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토머스 에디슨

다른 표기 언어 Thomas Alva Edison
요약 테이블
출생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밀런
사망 1931년 10월 18일, 뉴저지 웨스트오렌지
국적 미국

요약 저압의 전류를 발생시키는 원시적인 전지가 유일한 전원이던 전기산업의 초창기인 1863년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여 1931년 죽기 전까지 전기시대를 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축음기, 현대 전화기의 전신인 탄소송화기, 백열전구, 가장 효율적인 혁신적 발전기, 최초로 상업화된 전등과 전력 체계, 실험적 전기철도, 가정용 영사기 등을 발명했다.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1,093개의 특허를 얻어 세계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공업용 실험실을 세웠다. 어렸을 때 청각장애를 일으켰는데, 청각장애는 토머스 에디슨의 활동과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에디슨의 후기 발명품들은 초기의 것들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80세에 이르러 웨스트오렌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발명을 계속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멘로파크 시절
  4. 에디슨 연구소
에디슨
에디슨

개요

토머스 에디슨은 저압의 전류를 발생시키는 원시적인 전지가 유일한 전원이던 전기산업의 초창기인 1863년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여 1931년 죽기 전까지 전기시대를 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축음기, 현대 전화기의 전신인 탄소송화기(炭素送話器), 백열전구, 가장 효율적인 혁신적 발전기, 최초로 상업화된 전등과 전력 체계, 실험적 전기철도, 가정용 영사기 등을 발명했다.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1,093개의 특허를 얻어 세계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공업용 실험실을 세웠다.

토머스 에디슨은 새뮤얼 에디슨 2세와 낸시 엘리엇 에디슨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청각장애를 일으켰는데, 청각장애는 에디슨의 활동과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초기생애

1854년 토머스 에디슨의 아버지는 미시간 주 포트휴런 근교의 포트 그래셧 군기지에서 등대지기 겸 목수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곳에서 유복한 가정생활을 했으며 토머스 에디슨은 학교에 들어가 5년 동안 가끔씩 출석했다. 에디슨은 상상력이 풍부했고 호기심이 많았으나, 틀에 박힌 학교 교육과 청각장애 때문에 학교공부를 싫어했고 문제아로 낙인 찍혀 이것을 보상받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책을 읽었다. 1859년 에디슨은 학교를 그만두고 디트로이트와 포트휴런 간의 철도 급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4년 전에 미시간센트럴사는 기차를 통제하는 데 전신을 사용함으로써 상업적으로 전신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남북전쟁은 수송과 통신을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토머스 에디슨은 전신을 배울 기회를 잘 이용하여 1863년 견습 전신기사가 되었다.

초기 모스 전신에서는 메시지가 긴 종이 위에 일련의 점과 짧은선으로 새겨져 해독되고 읽혀졌으므로 토머스 에디슨의 부분적인 청각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신기사가 '찰깍' 소리를 들으면서 메시지를 받아쓰도록 하는 장치가 수신기에 장치되는 등 점차 전신이 청력을 요구하는 기술로 변모해가자 에디슨은 점점 불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발명의 재능과 통찰력이 풍부한 토머스 에디슨은 불완전한 기구를 개량하고 육체적 장애한계로 인해 어려워진 작업을 더욱 손쉽게 할 도구를 발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69년 1개의 전선을 통해 2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2중 전신기와 전기신호를 문자로 찍어내는 인쇄기의 개발을 눈앞에 두자 에디슨은 전신기사직을 그만두고 발명과 사업에 전념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뉴욕 시로 이주하며 처음에는 저명한 전기 전문가인 F.L.폽과 손을 잡고 에디슨 만능주식인쇄기(Edison Universal Stock Printer)와 그밖의 전신인쇄기구를 생산했다.

1870~75년에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신산업계에서 여러 사람과 동업을 하고 복잡한 계약을 맺으면서 사업과 연구개발을 병행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독립적인 기업가로서 가장 높은 입찰가를 내는 사람을 위해 일했고 중간층에 대해서는 기업가와 입찰가의 역할을 둘 다 수행했다. 에디슨은 그당시 전신산업을 주도하고 있었던 웨스트유니언사의 라이벌 회사를 위해 자동전신체계를 개량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또한 웨스트유니언사의 후원을 받아 한 전선을 통해 4가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4중 전신기를 고안하기도 했으나, 1874년 12월 철도왕이자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자인 J. 굴드로부터 현금과 채권, 주식 등 10만 달러 이상을 받고 4중 전신기를 넘겨주었다. 이는 당시까지 발명품에 지급된 최고 금액 중 하나였지만, 그후로 수년간 소송이 뒤따랐다.

멘로파크 시절

토머스 에디슨은 장사에는 빈틈이 없었으나, 재정관리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토머스 에디슨이 1871년 결혼한 16세의 메리 스틸웰 역시 전혀 절약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1875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비용을 줄이고 돈을 쓰려는 유혹을 억제하기 위해 에디슨은 뉴저지 주의 멘로파크 근교에 실험실과 기계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C. 베첼러와 J. 크루지는 그와 함께 일한 동료였다. 1845년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베첼러는 뛰어난 기계공이자 제도공으로서 에디슨의 결점을 완전히 보완해주고 축음기·전화 등을 개발할 때 그의 '귀'가 되어주었다.

멘로파크에서 토머스 에디슨은 가장 뛰어난 발명을 했으며 그의 생애 중 눈부신 시기를 보냈다.

자동전신에 쓰일 수중 케이블을 실험하던 도중 토머스 에디슨은 탄소의 전기저항과 전도도가 압력에 따라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그래파이트). 이것은 중요한 이론적 발견으로 에디슨은 이로부터 자석 대신 탄소를 사용하여 전류를 변화시키는 '압력 계전기'를 고안해낼 수 있었다. 1877년 2월 에디슨은 전화의 가청도를 높일 압력 계전기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 기구는 다른 사람들도 연구했는데, 그중 A.G.벨은 1876년 처음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1877년말 토머스 에디슨은 전화수화기와 확성기에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탄소송화기를 개발했다. 에디슨은 탄소송화기와 같이 특정한 필요에 부응해서 발명한 것들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축음기와 같이 우연히 발명한 것들도 많다. 1877년 여름 에디슨은 음향전신의 변형이라고 생각되던 전화에서 수신된 메시지를 사람의 음성의 형태로 바꾸어줄 기구를 개발하려고 하던 중에 축음기를 발명했다.

이 축음기를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데 1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토머스 에디슨은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멘로파크의 마술사'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1878년 여름은 전기 아크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전되고 있던 때로 강렬한 아크 불빛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분하는 문제의 실행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었다(백열전구). 기본적인 문제는 등이 지나치게 가열되어 소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은 미소압력 측정기 형태의 기구로 전류를 조절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디슨은 가스등을 대체할 안전하고 값싼 전등을 발명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백열등의 문제는 50년 이상 많은 발명가들을 절망시켰으나 에디슨의 과거경력을 본 J.P. 모건과 C. 밴더빌트 등의 재산가들이 에디슨전등회사를 차려주고 3만 달러를 연구개발비로 지불했다. 에디슨은 직렬회로로 되어 있는 아크등과는 달리 저항이 큰 전구를 병렬회로로 연결함으로써 전구 1개의 고장으로 전체 회로가 망가지지 않게 했다.

1879년 10월 토머스 에디슨과 그의 연구진들은 백금 필라멘트가 든 진공 전구를 사용해서 매우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으나 백금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실용화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진공상태가 더 개선되면 탄소 필라멘트를 백금 대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같은 해 12월 3일 에디슨전등회사의 후원자들 앞에서 처음 시범실험을 할 때까지 백열전구의 개발은 계속 진행되었다.

1881년 가을 맨해튼 남쪽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 9월에 가동되기 시작한 세계 최초의 영구적인 중앙전력 체계의 설립은 토머스 에디슨이 직접 감독했다.

에디슨 연구소

1884년 토머스 에디슨의 첫번째 아내가 사망한 후 에디슨은 1886년 2월 오하이오 주의 부유한 제조업자의 딸인 20세의 M. 밀러와 재혼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그의 새로운 신부를 위해 뉴저지 주 웨스트오렌지의 언덕에 있는 땅을 구입해서 근처에 크고 새로운 실험실을 만들었는데, 그는 그곳을 세계 최초의 진정한 연구시설로 만들고자 했다. 거기에서 에디슨은 상업적인 축음기를 생산하고 활동사진 공장을 설립하는 한편 알칼리 내장 전지를 개발했다. 경영 면에서는 형편없었던 에디슨은 몇몇 가까운 동료들이나 조수들과 화목한 분위기에서 일하는 데에는 익숙했으나, 웨스트오렌지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산업가로서 백열등이나 축음기를 상업화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전기산업의 발전은 점차 대학에서 교육받은 수학자나 과학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10년 이상 정력을 쏟았던 자석광산에 대한 투자가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은 토머스 에디슨의 경력에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에디슨은 이곳에서 축음기를 '회전요지경'(zoetrope)과 일치시켜 대중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사진술에 관심을 가진 W.K.L.딕슨을 고용해 함께 작동 카메라와 보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각각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로 불렸다. 그러나 소리와 사진의 움직임을 일치시키는 일은 실패했고, 결국 무성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토머스 에디슨은 자신의 연구소에 1893년 '검은 마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 최초의 활동사진극장을 설립하고 그 다음해에는 한 사람씩 구멍으로 활동사진을 구경하도록 하는 키네토스코프를 도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영화). 축음기에서 파생된 또다른 발명은 알칼리 내장 전지였다.

이 전지는 아직 가정용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을 때 축음기의 전원으로 사용하려고 토머스 에디슨이 개발한 것이었다. 1909년에 이르러 에디슨은 잠수함과 운반기구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지를 공급하게 되었고 급기야 전기자동차제조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에디슨 연구소가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 초반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광석분리기였다. 처음에는 백열등에 사용할 백금을 얻고자 광석분리기에 관심을 가졌다. 1880년대 철광의 가격이 오르자 철을 저등급 광산에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토머스 에디슨은 동부에 있는 오래된 광산을 145개 가량 구입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와 체제의 결함을 극복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1890년대 중반 광산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게 되자 토머스 에디슨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패가 에디슨의 발명욕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에디슨의 후기 발명품들은 초기의 것들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80세에 이르러 웨스트오렌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발명을 계속했다.