 눈부신 부활을 나타냈는데, 그 추진력은 영화비평과 작품활동의 일치된 노력 덕분이었다.

많은 경우 영화작가 자신이 비평가나 이론가를 겸하고 있었다. 먼저 그들이 주장한 것은 '미국 영화에서 배워라'였다. 그리피스·인스·세넷·채플린이 그들의 스승이 되었다. 루이 델뤼크는 미국 영화와 스웨덴 영화로부터 포토제닉설의 암시를 받았고 장 엡스탕은 델뤼크의 뒤를 이어 포토제닉설을 철학의 경지에까지 올려 놓았으며 레옹 무시나크는 리듬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위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 선구자 아벨 강스는 이미 1915년에 카메라에 의한 화면의 왜곡을 이용하여 〈튀브 박사의 실수 La Folie du Docteur Tube〉를 그렸다. 강스는 다시 〈전쟁과 평화〉(1918)·〈철로의 백장미〉(1923)·〈나폴레옹 Napoléon Vu par Abel Gance〉(1927) 등을 만들어 프랑스 영화의 선두에 섰다. 〈철로의 백장미〉는 무성영화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그 화면 수를 계산해서 나타낸 리듬은 영화 리듬의 고전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 강스는 〈나폴레옹〉에서 사용한 3면 스크린으로 현재의 시네라마의 원형을 발표했다. 게다가 중앙의 화면과 양쪽 화면에 대립되는 내용을 담는 동시적 종합표현의 새로운 시도까지 했다.

강스(Abel Gance)
강스(Abel Gance)

마르셀 렐비에는 포토제닉과 리듬을 겸비한 〈엘 도라도 El Dorado〉(1921)를 대표작으로 한다. 장 엡스탕은 움직임을 포토제닉의 핵심으로 하는 이론가인데, 그 주장은 그의 작품 〈진심〉(1923)에서 실현되었다.

포토제닉설이고 리듬설이고 간에, 그 근본은 영화를 문학과 연극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주 독립의 영상예술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 생각을 극단으로 몰아가면, 이야기와 드라마의 부정이 되고, 영화는 오로지 영상만의 표현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전위영화 운동이 탄생되었다(1924)(전위예술). 페르낭 레제의 〈발레 메카니크 Le Ballet mécanique〉(1924), 르네 클레르의 〈막간(幕間) Entr'acte〉(1924) 등이 그 최초의 작품이었다.

영화의 몽환적 성질은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에서 꿈을 중시한 것과도 공통점을 가지는 것으로, 그들은 순수 영화에도 흥미를 가졌으며,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은, 앙트낭 알토가 시나리오를 쓰고, 제르멘 뒬라크가 영화화한 〈조개와 성직자 The Seashell and the Clergyman〉(1927)였다. 순수영화는 반(反)상업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일반 영화관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으나, 그 실험적 연구는 상업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예로 전위수법을 대담하게 수용한 무성영화 최후의 걸작 〈잔 다르크의 재판 The Trial of Joan of Arc〉(1928, 카를 드라이어)이 있다. 또 전위영화인으로서 일반 극영화 감독이 된 인물도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는 르네 클레르가 으뜸이다. 그의 〈이탈리아의 밀짚모자〉(1927)는 보드빌 희극의 걸작이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작가·작품은 리얼리즘과는 관계가 없지만, 심리적 리얼리스트라고도 할 만한 작가도 있었다. 〈모습〉(1923)·〈눈사태〉(1924)·〈테레즈 라캥 Thérèse Raquin〉(1928)의 자크 페데르이다.

스웨덴

1916~23년은 스웨덴 영화 초기의 황금 시대였다.

이에 앞서 빅토르 시외스트룀은 〈파도 높은 날〉(1916)·〈산 사랑 죽은 사랑〉으로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영혼의 불멸〉(1920)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M. 스틸러는 〈눈보라의 밤〉(1919)·〈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Gösta Berlings saga〉(1924) 등의 문제작을 만들었다. 스웨덴 영화의 명성은 이 2명의 감독에 의해 이룩되었는데, 그 특질은 북유럽적인 종교적 신비주의의 시각화를 자연묘사에 의해 한 것이었다.

자연도 영화의 등장인물이었다. 그 조형미는 인간의 심리까지 표현했다. 이 스웨덴적 수법은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국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포토제닉 표현에 특히 그것이 분명했다. 1923년 이후, 시외스트렘과 스틸러가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스웨덴 영화는 침체되었다.

독일

영화제작이 비교적 뒤떨어져, 191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영화는 급격한 발전을 맞이했다. 첫째로는 인플레이션이 수출을 조장한 덕도 입었지만, 표현주의 영화의 발흥이 독일 영화의 명성을 세계로 넓힌 일이 그 최대의 원인이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us)는 괴기성(怪奇性)과 이상성(異常性)을 주제로 하는 것이 많았고, 이것은 본디 독일 예술의 하나의 특질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전후의 사회불안이 이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표현주의 영화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Das kabinett des Dr. Caligari〉(1919)이다.

정신병원 원장이 사실은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로, 전부가 세트 촬영인데다 거리·숲·집·소도구 및 배우까지도 모두 별스럽게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는 점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 이것은 전세계 영화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상성은 차치하고라도, 인물 또한 장치와 동렬(同列)이라는 사고방식은 스타 중심의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수정을 의미한 점에서 중요하다.

순수한 표현주의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몇 편밖에 제작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게오르크 카이저 희곡을 영화화한 〈아침부터 밤중까지〉(1920, 카를 하인츠 마르틴)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상으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후 표현주의 영화는 사라졌으나 표현주의적 경향을 가진 작품은 독일 영화의 주류를 차지했고, 이에 독일 영화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프리츠 의 니벨룽겐 전설을 영화화한 〈지크프리트 Siegfried〉(1922~24)와 공상과학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6)는 대(大)세트의 괴이성으로 평판이 났고, F.W.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1924)은 인간 내부의 이상한 밑바닥을 탐색하는 영화였다.

또 무르나우 영화는 카를 그루네의 〈고혹(蠱或)의 거리〉(1923), 루푸 피크의 〈제야(除夜)의 비극〉(1924)과 함께 자막이 없는 영화로 유명하다.

무르나우(F. W. Murnau)
무르나우(F. W. Murnau)

무성영화는 극의 상황을 영상으로 전달할 수 없을 경우 자막으로 설명했는데, 자막은 영상에 있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제거했다. 그 일을 투철하게 관철시켜 무자막으로 만든 것이 위에 쓴 작품이다. 이것도 무성영화의 예술성을 극단적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무자막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범위는 당연히 좁아지므로 세 작품 모두 일정한 시간과 환경 내의 소수 인물의 생활 드라마였다. 그러므로 소수의 작품이 만들어지고는 끝나버렸다. 그밖에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발터 루트만의 전위영화 다큐멘터리 〈베를린:대도시 교향악〉(1927)과 진보적인 감독 G.W. 파브스트의 〈활기 없는 거리 Die freundlose Gasse〉(1925)가 있다.

소련

제1차 세계대전 전에도 러시아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문예영화 중심이었다.

그러나 10월혁명 이후 모든 것은 무(無)에서 출발했다. 먼저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는 연출을 가하지 않고 사실만을 촬영해야 한다면서 뉴스 영화의 일종인 〈키노-프라우다〉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이윽고 그는 서로 독립적인 실사(實寫)의 단편을 편집해 1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도 실행했다. 그의 주장과 작품은 전세계의 영화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후 프랑스에 있어서의 '시네마-베리테'가 그 최근의 예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도 '몽타주 영화'이지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몽타주 이론은 레프 쿨레쇼프,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에 의해 제창되었고 실현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몽타주 이론은 베르토프와 같이 카메라에 의한 진실추구와 그 표현보다도 현실을 초월한 영화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쿨레쇼프는 주로 영화작법으로서 몽타주 이론을 주장했고 에이젠슈테인은 쇼트 사이의 충돌로부터 관념이 탄생하기를 기대했으며, 푸도프킨은 관객의 심리파악에 이것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에이젠슈테인은 〈파업 Strike〉(1924)·〈전함 포툠킨 Battleship Potemkin〉(1925)·〈10월 October〉(1927)·〈낡은 것과 새 것 Old and New〉(1928)으로 이것을 실행했다.

특히 〈전함 포툠킨〉이 세계 영화계에 던진 충격은 컸다. 푸도프킨은 〈어머니 Mother〉(1926)·〈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종말 The End of St. Petersburg〉(1927)·〈아시아의 돌풍 Storm over Asia〉(1928)을 제작했다. 〈어머니〉는 혁명가와 그 어머니를 그린 그의 심리적 몽타주의 걸작이었다.

이와 같이 몽타주 이론의 실현은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은 혁명의 완성을 비원으로 하는 그들의 열정과 그 사회적 정세가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 예술성이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몽타주 이론은 형식적인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젠슈테인의 〈낡은 것과 새 것〉에는 이미 매너리즘이 나타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과 푸도프킨에 이어 이 시대의 소련 영화를 대표하는 우크라이나의 감독 도프젠코는 〈즈베니고라 Zvenigora〉(1928)로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원천인 대지와 자연을 다큐멘터리풍으로 그린 〈대지〉(1930)에서 유례없는 서정성을 펼쳤다. 또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 작품의 걸작 〈투르크시브 Turksib〉(1929)가 투린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도 특기할 일이다.

이것은 중앙 아시아의 철도건설 기록이다. 또 지가 베르토프도 같은 해에 카메라맨이 화면에 자유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 The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만들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소련 영화는 혁명의 새 사회에 부응한 새로운 영화의 예술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영화사상 획기적 의의를 갖고 있다.

미국

이 시대의 미국 영화는 소련을 제외한 세계 영화시장을 완전히 독점했다.

미국 영화는 다시 몇 개의 대회사가 지배했으며, 할리우드는 영화의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유럽에 비해(특히 후반에) 오히려 수준이 떨어졌다. 그때문에 독일로부터 에른스트 루비치와 무르나우, 스웨덴으로부터 시외스트룀과 스틸러, 프랑스로부터 자크 페데르 등이 영입되었다. 미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새로이 명성을 누린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나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도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순수한 미국인 감독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다큐멘터리에 예술적 표현을 발휘한 플라어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를 비롯하여 진군(進軍)의 리듬을 적확하게 파악한 킹 비더의 〈대행진 The Big Parade〉(1925), 서부극의 고전적 원형을 보여준 제임스 크루스의 〈포장마차 The Covered Wagon〉(1923), 스웨덴의 출신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정감을 섬세하게 그려낸 클라렌스 브라운의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가 꼽히는데, 슈트로하임의 강렬한 작풍에는 미치지 못한다.

슈트로하임은 〈알프스의 재넘이〉(1918)로 데뷔했는데, 그 잔혹한 리얼리즘은 〈어리석은 아내 Foolish Wives〉(1922)와 〈그리드 Greed〉(1924)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미국 영화 중에서 리얼리즘을 이토록 철저하게 다룬 영화는 없었다. 특히 〈탐욕〉은 그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애욕이나 물욕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린 점에서도 압권이었다. 또 슈트로하임은 일반적인 촬영법과는 달리, 각 장면의 진행 그대로의 순서로 촬영하는 방법을 강행했다고도 하는데, 이것도 그 응시적인 리얼리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작에 엄청난 비용을 들인 탓으로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다.

채플린의 희극은 이 시기의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1925)를 대표작으로 꼽는데, 그는 풍자와 빈정거림에 찬 〈파리의 여성 A Woman of Paris〉(1923)의 작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비판적 조류에 발맞추어, 상업영화감독인 세실 B. 데밀의 〈남성과 여성 Male and Female〉(1919)에서도 이미 엿보였지만, 예술적이고도 재기 넘치는 영화는 〈파리의 여성〉 이후이다.

이를 다시 남녀간의 원숙한 희극으로 만든 것이 전 독일의 명감독 루비치의 〈결혼 모임 The Mariage Circle〉(1924)인데, 똑같이 독일에서부터 할리우드로 옮겨온 무르나우의 〈일출 Sunrise〉(1927)의 부진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스웨덴에서부터 옮겨 온 시외스트룀은 〈바람 The Wind〉(1928), 스틸러는 〈제국 호텔 Hotel Imperial〉(1927)이라는 수작을 만들었는데, 둘 다 미국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루비치처럼 미국 영화에 융합되지도 않았다.

미국 영화의 신인으로서는 채플린이 발견한 슈테른베르크가 특이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었다.

처녀작 〈구원을 청하는 사람들〉(1925)은 아마추어적인 좋은 점을 보였는데, 다음 작품 〈암흑가 Underworld〉(1927)는 첨예한 작품으로, 갱 영화라는 장르를 창시했을 정도의 성공작이었다. 그의 〈여자의 일생〉(1929)은 미국 무성영화 최후의 걸작이었는데, 그 생략수법의 날카로움이 일반 관객에게는 난해하다고 평가되었다. 무성영화의 말기는 영화의 예술적 순수성을 철저하게 탐구한 점이 특징이지만, 무성 흑백이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현실성을 떠나 추상으로 흐르기가 쉬웠으며, 그때 토키가 등장한 것은 극히 암시적이었다.

그것은 영화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토키 초기영화

개요

이 시기는 토키의 초기이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전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토키는 영화 발명 후 얼마 뒤부터 시험제작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토키의 등장은 라디오의 증폭기가 사용되고부터이다. 1926년 미국의 워너브러더스사가 파산 직전으로 몰렸을 때 시험삼아 토키를 채용하여 부분적 토키 작품 〈돈 주앙〉을 만들었다. 이것이 성공적이었으므로 이듬해 완전한 토키 작품인 〈재즈 싱어〉(1927)를 만들었다. 이것이 성공하자 토키 융성의 계기가 되었고, 1928년 미국 영화는 전부 토키화되었다. 1929년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영화도 잇달아 토키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영화예술을 흑백 무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영화예술가의 대부분은 토키에 반대했다.

그들은 무성영화의 예술성은 토키의 새로운 요소인 음성에 의해 파괴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윽고 그들도 영상과 음성의 두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을 연구했다. 에이젠슈테인·푸도프킨·알렉산드로프 등의 세 사람은 영상과 음성의 두 요소를 독립적으로 생각한 끝에 그것을 몽타주(편집)할 것을 생각했다. 또 클레르는 영상과 음성을 비동시적으로 짜맞추는 것을 고안하여, 이것을 작품에 실험했다. 영화 예술가도 이미 기정사실인 토키를 자기 작품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1929~30년 무렵부터 시작해, 1935년에는 각국 모두 토키의 예술적 방법론이 대체로 수립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컬러 영화가 출현했다(1935). 컬러 영화는 토키와는 달리 그리 심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색채 디자인의 필요성이 역시 영화작법에 다소의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의 10년 사이에 컬러 토키의 예술성이 일단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미국

처음에 미국 영화는 무대극과 흡사한 영화, 무대 그대로의 음악과 춤의 뮤지컬 영화에 시달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것도 가라앉고, 무대의 연출가로부터 영화감독으로 전향한 루벤 마물리안의 〈갈채 Applause〉(1929), 킹 비더의 〈할렐루야! Hallelujah!〉(1929), 루비치의 〈사랑의 행진 The Love Parade〉(1929), 슈테른베르크의 〈모로코 Morocco〉(1930) 등에 의해 음성요소를 적당히 배합하는 새로운 토키 작법이 성립되었다. 게다가 음악을 주로 한 뮤지컬 영화, 그리고 권총 소리를 들려주는 갱 영화라는 토키 특유의 두 장르가 여기에 새로 태어난 사실은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뮤지컬의 초기 대표작은 앞에 쓴 루비치의 〈사랑의 행진〉과 마물리안의 〈오늘밤은 사랑해주세요 Love me Tonight〉(1932), 로이드 베이컨의 〈42번가 42nd Street〉(1933) 등이다.

이에 반하여 갱 영화는 마물리언의 〈시가〉를 비롯하여 루이스 마일스던의 〈범죄 도시〉(1931), 머빈 르로이의 〈도망자 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1932), 하워드 호크스의 〈스카페이스 Scarface〉(1932) 등의 명작을 낳았다.

포드의 〈내부의 적(敵) The Informer〉(1935)은 아일랜드 혁명의 밀고자를 다룬 걸작이고, 〈역마차 Stagecoach〉(1939)는 서부극의 전형적 작품으로, 이들은 갱 영화는 아니지만 넓은 뜻으로는 서부극 영화의 계통에 속한다.

1930년대 후반에 번영한 '미국적 희극'으로 옮기면, 포드와 함께 미국 영화를 나눈 프랭크 캐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 It Happened One Night〉(1934)로부터 〈우리 집의 낙원 You can't Take It with You〉(1938)을 거쳐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Mr. Smith Goes to Washington〉(1939)에 이르는 계열이 단연 주목을 끌었다. 하나같이 얼마쯤 상식적인 범주를 벗어난 주인공의 행동이 담긴 자유로운 인간의 정당한 모습이라고 하는 점에, 미국 영화에 있어서의 비판정신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에서 근대문명의 비인간성을 비꼬았다.

토키 초기의 무대극의 실사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지만, 토키 기법의 완성은 다시 무대극의 올바른 영화화를 환기시켰다. 윌리엄 와일러의 〈이 세 사람 These Three〉(1936)·〈데드 엔드 Dead End〉(1937), 캐프라의 〈우리집의 낙원〉이 그 전형적인 작품이다. 또한 1935년 마물리안의 〈허영의 도시 The Open City〉에 의해 시작된 컬러 영화는 이 시기 끝까지 미국 영화의 1/3을 차지하게 되었다.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8), 빅터 플레밍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프랑스

토키의 예술성을 먼저 독자적인 수법으로 수립한 것은 〈파리의 지붕 밑 Sous les toits de Paris〉(1930)·〈백만장자 Le Million〉(1931)·〈우리에게 자유를 A nous la liberté〉(1931)·〈파리제〉(1933) 등의 르네 클레르였다.

움직임과 리듬에 찬 장면 처리에 감미로운 샹송을 곁들인 그의 독창적인 작품이었다. 그의 풍자희극 〈마지막 억만장자〉(1934)는 시대가 너무 앞서 실패했다. 클레르는 1935년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뒤에 미국으로 갔다. 그의 작품이 환상적인 계통의 프랑스파 희극의 모델이 된 데 반하여, 자크 페데르는 〈위대한 놀이 Le Grand Jeu〉(1934)·〈미모사 하숙집 Pension Mimosas〉(1934)으로 프랑스풍의 리얼리즘 영화를 완성했다.

토키 시대가 되자 무성영화시대에는 배격되었던 문예작품의 영화화가 진행되어 말과 함께 자연히 영화 속으로 녹아들었다.

쥘리앵 뒤비비에는 그런 의미에서 정통파 문예영화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홍당무 Poil de carotte〉(1932)를 시작으로 〈상선 테나시티 Le Paquebot Tenacity〉(1934)·〈마리아 샤들렌 Maria Chadelaine〉(1934)·〈땅끝을 가다 La Bandera〉(1935) 등 잇달아 훌륭한 문예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후로는 약간 경향을 바꾸어, 인기작 〈망향 Pépé le Moko〉(1937), 옴니버스 영화 〈무도회의 수첩 Un Carnet de bal〉(1937)을 만들었다.

이 옴니버스 영화는 토키 이후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뒤비비에는 그후에도 종종 손을 댔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각국에서 유행했다.

1935년은 토키 예술의 일단의 완성기이며, 이해를 경계로 하여 영화가 사상적 깊이를 더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무성영화 후기에 전위영화인으로 출발하여 개성적인 작품을 계속 만들어온 장 르누아르였다.

고리키 원작의 〈밑바닥 The Lower Depths〉(1936)에 이은 〈대환영(大幻影) La Grande Illusion〉(1937)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를 그려낸 휴머니즘의 걸작이었다. 또 〈게임의 규칙 La Règle de jeu〉(1939)은 부르주아를 비판한 뛰어난 영화로서 종래의 틀에 박힌 작법을 파기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그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누벨 바그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 후반에 장편 처녀작을 만들고 즉각 일류감독이 된 신인은 마르셀 카르네였다.

〈제니의 집〉(1936)으로 시작되는 리얼리즘은 3번째 작품 〈안개 낀 부두 Quai des brumes〉(1938)로 완성되었다. 한편, 그에게는 어릿광대적인 희극 〈우스꽝스런 드라마〉(1937)라는 작품도 있다. 르누아르와 카르네의 활약은 클레르·페데르에 이은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출현시켰는데, 그밖에 장 브누아 레비의 〈아름다운 청춘〉(1936), 레오니드 모기의 〈창살 없는 감옥〉(1938), 피에르 쉬날의 〈죄와 벌〉(1935) 등도 각각 뛰어난 작품이다.

또 이 시대에는 극작가인 감독의 작품이 유행했는데, 그것도 토키에 의해 영화가 대사를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선두에 선 것이 마르셀 파뇰이며, 토키는 연극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하여 영화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빵집 마누라〉(1938)는 뜻밖에도 영화로 잘 만들어졌다. 연극의 왕이라고 일컬어졌던 사샤 기트리는 일인칭 말에 영상을 짜맞춘 별난 영화 〈트럼프 이야기〉(1936)를 발표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것은 기트리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이단자를 태연히 받아들인 점에서 영화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벌써 형식적인 방법론의 시대는 지나가버린 것이다.

독일

독일 영화는 1933년을 경계로 하여 뚜렷이 2기로 나누어진다.

후기는 히틀러의 나치 시대로서, 영화는 국가시책의 도구가 되었다. 토키 초기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먼저 음악을 영화에 채용했다. 발터 루트만은 〈세계의 멜로디〉(1929)에서, 음악을 다큐멘터리 영화에 채용하여 전위영화적인 몽타주를 만들었다. 파프스트는 브레히트와 바일의 오페라를 영화화하여, 영화로서는 드문 사회주의적인 영화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31)를 만들었고, 이어 갱 안의 국경을 초월한 동지애를 그린 〈탄갱 Kameradschaft〉(1931)을 발표했는데, 그후에 망명했다.

일반적인 영화음악으로서는, 오페레타 영화가 독일 특유의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물에는 빌헬름 티레의 〈가솔린 보이 3인조〉(1931)가, 역사물 오페레타로는 에리크 샤렐르의 〈회의는 춤춘다〉(1931)가 각각 대표작이다. 또 독일만의 것으로 청춘영화가 있는데 여교사와 여학생의 사랑을 그린 레오 티네 자간의 〈제복(制服)의 처녀〉(1931)는 그중 걸작이었다. 1933년 이후의 국가시책에 따른 영화로는 베를린 올림픽을 다룬 다큐멘터리 〈민족의 제전〉·〈미의 제전〉(1938) 등이 있다.

독일인은 아니지만, 같은 독일어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인 빌리 포르스트는 1933년 이후 히틀러에게 정복될 때까지의 수년 동안 〈미완성 교향악〉(1933)·〈황혼의 빈 Maskerade〉(1934)·〈마주르카〉(1935) 등으로 빈의 정서를 묘사한 뛰어난 작품을 내보냈다.

영국

토키 영화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영국 영화는 국제적인 영화가 되었다.

헝가리 출신의 제작자 겸 감독인 알렉산더 코르도가 런던 필름을 창설하여 그 자신이 감독한 〈헨리 8세의 사생활〉(1933)·〈그려진 인생〉(1936), 프랑스의 클레르에게 만들게 한 〈유령 서쪽으로 가다〉(1935)와 페데르 감독의 〈갑옷 없는 기사(騎士)〉(1937) 등의 우수 작품을 속속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이것들을 무국적(無國籍) 영화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순수한 영국 영화의 대표작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39계단 The Thirty-Nine Steps〉(1935)과 빅터 새빌의 감상극 〈황혼의 노래〉(1934) 등이 있었는데, 히치콕 터치의 독자적인 스릴러 작법은 별격(別格)이다.

영국 영화로서 세계 영화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장르는, 존 그리어슨을 선두로 하는 다큐멘터리 필름파(派)의 작품이었다. 그 특징은 대상(對象)이 사회 기구 안에서 담당하는 기능적 의의를 해명함과 동시에 그 존재방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점에 있다. 해리 와트, 배질 라이트의 〈야간 우편〉(1936)이 예술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소련

1931년 니콜라이 에크는 부랑인의 갱생문제를 다룬 〈고생 안내서〉에서 현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뛰어난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후 소련 영화는 침체되었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예술정책의 영향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제약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에이젠슈테인도 몽타주 이론의 형식주의나 그 자신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을 비난받고서야 겨우 1938년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몽타주적 효과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양식적 구도에 특징이 있으며, 주제도 스탈린주의에 순응한 감이 있다.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영화 통제를 더욱더 엄격하게 했다.

대규모의 국책 영화가 몇 편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아우구스토 제니나가 아프리카에의 이탈리아군의 행동을 말하면서 사막의 행군을 리얼리즘으로 그린 〈리비아 백기대〉(1936)에서, 국책 영화라고 말할 수 없는 고뇌의 진실감을 북돋운 것은 예술가의 양심의 표현으로서 특기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영화연구기관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영화실험실 센터를, 무솔리니가 체네치다(영화 도시)에 창설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국책에 공헌하지 못했지만, 전후의 이탈리아 영화의 융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토기 혁신시대의 영화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부터 전후 수년까지를 여기에서 일괄한 까닭은 전후의 영화는 오히려 전쟁 당시에 그 근원이 있다고 여겨지는데다가, 전쟁은 영화작가의 세대를 교체시켰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전의 대가의 활약도 전후 수년까지였다. 1952년 텔레비전의 공세가 대형영화의 출현을 낳았다. 전시에 있어서의 현실의 혹독성은 현실을 응시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영화 작법도 그에 맞추어 변화했다. 그중 가장 명백한 예가 이탈리아의 네오레알리스모이다. 영국의 다큐멘터리풍의 영국적 리얼리즘, 미국의 세미다큐멘터리, 뉴로틱 영화, 이 모든 것들도 전쟁의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또 순수하게 기술상의 대혁명은 미국에서의 팬 포커스 촬영의 발명이었는데, 이것은 영화의 연출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영상의 현실 존중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우수작품은 종래와 같이 이야기 중심이 아니고 작가의 태도도 지성적이며 때로는 그 묘사가 참혹하기조차 했다.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스모의 시대이다(네오리얼리즘 영화). 네오레알리스모에는 그 바탕에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적 리얼리즘이 있으며, 파시즘 시대의 압제하에서도 사멸하지 않았다.

무솔리니 몰락 직전, 당시 다큐멘터리 작가였던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해군의 선전 영화 〈하얀 배〉(1941)를 만들어 진실을 폭로했기 때문에 상영이 금지되었다. 또 루키노 비스콘티는 악덕 묘사 때문에 그의 작품 〈강박관념 Ossessione〉(1942)의 상영이 금지되었다. 이것이 네오레알리스모의 선구적 작품이다. 로셀리니는 전쟁 말기부터 로마의 저항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으로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à〉(1945)의 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후에 공개되어 네오레알리스모 영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이어 연합군의 북상을 그린 에피소드집 영화 〈전화(戰火)의 저편 Paisà〉(1946)을 제작했다. 전시중에 감독으로 전향한 배우 비토리오 데 시카는 전후의 도회지 부랑아들의 생활을 〈구두닦이 Sciuscià〉(1946)의 한 편으로 만들었다. 또 루이지 잠피는 종전 직전의 마을의 희비극 〈평화에 산다〉(1946)를 만들었다.

이상의 3편이 먼저 세계적으로 평판이 난 네오레알리스모 작품이다. 미국인들은 이것을 이탈리아 리얼리즘이라고 했다. 네오레알리스모의 특징은 현실의 응시와 그 기록적 표현, 비직업 배우의 채용, 즉흥적 연출, 비(非)이야기성, 반(反)몽타주 등이었는데, 이러한 영화작법은 종래의 허구와 허식으로 꾸며낸 드라마 영화에 대한 반격이었다.

이것은 세계의 영화에 혁명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현실의 변화는 이윽고 네오레알리스모마저도 변화시켰다. 1948년경 벌써 네오레알리스모는 2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졌다. 로셀리니의 〈프란체스코, 시의 어릿광대 Francesco, giullare di Dio〉(1950)·〈유럽 1951년 Europe 1951〉(1952), 데 시카의 〈밀라노의 기적 Miracolo a Milano〉(1950) 등은 인간구제를 문제로 집어들었다. 이에 대립적인 것이 지방주의적 작품으로서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8), 주제페 데산티스의 〈애정의 쌀〉(1948) 등이 그 대표작이다.

그러나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이나 〈움베르토 D. Umberto D.〉(1952)는 의심의 여지 없이 본원적 네오레알리스모의 걸작이고, 앞에 든 두 경향도 요소적인 분량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1952년경에 이르자 네오레알리스모의 죽음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데 시카의 협력자이자 네오레알리스모의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 체자레 자바티니는 이에 반대하여 자신이 감독한 영화 〈거리의 사랑〉(1953)을 만들고는 이것이야말로 네오레알리스모라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네오레알리스모가 변모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영향은 분명하게 이탈리아 영화에 살아 남아 있었다.

미국

1941년 연극계의 이단아 오손 웰스가 영화감독으로서의 첫 작품인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을 발표했다.

이것이 영화 표현에 있어 혁명적인 팬 포커스 기술의 창시가 되었다. 즉 전초점 렌즈의 사용에 의해 종래의 몽타주적인 자잘한 쇼트는 불필요해지고, 하나의 쇼트를 그대로 1시퀀스로 맞추는 연출도 가능해졌다. 이같은 방법의 뛰어난 연출을 해낸 감독이 많은데 그중 윌리엄 와일러의 〈작은 여우들 The Little Foxes〉(1941)·〈우리 생애 최고의 해 The Best Years of Our Lives〉(1964)가 대표적이다.

전쟁중에는 당연히 다큐멘터리 영화가 번영한다.

주제를 정하고 실사 필름을 정리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유명한 루이 드 로슈몬트가 세미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작했다. 실제의 사건현장을 배경으로 하여 다큐멘터리풍으로 드라마를 전개하는 영화이다. 그것에 처음 손을 대기 시작한 작품이 헨리 해서웨이의 〈G멘 대 간첩〉(1945)이었다. 또 전쟁이 가져온 이상 신경을 주제로 한 뉴로틱 영화도 이 시기의 소산이다. 이것은 히치콕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더욱 왕성해진 스릴러 영화와도 결합했다.

강박관념을 주제로 한 히치콕의 〈혐의 Suspicion〉(1941)·〈의혹의 그림자 Shadow of a Doubt〉(1943), 기억상실을 그린 머빈 르로이의 〈마음의 행로〉(1942)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상 두 장르는 미국 영화의 예술성에 폭을 가져다준 신경향이었는데 이것은 전후에도 계승되어 1940년대말까지 이런 종류의 뛰어난 작품도 많았다.

동시에 새로운 능력을 가진 감독도 배출되었다.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 A Tree Grows In Brooklyn〉(1945)·〈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1951),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1952)의 엘리아 카잔,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1950)의 조지프 L. 맨키비츠,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1945)·〈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1950)의 빌리 와일더, 〈시에라마드레의 보물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1948)의 존 휴스턴, 〈여상속인〉(1949〉·〈탐정야화〉(1951)의 와일러 등이 전후의 미국 영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중 프랑스는 항복 후 독일의 통제하에 놓였다.

엄격한 검열을 피해 레지스탕스가 영화에도 나타났다. 대가들이 전쟁을 피해 망명하자 신인 감독들이 대두한 것도 이 시대의 큰 특징이다. 전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들 대부분이 이 시대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중에서도 앙리 조르주 크루조는 프랑스 농촌의 부패를 그리라는 독일 선전반의 지시를 무시하고 예술적인 스릴러 작품 〈밀고〉(1943)를 만들어 프랑스 영화 예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선전하여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한편, 전쟁 말기에 철도 종업원 레지스탕스를 드라마화한 르네 클레망의 〈철로의 싸움〉(1945)은 전후 프랑스 영화해방의 선구가 되었다.

클레망은 또 시인 장 콕도의 기술고문으로서 18세기 옛 이야기를 영화화한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1945)의 제작에 협력했다. 전자의 리얼리즘, 후자의 판타지, 이 두 경향은 전후 프랑스 영화의 두 계열을 대표했는데, 일반적으로 전쟁 전의 현실을 경험한 작가들은 전쟁 전의 감상을 버리고 지성적이 되었다.

리얼리즘 영화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크 베커의 〈행복의 설계〉(1947)·〈육체의 관〉(1952), 클로드 오탕 라라의 〈육체의 악마 Devil in the Flesh〉(1947)로 대표되는 중용을 유지한 정통적인 리얼리즘, 또는 클레망의 서정적인 반전영화 〈금지된 장난 Jeux interdits〉(1952)의 시적 리얼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이브 알레그레의 〈데데라는 창부〉(1947)나 크루조의 〈정부 마농〉(1948)으로 시작되는 잔인한 리얼리즘(암흑영화)이다. 이에 반하여 판타지 계열의 작품은 가지각색이어서 콕토의 시 작품 〈오르페 Orpheus〉(1950), 카르네의 〈애인 쥘리에트〉(1951), 뒤비비에의 〈앙리에르의 파리제〉(1952), 클레르의 마지막 걸작 〈밤마다 미녀〉(1952) 등과 그밖에 자크 터치의 희극, 폴 그리모의 동화도 이 계열에 포함된다.

영국

전쟁중 다큐멘터리 영화가 전후의 영화 작법에 리얼리즘의 교훈을 주어 1945년 영국 리얼리즘의 걸작인 데이비드 의 〈밀회 Brief Encounter〉가 탄생했다.

또 다큐멘터리적 성향이 짙은 '밸컨 터치'(밸컨은 제작자 이름)의 수작 〈대소동 Hue and Cry〉(1947, 찰스 크리스턴)을 비롯해 밸컨 영화가 잇따라 등장했다. 대개는 실제 배경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스릴러가 많았는데 그것은 차츰 희극적 요소가 늘어나면서 크리스턴의 〈친절심과 왕관〉(1949)·〈라벤더 언덕의 군중 The Lavender Hill Mob〉(1951) 등의 작품이 등장했다.

이것은 '영국파 희극'이라고 일컬어졌다. 한편 순정 스릴러는 캐롤 리드의 〈방해자는 죽여라〉(1946)·〈몰락한 우상 The Fallen Idol〉(1948)·〈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에 의해 최고의 완성도를 나타냈으나, 전쟁 전과는 달리 리드의 작품은 특히 심리적·분위기적인 점에 특징이 있다. 또 이 시기의 영국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컬러 영화의 디자인 중에 우수한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의 〈헨리 5세 HenryⅤ〉(1945)와 파월과 프레스버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1946)·〈분홍신〉(1948)이 뛰어났다. 전후 세계 영화의 주목할 현상은 전쟁 전부터의 베네치아 이외에 칸·베를린 등지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리면서 종래 알려지지 않았던 제3세계의 영화가 국제적인 평판을 얻게 된 일이다. 멕시코의 에밀리오 페르난데스의 〈마리아 칸데라리아〉(1944),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몬 羅生門〉(1950), 스페인의 루이스 G. 베르랑카의 〈마샬 씨 환영〉(1952)이 세계에 소개되었다.

대형 영화시대

개요

텔레비전 공세에 대한 영화의 자위책으로서 출현한 것이 대형영화(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70㎜ 등)인데, 이것은 즉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것은 영화예술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지만, 예술가는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 대형영화시대는 당연히 스펙터클 영화의 유행을 재촉했다. 한편 표준형 영화에서는 텔레비전으로는 감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은 예술적 의욕이 앞선 작품도 나타났다. 또한 1960년경부터 종래의 영화작법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영화작가들이 등장해 독자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영화에 대한 관념의 변혁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비디오의 유행도 예상되었다. 이 보급은 영화 흥행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영화 자체의 예술에도 대변화를 가져왔으며, 드디어 영화는 대변혁기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미국

1952년 미국에서는 시네라마가, 1953년에는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3D(입체) 영화도 제작되었지만, 관객이 색안경을 써야 하는 불편 때문에 2년 정도 지나자 소멸했다. 대형영화는 다시 70㎜ 영화로까지 진전했다. 대형영화의 예술화는 먼저 무대 출신의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스탠리 도네의 〈7인의 신부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1954),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5)이 그것이다. 대형 뮤지컬의 최고 작품은 로버트 와이즈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61)였다.

스탠리 도네(Stanley Donen)
스탠리 도네(Stanley Donen)

한편 텔레비전의 융성과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화화가 영화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마티〉(1955, 덜버트 맨)·〈12인의 성난 사람들 Twelve Angry Men〉(1957, 시드니 루멧)이 그 좋은 예이다. 맨과 루멧은 둘 다 텔레비전 연출가였다. 그 뒤로도 텔레비전 연출가 출신 감독이 대거 등장했으며, 특히 아서 펜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앨리스의 레스토랑〉(1969)으로 미국 영화를 쇄신할 만한 작품을 보였다.

한편 뉴욕파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작가도 나타나서 할리우드 영화를 배격하는 분위기가 일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도 이에 대해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

종래 터부시했던 폭력·섹스·인종문제 등이 잇달아 영화에 등장했다. 마이크 니콜스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6)부터 시작되어, 니콜스의 〈졸업 The Graduate〉(1967), 루멧의 〈그룹 Group〉(1966),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리처드 브룩스의 〈냉혈〉(1967), 펜의 〈앨리스의 레스토랑〉으로 발전했다.

이들 작품은 주제를 다루는 법이 새로울 뿐 아니라, 특히 이 최후의 작품과 같이 스토리의 부정(否定)과 표현 위주라는 새 경향도 낳았다. 또 서부극에도 인디언 쪽에서 그린 서부극과 반(反)서부극적 작품도 등장했다. 또한 부르주아 비판을 수필적 터치로 그린 〈헤엄치는 사람〉(1968, 프랭크 베리 감독)과 같은 새로운 작품도 등장했다. 미국 영화는 이제 오랜 침체로부터 재기했지만, 이 영화 자체의 변동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는 앞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영화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아 이 시기 최대의 사건은 1959년 이후의 누벨 바그의 대두이다.

그러나 이 20대 청년들의 의도가 구세대 감독들의 습관적인 영화작업을 타파하는 점에 있었다 하더라도, 거장들의 작품에는 아직도 완성도가 높은 영화가 있었고, 누벨 바그의 존경과 신뢰를 얻은 선구적인 영화작가도 있었다. 예컨대 카르네의 〈테레즈 라켕〉(1953)은 암흑 리얼리즘의 극치로, 크루조의 〈공포의 보수(報酬)〉(1953)는 서스펜스 영화의 최고작품으로, 이브 알레그레의 〈열광의 고독〉은 암흑영화의 결정판으로, 클레망의 〈목로주점 L'Assommoir〉(1956)은 졸라 작품의 완전한 영화화로, 라모리스의 〈빨간풍선〉(1956)은 영화시적(映畵詩的) 다큐멘터리로서 영화예술사에 남는 명작들이었다.

브레송의 〈저항 Un Condamné àmort s'est échappé〉(1956)·〈소매치기 Pickpocket〉(1959)·〈잔 다르크의 재판 Le Procès de Jeanne d'Arc〉(1963)·〈발타자르 어디로 가는가 Au hasard, Balthazar〉(1966) 따위는 '알몸의 영화'라고도 일컬어지는 독자적인 에크리튀르이며 집념의 수난을 추구했고, 알랭 레네는 미술 단편영화로부터 들어가서 〈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1955)·〈24시간의 정사〉(1959)·〈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1961)·〈전쟁은 끝났다 La Guerre est finie〉(1966) 등에서 과거가 살아 있는 현재의 존재방식이라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브레송과 레네가 누벨 바그의 동시대적 선도자였던 데 반해, 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누벨 바그 작가들의 교조적 존재였다.

바쟁은 영화감독은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쓰는' 작가여야 한다고 말하고, 몽타주의 영화적 신현실을 배제하고 영상의 현실 자체가 나타내는 것을 중요시했다(카메라 만년필설). 그런 뜻에서 그는 팬 포커스 연출을 주장했고 네오레알리스모에 동감했다.

바쟁 문하의 비평가로 출발해, 영화제작에 대한 경험 없이 처음부터 제멋대로 영화를 만든 누벨 바그 청년들의 작품에는 한결같이 전통을 파괴한 신선함이 넘쳤다.

즉 클로드 샤브롤의 〈사촌 사이〉(1949), 프랑수아 트뤼포의 〈어른들은 몰라준다〉(1959),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1960)가 동시에 나타나서, 여기에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샤브롤(Claude Chabrol)
샤브롤(Claude Chabrol)

경력은 다르지만 루이 의 〈연인들〉(1958)도 이 계열에 속하는데, 이후 수년 동안 누벨 바그 작가가 잇달아 나타나 한 시대를 이끌었으며다른 나라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몇 년 후부터 누벨 바그도 분화되어, 1970년에 와서는 그들을 일괄하는 명칭조차 무의미해졌다. 그중에서도 고다르는 혁명의식이 강해 차츰 영화 자체를 도구화하고, 영화 부정으로도 접근했지만, 이것이 동시에 영화 표현의 혁신으로 통하는지 어떤지는 차후의 문제이다.

고다르의 작품 〈주말〉(1968)은 한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한편 '시네마 베리테' 일파가 등장해 현실을 충실하게 기록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 생각은 오히려 텔레비전에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실제로 증명되고 있다.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스모 속에서 자라나 그 전통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이탈리아 영화에 길들여진 것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La Strada〉(1954)이었다.

여기에 이은 〈단애 斷崖〉(1955)·〈카비리아의 밤〉(1957)·〈달콤한 인생〉 등의 작품에서는 모두가 신을 찾으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의 비원을 독자적인 상징적 이미지를 구사하여 선명하게 그려냈다. 〈81/2〉(1963)이나 〈사티리콘〉(1969)에서도 그 내면 고백이 쓰라릴 만큼 절실하게 엿보인다. 펠리니에 이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방랑〉(1957) 이후 특히 〈정사〉(1960)·〈밤〉(1961)·〈태양은 외로워〉(1962)의 3부작으로 현대에 있어서의 사랑의 불모(不毛), 커뮤니케이션의 결여를 구체적인 시적 이미지로서 미세하게 표현했다.

그후의 〈붉은 사막 Deseto rosso〉(1964)·〈욕망〉(1966)·〈사구 砂丘〉(1970)도 그 변형이다. 펠리니와 안토니오는 이념과 표현은 다르지만, 네오레알리스모에서 나온 일종의 새로운 로맨티시즘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잇는 작가 겸 영화 감독인 피에로 파오로 파솔리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는 현대의 부패를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 주제가 있다고 하는 원시 그리스도교적인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원적 생활력을 시적 이미지에 의탁한 작가이며, 그 신앙고백은 〈기적의 언덕〉(1964)·〈아폴론의 지옥〉(1967)·〈테오레마〉(1967)에서 분명하다.

또한 이탈리아의 신인 감독 가운데서 네오레지스타(새 감독)라고 불리는 일군도 있지만, 그 평가는 훗날 내려질 것이다.

스웨덴

베리만 시대는 〈여름밤의 미소〉(1955)·〈제7의 봉인(封印) Det sjunde inseglet〉(1956)·〈산딸기 Smultronstället〉(1957)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베리만의 작풍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신의 침목을 조형적인 상징으로까지 높인 북유럽적인 중세 설화 〈제7의 봉인〉이었다.

바로 그 주제는 특히 〈거울 속에 어렴풋이 Säsom i en spegel〉(1961)·〈겨울빛 Nattsvardsgästerna〉(1962)·〈침묵 Tystnaden〉(1963)의 현대 3부작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 자체의 추구를 테마로 한 〈페르소나 Persona〉(1966)를 재출발점으로 하여, 베리만은 다시 〈수치(羞恥) Skammen〉(1968)·〈수난 En passion〉(1969)에서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것인가를 조형화하는 데 전력했는데, 이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베리만 외에 시네마 베리테적인 〈나는 호기심이 강한 여자〉(1967)의 비르고드 셰만, 반(反)베리만의 입장에서는 〈짧고도 아름답게 불타서〉(1967)의 보 비데르베루이 등의 대표적 감독이 있다.

덴마크

카를 드라이어는 세계 영화계의 거인이었다.

드라이어(Carl Theodor Dreyer)
드라이어(Carl Theodor Dreyer)

무성영화 시대의 〈의장 The President〉(1919)·〈잔 다르크의 열정 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 이후 토키 시대의 〈흡혈귀 Vampyr〉(1932)·〈분노의 날 Day of Wrath〉(1942)·〈오르데트 Ordet〉(1955)·〈게르트루드 Gertrud〉(1964)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드라이어 예술의 독창성을 보인 작품이었다. 그의 주제의 중심은 여성의 수난이고, 그 방법은 영상의 현실성을 집요하게 추구한 것이었다. 〈잔 다르크의 열정〉 이후의 그의 작품에서는 중세의 마녀 사냥을 주제로 한 〈분노의 날〉이 걸작이다.

드라이어 이후의 신인으로는 〈꽃잎이 젖을 때〉(1967)의 헤닝 칼세가 누벨 바그의 신선한 작품을 선보였다.

영국

여전히 '영국파 희극'은 남아 있었다.

알렉산더 매켄드릭의 〈탕아들 Ladykillers〉(1955)이 그 걸작이었다. 그러나 그후 얼마 안 있어 영국의 연극계에는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의 시대가 왔고(1958), 영화도 그 물결을 탔다. 영국의 누벨 바그라고 할 '프리 시네마'(Free Cinema)가 그것이다. 〈꿀맛 A Taste of Honey〉(1961)·〈장거리 주자의 고독 The Loneliness of the Long Distance Runner〉(1962)의 토니 리처드슨,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60)의 캐럴 라이스, 〈즐거운 인생 This Sporting Life〉(1963)·〈만일…… If……〉(1968)의 린제이 앤더슨이 그 대표적 감독이다.

모두 어떤 의미에서이건 성난 젊은이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게다가 방법적으로는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즘을 기조로 한다는 점에서 밸컨 터치의 계통을 잇고 있다. 또 영국인의 스릴러 기호의 전통은 스파이 영화라는 형식으로 부활했는데 이것은 '007'시리즈로 명백해졌다.

동유럽

이 시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동유럽 영화가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나타내게 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폴란드 영화는 예지 카발레로비치의 〈그림자〉(1956)·〈야간열차〉(1959), 안제이 바이다의 〈운하 Canal〉(1956)·〈재와 다이아몬드 Ashes and Diamonds〉(1958)에 의해 정치적 현실과 인간적 감정의 격돌을 첨예하게 묘사해 '폴란드파'라고 불리는 특이한 작품을 수립했다. 그후 카바렐로비치는 〈천사 중의 어머니 요안 Mother Joan of the Angels〉(1961), 로만 폴란스키는 〈물 속의 칼 Knife in the Water〉(1962), 안제이 뭉크는 〈승객 Passenger〉(1963) 등의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는데 차츰 강해지는 정치적 압박 때문에 폴란드 영화는 부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전후에 먼저 우수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알려졌지만, 극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1964년경부터 일어났다.

베라 히티로와의 〈데이지 꽃 Daisies〉(1966), 얀니에메츠의 〈바의 다이아몬드〉(1964), 밀로슈 포르만의 〈금발 여인의 사랑 Loves of a Blonde〉(1964)이 산뜻한 기법과 전위적인 내용으로 국제적으로도 평판을 얻었지만, 1968년의 자유화 압박 이래 빛을 잃었다. 그에 반해 헝가리는 1956년의 동란 후 점진적인 자유화를 추진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즉 안드라슈 코바추의 〈겨울날 Cold Days〉(1966), 미크로슈 얀초의 〈색출 The Round-up〉(1965)·〈적과 백 The Red and The White〉(1967), 이슈투안 사보의 〈아버지 Father〉(1967), 페렌츠 코샤의 〈1만 개의 태양 Ten Thousand Suns〉(1967)이 일약 세계영화계에 널리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들은 냉혹할 정도의 지성적 묘사와 조형미 속에 숨겨진 민족적 정열에 특징이 있고, 피압박 민족의 비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두산 마카베예프와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의 작품에 의해서였다.

마카베예프의 작품에는 고다르적인 〈정사 Love Affair〉(1967), 페트로비치의 작품에는 클레르를 연상시키는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었네 I Even Met Some Happy Gypsies〉(1967)가 있는데, 둘 다 시적이라는 특징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레지스탕스 영화나 문예영화가 많다. 그리스 영화는 〈엘렉트라 Electra〉(1962)의 카코야니스와 〈봄의 눈뜸〉(1963)의 쿤두로스에 의해 대표된다. 각각 그리스의 비극과 그리스의 목가에 바탕을 둔 특색 있는 작품이지만 국제적으로 '그리스파'라고 이름 붙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소련

흐루시초프 시대에 이르러 영화계에도 해빙의 영향이 미쳤다.

그 선구가 된 작품이 카자토조프의 〈전쟁과 정조〉(1957), 추프라이의 〈맹세의 휴가〉(1959)였다. 둘 다 전쟁의 부정적인 면까지 기피하지 않고 개인적인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했다. 이것은 종래의 소련 영화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또 다네리아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1963) 등은 클레르를 모방한 서정적 코미디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물결'(뉴 웨이브)은 흐루시초프 실각 후의 경화정책으로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까지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독일

전후의 독일 영화는 오랫동안 부진했고, 새로운 물결이 일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1966년 알렉산데르 클루게의 〈어제의 소녀 Yesterday Girl〉, 폴커 슐렌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 Der Junge Törless〉가 각각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나서 갑자기 신인 영화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어 에드가 라이츠의 〈점심 식사〉(1967)와 클루게의 〈최고의 예술가 Die Artisten in der Zirkuskuppel:ratlos〉(1968)가 화제에 올랐지만, 그후로는 섹스 영화의 전성에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라틴 아메리카

멕시코에서는 여전히 국제적으로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 〈나사린〉(1958)·〈전원 살해의 천사〉(1962)의 루이스 부뉴엘이 제1인자이다.

피와 폭력과 죽음의 초현실주의적 신비성이 그 특유의 예술성임에 변함이 없다. 이것과 공통점을 지닌 브라질의 신인 그라우베 로샤의 작품은 〈검은 신, 하얀 악마 Black God, White Devil〉(1963)·〈죽음의 안토니오 Antonio das Mortes〉(1969) 등인데 여기에는 정치적 반체제의 주장이 가미되어 있다.

로샤는 브라질의 새로운 물결 '시네마 노보'(신영화)의 대표자이다.

인도

인도 영화를 세계에 알린 것은 〈대지의 노래 Pather panchali〉(1955)·〈대하의 노래〉(1956)의 사티아지트 레이였다.

그는 영국에서 영화수업을 했는데 작품은 자연묘사가 뛰어난, 순수하게 인도적인 시적 리얼리즘이었다. 국민성에 투철한 영화 예술성은 동시대에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작품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한국의 영화

개척기

영화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1919년이다.

이것은 한국에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소개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었던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투 義理的仇鬪〉는 연극 장면 가운데 필요한 대목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중에 비추는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연쇄극은 한국 영화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 영화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그뒤 늑막염으로 죽은 김도산의 일파가 1923년 1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틀을 갖춘 활극 〈국경 國境〉을 만들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출연진은 박일순을 비롯한 신극좌 배우 20여 명으로 5만 원(圓)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알려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月下)의 맹세〉는 〈국경〉이 상영된 그해 4월 9일 경성 호텔에서 신문통신기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이 계몽극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귀재 나운규의 출연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박승필이 주도한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일제하의 민중들에게 조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 민족영화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탁월한 영화적 재능은 제작·각본·감독·주연을 겸한 〈사랑을 찾아서〉(1928)·〈벙어리 삼룡〉(1929) 등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잇달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착취적인 취득방식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아래 계급의식의 고취를 내세운 카프그룹, 곧 경향파(傾向派)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유랑 流浪〉(1928)·〈혼가 昏街〉(1929) 및 〈화륜 火輪〉(1931)을 만든 김유영이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악덕 지주와 농민의 대립, 도시노동자의 쟁의였다. 한편 관객의 외면으로 흥행에 실패한 경향파의 몰락과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사람이 이규환이다. 나운규에 이어 민중 애환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그의 데뷔작 〈임자 없는 나룻배〉(1932)는 〈아리랑〉과 더불어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발성영화기

극심한 침체와 혼미 속에서 한국 영화는 비로소 숙원이던 발성영화시대를 맞이했다.

1935년 10월 4일 개봉된 이명우(감독)·이필우(녹음) 형제가 만든 〈춘향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세계영화계에 토키 영화인 〈재즈 싱어〉가 나온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개가였다. 이를 계기로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1935)·〈장화홍련전〉(1936), 안석영의 〈심청〉(1937), 나운규의 〈오몽녀 五夢女〉(1937), 이규환의 〈나그네〉(1937) 등 발성영화가 발표되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내선일체를 들고 나온 조선총독부의 압력은 끝내 자유로웠던 영화제작을 허가제로 바꾸는 한편, 일제의 선전 문화영화 의무상영 규정과 함께 서구영화 수입허가제인 조선영화령을 제정했다.

이와 아울러 어용영화의 제작 환경을 조성하여 황국신민화 운동과 자원병 제도를 찬양한 서광제의 〈군용열차〉(1938), 방한준의 〈승리의 뜰〉(1940), 안석영의 〈지원병〉(1941)과 같은 친일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무렵 데뷔와 함께 히트를 기록한 최인규의 〈국경〉(1939)은 다음해 〈수업료〉를 낳는 발판을 마련했다.

1940년대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호평을 받은 이 영화에는 복혜숙·김신재·문예봉 등이 출연했다.

8·15해방 직후

8·15해방으로 우리 민족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극적인 회생을 맞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엄격한 통제하에서 제한된 소재가 개방되고, 교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영화가 대중을 위한 오락기능으로 회복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항일(抗日)영화의 대두였다. 해방기를 연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를 대표작으로 윤봉춘의 〈3·1혁명기〉(1947), 이규환의 〈민족의 새벽〉(1947), 전창근의 〈해방된 내 고향〉(1947), 최인규의 〈독립전야〉(1949)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특히 한 독립투사(전창근 분)의 지하운동을 그린 〈자유만세〉는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절규와 연대적 공감으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수립과 함께 해방의 들뜬 분위기가 안정되면서 이규환의 〈갈매기〉(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최인규의 〈파시 波市〉(1949) 등 향토적 정서와 생활의 리얼리티, 사랑의 모럴을 추구한 예술성향의 작품들이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미령의 데뷔 작품 〈갈매기〉는 대학을 나온 처녀가 동해안의 어느 소년원에 자원하여 교도관으로 봉사하며 문제아들을 감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마음의 고향〉은 절에 몸을 의탁한 사춘기 고아 소년이 젊은 미망인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의 환상을 찾아 하산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흑산도에서 촬영한 〈파시〉는 어촌사람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중에도 인간의 심성을 모성적 시각에서 아름답게 포착한 〈마음의 고향〉과 다큐멘터리 터치의 〈파시〉는 해방기에 제작된 작품 가운데 가장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는 제작기재 빈약과 시설 미비, 기술부족 등으로 당초 기대한 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10㎜ 무성(無聲)으로 머물고 만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동시녹음 음악영화인 유동일의 〈푸른 언덕〉(1949)과 홍성기의 〈여성일기〉(1949) 같은 최초의 컬러 영화가 시도되었다.

6·25전쟁 이후

열강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조국의 분단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사상적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런 가운데 몰아친 여수반란사건, 제주도 4·3사태등 역사의 소용돌이는 필연적으로 반공영화를 낳았다. 이 시기에 나온 한형모의 〈성벽을 뚫고〉(1949)는 첫 반공영화라는 데에 큰 뜻이 있다. 대학 동기생인 처남·매부 간에 빚어지는 이념적 대립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카메라 구도가 뛰어났다. 또한 6·25전쟁은 영화계에도 적지 않은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명우·박기채·최인규 감독과 강홍식 등의 배우들이 월북했거나 납치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때 두드러진 현상은 기록영화의 발전이다.

전쟁 이전의 작품이 극장 흥행용인데 비해 전쟁 이후의 작품은 종군 다큐멘터리, 또는 홍보용 문화영화라는 점이 색다르다. 북한의 남침으로 〈아름다웠던 서울〉(윤봉춘 감독) 1편을 내놓고 남하한 영화인들은 피난지 부산·대구·진해 등지에서 16㎜ 종군 다큐멘터리 및 군사영화를 제작했다. 윤봉춘의 〈서부전선〉(1950), 전창근의 〈낙동강〉(1952), 신경균의 〈진격만리〉(1953), 임운학의 〈총검은 살아 있다〉(1953)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구에 자리잡은 공군의 지원 아래 최초의 항공전투영화 〈출격명령〉(1954)을 홍성기가 만든 것도 이때였다. 이와 같이 전시에 종군하여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카메라맨은 국방부 제작 〈정의의 진격〉(1951) 등을 촬영한 김학성과, 해군의 기록영화를 담당한 이필우 등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전시에 신인감독 신상옥은 최은희·황남을 기용해 처녀작 〈악야 惡夜〉(1952)를 발표해 기대를 모았다.

전쟁을 겪은 양공주의 치열한 삶과 애환을 그린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켰다. 1953년 휴전의 성립과 함께 단행된 화폐개혁은 극심한 자금난을 가져와 영화제작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공군조종사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사랑을 담은 홍성기의 〈출격명령〉(1954)이 인기를 끌었고, 키스 장면이 처음 나온 이향·윤인자가 주연한 한형모의 〈운명의 손〉이 수도극장(지금의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되어 히트한 것은 이듬해인 1954년이었다.

중흥기

환도(還都)와 함께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한 영화계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몇 가지 발전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1955년 6월에 있은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전향적인 변화 속에서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이규환 감독, 조미령·이민 주연의 〈춘향전〉(1955)이 1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잇따라 민족정서와 양반의 이기주의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이병일의 풍자극 〈시집가는 날〉(1956), 전창근의 정통사극 〈단종애사 端宗哀史〉(1956), 김성민의 〈망나니 비사(悲史)〉(1956), 그리고 극한 상황에 처한 빨치산들의 반목과 휴머니티를 부각한 문제작 〈피아골〉(1955)과 벙어리 처녀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백치 아다다〉(1957)가 이강천에 의해 만들어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피아골〉은 빨치산의 집합지인 지리산을 무대로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그들의 이념적 갈등과 좌절에 초점을 맞춘 사실묘사가 돋보였다. 〈춘향전〉의 흥행성공은 곧 신상옥의 〈젊은 그들〉(1955)·〈꿈〉(1955)·〈무영탑〉, 전창근의 〈단종애사〉 등과 같은 시대극의 붐을 일으켰다.

유현목은 이 시기에 등장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출세작 〈교차로〉(1956)·〈잃어버린 청춘〉(1957) 등은 6·25전쟁 후 어두운 사회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이러한 그의 영상적 집착력은 뒷날 대표작이 된 〈오발탄〉(1961)에 이르러 한층 강렬한 메시지로 발산되었다. 문정숙·최무룡이 공연한 〈교차로〉에서 보인 대립적인 몽타주는 〈잃어버린 청춘〉에 이르러 더욱 뚜렷한 절망의 이미지로 발전했다.

〈주검의 상자〉(1955)를 선보인 김기영 감독은 〈초설 初雪〉(1957)·〈10대의 반항〉(1958) 등을 통해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간들의 모습과, 현실에 적응하는 생존의 본능을 묘사했다.

140여 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으나 질적으로 빈약했던 1957년에 〈황혼열차〉를 통해 김지미 같은 신인배우가 배출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무렵 한가지 두드러진 경향은 〈자유부인〉·〈별아 내 가슴에〉·〈장마루촌의 이발사〉 등의 히트작들이 말해주듯이 멜로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이다.

〈자유부인〉에서는 자유풍조가 만연시킨 전쟁 후의 애정편력과 가정윤리관을, 〈장마루촌의 이발사〉에서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참전용사의 의지를 다루었다. 한편 〈눈 내리는 밤〉(1957)·〈두 남매〉·〈눈물〉·〈자장가〉 등 전옥(全玉) 시리즈에 속하는 통속 신파극이 만들어져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가 없었다.

고작 만리동의 목재상 창고, 청량리의 염색공장 창고를 이용한 정도였다. 아시아 재단이 기증한 4만 달러 상당의 촬영·현상 기재를 정동 스튜디오로 옮겨 영화제작에 개방한 것은 1950년대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첫 작품이 김소동의 〈돈〉(1958)이었으며, 시네마스코프 시대가 열린 것도 이때였다. 대지 8만 2,645㎡, 건물 156㎡ 규모의 안양촬영소가 1957년 6월에 준공되었고, 아리플렉스 대신 미첼카메라를 동원해 비로소 이강천이 〈생명〉(1958)을 완성시켰다.

전성기

4·19혁명이 몰고온 자유물결은 1960년대의 한국 영화를 풍요롭게 하는 지렛대로 작용했다.

정부 당국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검열기구가 민간 중심의 영화윤리위원회로 이관되어 이성구의 〈젊은 표정〉(1960), 김기영의 〈하녀 下女〉(1960), 강대진의 〈마부 馬夫〉(1960)와 같은 가작이 손상 없이 나오는 등 가시적인 효과로 나타났다. 〈젊은 표정〉이 젊은 날의 꿈과 좌절을 밀도 있게 표출시켜 눈길을 끌은 작품이었다면, 〈하녀〉는 인간의 마성(魔性)을 감독 특유의 가학적인 터치로 끌어내 차별화했으며, 〈마부〉는 평범한 서민의 삶을 긍정적인 휴머니즘으로 승화하여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1년 뒤에 불어닥친 5·16 군사정변은 영화에도 적지 않은 제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현목의 〈오발탄〉(1961)이다. 하루가 지겨운 소시민(김진규 분)의 찌든 삶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늙은 어머니의 발작적 갈망을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보인 이 문제작은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또한 군사정부는 얼마 후 〈7인의 여포로〉(1965)를 감독한 이만희를 반공법 위반혐의로 기소하는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한국 영화계는 어느 때보다 질적으로 풍성한 문예영화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필두로 김기영의 〈고려장〉(1963), 이봉래의 〈성난 코스모스〉(1963), 유현목의 〈잉여인간〉(1964), 박상호의 〈비무장지대〉(1965), 김수용의 〈갯마을〉(1965), 이만희의 〈만추 晩秋〉(1966),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최하린의 〈독짓는 늙은이〉(1969) 등으로 이어지면서 의욕적인 예술정신의 결실을 맺었다.

특히 신상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탐미주의를, 김기영은 〈고려장〉을 통해 인간을 성악(性惡)의 시각으로 파악하는 새디즘을, 이만희김수용은 절제된 영상미와 시적(詩的) 감수성을 각각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1960년 추석 대목을 노려 두 라이벌인 홍성기의 〈춘향전〉(김지미 주연)과 신상옥의 〈성춘향〉(최은희 주연)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성춘향〉이 72일간의 상영으로 40여 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관객동원면에서 우세했다.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성장을 위축시킨 석유파동은 영화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 않아도 텔레비전의 공세에 위축된 한국 영화는 제작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색하게 나온 것이 저질영화라는 낙인이 찍힌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식의 넌센스 코미디와 용팔이 시리즈 및 8도(八道) 시리즈였다. 그런데 불황 속에 히트작이 나온다는 통념을 확인시켜주듯이 적시에 터져 나온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과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는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성(性)의 남녀공유를 들고 나온 이화(장미희 분)의 의식에 초점을 맡춘 〈겨울여자〉는 58만 5,7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영화는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1982년 6월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해소와 교복 및 두발자유화는 소재의 개방을 촉진시키는 한편, 심야극장 개설을 가져왔다.

그러한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인엽의 〈애마부인〉(1982)으로 대표되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성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회고발적인 리얼리즘 추구와 해외영화제의 진출이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화려하게 감독으로 데뷔한 배창호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온 리얼리즘의 벽에 도전하는 집념을 보였고, 1960년대 액션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등장한 임권택은 〈만다라〉(1981)를 통해, 이두용은 〈피막〉(1979)·〈물레야 물레야〉(1983)를 통해 해외에서 이목을 끌었다.

이장호·배창호의 작품들도 이에 못지 않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수상한 것과 1987년 임권택의 〈씨받이〉(1986)로 강수연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활성화에 기여한 배우 안성기의 성과도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